•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1. 개항 후의 국제무역
  • 3) 외국 상인의 침투와 조선 상인층의 대응
  • (3) 조선상인층의 대응과 변모

가. 조선정부의 상업정책과 객주상회소·상회사의 설립

 1884년부터 외국상인의 내지통상이 개시됨에 따라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것은 개항장객주였다. 외상이 이들을 거치지 않고 직접 내지객주를 통하여 수출입무역을 하였으므로 거래를 주선하고 얻던 구문이 현저히 떨어진 것이다. 조선정부 역시 외국상인의 내지통상 및 밀무역으로 인하여 관세 수입이 감축되고 개항장객주로부터 징수하던 상업세 수입 역시 감소함으로써 개항장객주 보호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양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설립되기 시작한 것이 객주상회소라는 조직이다. 이는 1883년의 원산상회소를 필두로 하여 1887년 이후 다수 창설되었는데, 부산의 釜山商會所·東港商會·商法會社·同契社·均興商會社, 인천의 船商會社·均平所·商法會社, 부산·원산·인천 세 개항장객주가 조직한 均平會社 등이 그것들이다.0322)홍순권,<개항기 객주의 유통지배에 관한 연구>(≪한국학보≫제39집, 일지사, 1985), 109쪽.

 그러나 조선정부는 관세율의 인상이나 불평등조약의 개정 등은 거의 생각지 않고 조선상인에 대한 통제와 수세를 강화하는 정책으로 일관함으로써 사실상 국내 상업 보호를 방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정부가 취한 정책은 밀무역을 방지하기 위하여 개항장객주에게 수출입무역의 유통 지배권을 부여하는 것과 아울러 세수 확보를 위하여 개항장객주에게 영업세 징수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정부는 1883년 부산항객주 중에서 別檢을 선정하도록 하였으며 1885년에는 부산항의 객주와 거간들이 속임수를 일삼아 분쟁을 일으키는 폐단을 시정한다는 명목으로 元客主 2명을 차정하여 선상과 행상을 통제하도록 하였다. 1884년 4월에는 인천감리의 고시로 잡품을 제외한 모든 수출화물은 반드시 객주나 상회를 거쳐 報單에 기입한 후 수송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고시문은 일본측이 자유무역을 보장한 통상조약에 위배된다고 항의하여 곧 철폐되었으나 얼마 동안은 그대로 시행되었다.

 또 1886년 6월에는 인천항 萬石洞에 부두를 쌓고 內港으로 삼아 국내 상선을 정박하게 하고 외국선박과 뒤섞여 外港인 圻浦를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국내상선이 외국 선박과 뒤섞여 항세를 포탈하는 것을 막고 내항의 객주에게도 상업 이익을 보호해 주어 상권을 넓히는 한편 수세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 조치의 일환으로 만석동 선상객주들은 1887년 12월 선상회사를 설립하여 광무국과 통리아문에 구문의 일부를 납부하는 대가로 인천항에 운송되는 화물의 중계 독점권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내항·외항을 구별하여 선상은 내항객주가 전담하고 육로 객상은 외항객주가 담당하게 한 이 시책은 외항객주의 반발을 사 만석동으로의 화물 출입을 차단하는 집단행동을 야기하였다. 게다가 조선 선박을 고용한 일본상인도 화물을 만석동에서 부리면 외항 근처에 있는 조계지 부두까지 다시 수송해야 되는 번거로움과 운송 부담이 늘어남에 따라 자유무역에 위배된다고 철폐를 요구해 왔다. 이로 인하여 만석동 내항은 1892년 말까지 여러 차례 철폐와 복설을 반복하였다.

 정부는 재정수입 보충을 위하여 1889년 9월부터는 종래의 구문제도를 영업세제도로 바꾸고 인천항 객주 중 徐丙浩를 船陸首客主로 선정, 매년 1만 냥을 납부하도록 했다가 객주들의 요청에 따라 객주분읍제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1889년 11월부터 인천항에서 실시된 25객주 분읍제는 객주 중 비교적 자본이 많은 25명을 선정하고 각각에게 전국의 주요 읍을 전관지역으로 할당하여 매매주선 독점권을 부여하되 각 읍 시장의 규모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영업세를 상납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객주지정제도는 원산과 부산에서도 실시되었다. 특히 부산은 인천과 유사한 방식으로 1890년 3월 25家 객주제가 시행되어 인천과 함께 매년 2만 냥의 영업세를 상납하도록 하였다.

 이 제도는 선정에서 탈락된 객주와 상품 유통량이 적은 읍에 배정된 객주, 그리고 전보다 구문 부담액이 늘어난 데다가 예전처럼 임의로 객주를 선택할 수 없게 된 선상·행상 등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특히 후술하는 일반 상회사 역시 이들의 독점권에 대하여 격렬한 저항을 보이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외국공사들의 격렬한 항의도 불러 일으켰다. 즉 통상조약에 보장된 자유무역 조항, 관세 이외의 모든 세금의 면제 조항에 저촉된다고 하는 외국공사들의 격렬한 항의에 부딪혀 후술하는 균평회사와 비슷한 시기인 1890년 6월경 모두 폐지되었다.0323)나애자, 앞의 글, 196∼197쪽.

 조선정부는 25객주 분읍제 실시 기간 중 내외의 반발과 제도적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도량형 정비라는 명분 하에 균평회사를 설치하였다. 개항후 청상·일상은 조선의 도량형이 통일되지 않은 점을 악용하여 각각 자국의 斗衡을 사용하면서 조선산품 구입시에는 후한 두형을 사용하고 수입품 판매시에는 박한 두형을 사용하는 등의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도량형의 통일은 시급한 일이었다.

 1885년 인천·부산의 상인들이 도량형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스스로 노력하기도 하였으나 현실적으로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1887∼1889년 사이에는 정부에서 직접 權平局·均平所 등을 특설하여 도량형 통일을 꾀하려고 하였지만 이 역시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시도 끝에 정부는 25객주 분읍제를 실시하던 중인 1890년 1월 3港에 개항장 객주를 중심으로 均平會社를 설립하게 하였다.

 정부에서 승인한 절목에 의하면 균평회사는 일본 됫박과 서양 저울 중 가장 공평한 것을 선정하고 이를 각 개항장에 20개씩 나누어 주고 수출입무역시 도량의 준거로 통용하도록 하였다. 균평회사는 이 화물 도량을 담당한 대가로 貨主에게서 每石當 1升씩의 斗稅를, 每秤當 1兩씩의 衡稅를 거두어 그 일부를 정부에 상납하게 하였다.

 균평회사의 설립은 단순히 도량형이 정비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만을 지닌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차인을 파견하거나 관지정 25객주로 하여금 징수하게 하던 상품과세를 균평회사라는 제도적 틀을 통해 지속시키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즉 모든 거래 상품을 균평회사를 통하게 함으로써 25객주 분읍제 시행에 강제력을 부여함과 동시에 객주구문과 혼합되어 있던 상품과세를 분리하여 균평회사로 하여금 징수, 監理署에 납부하도록 함으로써 영업세 창설로 주요한 세원을 잃게 된 감리서의 경비를 보족하려는 것이었다.0324)전우용,<19세기말∼20세기초 한인회사연구>(서울대 국사학과 박사논문, 1997), 74∼77쪽.

 그러나 균평회사 역시 위 25객주 분읍제와 같은 운명을 걸었다. 내적으로는 균평회사의 독점성을 비판하는 일반 조선상인의 반발, 외적으로는 균평회사를 무역화물세 징수를 위한 기관으로 파악한 외국공사들의 반발로 인하여 설립된 지 3개월만인 1890년 4월 이후 6월에 걸쳐 모두 폐지되고 말았다.0325)박수경,<개항후 인천항 객주에 관한 연구>(≪대한제국연구≫5,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1986), 72∼74쪽.

 이로써 개항장객주를 보호하려고 했던 정부의 의도는 좌절되었으나 재정 수입을 보충하려고 했던 의도는 계속 관철되었다. 이후에도 개항장객주의 영업세 상납 의무는 계속되었고 정부는 원활한 영업세 징수를 위하여 客主頭目, 監董 등을 임명하고 납세를 연체하는 객주를 처벌하는 등 수세 강화 정책으로 일관하였다.0326)한우근, 앞의 책, 191∼194쪽.

 객주상회사와 함께 나타난 조선상인의 움직임으로 船商 등 일반상인들이 합자하여 설립한 상회사들이 있었다. 이들 상회사는 정부의 육성정책에 의하여 1883년 이래<표 10>과 같이 전국 각지에서 다수 설립되었다.

연 도 상 회 사 명 소재지 업 종
1883 大 同 商 會 한 성 매매,운송
1884 義 信 會 社 한 성 상업, 무역, 어업, 선운업
  順 信 昌 會 社 인 천 매매
  布 木 商 會 社 경상도 매매
  金 泉 商 會 경상도 매매
  博 林 社 한 성 매매
  乃 成 里 商 會 안 동 매매
  太 平 會 社 한 성 매매
  永 信 商 會 한 성 매매
1886 大 興 商 會 인 천 상업
  濟 興 社 인 천 상업
  信 昌 商 會 순 천 상업
1887 大 安 商 會 천 안 상업
  船 商 會 社 한 성 상업
1888 濟 生 會 社 한 성 무역
  湊 會 社 부 산 상업, 수세
  太 平 會 社 경상도 상업
1889 海 産 會 社 부 산 어획, 매매
  廣 成 會 社 인 천 상업
  槐 興 會 社 괴 산 상업
  蓉 湖 會 社   상업
1890 濟 通 會 社 부 산 상업
  新 福 商 會 社 부 산 상업
  汝 産 會 社 부 산 상업

<표 10>1883∼1894년간 설립된 상회사

*출전:전우용, 앞의 박사논문,<부록 1>1883∼1910년간 韓人會社一覽 중 상업·무역과 관련된 회사만 정리함

 이들 상회사는 관허회사로 인가를 받았고 업종에 따라 세금 상납의 의무를 지는 대신 내지객주의 푼세 등의 잡세나 세력가의 수탈로부터 보호를 받았고, 개항장으로 화물을 싣고 가 매매를 할 때에 객주의 중계를 거치지 않아도 되었다. 이처럼 상회사가 국가권력의 보호를 받았던 것은 당시 정부의 상업진흥책에 의한 것이었다. 이 점은 전현직 관리들이 상당수 상회에 출자하였고 정부에서도 양반의 상업 참여를 권장하고 있었던 데서도 알 수 있다. 양반의 상업에 대한 투자는 이미 조선 후기부터 나타나고 있었지만 개항 후 무역 발전에 따른 상업이익의 증가로 더욱 확대되고 정부에서도 이를 적극 권장하였던 것이다.

 이들 상회사는 3항구에서 25객주 분읍제가 실시되었을 때 종전과 달리 개항장에서 화물을 매매하려면 반드시 객주의 중계를 거쳐야 하게 되었으나, 객주와의 상권 분쟁 끝에 상회의 자본으로 구매 수송한 물품에 대해서는 판매권을 인정받을 만큼 상당한 성장세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상회사 역시 정부로부터의 허가를 받고 특정 물종에 대한 독점 영업권을 가진 이상, 소상인과 소상품생산자들의 불만을 샀고 이러한 폐단 때문에 광성회사·해산회사 등 몇몇 상회사가 철폐되는 결과를 빚었다.0327)나애자, 앞의 글, 200∼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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