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2. 국내적 상품유통의 변동

2. 국내적 상품유통의 변동

 개항으로 국내적 상품유통은 일정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 시기는 농민전쟁 이후나 보호국화된 뒤의 단계만큼 유통구조의 재편이 전면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대외무역이 증대하고 각 지역의 상권이 개항장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종래의 상품유통권, 유통상품의 구성, 유통조직 등 유통구조는 전반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각 개항장은 전통적 원격지 유통의 중심지를 대신하여 각지에서 생산된 상품이 집산되고 국내의 각 포구 등으로 중계하는 유통의 거점으로 등장했다. 종래 동해안과 서해안 사이의 원격지 유통의 중심지로, 특히 북어의 집산지로 명성이 있었던 마산의 상권이 부산의 개항으로 몰락했던 것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원래 전통적 국내상품유통권은 크게 경상도의 동해안과 강원도의 영동지방 및 함경도를 연결하는 유통권과 전라·경상도에서 서울·개성을 거쳐 황해·평안도를 잇는 유통권으로 양분할 수 있다.0331)李重煥,≪擇里志≫卜居總論 生利條.

 그런데 개항 직후부터 대일무역이 증가하면서 부산항 중심의 새로운 유통권이 형성되어 갔다. 원산항이 1880년 4월, 인천항이 1883년 11월에 개항되기 이전에는 주로 부산을 통하여 수출되고 있었다. 1879년 당시 수입품의 대종을 이루던 카네킨의 판매지역은 대개 경상도·전라도·충청도·강원도 등 4개도였는데 수입품이 엽전을 매개로 곡물로 바뀌어 수출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부산항 중심의 새로운 유통권에는 이 4개도가 포함되었다고 보여진다.0332)≪日本外交文書≫12, 사항 9, 문서번호 125, 224쪽. 당시 국내적 유통과 대외교역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쌀과 콩 등의 국내적 곡물수급구조는 이 새로운 유통권이 형성되면서 위협받았다. 종래 함경도 지역은 강원도의 영동지방과 경상도 동해안을 연결하는 곡물 유통권 아래 경상도에서 미곡을 공급받고 있었다. 그러나 부산항의 곡물수출이 증가하면서 함경도로 공급되던 곡물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식량의 부족현상이 일어나서 함경도의 많은 농민이 유민화하고 만주지역으로 월경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다. 1882년의 임오군란이 곡물의 대일수출에 따른 미가상승과 식량부족에서 발생했다는 지적도 이 새로운 곡물유통권의 형성으로 인한 전국적인 곡물수급구조의 교란현상에 근거한다.0333)彭澤周,≪明治初期日韓淸關係の硏究≫(東京:高書房, 1969), 292쪽. 실제로 개항 이전에 주로 서울로 운송되던 전라도의 미곡은 1890년을 전후하여 10분의 7·8이 부산항으로 수출되고 있었다.0334)≪明治官報≫2242(1890.12.17), 仁川米穀商況, 234쪽;전라도의 미곡 가운데 珍島 이남은 주로 부산으로, 북부지역에서는 인천으로 운송되어 수출되었다고 한다(≪通商彙纂≫55 號外 1, 28년 仁川港商況年報(1896.8.5)). 그래서 1892년 전라감사는 ‘외국인의 곡물수출로 인한 폐단’을 막기 위하여 부안 등 14개 읍에 방곡을 실시하기도 했다.0335)≪全羅道關草≫4책, 壬辰 11월 23일 完營報.

 그 뒤 1885년과 1886년은 부산항의 수출비율이 총쌀수출액의 각각 83.6·98.1%을 차지했으나 그 이후는 인천항의 수출량이 늘어나면서 60% 전후를 차지하다가 1893·1894년경에는 오히려 인천항의 수출비율이 각각 73.3·82.9%로 역전되었다.0336)李憲昶,<韓國 開港場의 商品流通과 市場圈>(≪經濟史學≫9, 1985), 130∼31쪽. 두류(豆類)는 1887년 이후 인천항과 부산항의 수출비율이 대등하며 후기로 갈수록 오히려 인천의 수출양이 우세한 추세에 있었다. 그러므로 곡물수출의 주도권도 후기로 갈수록 초기의 부산 중심에서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인천항은 입지적인 관계로 서울의 유통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종래 서울로 향하던 무곡선은 인천항의 미가와 서울의 미가의 차이에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1890년 이후 급격한 곡물수출의 증가는 서울의 곡물가격을 등귀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전통적인 국내 최대의 곡물소비지인 서울과 대일 곡물수출의 새로운 중심지로 등장한 인천항 사이에 같은 유통권의 주도를 놓고 상권대립이 치열했다. 그래서 1893년 1월 조선정부는 인천항으로의 곡물유출을 막기 위한 한 방법으로 외무독판이<萬石洞廻船令>을 내려 조선선박의 인천항에서의 적하와 양륙을 금지했고, 이에 대항하여 일본상인들은 철폐를 요구하고 조선상인과의 거래를 거절하는 사례까지 나타났던 것이다.0337)≪通商彙纂≫8호 附錄, 명치 26년중 仁川港商況年報.
≪仁川府史≫, 1029∼1030쪽.

 한편 이 시기 기선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운송수단의 도입은 원격지 유통의 확대와 이에 따른 국내 상품유통의 전반적 증대를 가져왔다. 부산의 예를 들면 1885년 국내상품 이입액이 38,495엔·이출액이 68,856엔이었던 데 비해 1894년에는 각각 520,848엔, 473,653엔으로 증가했다. 원산은 1885년에 이입 76,781엔, 이출 62,247엔이던 것이 1894년 이입 326,894엔, 이출 428,625엔으로 증가했고 인천도 1885년이 이입 16,649엔, 이출 5,174엔인데 1895년은 이입 297,601엔, 이출 277,164엔이었다. 이 가운데 이입액에는 외국과의 교역을 위한 상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출액은 대부분 국내적 유통을 위한 것이었다. 외국과의 무역상품으로 등장하지 않았지만 국내적 상품유통에서는 중요한 상품이었고 외국상품의 수입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던 명태와 마포의 예를 들면 명태는 1880년대 중엽에 5만엔 정도에 불과한 원산의 이출액이 1890년대에 30만엔 내외, 마포는 1885년 6만엔대에서 1890년대초 한때 100만엔에 가까운 수준에 이르렀다.0338)李憲昶, 앞의 글 참조. 이 같은 유통량의 증대는 무엇보다 기선이라는 근대적 운송수단의 발달로 인한 결과이며 한편으로는 조선사회 내부의 상품생산과 수요가 확대되고 있었음도 함께 의미하는 것이다. 즉, 대외무역 특히 곡물과 금 등의 대량수출로 전반적으로 조선사회의 상품구매력이 증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격지유통은 주로 일본인이 소유한 기선에 의존했다. 따라서 국내적 상품유통에서도 일본상인이 주도권을 쥘 수 밖에 없었고 일본상인에 대한 조선상인의 종속도 심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들은 기선을 이용해 개항장 사이의 교역을 주도했고 개항되지 않은 연안의 포구에서 밀무역을 자행하기도 했던 것이다. 일본상인들은 일본에서의 곡가가 하락할 때 매입한 곡물을 다른 개항장으로 이송하고 상업적 이윤을 취득했다. 항상적으로 부산항에서 미곡을 공급받고 있던 원산항으로의 일본기선에 의한 곡물수송이 바로 그것이다.0339)≪明治官報≫2726(1892. 7. 29), 釜山貿易景況, 313쪽. 이 같은 현상은 다른 상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었다. 1889년 인천의 연안무역의 경우 미개항장에서의 미곡운송 등은 조선상인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원격지인 부산의 미역, 원산의 명태 등의 상권은 대체로 기선을 이용한 일본상인이 담당했다.0340)≪通商報告≫, 1890년 3월분, 명치 22년중 仁川港貿易景況, 66쪽. 그래서 종래 조선상인에 의해 육로를 통하여 서울로 수송되던 함경도의 명태와 마포의 상권이 해로를 이용한 일본상인에게 침식당해 서울의 어물전상인이 손해를 입고 있는 실정이었고 1893년 일본인의 보고에 의하면 “명태어의 판매권도 점점 韓商의 손을 떠나 在留外商의 손에 이행”되고 있었다고 한다.0341)≪通商彙纂≫4, 명치 6년중 京城商況年報(1894.4.16). 뿐만 아니라 일본상인은 호남지방에서 목면을 서울에 반입하고 판매함으로써 백목전상인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0342)≪所志謄錄≫, 戊子 9월 18일, 白木廛元必成等所志.

 이 같은 외국상인의 상권침탈은 종래 유통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전통상인에게 대응과 종속을 강요했다. 위의 어물전이나 백목전의 경우와 같이 외국상인이 직접 서울에 점포를 설치(漢城開棧)하며 시전상인의 상권을 침해하게 되자 이들은 외국상인의 점포철수를 요구하는 동맹철시를 하기도 했다.0343)≪所志謄錄≫, 戊子 11월 21일, 己丑 10월 11일조. 또한 조선 후기 이래 세곡운송을 통하여 성장하여 온 京江商人들은 서울시장을 중심으로 일정하게 상권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일본기선의 세곡운송으로 말미암아 타격을 입고 있었다. 개성상인은 종래의 상업조직을 이용하여 개항 이후 활동영역을 수출입유통업으로 확대하는 방식을 통하여 이 시기까지는 서울 이북지방에서 계속 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해주·재령상인들도 황해도 지방에서 미곡을 매집하는 일본상인과 대응하여 일정하게 유지했다. 평양상인들은 1883년 인천항에 대동상회를 설치하고 개항 초부터 수출입상품의 유통에 종사함으로써 적어도 진남포가 개항되고 일본상인이 적극적으로 침투하기 이전까지는 상권을 오히려 전국적 규모로 확대하려는 경향을 보였다.0344)李炳天,≪개항기 외국상인의 침입과 한국상인의 대응≫(서울대 경제학과 박사학위논문, 1985), 제3장 참조. 보부상은 惠商公局에서 商理局으로 소속되는 등 어용상인화하면서 관권을 빙자하여 경제적으로 같은 처지에 있던 소상인을 침탈하는 전근대성을 면치 못함으로써 갑오농민전쟁에서도 보부상의 작폐 금지요구가 나왔던 것이다.0345)韓㳓劤,≪韓國開港期의 商業硏究≫(一潮閣, 1970), 142∼172쪽 참조.

 개항 후 등장한 새로운 상인층으로는 개항장 객주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개항 초기에는 경강과 외방의 객주와는 달리 주인권을 소유하지 않아 특권에 기초한 중개독점권이나 영업에 대한 제한이 없었다. 그러나 개항장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정부는 수출화물에 대한 수세와 함께 개항장 객주를 선정하는 등 통제를 시작했다. 개항장 객주들도 상회·상의소 등의 객주조합을 결성했다. 관허의 상회사는 상업세을 내는 대가로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매매주선권을 보장받는 특권적 상인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1880년대 말부터 외국상인들이 본격적으로 내지행상에 나서 산지의 객주에게 직접 상품을 매매하면서 개항장 객주의 상권은 위축되어 갔다. 봉건정부도 개항장 객주에게서 거두는 세입이 감소하자 이들의 특권적 지위를 강화하려고 특정 객주를 선정하여 이들에게 각 지역의 매매주선의 독점권을 부여하는 25가객주전관제와 같은 특권적 상업정책을 실시했다가 행상 등 소상인의 반발과 외국공사들의 항의로 인해 곧 철폐하기도 했다.0346)韓㳓劤, 위의 책, 172∼204쪽.
朴修鏡,<開港後 仁川港 客主에 관한 硏究>(≪大韓帝國硏究≫V, 1982).
洪淳權,<開港期客主의 流通支配에 관한 硏究>(≪韓國學報≫39, 1985).
李炳天, 앞의 글(1985), 2장.
그런데 개항장 객주는 그 성격상 상품유통과정에서 외국상인과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데다가 자본면에서도 외국상인, 특히 일본상인의 금융지배체제에 예속되어 있어 그 성장 자체가 매판화의 가능성을 함께 내포하고 있었다.

 이처럼 개항 이후 상품유통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급격히 진전되었고 국내 상품유통도 기선과 같은 근대적 수송수단의 도입과 대외무역의 확대에 따른 구매력의 증진에 힘입어 원격지유통이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국내적 상품생산과 수요확대는 국내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세계자본주의체제 편입의 결과였으며 유통과정도 기선을 장악한 외국상인이 주도하여 감으로써 국내시장 자체가 보호되지 못하는 실정이었으므로 개항 이후 상품유통의 증대는 조선경제의 제국주의에의 예속과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국내시장이 보호되지 못하는 속에서 상인조직도 외국상인과 연계를 가지지 않고서는 상권이 축소될 수 밖에 없어 이 시기 상인계급의 성장은 매판화의 가능성을 함께 가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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