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3. 방곡령실시의 사례와 원인
  • 3) 제3기(1895∼1904)

3) 제3기(1895∼1904)

 청일전쟁 이후의 방곡령은<표 3>에서 보듯이 전시기에 비해 발생건수가 줄어 18건 정도가 발생되고 있었다.

 방곡령의 발령자를 살펴 보면 각읍 수령이 대부분이며 관찰사의 것이 2건, 암행어사의 것이 2건, 정부가 1건이었다. 방곡령의 대상은 여전히 일본상인이 대부분이었지만 발령지역내의 농민이 대상인 사례도 적지 않다. 발령지역으로서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곡창지대가 대부분이며 함경·경상·제주도에도 한 두 차례 나타난다. 발생연도별로 보면 1895년과 1896년의 청일전쟁 직후를 제외하고 매년 두 세 건의 방곡령이 발생되고 있었다.

 이처럼 방곡령의 발생이 줄어들고 있었던 근본원인은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정치적 압력이 증대하면서 정부가 각 지방관의 방곡령을 인정할 수 없었던 데서 찾을 수 있다. 1897년 11월 충청남도 恩津을 비롯한 각 지방의 방곡실시에 대해 정부는 충청남도 관찰사에게 이의 철폐를 지시하는 訓令에서

防穀一款은 정부에셔 各公領事와 協商야 日期를 定限고 各道各郡에 訓知면 해지방관이 遵訓施行而已여널 胡爲乎徑行禁防야 致誤約章에 貽此外詰고 …0405)≪忠淸南北道來去案≫1책, 광무 원년 12월 7일 훈령.

라고 했다. 즉, 방곡령은 정부가 각국 공·영사와 협의한 후 지방관에게 실시토록 하는 것이며 지방관의 독자적인 권한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1901년 정부가 발령한 전국 방곡시에는 지방관의 방곡으로 일본상인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는 지방관으로부터 문책징수할 것이라 하고 1889년의 함경도 방곡령사건을 상기시켰다.0406)≪위의 책≫, 광무 5년 10월 7일 훈령 제2호;“若外國人이 因此〔地方官의 防穀:〔筆者〕有責言이면 該地方官에게 倍償을 斷當責徵지니 必有後悔之日이며 年前咸鏡道防穀이 釀成鉅案엿스니 前鑑不遠이라.”

 1901년의 전국방곡 때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받은 외교적 압력은 정부의 방곡령 실시가 단지 개항장에서의 곡물유출만 저지할 뿐 실제로 방곡의 필요성이 절실했던 곡물유출지역내의 곡물시장보호는 불가능했음을 보여 준다.

 1901년 7월 24일 외부대신 朴齊純이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에게 1개월 후의 방곡을 통보했을 때0407)≪日案≫, 광무 5년 7월 24일조. 일본공사는 전국의 農況을 들어 2개월간의 방곡실시 보류를 요청했다.0408)일본공사가 각 영사의 보고에 근거하여 주장한 농황은 다음과 같다. “平安南道와 黃海道의 일부분은 강우가 적지만 旱魃이라 할 수 없고 필경 2∼3分의 減作에 불과하다. 平安道의 대부분 지방은 이미 상당한 강우가 있어 풍작은 평상과 다름이 없고, 평양부근에 黍·粟의 발육이 다소 妨害가 있으나 역시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江原·咸鏡 양 도의 풍작은 작년과 다를 바 없어 한발의 해가 조금도 없다. 慶尙道 大邱以南 洛東江一帶의 지방에서는 근래 충분한 강우가 있어 가장 먼저 파종이 끝나 한발이 전혀 없다. 全羅道는 全州부근에 비가 부족하지만 豊凶은 지금 판명이 곤란하다. 기타는 강우가 適量하여 京畿·忠淸 양 도는 目下 降雨가 鮮少하나 한발의 災害가 있다함은 의문스럽다”(≪日案≫, 광무 5년 7월 27일조). 그러나 일본영사가 본국에 보낸 보고에는 함경도·강원도 지방은 풍작이었고 전라도와 경상도에 다소의 降雨가 피해가 덜하지만 전국적인 흉작이라고 한다. 특히 경기도지방은 평년 수확의 5할에 불과한 극심한 흉작이었다(≪通商彙纂≫臨時增刊 7, 仁川 35년 貿易年報(1903. 10. 22:仁川);≪通商彙纂≫臨時增刊 241, 釜山 34년 貿易年報(1902. 9.15. 釜山);같은 책, 元山 34년 貿易年報(1902. 10.7:元山)). 실제현장의 시찰보고는 “丙子(1876) 이래 大旱”이라 할 정도의 흉작이었다고 한다. 경기·강원·충청도 지역을 유력한 일본인의 보고로는 충주지방 같은 곳은 평년작의 1할도 거두지 못했고 대부분이 2∼3할의 수확에 불과했다(≪通商彙纂≫211, 韓國京畿道江原道及忠淸道農商況視察報告書(1902. 1.14:京城), 120∼21쪽). 또한, 방곡대상 곡물도 조선측에서는 쌀을 포함한 모든 곡물을 대상으로 삼았으나,0409)조선측은<在朝鮮國日本人民通商章程>제37관을 들어 방곡령을 발령했는데, 37관의 ‘禁粮米出口’의 粮米를≪周禮≫를 인용하여 모든 곡물이라 했다(≪日案≫광무 5년 7월 24일, 8월 10일;≪海關案≫, 광무 5년 7월 24일, 7월 26일조). 일본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혀0410)1876년의<通商章程>第6則, 즉 “嗣後於朝鮮國港口住留日本人民 粮米及雜穀得輸出入”에는 粮米와 잡곡으로 구별했으므로 37관의 粮米는 쌀에 한한다고 일본공사는 주장했다(≪日案≫, 광무 5년 7월 27일, 8월 10일, 8월 11일조;≪外部來文≫5책, 광무 5년 8월 3일). 쌀만을 대상으로 했던 것이다.0411)≪日案≫, 광무 5년 8월 16일, 8월 17일, 10월 1일조.
≪海關案≫, 광무 5년 8월 17일조.
뿐만 아니라 일본공사는<在朝鮮國日本人民通商章程>제37관의 곡물수출 금지는 외국으로 수출을 금지하는 것일 뿐 국내 매매로 인한 지역간의 곡물이동과는 상관이 없다 하고 지방관의 방곡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즉 “만약 誤認하여 이른바 방곡이란 것을 一般視하여 이것이 매매·운반을 금지하는 경우가 있을 때는 귀국상민은 물론 제국상인(일본상인-필자)의 迷惑이 심해서 商業停止의 결과가 생긴다. 오히려 매매·운반을 막는 것은 사실 粮米의 결핍을 고한 지방이 그를 보충할 길을 잃게 되는 것이다”라며 지방관의 방곡을 금할 것을 요구했다.0412)≪日案≫, 광무 5년 7월 27일조. 8월의 전국적 방곡령실시에 앞서 지방관의 방곡은 한발의 피해가 우려되는 지역, 특히 금강유역의 각 군에서 이미 광범위하게 실시되고 있었다. 일본공사의 국내 방곡 허용요구는 바로 이 문제의 해결을 요구한 것이었다.0413)≪通商彙纂≫臨時增刊 231, 群山 34년 貿易ノ年報(1902. 6.27:群山), 66쪽.

번호 발생연월 발령자
및 집행자
발령지역 내 용 비 교(出典)
1 1897.?∼5 관찰사 함경북도 일본공사 항의로
철폐
≪日案≫, 건양 2년
5월 14·15일
2 1897. 4∼6 전남관찰사
암행어사
寶城 및
각 읍
위와 같음 ≪日案≫, 건양 2년
6월 3·4일
3 1897.11∼2 암행어사
(발령)
각 읍
수령(집행)
충남
恩津·德山·九
萬浦·禮山·牙
山·屯浦
위와 같음 ≪日案≫, 광무원년
12월 4·7일
4 1898.1.12 · 경상도 固城 地方隊兵丁康津上納
船 勒奪
≪독립신문≫, 광무
2년 3월 8일
5 1898 초 제주목사 제주도 방곡이용 부정으로
농민봉기
≪濟州道防穀事≫
6 1898.6∼12 목사 제주도 中山庄吉대두 매집,
운반정지
≪全羅南北來案≫,
광무 2년 10월 9일
7 1898.5. 군수 충북 鎭州 · ≪독립신문≫, 광무
2년 6월 4일
8 1898.?∼12 군수 전남 흥덕 英學黨사건 ≪重犯供草≫9
9 1899.11 군수 충남북각읍 · ≪독립신문≫, 광무
3년 11월 30일
10 1900 지방관 제주 · ≪皇城新聞≫, 광무
4월 112월 7일.
12 1901 군수 대구 수출곡물 매집금지 ≪通商彙纂≫196
12 1901.7 군수 은진 日商米豆
1,500∼1,600석 차압
≪日案≫, 광무 5년
7월 24일·10월 30일
13 1901.8∼
11.9.
정부(발령) 전국 1개월 전 통보 쌀에
한함
≪日案≫, 광무 5년
7월 24일, 10월 30일
함경도
각 군수
함경도
각 지역
쌀 이외 곡물
방곡으로 일본항의
≪日案≫, 광무 5년
10월 30일
14 1902.4. 각 군수 전라도 각
상납금으로 무곡 ≪續陰晴史≫하
15 1903.3. 진위대
군수
江界 후창군 강계진위대
후창군수 방곡
≪各府部來牒≫, 광무
7년 3월 28일
16 1904.1 · 전라도
寶城·樂安
거제인 朴汝辰
곡물압류
≪各郡狀題≫上,
甲辰 1月 10日
17 1904.3 군수 전남 咸平 日商의 항의로 배상 ≪續陰晴史≫下
18 1904.6 군수 平康 독일인광산 所運米
執穀, 世昌洋行에
배상
≪內部案≫, 광무 8년
6월 1일·7월 23일

<표 3>1895∼1904年의 防穀令發生事例

 그래서 정부는 충남북의 관찰사에게

此次防穀이 非謂內地販運이라 不過是暫禁出口니 出口者 卽由通商港口 運出外國者라 此港口에셔 彼港口로 運出도 自不可禁이어 況內地販運은 水陸間에 何以沮遏이리오 각 지방관이 不鮮約旨야 但稱防穀고 境內運出을 尙欲禁阻니 殊甚慨歎이라.0414)≪忠淸南北道來去案≫1책, 광무 5년 10월 7일 훈령 제 2호.

라는 훈령으로 지역적 방곡을 금했다. 그러나 개항장에서의 곡물유출 금지만으로는 지방에서의 일본상인의 곡물매집을 저지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사실, 구매곡물로 생계를 잇던 도시의 빈민이나 농촌의 임노동자층의 처지에서 가장 절실했던 문제는 지역내 곡물가격의 안정이었지 단순한 개항장에서의 곡물유출 저지가 아니었다. 1901년 대구군수가 한발의 영향으로 미가가 등귀하자 수출을 위한 매점을 금지하는 방곡을 실시했을 때 일본인도 ‘빈민구조의 一策’이라고 수긍하고 있었다.0415)≪通商彙纂≫196, 韓國慶尙北道大邱附近農況(1902. 7.16:釜山), 79∼80쪽.

 그러나 정부가 일본측의 압력으로 지역적 방곡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 지방관의 지역적 방곡실시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곡물유출지역에서의 빈민층이 불만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했다. 1898년 2월 15일 평양민 2천여 명은 평양의 ‘細民’이 기아에 처해 있는데 일본상인에 의해 미곡이 적출된다며 평양군수에게 방곡령의 실시를 요구하는 한편, 일본상인의 미곡을 적재한 선박의 출범을 막았다. 그러나 평양군수나 평안도 관찰사는 방곡령실시를 거부했다.0416)≪駐韓日本公使館記錄≫13(국사편찬위원회, 1995), 明治 31년 各領事館來信, 平壤亂民蜂起報告, 24∼25쪽. 같은 해 5월 20일 ‘平壤細民’ 80∼90명은 곡가의 앙등에 반발하여 재차 관찰사에게 방곡령의 실시를 요구했다.0417)같은 자료, 平壤細民蜂起ノ件. 이 경우 ‘細民’은 곡물을 구입하여 생계를 잇던 도시의 빈민층을 가리킨다. 이러한 평양민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평안도관찰사는 방곡령을 실시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중앙정부의 지역적 방곡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서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더구나 지역내 곡물의 유출이 심하여 지방관이 정부에 방곡을 요청할 때에도 정부는 들어주지 않았다. 즉, 1897년 12월 황해도관찰사 金嘉鎭이 외부에 낸 보고서에는 흉작인데다가 내외국선박이 각 포구에 몰려와 高價로 곡물을 매집해 가는 것이 몇천 석이나 되어서 곡가가 등귀하고 장시에 곡물이 나오지 않아 境內 백성이 걸식하는 참상을 보고하면서 방곡령의 실시를 요구했는데 정부는 실시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0418)≪黃海道來案≫1冊, 光武 元年 12월 1일 報告, “ … 又況內外國賈船商舶이 湊集各浦야 無論各穀고 厚價買之야 日日出浦者ㅣ 不知其幾千石乎아 由是而非徒穀價之刁騰이라 各郡場市에 每爲絶穀야 男女布袋가 之東之西에 乞糧不得야 號泣道路에 廳聞이 極慘이다온 若不及今通變이면 明春餓殍之相望은 勢所必至이온바 … 以此意로 知照各國와 貿穀一款은 限明年 新麥成熟야 俾爲嚴防之地 望홈”

 1898년 제주도 방곡령사건 때에도 정부의 이 같은 입장은 마찬가지였다. 제주도 방곡사건은 이 시기 방곡령실시의 여러가지 요인들이 복합되어 일어난 대표적 사례이므로 좀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원래 제주의 土穀은 出陸하지 않는 것이 常規였는데, 1898년 초엽 제주목사 李秉輝는 표면상으로 방곡을 엄히 시행하면서도 裏面에서는 ‘受賂暗放’하여 民擾가 발생했다.0419)奎 26061<濟州島防穀事>. 즉 이병휘는 방곡을 시행하면서도 뇌물을 받고서 “牟利輩가 不知遠慮고 但思己欲야 豆太를 潛載出陸 弊”를 묵인했던 것이다.0420)≪全羅南北來案≫1책, 광무 2년 8월 15일 보고서 제1호. 이것이 구실이 되어 같은 해 3월 1일 島民 수만 명이 房甲(일명 鎭社, 星七)을 중심으로 南學黨이라 칭하고 관아를 습격하여 제주목사 이병휘와 大靜郡守 蔡龜錫에게 중상을 입혔다.0421)金允植,≪續陰晴史≫上, 456∼68쪽. 그리하여 朴用元이 察理使兼濟州牧使로 파견되어 민원에 따라 大豆의 유출을 금지함으로써 민심이 수습되었다.0422)<濟州島防穀事>.

 그 뒤 부산거류 일본상인 나카야마(中山庄吉)가 같은 해 3월 제주도에 행상하여 城山浦에서 周文喜 등 조선상인 수 명과 대두매매의 계약을 맺고 총 계 1,400俵에 대한 前渡金으로 1,500관문을 9명의 상인에게 지급하고 6월에 太豆를 受授할 때 박용원은 방곡을 실시했다.0423)≪全羅南北來案≫1책, 광무 2년 10월 9일 보고서 제2호;奎 20711≪濟州太穀事報告案≫, 外部報告書 제2호. 이에 나카야마는 駐釜山日本警官 시라이시(白石由太郞)와 함께 와서 항의했으나 제주목사 박용원은 허가하지 않고,0424)≪全羅南北來案≫1책, 광무 2년 8월 15일 보고서 제1호;≪濟州太穀事報告案≫, 外部報告書 제1호. 정부에 대해서도 민심수습의 명목으로 불허를 요청했다.0425)≪全羅南北來案≫1책, 광무 2년 10월 6일 指令. 그러나 정부는 일본공사가 항의한다 하여 철폐를 지시했으며 박용원이 재차 나카야마의 화물은 出給하나 방곡은 계속하게 해 줄 것을 요망했지만,0426)위의 책, 광무 2년 10월 9일 보고서 제2호. 정부는 방곡금지의 지령을 내렸다.0427)위의 책, 광무 2년 11월 25일 지령 4호 이에 따라 12월 7일 박용원은 防穀撤鎖의 전령을 관하 三郡과 각 里坊曲에 내렸다.0428)위의 책, 광무 2년 12월 7일 보고서 4호;≪濟州太穀事報告案≫, 傳令三郡各浦口. 그러나 이듬해 나카야마는 실제 손해액보다 훨씬 많은 액수의 배상을 요구했다가 박용원의 항의에 賠償申請書를 정정하고0429)≪務安報牒≫2책, 광무 3년 8월 8일 보고 제43호, 8월 29일 보고 제47호. 일본공사를 통해 다시 배상을 요청했다.0430)≪日案≫, 광무 3년 12월 1일조. 박용원은 손해배상액과 벌금을 물게 되자 나카야마에게 대두를 방매하던 상인들에게 배상하라고 강요했다.0431)≪독립신문≫, 광무 3년 8월 10일 잡보.

 이상의 제주도 방곡사례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이병휘의 경우와 같이 지방관이 방곡을 이용하여 이익을 꾀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 방곡령의 실시를 요구하는 민중의 봉기가 발생했고 이에 따라 지방관은 방곡령을 실시했지만, 일본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정부는 민중봉기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철폐를 지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방관이 민중의 요구에 의해 방곡을 실시하더라도 배상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지방관이 그 책임을 져야 했다. 따라서 지방관이 일본상인을 대상으로 방곡을 실시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1900년 제주의 곡물상인 金根煥 등이 제주도지역에서 곡물을 매집하고 木浦와 智島 등으로 운반하려고 했을 때 방곡의 실시로 출항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外國人은 無難貿米하야 出入無常하야 初無禁阻하고 唯獨矣等穀包만 末由遷動하온즉 …”이라고 農部에 호소한 내용은 방곡의 대상에서 일본상인이 제외되고 있던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0432)≪皇城新聞≫, 광무 4년 12월 7일.

 그 때문에 전시기의 방곡령이 대부분 일본상인이 대상이었던 반면, 이 시기에는 일본상인이 그 대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표에서 보듯이 적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 대량의 곡물유출은 민중의 반발을 사고 있어 초기의병의 항쟁 때도 방곡령실시를 요구한 일이 있으며,0433)糟谷憲一,<初期義兵運動につい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14, 1977), 34쪽. 활빈당도 그들의 강령에서 방곡령의 실시를 주장했던 것이다.0434)信夫淳平,≪韓半島≫(東京堂書店, 1901), 76∼80쪽.
姜在彦,≪近代朝鮮の變革思想≫(日本評論社, 1973), 87∼94쪽.
또 前秘書丞 洪鍾宇는 1898년 4월 8일 경희궁 인화문 앞에서 인민 천여명과 함께 상소를 올렸는데 상소의 제1항에서 곡물의 국외유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의 실시를 요청했다.0435)≪독립신문≫, 광무 2년 4월 9일 잡보.
그런데 홍종우의 상소에 대해≪독립신문≫의 논설에서는 이를 반박하여, 방곡을 하면 通商港口로 곡식은 못나가지만 內地各浦口로 나가는 것은 더 심할 터이니 그렇게 되면 탁지부의 海關稅만 잃고 곡식은 곡식대로 나간다고 했다(≪독립신문≫, 광무 2년 4월 14일 론셜). 褓負商의 두령으로서 萬民共同會를 무력으로 해산시킨 홍종우와 독립협회와의 대립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 경우 독립협회의 반박은 설득력이 없다. 독립협회가 주장하는 내지포구로 곡물이 나갈 것이라 함은 潛賣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방곡령실시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사실이었다. 독립협회의 자유무역적 성향 자체가 일종의 보호무역인 방곡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선언문에서도 방곡령실시의 요구사항은 보이지 않는데 이는 공동회의 구성인원 가운데 곡물을 구입하여 살던 도시빈민이나 농촌의 임노동계층의 참여가 적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독립신문≫, 광무 2년 12월 12일 참조).
이 해 10월에도 保民會員 權明浩 등이 內部에 고소하여 “近因交隣通商하야 米穀이 輸出他邦하오니 所以로 豊年之穀이 貴於凶年하와 穀價가 高登하온즉 … 嗷嗷抑鬱한 民情을 特念하시와 米穀을 他邦으로 輸出치 勿하게 永爲邦禁하와 使此民으로 俾保生命하심을 望홈”이라 했지만 그 대답은 역시 “遏糴은 邦禁也라 決不可認許事”였다.0436)≪皇城新聞≫, 광무 2년 10월 21일조.

 중앙정부가 이처럼 방곡령실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지방관 임의의 방곡을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境內 곡물유출로 인한 민정의 불안 때문에 지방관이나 암행어사에 의하여 지역적 곡물시장의 보호를 위한 방곡령이 몇 차례 나타난다. 1897년 4월 전라남도 지역에 방곡령을 발령한 암행어사는 그 이유를 포구에서 적출되는 미곡이 하루에도 수천석에 이르러 민정이 불안하기 때문이라 했다.0437)≪日案≫, 建陽 2년 6월 3일조, “湖南雖是穀鄕 而一自海開埔之後 每日米船之載外不下數千石 以有限之穀 入無窮之海 億萬生靈莫不嗷嗷 不得不嚴防.” 앞서 본 제주도민의 봉기 때 박용원이 방곡을 실시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방곡은 행정의 강제력으로 유통을 차단하는 행위여서 방곡하는 지역에서는 일단 곡가를 안정시킬 수 있었지만 정부의 방곡금지정책으로 방곡을 시행하지 못한 이웃한 지역에서의 곡가를 등귀시키는 사례도 있었다. 1898년 진천군의 방곡과 죽산군의 경우가 그러했다.0438)≪독립신문≫, 광무 2년 6월 4일조.

 그러나 이 시기 방곡령의 실시 원인에서 볼 수 있는 두드러진 특색의 하나는 지방관이 상납금의 전용으로써 곡물을 매집, 무곡하기 위하여 방곡령을 실시했던 점이다. 1898년 12월 전남 興德郡에서 발생한 英學黨事件은 흥덕군수 林鏞炫의 탐학에서 비롯되었다. 군수의 탐학사항 중 하나가 군내에서 방곡을 실시하고는 공전을 가지고 다섯 곳에서 歇價로 貿米하는 데 매석에 시가로 15냥인 것을 13냥 5전에 사들여 차액을 착복한 것이었다.0439)奎 17282≪重犯供草≫9책, 興德郡亂民取招査案;≪韓國學報≫35(1984, 여름), 244∼254쪽 所收. “防穀而歇價貿米段은 貿米於五處 而嚴截防穀 租每石時價十五兩者 以十三兩五錢 定價貿置 民多呼寃 至於此境 伏願明査處之敎味.” 또 1902년 4월에는 전라도의 각 읍 수령들이 방곡을 실시하고 공전으로 읍의 곡식을 減價로 勒買해 東萊로 운반하고 매매함으로써 몇 갑절의 이익을 남겨 민간의 곡물매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0440)金允植, 앞의 책(下), 12쪽.

 이 경우의 방곡은 지방관이 상인과 결탁해서 실시하는 사례도 있었다. 1897년≪독립신문≫의 “무곡하는 사람들이 수령들을 끼고 방곡을 하야 곡식을 장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고로 그 고을 안에서는 곡식금이 싼지라 무곡장사와 수령들이 그 곡식을 싸게 사서 각 포구로 내보내어 중가로 밧고 파니 …”0441)≪독립신문≫, 광무 원년 12월 2일 논설.라는 기사에서 보듯이 방곡을 貿穀商人과 수령이 지역간 가격차이를 이용하는 수단으로 시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농민전쟁 단계에서 趙秉甲이 전라도 고부에서 곡물의 수확기에 방곡을 실시해 계절적 곡가차이를 이용하는 경우는 이미 살펴 본 대로지만 이 시기에 들어 이같은 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租稅金納의 실시 이후 조세납입 이전까지 지방관이 상납금을 전용할 수 있었던 데다가 대일수출로 인한 시장확대가 계절적 차이만이 아니라 지역적 가격차이를 이용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한 점 등이 이를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韓國誌≫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나라의 상업유통에 관여하는 관리들은 방곡령 때 자기들의 대리인을 통해서 농민들의 잉여농산물을 싼값으로 매점하여 자기들의 창고에 저장했다.0442)러시아대장성 편,≪구한말의 사회와 경제≫(유풍출판사, 1983), 215쪽.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압력이 강화되면서 전시기에 비해 일본상인을 대상으로 지역적 곡물시장의 보호를 위한 방곡령실시가 줄어든 대신 지방관들이 상납금 등의 공전을 전용하여 경내 농민을 대상으로 방곡을 실시하고 싼값으로 곡물을 사들여 무곡하고 私腹을 채우는 경우가 많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사실상의 식민지화와 함께 이러한 방곡령마저 소멸되고 말았다.

 필자가 사료에서 찾아낸 바로는 일본상인을 대상으로 한 마지막 방곡령의 실시는 1904년 3월 전라남도 함평군수가 실시한 것이었는데, 이 사례에서 우리는 러일전쟁 이후 방곡령이 발생되지 못했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즉 함평군의 방곡이 엄해서 同鄕之民도 식량을 못구해 怨聲이 잦던 차에 일본인 5명이 政堂에 돌입하여 군수를 구타하고 조약위반의 손해배상금을 요구했다. 이에 군수는 우선 2천냥을 주었고 또 일본인이 곡물을 모두 매입해 가는 바람에 지역민은 식량조차 구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0443)金允植, 앞의 책(下), 85∼86쪽. 러일전쟁 도중의 일개 일본상인의 횡포가 이러했으니 이후 방곡령의 발생은 기대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국가기구가 일본의 손에 넘어가는 단계에서 방곡령의 소멸은 당연한 결과였다.

 원래 防穀은 행정의 강제력으로 시장기능을 마비시키는 전근대적 경제정책이었다. 상품화가 고도로 진전되면 소멸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 중앙정부가 외국미의 수입이나 轉運使·檢稅官 등의 무곡으로 서울지역의 곡가를 조절하는 데 반해, 환곡이나 진휼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역의 지방관의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곡가안정의 방법은 방곡밖에 없었다. 따라서 개항 이후 100건 이상 발생했던 방곡은 대부분이 중앙정부의 곡물가격정책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방관이 조선 후기 이래 관습화된 정책으로 시행했던 것이었고 실시된 지역내에서는 나름대로 곡가안정이라는 기능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종래의 계절적·지역적 가격차이를 이용해 무곡하던 조선인 지주·부농이나 곡물상인에서 새로이 곡물유통과정에 침투하여 수출곡물의 유통을 장악하던 일본상인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결국 개항 이후의 방곡령은 중앙정부가 외압으로 국내시장을 보호하지 못하는 가운데 일제의 경제적 침탈과 직접 대면하게 된 지역적 곡물시장권의 대항이었던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河元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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