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4. 사회신분제의 동요
  • 3) 양반 신분의 동향
  • (2) 양반 신분의 동요와 분화

(2) 양반 신분의 동요와 분화

 조선 후기 양반신분의 동요를 초래한 배경은 비양반층의 신분적 상향 이동의 결과라는 관점에서 조명될 수 있다. 비양반층은 과거라는 좁은 통로를 거쳐 양반으로 상향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동 방식은 양반층의 신분적 지위 자체에는 거의 타격을 주지 않는 성격의 것이며, 양반 신분으로의 充員의 의미를 띠는 班常制의 제도적 과정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양반 신분의 동요는 과거 이외의 다양한 합법적·불법적 수단들을 통한 상향 이동에 의해 초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상제의 제도적 과정을 벗어난 수단들을 통하여 새로이 양반 신분층에 대량으로 진출함으로써 양반 호구가 그만큼 늘어나고 그로 인한 양반 신분의 동요가 야기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합법적 상향 이동 수단이 곧 納粟授職이다. 납속수직은 米穀으로 대표되는 일정 財貨를 국가에 헌납한 자에게 그 대가로 官爵을 수여하는, 말하자면 賣官과 다를 바 없는0480)≪英祖實錄≫6, 영조 원년 5월 계묘. 侍讀官 徐宗燮의 말 참조. 재정염출책이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부유한 상민들은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서는 접근할 수 없는 관직이나 품계를 납속수직의 방법을 통하여 획득함으로써 자신의 신분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었고 국가는 그러한 신분 상승의 열망을 이용하여 부족한 재원을 메꿀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賑恤·軍糧確保·軍器補修·宮闕營建·築城 등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납속수직이 빈번하게 행해졌다. 납속에 의해 획득할 수 있는 관직은 대개 老職·贈職·影職·加設職 등으로서 職事가 없는 명예직이 주류를 이루었다. 納粟品官은 군역이 면제되지 않는 등 일반 사대부와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구별되어 그 신분적 지위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위치하는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지만,0481)李俊九,<朝鮮後期兩班身分移動에 關한 硏究(上)>(≪歷史學報≫97, 1983), 152쪽. 제도상의 규정과는 달리 시일이 흐름에 따라 본래의 양반층과 마찬가지로 양반 행세도 할 수 있게 되었다.0482)金容燮,<朝鮮後期에 있어서의 身分制의 動搖와 農地所有>(≪朝鮮後期農業史硏究≫, 一潮閣, 1970), 413쪽.

 납속수직 이외에도 각종의 冒稱·冒屬·冒錄 등 다양한 불법적 방법을 동원하여 양반으로의 신분 상승을 도모하였다. 비교적 부유한 상민들은 籍吏와 결탁하여 호적에 幼學으로 冒錄함으로써 避役을 꾀하였으며 이러한 冒稱幼學은 상민 가운데 약간의 식견과 재력이 있는 자는 쉽게 넘볼 수 있었다.0483)鄭奭鍾,<朝鮮後期 社會身分制의 變化>(≪朝鮮後期社會變動硏究≫, 一潮閣, 1983), 255쪽;金容燮,<朝鮮後期 軍役制의 動搖와 軍役田>(≪東方學志≫32, 1962), 110쪽 참조. 또한 재력있는 상민들은 璿派·勳族을 모칭하고 관작을 거짓 기재하여 僞譜를 만들거나, 빈궁한 양반의 족보를 사서 후손으로 冒錄하는 방법 등을 사용하였다.0484)鄭奭鍾, 위의 글, 261∼263쪽;金容燮, 위의 글, 116쪽 참조. 이와 함께 忠義衛·業儒·業武·校生·院生·軍官·將校 등의 신분직역을 모칭하거나 거기에 모속함으로써 피역을 위한 신분 상승을 도모하였다.

 비양반층의 상향 이동이 활발해지고 이들이 양반 신분층에 대량으로 진출함에 따라 양반 신분은 크게 동요되었고 이는 양반 신분의 분화 현상을 촉진하였다. 본래의 양반 신분은 李重煥(1690∼1756)이 지적한 바와 같이 士大夫와 鄕曲品官의 구별이 있었고, 사대부 간에도 大家·名家의 경계가 있었다.0485)李重煥,≪擇里誌≫總論. 또한 柳壽垣(1694∼1755)이 素門平族과 高門大族을 나눈 것과 같이0486)柳壽垣,≪迂書≫2, 論門閥之弊. 家世와 門地에 따라 한미한 가문과 문벌 가문을 구분하는 풍토가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대지주로부터 “사는 꼴이 걸인을 방불케 하는”0487)宋俊浩,<1750年代 益山地方의 兩班>(≪全北史學≫11, 1983). 빈곤층에 이르기까지 분화되고 있었다. 지역적으로도 18세기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數十家의 양반 권세가에 정권이 집중되어 간 이면에는 지방 사족(특히 영남 사족)의 향족화 현상이 자리잡고 있었다.0488)韓㳓劤,≪東學亂 起因에 關한 硏究≫(서울대학교출판부, 1971), 42∼45쪽.

 그런데 비양반층의 대량 진출에 의해 촉진된 양반층의 분화 현상은 이러한 전국적 수준에서 상·하를 구분하는 형태와는 다소 다른 방향에서 진행된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분화의 새로운 형태는 주로 양반 신분의 하부에 해당하는 재지사족 내지 향반의 수준에서 향촌사회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儒鄕分岐’ 즉 士族과 鄕族·鄕品의 분리 현상이었다.0489)이하 儒鄕分岐에 대한 서술은 李俊九, 앞의 글, 36∼38쪽 참조. 영남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거의 전국적 수준에서 진행된 유향분기는 사족지배체제에서 守令-吏·鄕支配體制로의 변화에 따른 재지사족의 鄕權 상실 경향과도 관련된다. 관 주도의 향촌사회 통제책 시행에 따라 향임이 고역으로 전락하자 본래의 사족층은 이를 기피하였고, 향임을 담당하는 향족·향품층은 이들과 구분되는 하나의 계층으로 형성되어 갔다. 18세기 후반 이후 향임은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부민층이 대거 참여하는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지역에 따라 향임·서얼·이서 등으로 구성된 ‘新鄕’의 향안 입록을 둘러싸고 기존 입록자인 ‘舊鄕’과의 사이에 전개된 ‘鄕戰’과 이를 배경으로 한 향안 파치 현상도 같은 맥락에서 재지사족층의 분화를 보여 주는 한 예로 삼을 수 있다.

 다른 한편, 1832년경 晉州 지역에서 나타난 元儒와 別儒의 구분과 차별 양상도 재지사족 수준에서 진행된 분화 현상과 관련하여 음미되어야 할 사례이다.0490)李海濬,<朝鮮後期 晉州地方 儒戶의 實態>(≪震檀學報≫60, 1985). 원유와 별유는 다같이 幼學을 직역으로 하면서도 원유는 토착·전통적인 지배신분층, 별유는 신분상승 혹은 後來移住로서 지배신분층의 하부에 첨입된 존재로 파악된다. 원유와 별유의 구분은 급증된 兩班戶의 자체 구별의 양상을 띠고 있으며 분명한 신분적 상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양반층의 증대에 따른 기존 사족층의 자기 방어 차원의 대응 양상을 잘 보여 준다.

 이러한 분화의 제양상은 모든 사회에서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부, 그리고 사회적 위신이 불평등하게 분배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양반신분의 분화 과정은 신분제 동요의 결과 또는 징후와 관련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특징이 있다. 상민을 비롯한 여러 신분층의 사회적·경제적 성장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양반 신분으로의 대량 진출이 양반 호구의 증대를 낳고 그에 대한 사회적 반응으로서 양반 신분의 분화가 촉진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상층 양반이 이러한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하여 동요된 흔적은 발견하기 어렵다. 오히려 전형적인 양반 가문은 이질적 요소나 하층 양반과의 구별을 강조함으로써 스스로를 강화시켜 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양반 신분의 동요와 관련하여 주목하여야 할 부분은 양반 신분의 하부이다. 이 비교적 수심이 얕은 곳에 상민을 비롯한 여타의 신분층이 뛰어들어 휘저어 놓음으로써 반·상의 混淆가 일어나고 호적대장 상의 양반층 증대 현상이 야기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8·19세기에 이르러 다양한 신분층이 幼學 직역에 진출함으로써 이 직역 기재로는 본래의 신분을 구별할 수 없게 된 현상은0491)崔承熙, 위의 글, 117쪽. 충분히 주목될 가치가 있는 것이다.0492)兩班層 增大와 奴婢戶 激減으로 요약되는 조선 후기 신분제 동요의 추세는 조선시대 신분구조의 구성 원리인 班常制와 良賤制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19세기 후반의 신분제는 幼學 職役의 사례에서 극명히 표출되듯이 신분직역체제가 파탄 국면에 이르게 되면서 국가신분제로서의 성격은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19세기 후반의 계층구조에 대하여 이를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계급을 함께 고려하여 파악하려는 입장, 예컨대 “상층부에는 兩班士族을 모태로 하는 土豪層과 班常을 포괄하는 신분구성을 갖는 饒戶富民層이 있고, 하층부에는 平民·賤民 신분층의 小貧民層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는 입장은 일정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이영호,<1894년 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변혁주체의 성장>(≪1894년 농민전쟁연구 1≫, 역사비평사, 1991), 26쪽 참조.

<池承鍾>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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