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5. 개항기 지주제와 농업경영
  • 1) 개항 후 농업변동의 요인
  • (1) 통상무역의 확대와 농촌사회

(1) 통상무역의 확대와 농촌사회

 조선 후기 농촌사회는 신분제의 해체,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생산관계의 변동, 상품화폐 유통경제의 발전 등의 요인으로 중세적 기저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0493)조선 후기 사회변동은 근대사연구회,≪한국 중세사회 해체기의 제 문제≫상·하, 한울, 1987과 한국역사연구회,<중세사회의 발전과 해체>(≪한국역사입문≫②, 풀빛, 1995에 잘 요약 정리되어 있다. 이러한 변화는 1876년 조일수호조규로 국교가 확대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어 갔다. 이 조약으로 조선사회는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불평등한 관계로 강제로 편입되었으며, 여기에 기본적으로 규제를 받으면서 자기변신을 해 갔다. 특히 통상무역의 확대에 따른 경제 변화가 이를 주도했다. 쌀·콩·소가죽 등 농산물의 수출 판로가 국제적으로 확대되면서 이를 겨냥한 농산물 생산의 급속한 발전, 공장제 면제품의 수입에 따른 전통 토포산업의 위축이라는 사태를 맞이하여 농촌사회가 급격히 분해된 것이다.0494)면업의 생산과 유통구조는 다음 글이 참고된다.
梶村秀樹,<李朝末期 綿業の流通及び生産構造>(≪東洋文化硏究所紀要≫46, 1968).
吉野誠,<李朝末期における綿製品輸入の展開>(≪朝鮮歷史論集≫(下), 龍溪書舍, 1979).
권태억,≪한국근대면업사연구≫(일조각, 1989).
이 중에서도 쌀이 변화를 주도했다. 일본 자본주의는 후발성을 극복하기 위해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으며, 그 기반은 값싼 쌀이었다. 질의 측면에서 조선 쌀은 일본 쌀과 같은 종류였기 때문에 일본자본주의는 조선 쌀을 수입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리하여 일본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일본내 쌀 부족 현상이 심화되자 조선과의 쌀무역은 더욱 확대되어 갔으며, 그만큼 조선내의 쌀값은 앙등되었다.0495)개항기 무역과 국내 유통구조는 다음 글이 참고된다.
姜德相,<李氏朝鮮 開港直後 朝日貿易의 展開>(≪歷史學硏究≫265, 1962).
吉野誠,<朝鮮開國後の穀物輸出につい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12, 1975).
吉野誠, 앞의 글(≪朝鮮歷史論集≫(下), 龍溪書舍, 1979).
이병천,≪개항기 외국상인의 침입과 한국상인의 대응≫(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5).
하원호,≪한국근대경제사연구≫(신서원, 1997)를 참조.

 쌀무역은 국내 곡물시장의 전면적 재편을 초래했다. 개항 이전의 곡물시장은 지주와 국가에 의한 전국적 유통망과 농민에 의한 국지적 유통망이 짝을 이루면서 서울 중심으로 형성된 유통구조였다. 그러나 개항이 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여기에 부산·원산·인천항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산지·포구 객주↔중개곡물상↔개항지 객주↔거류지 일본무역상이라는 유통권이 새로 추가된 것이다. 이것은 곧 서울 중심의 유통권이 개항지 중심의 유통권으로 양분되어 재편 발전해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서울도 쌀값이 오르고 구매력이 커져 갔으나, 대체로 서울보다 개항장의 흡입력이 더 강세를 보였다.0496)이 시기 곡물 유통구조는 다음 글이 참고된다.
이세영,<18·19세기 곡물시장의 형성과 유통구조의 변동>(≪한국사론≫9, 1983).
하원호, 앞의 책, 1997과 주3)의 글.

 외국과 잇달아 통상조약을 맺으면서0497)통상조약의 내용은 국회입법조사국 편,≪구한말조약휘찬≫(상)(중)(하), 1964 참조. 개항장의 수, 거류지와 조차지의 수와 규모, 외국인의 토지이용 허용범위, 외국인의 활동허용 범위가 확대되어 무역의 영향력은 더 커져 갔다.0498)한국역사연구회 편,≪한국역사입문③≫(1996)에 소개된 글과 김정기,<조선 불평등조약의 間行權·漢城開棧權 분석>(≪한국근현대의 민족문제와 신국가건설≫, 지식산업사, 1997). 외국 상인, 특히 일본상인은 이를 적극 활용하여 활동무대를 넓혀 갔다. 중개곡물상과 개항지 객주를 배제하고 산지 포구 객주와 직접 거래하는 유통구조를 형성한 것이다. 개항장의 유통권이 더욱 강한 규정력을 발휘하면서 일본상인은 조선의 상권을 점점 장악해 갔다.

 쌀무역은 부산항이 주도했다. 쌀의 수출지가 일본이라는 거리상의 이점과 쌀 가격이 인천보다 부산이 좋다는 점이 반영되어 부산항으로 집중되는 현상을 보였다. 부산항에서 수출한 쌀의 산지는 전라도 산이 7분, 경상도 산이 3분을 점하였다. 부산항의 비중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대일 무역이 더욱 활성화됨에 따라 더욱 커져 갔다.0499)하원호,<곡가변동의 추이와 원인>, 앞의 책, 1997, 253∼263쪽. 콩도 대일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생산량은 쌀의 10%에 불과했지만 수출액은 쌀에 필적할 정도였다. 그 원인은 질좋고 값이 싸 일본산에 비하여 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영향으로 콩의 경작기술이 크게 발전하고, 신간전이나 밭의 언덕·둔덕 등도 개발하여 재배면적을 크게 확대했다. 콩은 쌀과 달리 지주제가 덜 발달한 부산항의 배후지인 경상북도에서 상품화가 두드러졌으며, 계층에 관계없이 전농민층이 참여하여 재배했다. 쌀은 지주제의 발전에, 콩은 농민적 부의 축적에 기여했을 것이라 판단된다.0500)콩의 재배와 상품화는 宮嶋博史,<朝鮮 甲午改革以後의 商業的 農業>(≪史林≫57-6, 1974;≪한국근대경제사연구≫, 사계절, 1983, 219∼220쪽) 참조.

 이러한 유통구조 속에서 쌀무역에 직접 참여한 양반관료와 상인들, 그리고 쌀을 생산 판매하는 병작지주·경영지주들은 크게 이익을 보고 있었다.0501)쌀무역과 지주제 변동과의 관련성은 김용섭,<개항과 농업문제의 심화>(≪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 일조각, 1992)에 잘 정리되어 있다. 생산활동에서 잉여가 있는 부농들도 여기에 동참할 수 있었다. 쌀 생산이 크게 이익을 가져와 이들의 토지 구입열도 상승해 갔다. 이들이 구입한 토지는 주로 소빈농층이 방매한 토지였다. 소빈농층도 상품화폐 유통경제권의 확대에 따라 여기에 포섭되어 쌀의 상품화에 참여했지만, 그것은 궁박 판매의 형태였다. 이들은 여기서 발생한 손해를 회복하기 위해서 자기의 생존수단인 토지라도 방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쌀값과 땅값은 때로는 하락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 동반 상승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 중에서도 쌀값이 땅값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승률이 더 큰 경향을 보였다.0502)이 시기 땅값과 쌀값의 동향은 최원규,<한말 일제하 농업경영에 관한 연구>(≪한국사연구≫50·51, 1985)와 하원호, 앞의 책, 1997 참조. 더 많은 쌀을 생산하여 더 많은 수익을 거두기 위해 각계 각층은 경영규모를 확대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했다. 부농들은 차경지를 중심으로 하면서 때로는 소유지를 확대해 가기도 했으며, 상인 지주들은 소유지를 중심으로 대책을 강구했다. 이들의 토지 구입방식은 고관대작이나 부호의 경우 개항장 부근에 일시에 농지를 구입하기도 했지만, 일반적인 지주들은 소빈농층이 방매하는 토지를 한 두 필지씩 구입하여 20∼30년 지나는 사이 대지주로 성장해 갔다.0503)김용섭,<근대화과정에서의 농업개혁의 두 방향>(≪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 일조각, 1992), 21쪽.

년도 총수입액 면제품
수입액
총수출액
수출액 단가 수출액
1876
1877
1878
1879
1880
1881
1882
1883
1884
1885
1886
1887
1888
1889
1890
1891
1892
1893
1894
1895
1896
1897
1898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188246
126569
244545
566955
978014
1873976
1562169
2178400
793734
1671652
2474185
2815441
3046443
3377815
4727839
5256468
4598485
3880155
5831563
8088213
6531324
10067514
11825249
10307830
11013590
14822003
13657063
18374814
27034345
11623
54250
167894
477222
768467
147157
178640
912856
497593
1122359
1305731
1894324
1961932
1709142
2674807
2874837
2185073
1733458
2494544
4713755
3478924
5273119
5185406
5384460
5764990
6182912
5561400
6009321
8456940
92518
58759
181469
612174
1256225
2230296
1768619
1656078
884060
388023
504225
804996
867058
1233841
3550478
3366344
2443739
1698116
2311215
2481808
4728700
8973869
5709489
4997845
9439867
8461949
8317070
9477603
6933504

1959
50600
358812
729706
381283
21011
45625
196
15691
12193
90071
21810
77578
2037868
1820319
998519
667165
979292
305196
2509343
5556700
2759046
1417842
3625629
4195309
3524619
4224712
1300790

3.3
27.9
58.6
58.1
17.1
1.2
2.8
0.0
4.0
2.4
11.2
2.5
6.3
57.4
54.1
40.9
21.6
42.4
31.2
57.1
68.7
61
33.7
50.1
56.6
53.8
55.6
22.8

4.00
3.51
4.33
5.31
4.99
4.90
4.25
3.73
4.85
5.18
3.73
3.28
5.55
5.74
5.05
5.36
6.06
7.85
7.24
7.00
9.12
12.12
8.36
9.17
8.13
9.36
11.43
12.88

4155
25323
99123
119307
196695
311325
293955
100705
28884
51733
335415
471541
645429
1005156
913939
797884
628324
506888
923695
1277071
1710211
1124048
1974863
2368545
1881014
1735945
1528834
2399513

7.1
14.0
16.2
9.5
8.8
17.6
17.8
11.4
7.4
10.3
41.7
54.4
52.3
28.3
27.1
32.7
37
21.9
39
29
21.1
24.9
47.0
32.7
25.5
27.8
20.1
42.1

<표 1>총수출입액과 쌀수출입액 비교 (단위:円)

*출전:이세영,<개항기 지주제의 동향>(≪한국사≫12, 한길사, 1994, 71쪽).
    하원호, 앞의 책, 23·125·219쪽.
*비고:쌀값은 부산항의 1석당 円화 가격이다(하원호, 앞의 책, 219쪽).

 그렇지만 쌀무역이 지주제 발전에 무조건 유리하게 작용한 것만은 아니었다. 농민들은 지주적 상품화에 반대하여 지대인하 투쟁을 통한 농민적 상품화를 지향했으며, 당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과 항조운동은 이러한 표현의 하나였다.0504)한국역사연구회,≪한국역사입문②≫중세편, 1995, 537∼539쪽과≪한국역사입문 ③≫근대·현대편, 1996, 216∼219쪽. 그리고 콜레라 등 전염병이 유행하고, 수재·한재 등 자연재해가 잇달아 일어나 외적 형편도 지주경영을 강화하기에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쌀무역의 활성화와 더불어 이같은 생산량의 저하 현상은 국내의 쌀부족을 가져와 쌀값을 더욱 앙등시켰다. 이럴 때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는 농민들의 생존과 관련하여 대일 쌀무역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이에 조선정부는 이를 고치는 데 힘써 1883년 일본과<在朝鮮國日本人民通商章程>을 맺으면서 제한적이나마 전통적인 방곡령을 발동하여 이를 막을 수 있었다.0505)국회도서관,≪구한말조약휘찬≫상, 64쪽. 쌀이 부족하여 민심이 흉흉하여 통치가 어려워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일제는 방곡령으로 쌀무역이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자 강경한 자세로 여기에 대처했다.0506)하원호,<개항후 방곡령 실시의 원인에 관한 연구(상)·(하)>(≪한국사연구≫49·50·51, 1985) 참조. 조선정부에 배상책임을 묻는 한편 쌀무역을 확대 강화해 갔다.

 대일 쌀무역은 일제가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친일 개화파 정권을 수립하면서 어느 정도 불안정성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역에 의존하는 한 일본내 쌀 수급의 안정성을 기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일본자본주의가 ‘산업혁명기’에 접어들면서 저임금 구조의 기반인 값싼 쌀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은 더 커졌다. 그리하여 일본자본주의는 장기적 안목에서 한국 내에서 토지를 구입하여 직접 경영을 통해 쌀을 확보하는 대책을 강구했지만,0507)일제의 토지침탈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참고된다.
李在茂,<いわゆる≪日韓倂合≫=≪强占≫前における日本帝國主義による朝鮮植民地化の基礎的 諸指標>(≪社會科學硏究≫9-6, 1958).
김용섭,<고종조 왕실의 균전수도문제>(≪한국근대농업사연구≫하, 일조각, 1988).
최원규,<1900년대 일제의 토지권 침탈과 그 관리기구>(≪부대사학≫19, 1995).
조선내의 조건도 쌀무역의 활성화에 부응해 갔다. 상품화폐 유통경제가 발전해 가는 가운데 갑오개혁에서 조세 금납화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자 농민경제 전체가 그 영향권에 포섭되면서 쌀 상품화가 크게 진전되었던 것이다.0508)갑오개혁의 조세 금납화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참고된다.
오두환,<갑오개혁기의 부세 금납화에 관한 연구>(≪경제사학≫7, 1984).
왕현종,<한말(1894∼1904) 지세제도의 개혁과 성격>(≪한국사연구≫77, 1992).
이영호,≪1894∼1910년 지세제도연구≫(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이러한 경제적 조건은 지주들이 성장 발전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으며, 여기에 힘입어 특히 개항장 배후지의 지주들이 반사이익을 크게 얻고 있었다.0509)홍성찬,≪한국 근대농촌사회와 지주층≫(지식산업사, 1992)의 참고 문헌의 사례연구 참조. 여기에 예시된 지주들은 대부분 개항과 더불어 급격히 상승해 가는 전형적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들의 성장은 신분적 속성과 크게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토지소유를 늘려나가는 한편, 농업경영 방식의 전환을 시도하기도 했다. 강화도 김씨가의 성장과정이 이를 잘 보여준다.0510)김용섭,<강화 김씨가의 지주경영과 그 성쇠>(≪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 1992)에서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강화 김씨가는 개항기 쌀무역과 관련한 전형적인 성장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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