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5. 개항기 지주제와 농업경영
  • 2) 지주제의 유형과 동향

2) 지주제의 유형과 동향

 개항기 지주제는 조선 후기 지주제를 기본 토대로 재편 발전하고 있었다. 종전 지주제는 크게 병작지주와 병작과 家作을 겸영하는 경영지주로 구분된다.0526)조선 후기 지주제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참고된다.
김용섭,≪조선후기농업사연구(증보판)≫1(일조각, 1995).
김용섭,≪조선후기농업사연구(증보판)≫2(일조각, 1990).
허종호,≪조선 봉건말기 소작제연구≫, 1965.
이세영,<18·19세기 농촌사회의 계급구조>(≪동양학≫21, 1991).
김건태,≪16·18세기 양반지주층의 농업경영과 농민층의 동향≫(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병작제는 경작인이 독립 소경영을 하고 지주는 농업경영에서 분리된 채 경제외적 강제를 통해 지대만을 수취하는 형태였다. 병작지주는 주로 권력을 동반한 왕실을 비롯하여 양반·중인 등 중앙 권귀들로, 소유규모가 만 석, 천 석, 수백 석에 달하는 대지주들이 주류였다. 경영지주는 병작을 주로 하면서도 소유지의 일부를 지주가 직영하는 가작제를 겸영하는 존재로, 일반적으로 재지 양반지주들의 농업경영 형태였다. 따라서 경영의 성격은 상업적 목적보다는 양반으로서의 체모를 유지하는 자족적 성격이 강했다.0527)김용섭,<조선후기 양반층의 농업생산>(≪조선후기농업사연구(증보판)≫2, 1990) 참조.

 전통적으로 병작지주는 지주경영에서의 지대, 長利 혹은 甲利라는 고리대를 통해 부를 축적하여 토지를 집적해 갔다. 신분질서·향촌통제력 등 경제외적 강제가 지주경영의 유지와 확대에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다. 그러나 생산력과 상품화폐 유통경제가 발전하면서 지주제는 확대 발전의 전망과 동시에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신분제의 해체가 노골화되면서 이를 저지하려는 농민적 상품화를 지향하는 농민층의 도전도 그만큼 격렬해졌다. 拒納, 衍納 나아가 항조운동이 격심해지고, 몰락 농민층이 크게 증대하고 도적떼가 빈번히 출몰하는 등 지주경영에 어려움이 닥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개항 이후 더욱 증폭되어 갔다. 쌀무역이 확대되면서 지주의 재부축적 여건이 좋아진 반면, 이에 반대하는 농민운동도 농민항쟁·농민전쟁으로 양적 질적으로 확대 발전해 간 것이다. 농촌현실은 지주제의 발전과 농민몰락의 증대라는 현상과, 지주제의 정체와 농민경제의 안정화 운동이라는 모순된 현상이 중첩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경제가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강제로 편입되는 새로운 조건 아래 구래의 경영구조를 적극 탈피해 가면서 합리적 경영방식을 동원하여 쌀 상품화에 적극 참여한 지주나 부농층은 성장해 간 반면, 구래의 신분적 지배력을 상실했으면서도 여기에 의존한 종래의 경영방식을 묵수한 지주들은 농민적 상품화 세력의 강력한 도전을 받고 정체 혹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개항이라는 격변기에 대처하는 대응자세에 따라 지주들 스스로가 자기운명을 결정한 것이다.

 전자는 개항 무역을 적극 활용해 가는 상인 관료적 성격을 일신에 체현하며 경영변화를 시도한 지주이며, 후자는 반일·반개화 입장에서 중세적 질서를 묵수해 간 지주였다.0528)홍성찬,<한말 일제하의 지주제 연구>(≪동방학지≫49, 1985), 114∼115쪽;<한말 일제하의 지주제 연구>(≪동방학지≫53, 1986), 156∼170쪽. 전자의 유형에는 개항 전에 양반 관료 혹은 궁방의 중간관리인으로 상당한 규모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도 있었지만, 빈농 소상인에서 입신하여 대토지를 집적한 경우도 있었다.0529)장시원,≪일제하 대지주의 존재형태에 관한 연구≫(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그러한 예로는 홍성찬, 앞의 글(≪한국사연구≫33, 1982)가 참고된다. 이 점은 신분적, 관료적 지배력이 여전히 지주제의 유지와 발전에 중요한 요건이기는 했지만 유통경제에 대한 적응력이나 농업경영 능력이 더욱 결정적인 조건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시대의 변동 추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봉건적 성격을 간직한 후자의 유형에는 주자학으로 무장한 양반지주, 원격지의 부재지주, 그리고 궁방·서원·향교 등과 같은 봉건기관 지주들을 들 수 있다.0530)이러한 예로는 이영훈,<개항기 지주제의 일 존재형태와 그 정체적 위기의 실상>(≪경제사학≫9, 1985);<개항기 농촌사회 재편의 역사적 의의>(≪한국자본주의론≫, 한울, 1989);<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로의 이행과 특질>(≪제39회 전국역사학대회 발표요지≫, 1996). 그리고 최원규,<조선후기 서원전의 구조와 경영>(≪손보기박사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지식산업사, 1987)이 참고된다. 궁방전에서 농민의 성장 가능성을 예시한 논문으로는 왕현종,<19세기말 호남지역 지주제의 확대와 토지문제>(≪1894년 농민전쟁연구 1≫, 역사비평사, 1991)이 참고된다. 이들은 대체로 중세 해체기라는 조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여 지주경영의 성패를 좌우하는 지주의 경영능력 및 경작인과 舍音 등 지주지 관리자들을 장악하는데 여러 문제점을 노출시켜 재무구조를 악화시키고 있었다. 특히 농민이 사실상 소유권적 권리를 가진 일부 궁방전의 경우는 더욱 관리가 어려웠다. 이들의 성장과 유지를 가능하게 해 준 것은 경제외적 강제였으며, 이것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지대수입은 불안정성을 노출하면서 계속 감소경향을 보였다. 지주가 직접 농업경영권을 장악하지 못한 가운데 나타난 구조적 문제였다. 소유권과 경영권이 거의 완전히 분리된 상태에서 정율지대에 기생하는 지주가 이 문제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는 어려웠다. 지주들이 소유권의 절대성을 확보하여 토지권을 전일적으로 행사하지 못하는 만큼 경작권이나 마름 등의 관리권이 강화되는 상황의 반영으로 마름의 중간 작폐가 심해지고 작인들의 항조운동이 격발한 것이다. 여기에 휩쌓인 지주제는 정체 혹은 쇠퇴할 수 밖에 없었다.

 지주제는 세제의 도결화나 조세 금납화와 같은 부세제도의 변동에서도 영향을 받았다.0531)부세제도의 변동은 한국역사연구회,≪한국역사입문②≫, 537∼539쪽의 글 참조. 토지에 집중적으로 조세가 부과되는 도결화로 지세부담이 가중되자 지주들은 작인에 부담을 전가하여 이 문제를 해소하기도 했지만, 지주제 강화에 반하는 작용도 했다. 즉 이는 당장은 지주권의 강화를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 지주를 경영에서 더욱 배제하여 결과적으로 지주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경영에서 배제되어 기생적 성질을 가진 지주제는 봉건적 제 관계가 약화 소멸되면서 존립기반이 위태로울 수 밖에 없었다. 소유권적 권리가 경작권에 크게 위협을 받은 것이다. 조세 금납화도 조세납부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이해관계가 엇갈렸다. 조세 금납화는 종전 현물조세를 상품화하여 화폐로 납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관료가 조세를 현물로 거두어 상품화하여 납부하는 경우도 있지만, 조세부담 주체와 관련하여 지주적 상품화에 혹은 농민적 상품화에 기여했다.

 국교확대라는 새로운 경제환경에 맞추어 지주경영을 확대 성장시켜 간 지주들이 주목된다. 이들은 자기가 처한 조건을 적절히 활용하여 다양한 대책을 강구했지만, 우리는 이 중에서 구래의 전형적 경영형태인 병작 경영방식을 탈피하고 직영지 경영을 확대하는 등 경영방식의 전면적 개편을 통해 성장해 간 지주들을 특히 주목하고 싶다. 이들의 직영지 경영에는 예속적 노동력이나 임노동이 동원되었다. 농업환경의 변동과 작인의 저항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지주제의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이 방법이 유효했던 것이다.0532)이러한 직영지 경영의 사례연구로는 김용섭,<나주 이씨가의 지주경영의 성장과 변동>(≪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 1992)와 최원규,<한말 일제하의 농업경영에 관한 연구>(≪한국사연구≫50·51, 1985)가 참고가 된다.

 구래의 경영지주들이 동원한 노동력의 유형에는 다음의 종류가 있다. 대여지 경영에 동원되는 농민들은 지대납부 외에는 지주가와 무관한 독립 소경영을 하는 존재였던 반면, 직영지 경영에 동원되는 노동력은 지주가 보유한 노비나 고공, 호저집 노동력 등으로 지주가의 농업경영에 종속된 채 예속적 노동에 종사하는 존재였다.0533)조선 후기 직영지 경영을 하는 지주에 대한 연구로는 김용섭, 앞의 책,<조선후기 양반층의 농업생산>, 1990;이세영,<18·19세기 양반토호의 지주경영>(≪한국문화≫6, 1985)가 있다.

 19세기 신분제가 해체되면서 이들의 처지도 변동되었다. 전과 달리 지주의 예속관계를 벗어난 몰락농민들이 주류를 이룬 것이다. 이들은 단기 고공이나 일고처럼 양반 토호에 인신적 지배를 당하는 관계가 아닌 자유로운 임노동자였지만, 借地 借家하는 작인으로서 고역적 노동을 강요받는 존재이기도 했다.0534)토호의 행랑 등에 거주하는 협호는 행랑인·협방인·랑속·랑저로, 토호가 지어 준 독립가옥 즉 農幕에 거주하는 협호는 고직·농막인·묘직으로 불렸다. 이들은 종속소작인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총독부,≪조선의 소작관행≫상(1932, 816∼821쪽), (하) 속편(99∼111쪽)에 당시 실태가 조사되어 있다. 이들은 주로 지주가의 직영지 경영이나 연료채취, 퇴비제조 등에 동원되었다. 그 대신 반대급부로 소작지를 헐하게 경작하거나 지대를 면제받았으며, 농촌인구의 20∼30%정도로 적지 않은 비중을 점하였다.0535)협호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참고된다.
이영훈,<언양호적을 통해본 주호-협호관계와 호정의 운영상황->(≪조선후기사회경제사≫, 한길사, 1988).
박용숙,<18·19세기의 고공-경상도 언양현 호적의 분석->(≪부대사학≫7, 1983).
이들을 고용하는 경영지주는 병작지주와 달리 지주가 직접 농업경영에 종사한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경영형 지주로 자기 변신을 꾀하기도 했다. 이 때가 되면 이러한 형태의 경영방식이 이미 토호양반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부농경영을 하는 서민들도 지주제로 변신을 할 때는 이 제도를 도입하여 성장을 꾀하기도 했던 것이다.

 대여지와 직영지는 경영방식의 차이로 구분한 것이지만, 수확물의 사용처에도 차이가 있었다. 전통적으로 家作 직영지의 수확물은 지주가와 노복의 생활, 즉 가계운영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0536)이두순·박석두,≪한말 일제하 양반 소지주가의 농업경영≫(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93)과 이종범,<20세기초 자영(소)지주의 농업경영과 농민생활>(≪학림≫16, 1994)에 소개된 구례 유씨가의 자작경영은 1898년, 1899년의 경우 총 답 44두락과 전 5두락의 규모였다. 가작은 糧米冊의<流來家作1>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유씨가의 전통적인 농업경영 방식의 하나였다. 그리고 김병하,≪한국농업경영사연구≫(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에 소개된 전라도 부안의 황상익가는 146.8두락 중 45두락 31%가량을 직영했다. 그러나 쌀의 상품화의 진전, 특히 개항후 쌀무역이 확대되고 작인들의 항조운동이 격화되면서 가작경영도 시세변화에 대응하여 그 운영방식을 달리하고 있었다. 당시 지주는 쌀의 상품화에 최대의 목표를 두고 그 주축을 대여지 경영에 두었지만 직영지도 여기서 제외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두 방식을 적절히 활용하여 최대의 수익을 확보해 간 것이다. 대여지 경영이 어려울 때는 직영지를 늘려가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직영지를 축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항조운동과 같은 작인들의 저항이 발생하여 대여지 경영이 어려울 때 특히 이러한 양상을 보였다.

년도 총농지소유면적 자작지 년도 총농지소유면적 자작지
1872
1878
1882
1885
1889
1890
18-40-2
18-80-0
19-29-5
18-34-2
21-22-5
21-11-9
3-4-4
3-38-3
2-88-8
2-95-9
3-16-8
3-6-8
16.5
18
15
16.1
15
14.5
1893
1894
1895
1919
1929
 

21-44-0
21-44-0
36-32-3

 
4-85-8
6-40-2

2-59-7
11두락
 

29.9

7.1

 

<표 2>해남 윤씨가 직영지 규모 (단위:결-부-속)

*자료:최원규, 앞의 글,≪한국사연구≫50·51, 297쪽.

 해남 윤씨가의 농업경영에서 전형적인 예를 살펴 볼 수 있다.0537)최원규, 앞의 글(≪한국사연구≫50·51, 1985) 참조. 농민전쟁기를 전후한 시기에 대여지 경영을 축소하고 직영지 경영을 확대해 가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지주들은 지대 경감책이나 탈경 이작책만으로는 양자의 대립관계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게 되자, 직영지를 확대하여 작인 농민과의 대립을 피하고 소득도 늘릴 대책을 강구한 것이다. 구시대와 달리 소유와 경영을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지주경영의 구조조정을 시도한 것이다. 이 방식은 여러 사례연구에서 예시한 것처럼 당시 관행적 농업경영 방식의 하나였다. 봉건성과 근대성을 동시에 지닌 이러한 지주경영 방식의 추이는 지주권과 경작권의 힘의 역학관계 속에서 결정되었다. 직영지 경영은 일제하에 지주제가 강화되어 감에 따라 소멸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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