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5. 개항기 지주제와 농업경영
  • 3) 농업생산과 지대의 변화

3) 농업생산과 지대의 변화

 국교확대는 지주경영 내부의 변동도 초래했다. 理財에 밝은 지주들은 시장 경쟁력이 높은 양질의 쌀을 확보하기 위해 농업경영에 직접 개입을 시도했다. 우량품종의 재배강제, 적기수확, 적당한 건조 제조를 위한 감독, 정미가공업의 도입 등 생산과정에 개입하여 출하 쌀의 질을 높여 나가는 한편, 자금을 확보하여 미가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수익을 극대화시키는 작업을 시도했다. 그리고 수리시설을 확보하고 개간지를 확보해 가는 작업도 병행했다.0538)수리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참고된다.
이광린,≪이조수리사연구≫, 1961.
宮嶋博史,<李朝後期の農業水利>(≪東洋史硏究≫41-4, 1983).
최원규,<조선 후기 수리기구와 경영문제>(≪국사관논총≫39, 1992).
생산과 유통과정의 구조개편 작업을 추진한 것이다.

 이 작업은 조선 후기 지주제의 발달과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개항기에는 더욱 강도 높게 추진되었다. 특징적으로는 일본의 쌀 수출과 관련하여 경남 호남 등의 개항 배후지에서 왜도를 도입하여 품종을 교체하는 작업이 시도된 것을 들 수 있다. 부산 지역에서는 1890년 중반, 전남 학교와 함평은 1890년 전후, 나주·영산포부근은 1894·5년경, 부안·만경지방에서 전래되어 널리 퍼진 것은 1897년 이후였는데 10중 2∼3이 倭粗의 재배지역이었으며, 전주지방도 10중 4∼5의 비중을 보여 주고 있다. 이를 주도하는 계층은 일본품종이라는 점에서 지주·부농 등 상업적 농업을 주도하는 계층이었을 것이다.0539)하원호, 앞의 책, 299∼301쪽.

 지대징수 방식도 지역에 따라 변화를 보였다. 종래 지주경영에서는 주로 타조로 지대를 받았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18세기말·19세기 주류적 형태였던 타조제는 점차 도조제로의 전환 경향이 증가해 갔다. 賭地制는 풍흉과 비교적 관계없이 지대가 일정하기 때문에 흉년이 들 경우에는 경작자의 타격이 컸기 때문에 농작이 비교적 안정적인 곳에서 실시되었다. 특히 한전에서는 병작 경영이 곤란하여 도지제의 발전이 현저했다.

 도지제로의 변화 요인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변화의 기본 토대는 생산력 발전에 있었지만, 지주경영 방식에 따라 변화 수준에 차이가 있었다. 특히 궁방같은 부재지주지에서 많이 발생했다. 궁방에서는 안정적으로 재정을 확보해야 한다는 특수성과 부재지주로서 경영의 편리성 때문에 도지제를 선택하는 경향이 많았던 것이다. 지대수취의 번잡성과 항조운동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서도 도지제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것이 농촌사회의 관행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0540)도지제 변동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참고된다.
허종호, 앞의 책, 1965.
김용섭,<한말에 있어서의 중답주와 역둔토지주제>(≪한국근대농업사연구≫하, 1988).
이영호,<18·19세기 지대형태의 변화와 농업경영의 변동>(≪한국사론≫11, 1984).
도진순,<19세기 궁장토에서의 중답주와 항조>(≪한국사론≫13, 1985).
이윤갑,≪한국근대의 상업적 농업연구≫(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이러한 와중에 지주는 더 많은 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도지를 혁파하고 병작반수의 타조제로 다시 역전을 시도하기도 했다. 도지제가 관행으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지주와 경작자가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대립 갈등했다. 그 이유는 통상 도조가 타조에 비해 지대가 저렴하고 경작기간이 보장되어 지주가 마음대로 移作도 할 수 없는, 경작자에 유리한 경영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지제가 반드시 지주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것만은 아니었다. 타조와 달리 도지제에서는 종자와 지세를 경작자가 부담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작인에 더 많은 부담을 강요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결과로 지대는 타조제→도지제→타조제→도지제라는 반복된 변화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는 도지제 이외에 지대수취방법에 여러 변화가 일어났다. 도지제보다 지대가 낮은 정액 원정제가 실시되었으며0541)≪筆岩書院誌≫권 3, 散文 稟報, 고종 경자 윤 8월.<院畓九斗落在於西二麥洞 而以賭租言之 可捧六石 而本孫渠自元定四斗耕作 且四斗落在於邑東月坪 而以賭租言之可捧二石 而本孫渠自元定十五斗耕作 卽院任之力 皆未能移時作 且未能破元定 盖年有久矣 前敢緣由稟報特爲處分爲臥乎事>. 지대의 운반문제, 作錢과정에서의 폐단 문제, 그리고 지주측의 일정한 화폐수요를 반영한 作錢上納도 실시되었다. 나아가 정액 화폐제인 도전제도 나타나고 있었다.0542)허종호, 앞의 책, 1965와 홍희유,<18세기중엽 화폐지대의 발생>(≪역사과학≫, 1966. 4) 참조. 이러한 추세 속에서 1880년대에는 타조법에서 도조법으로의 전환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곳도 있었다.0543)이윤갑, 앞의 글, 1993, 111쪽. 그리고 홍성찬, 앞의 글(≪동방학지≫49, 1985, 123쪽)에 예시된 原定이나 元定은 1909∼1910년의 예이지만, 이 때는 전반적으로 지주제가 강화되던 시기라는 점에서 도조제의 강인성을 보여주는 적당한 사례라 생각된다.

 도지제는 지주의 경작강제를 배제하고 작인이 경영권을 강화시켜 간 표현물이었다. 도지제에서 작인에게 지세를 부담시킨 것은 소유권을 배제하고 경작권이 국가와 직접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국가 재정담당자로서 작인의 권리가 신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때 작인은 경영의 독립성을 획득한 생산력 증가의 주체로서 농민적 상품생산을 주도해 갈 수 있었다. 이를 주도한 계층은 그 중에서도 생산력적 조건이 우위에 있는 이점을 살려 차지경쟁에서 승리한 부농이었으며, 이들은 일고 노동자를 고용해 廣作을 하고 상업적 농업을 통해 부농경영을 해 갔다. 그러나 차지경영의 확대는 동시에 다른 농민을 몰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농민층 분해를 촉진시키고 이들의 반발을 초래하기도 했다.0544)러일전쟁 이후 일본인 지주들의 한국 농촌지배가 강화되면서 집수제가 도입되는 등 지주들의 농민장악이 강화되기에 이르렀다. 이윤갑, 앞의 글, 1993, 105∼114쪽.

 경작권의 강화와는 반대로 지주제의 확대 강화 경향도 동시에 보였다. 구래의 지주와 달리 지주가 농업경영에 직접 개입하여 수입을 극대화시켜 가는 방향이었다. 일반 민전지주제, 그 중에서도 개항장 배후지에서 이러한 경향이 현저했지만, 왕실에서도 소유권이 약화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지주경영을 확대 강화하는 조치를 강구했다. 궁방전의 경우는 소유권적 권리가 있는 유토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유토에는 궁방(지주)↔작인의 구조, 궁방(수조자, 지주)↔중답주(中畓主) 도장(導掌 지주)↔작인의 구조로 된 것이 있지만, 어느 경우에도 경영이 불안정하여 지대가 감소하는 등 현실적으로 지주경영에 많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궁방은 갑오개혁 무렵부터 이를 타개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강구했다.

 첫째 소유권을 확보하고 확인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배타적 소유권자로서의 위치를 확실히 하기 위해 역둔토 사검사업을 실시하여 소유권 확인 작업을 벌리는 한편, 개간규정을 이용하여 소유지를 확대시키는 조치도 강구했다. 여기서 개간자인 왕실과 사실상의 소유자인 농민이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둘째 합법적으로 권리가 보장되었던 중답주권을 빼앗아 중답주를 제거하고 지대수입을 증가시켰다. 셋째 작인 파악을 강화하고 지대를 인상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수탈 강화라는 측면도 있지만, 민전 도지제처럼 작인의 경작권을 보장해 주는 대신 지대수취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였다. 궁방의 일차적 목표는 배타적 소유권의 확보에 있었고 이를 얻는 대가로 경작권을 일정하게 보장해 준 것이었다.0545)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참고된다.
김용섭,<한말에 있어서의 중답주와 역둔토지주제>, 앞의 책(하), 1988.
김용섭,<고종조 왕실의 균전수도문제>, 앞의 책(하), 1988.
배영순,<한말 역둔토 조사에 있어서 소유권 분쟁>(≪한국사연구≫25, 1979).
박진태,≪한말 역둔토조사의 역사적 성격 연구≫(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최원규,<한말 일제초기 일제의 토지권 인식과 그 정리방향>(≪한국근현대의 민족문제와 신국가건설≫, 1997).

 지주층은 농민전쟁에서 승리를 획득했으나 작인의 견제와 저항, 그리고 외압에 직면하여 그 과실을 완전히 획득하지 못하고 작인들과 일정한 타협 속에서 이 같은 길을 택한 것이다. 여전히 부농적 발전의 길이 아직 열려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지주제도 부농적 경영방식을 도입할 때 성장의 가능성이 더 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은 지주가 사례연구에서 보듯 지주들이 농민전쟁이나 의병전쟁에서 작인들과 대립 갈등하면서도 작인과 적절히 타협하는 가운데 대응책을 강구하여 일정한 성장을 보인 데서도 알 수 있다.

 한편 민전 지주들의 경우 작인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직영지 경영을 확대하거나 분쟁이 발생한 지주지를 방매하는 등의 방법으로 지주제를 일부 포기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지주제를 유지하는 방향에서 해결책을 강구했다. 일부 지주들은 지대 수취를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작인에 대한 강경책을 시도했다. 차지 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을 이용해서 경작권을 뺏는 이작을 통해 작인을 통제하는 방안을 강구한 것이다. 경작권 박탈은 작인의 생존권을 뺏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쟁송이 벌어질 경우 지주는 臨農奪耕이 아닌 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奪耕移作을 하려 하나 작인의 항쟁이 두려워 이작을 하지 못함은 물론 지대를 받지 못하는 곤경에 빠지기도 했다.0546)김용섭,<18·19세기의 농업실정과 새로운 농업경영론>, 앞의 책(상), 1988, 66쪽. 지주의 경영강화책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대립을 완화하는 방향에서 지주경영책을 마련한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 한 예를 서울 지주가의≪勸農節目≫에서 살펴 볼 수 있다.0547)≪勸農節目≫(奎古 No. 163507의 1). 권농절목은 작인에게 일정한 양보를 전제로 장토를 경영하여 수익을 확보하려는 지주의 경영개선책이었다. 여기서는 이작에 관한 사항이 15개항 중 8개조를 차지한 데서 보듯, 작인들의 대지주 투쟁의 원인이 移作에 있다고 보고 상호 대립을 완화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우선 舍音이나 監打官의 請囑을 받아 이작을 하는 행위를 금지하여 작인들로부터 지극한 원한을 사지 말도록 주의를 환기시킨 뒤 작인 선정의 원칙을 말하고 있다. 농사에 게으르고 항조하는 자와 협잡 타조하는 자는 탈경 이작시켜 극력 제거하도록 하고, 영농과 상납에 근실한 농민은 계속 차경시키도록 했다. 그리고 이작은 농업경영과 관련하여 농민들의 농지를 재조정하여 거주지 부근 농지로 옮기는 등 작인들의 생산의욕을 자극하고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범위 내에서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 가능한 한 부농층을 작인으로 끌어 들이려는 방안이라고 하겠다.0548)김용섭, 위의 글(≪위 책≫상, 1988), 66∼7쪽.

 지주제를 해체하지 않는 한 대립은 경작권의 운영을 둘러싸고 전개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현재의 경작자를 가능한 한 포괄하여 대립을 해소하는 방안도 제시되었다. 지주와 작인이 義契 같은 契를 함께 조직하여 상하간의 의리를 강조하면서 농민의 저항을 방지하는 방안이 그 일환으로 제기되기도 했다.0549)최원규, 앞의 글(≪한국사연구≫50·51, 1985), 282∼286쪽.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주측이 지주로서 양보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인<均分而作>하여 이들이 살아가도록 하는 방안이 제시되어 실천에 옮겨지기도 했다.0550)홍성찬, 앞의 글(≪동방학지≫53, 1986), 162쪽. 1894년 농민전쟁 때 농민군은 전쟁과정에서 지주의 도조나 전답문서를 몰수하는 등 지주경영에 저항하면서도 정부 지배층이 제시한 이 안에 따라 토지의 평균분작을 타협안으로 도출한 것이다.0551)신용하,≪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일조각, 1993), 27∼281·373∼385쪽. 이 안은 지주의 소유권은 용인하되 경영권은 농민에 맡겨 농민경제를 안정화시키는 방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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