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1. 동학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 1) 개항 이후 미곡수출의 증대와 지주경영의 강화

1) 개항 이후 미곡수출의 증대와 지주경영의 강화

 1876년 우리 나라가 경험한 개항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 세계 후진 제지역에서 보편적으로 경험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개항은 이러한 세계사적 보편성과 더불어 한국사적 특수성도 지닌 것이었다. 한국사적 특수성은 산업혁명도 달성하지 못한 일본에 의해 개항됐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일본은 歐美선진국가에서 직물류의 자본제 상품을 수입하여 한국에 수출하는 중개무역을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에 대한 개항은 일본에 대한 종속만이 아닌, 구미선진국가를 중심국으로 하는 세계자본주의 시장체제에의 일본을 매개로 한 종속이었던 것이다.0553)정창렬,<韓末 變革運動의 政治·經濟的 性格>(≪韓國民族主義論≫, 창작과 비평사, 1982). 따라서 개항을 계기로 우리 나라는 후진국가인 일본과 청나라의 압력 뿐만 아니라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압력을 이중적으로 받았다. 특히 자본주의 발달이 미숙한 일본과 청에 의해 가해진 외압은 자본주의적 논리가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외압을 통해 관철되는 원시적 축적형 외압이었다.0554)梶村秀樹,<동아시아 지역에서의 帝國主義體制로의 이행>(≪韓國近代經濟史硏究≫, 사계절, 1983).

 이러한 이중의 외압은 구체적으로 일본과 청을 비롯한 구미열강과의 불평등조약 체결로 구체화되었다. 朝日修好條約에서 관세자주권의 상실, 일본화폐의 유통권 허용, 곡물수출의 허용이 이루어졌고, 1882년 朝美修好條約·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과 그 이듬해 수정체결 된 朝英條約을 계기로 서울, 양화진의 개방과 내지통상권이 허용됨으로써 불평등조약체제하의 우리 나라의 시장은 서울은 물론 내륙지방까지 외국자본에 전면 개방되었던 것이다.0555)김경태,<丙子開港과 不平等條約關係의 構造>(≪梨大史苑≫11, 1973).

 이와 같은 불평등조약체제의 성립은 미숙하나마 국내적 분업체제에 의해 형성되었던 종전의 상품생산과 유통구조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하였다. 이러한 변화 가운데 가장 심각한 변화는 일본에 대한 미곡유출로 야기된 농업환경의 변화였다. 개항 이전 조선사회는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농업에서의 상품생산이 성장하고 있었으며, 농민적 상품화폐경제도 확대되는 추세였다. 특히 지주경영은 19세기 중반 이후 광범위한 농민항쟁으로 말미암아 정체되는 추세에 있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곡물수출의 증대와 이로 말미암은 미곡가격의 상승은 위기에 처한 지주제가 강화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인천의 개항장을 끼고 있는 강화지역의 지주층들은 미곡무역에서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고 토지에 투자하여 대지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0556)김용섭,<江華島 金氏家의 秋收記를 통해서 본 地主經營>(≪東亞文化≫11, 1972).
홍성찬,<韓末 日帝下의 地主制硏究-江華 洪氏家의 秋收記와 帳冊分析을 중심으로->(≪韓國史硏究≫33, 1981).
호남지역에서도 금강, 영산강을 중심으로 한 포구와 내륙장시로 연결되는 시장권을 통하여 미곡의 상품화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지주제가 발전하였다.0557)왕현종,<19세기말 호남지역 지주제의 확대와 토지문제>(≪1894년 농민전쟁연구 1-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역사비평사, 1991). 지주층은 직영지의 확대, 소작경영의 강화, 그리고 精米를 통한 상품화과정을 직접 장악하는 방식으로 지주제를 강화하였다. 지주의 직영지경영은 신분적 관계에서 벗어난 노비·雇工·挾戶層 혹은 임노동층을 노동력으로 동원하였으며, 소작지 경영에서도 빈번한 作人교체와 마름에 대한 통제강화를 통해 지대수입을 증대시켰다. 지주층은 종전과 달리 증대된 소작료 등을 시장에 판매하거나, 또는 고리대나 상업투자를 통해 화폐자본을 축적하였고, 이를 다시 토지에 투자함으로써 대규모 토지를 집적하여 대지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소작농민층은 지주층의 직영지 확대와 소작경영강화로 인해 점차 몰락하여 갔다. 차지규모도 10두락 내지 5두락 정도로 열악해졌으며, 소작권의 잦은 이동으로 안정적인 생계마저도 위협받았던 것이다.

 한편 미곡유출로 인해 미곡의 상품화가 진전되고, 기선 등의 근대적 운송수단의 도입을 기반으로 사회적 분업이 발전하면서 상업적 농업은 활성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부농경영도 성장하였다. 부농경영의 성장으로 농촌의 소빈농층들은 농업경영에서 점차 驅逐되고 임노동자로 몰락되어 갔다.0558)이윤갑,<개항∼1894년 농민적 상품생산의 발전과 갑오농민전쟁-경북지역의 농업변동을 중심으로->(≪계명사학≫2, 1991). 그러나 부농경영의 성장은 지주제 강화와 대립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농민전쟁 직전에 이르러서는 상농층, 특히 부농의 경영도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곡물수출은 곡물의 상품화를 촉진하면서 경작면적의 증대와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 부농성장의 가능성을 열어 놓기는 했지만, 농민경리에서의 잉여는 대부분 외국상인과 지주층에 의해 수탈당했기 때문에 결국 부농경영도 위기에 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0559)하원호,<개항후의 곡가변동에 대하여(1876∼1894)>(≪이우성교수정년논총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하)≫, 창작과비평사, 1990). 개항 이후 부농경영의 추이에 대해서는 학계의 견해가 일치되고 있지 않다. 대체로 미곡상품화의 진전에 따른 부농경영의 성장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 가능성이 농민전쟁기까지 지속된다는 견해와 1890년을 기점으로 부농성장이 억제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대립되고 있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농민전쟁의 주체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안의 하나이다. 즉 1890년대를 기점으로 부농성장이 저지, 억제되고 있다는 하원호의 입장은 농민전쟁의 참여집단으로 부농층을 상정하는 반면, 부농성장이 농민전쟁기까지 계속 유지되었다고 보는 이윤갑의 견해는 부농을 외세와 봉건지배세력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층으로 설정하고, 이들은 농민전쟁기에 소빈농층의 공격대상이 되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농성장추이에 대한 논란은 하원호,≪韓國近代經濟史硏究≫(신서원, 1998) 참조.

 이와 같이 자본주의 시장체제에의 편입으로 결과한 농업환경의 변화는 농촌사회의 급속한 분해, 재편성을 초래하였다. 지주층은 경제적 이익을 획득하였지만, 소빈농층은 시장관계로의 강제적 편입에 따라 농민적 잉여의 유출을 강요당함으로써 전반적으로 몰락하여 갔다. 지주적 상품생산은 성장하고 농민적 상품생산은 쇠퇴하였다. 이렇듯 세계자본주의 시장체제에의 강제적 편입은 민족적 모순 뿐만 아니라 봉건적 생산관계인 지주-소작인간의 모순도 심화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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