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1. 동학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 2) 일·청상의 침투와 제국주의적 상품유통구조의 창출

2) 일·청상의 침투와 제국주의적 상품유통구조의 창출

 개항 이후 국내적 분업의 발달과 개항장을 중심으로 한 대외무역의 확대로 상품유통경제도 성장하였다. 이러한 상품유통경제의 성장은 조선 후기 이래 성장하던 농민적 상품화폐경제가 활성화된 결과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상품유통구조가 새로 창출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제국주의적 상품유통구조는 조선의 시장을 제국주의 국가의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지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창출되었다. 이러한 유통구조는 1882년 漢城開棧權과 내지통상권의 허용으로 더욱 확대될 수 있었으며, 이를 개척한 상인들은 일본 상인과 청국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영국제 섬유제품을 중심으로 한 중개무역을 전개했는데, 이들의 무역은 국내의 물가표준이 정해지지 않은 단계를 이용한 기만적인 약탈무역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0560)하원호,≪韓國近代經濟史硏究≫(신서원, 1998) 참조. 이들은 중개무역에서 나아가 시전상인의 전매상품인 백목면·명태 등 국내물품까지 취급하였으며, 기선과 같은 근대적 수송수단을 매개로 조선의 연안유통권을 장악하고 이를 토대로 내륙장시 시장권까지 침투하여 국내 선상들의 취급품목인 북어·다시마 등의 상권에 침투하기도 하였다.0561)나애자,<韓國近代海運業史硏究≫(국학자료원, 1998). 청과 일상은 수출입품만 아니라 국산품의 유통과정까지 침투해 선상과 행상, 시전상인 등 조선상인의 상권을 침탈하면서 제국주의적 상품유통구조를 구축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청·일상은 국내 상인보다는 취급상품이 유사한 청·일상인 사이에 훨씬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1885년에서 1894년까지의 무역추이를 보면 절대액에서는 일본과의 교역액이 높았지만, 청상은 주로 수출무역에 중점을 두었으나 일상은 자본재상품의 수출과 더불어 미곡수입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조선은 청나라와의 교역에서는 항상 적자를 면치 못했으며, 일본과는 흑자를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0562)吉野誠,<朝鮮開國後の穀物輸出につい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12, 1975). 이러한 것은 일본상인에게 있어 조선의 시장이 상품시장 뿐만 아니라 자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한 원료공급지로서 역할이 중시되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주의적 상품유통구조는 1880년 1월 원산항, 1883년 1월 인천항의 개항을 계기로 나타난 개항장 중심의 유통권 형성으로 구조화되었다. 개항장 중심의 유통권도 제국주의적 유통구조의 확대에 따라 변동하였다. 1890년대를 기점으로 곡물수출의 중심지가 종전의 부산항에서 인천항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는 인천이 서울과 인접하고 있다는 지정학적 이점이 작용한 것으로서 제국주의적 상품유통구조가 전통적인 서울중심의 시장권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0563)이헌창,≪開港期 市場構造와 그 變化에 대한 연구≫(서울대 경제학과 박사학위논문, 1990).

 국내에 제국주의적 상품유통권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조선상인들도 이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의 특권상인이었던 어물전이나 백목전 등의 시전상인은 외국상인이 서울에 직접 점포를 설치하여 시전상인의 상권을 침해하자 외국상인의 점포철수를 요구하는 동맹철시를 시도하였으며,0564)김정기,<1890년 서울상인의 撤市同盟罷業과 시위투쟁>(≪韓國史硏究≫67, 1989). 선박을 통해 전국의 해상유통권을 장악하여 조선 후기 강력한 상인으로 성장하였던 경강상인도 서울을 중심으로 상권을 유지했지만 일본기선의 세곡운송으로 타격을 입었다. 다만 개성상인과 평양상인들은 종래의 상업조직을 이용해 활동영역을 수출입 유통업으로 확대하는 방식 등을 통해 서울 이북지방에서 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0565)이병천,≪開港期 外國商人의 侵入과 韓國商人의 對應≫(서울대 경제학과 박사학위논문, 1985). 또한 지방 포구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포구주인이나 여각, 객주층들은 외국상인들이 근대적 기선을 이용하여 포구시장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점차 이들 상인에 종속되면서 제국주의적 상품화폐경제에 기생하는 층으로 전락하여 갔다.0566)고동환,<18·19세기 外方浦口의 商品流通發達>(≪韓國史論≫12, 1985).

 제국주의적 상품유통권의 핵심인 개항장에는 개항장 객주가 성장하였다. 객주는 원래 상품유통을 중개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봉건권력과 결탁하여 독점과 특권을 누렸던 상인이었는데, 개항장 무역이 활성화됨에 따라 이들은 상회·상의소 등의 객주조합을 결성하여 정부에 대해 상업세를 부담하는 대가로 특권상인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1880년대 말부터 외국상인의 내지행상이 활발해지면서 개항장 객주의 상권도 위축되었다. 이에 정부는 객주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인천항에 개항장의 상품유통을 독점하는 25객주 전관제를 실시하였지만 외국공사의 항의와 소상인들의 반발로 25객주 전관제는 곧 철폐되었다.0567)한우근,≪韓國開港期의 商業硏究≫(일조각, 1970). 이와 같이 제국주의적 상품유통구조의 창출과정에서 시전상인이나 경강상인 등 전통적 대상인의 상권은 점차 위축되었고, 포구시장권을 장악한 객주·여각층들은 이들 외국상인의 하부에 기생하는 상인층으로 전락하였다. 다만 내륙 장시시장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개성상인들은 외국상인과 경쟁하면서 제한적이나마 상권을 유지하거나 성장할 수 있었다.

 한편 개항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으로 농민경리도 본격적으로 화폐경제에 편입되고 있었다. 예컨대 1876∼1894년간 조선에서 소비된 면포의 반 정도는 지역내에서 자급하고, 나머지 반 정도를 자본제상품이나 토착면포의 형태로 외국이나 다른 지역에서 완제품을 구입하고 있을 정도로 기본 의류인 면포의 상품화율이 높았던 것이다. 이처럼 상품화폐경제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화폐유통량 역시 확대되고 있었다. 정부는 화폐유통량의 증대와 재정악화를 보전하려는 의도에서 1883년부터 명목가치는 5배이나 실질가치는 2∼3배에 불과한 當五錢을 발행하였다. 그 결과 전국은 당오전 유통지역과 당일전 유통지역으로 구분되었다. 당오전 유통권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지역·황해도·충청도의 대부분지역·강원도 연해지방 등에서 통용되었고, 그 외의 지역에서는 엽전인 당일전이 통용되었다. 한편 1891년부터는 當一錢 가치의 1/3에 불과한 平壤錢이 발행되었다. 이 평양전은 당일전 유통권인 원산·부산 등지까지 침투하여 당일전의 가치를 하락시켰다. 이와 같은 악화남발로 인하여 1892년경에는 당일전·당오전·평양전이 동일한 가치로 통용되게 되었다. 엽전시세 역시 1883년부터 1893년까지의 10년 사이에 3/5수준으로 폭락하였다. 특히 개항 이후 일본화폐의 유통권이 인정됨으로써 개항장을 중심으로 화폐유통권이 재편되었고, 나아가 일본화폐에 의한 조선화폐가 평가되는 엽전시세도 성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출곡물가격을 엽전으로 지급하던 일본상인이 엄청난 폭리를 취하였던 반면, 화폐가치의 하락으로 물가가 폭등함으로써 곡물을 구입하여 생계를 해결하던 도시와 농촌 임노동자, 하급군인, 관리 등의 생계가 곤란해졌으며 정부물자를 조달하는 공인층도 몰락위기에 처하였다. 정부의 악화남발 때문에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초래되었으며, 이는 하층민중의 생계를 압박하고 일본화폐의 유통확대로 일본금융자본에 대한 조선상인의 종속을 심화시켰던 것이다.0568)도면회,<화폐유통구조의 변화와 일본금융기관의 침투>(≪1894년 농민전쟁연구 1-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역사비평사, 1991). 봉건적 상업체제 아래서 제국주의적 상품유통구조가 창출되면서 소상인과 소상품생산자의 경제적 성장은 저지, 억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품화폐경제는 봉건지배층의 수탈을 강화시키는 원인으로도 작용하였기 때문에, 국내에 민족적 모순 뿐만 아니라 봉건적 모순도 더욱 격화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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