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1. 동학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 3) 부세운영의 변화와 농민몰락의 심화

3) 부세운영의 변화와 농민몰락의 심화

 조선 후기 부세제도는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면 田政·軍政·還政이라는 三政體制로 확립되었다. 이러한 삼정체제는 지주제, 신분제, 군현제와 현물경제체제를 근간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전정에서의 比摠制, 군정에서의 軍摠制, 환곡에서의 還摠制 등의 군현단위의 총액제의 방식으로 운영되었다.0569)김용섭,<朝鮮後期 賦稅制度 釐正策>(≪증보판 韓國近代農業史硏究 상≫, 일조각, 1988). 이러한 총액제적 부세운영은 국가가 토지와 인민을 일일이 파악하지 않고 군현단위로 미리 정해진 수취총액을 담세자의 증감과 관계없이 공동부담케하는 제도였다. 신분제의 변동과 농민층 분해에 따라 담세자가 줄어 들고 담세능력이 약화되는 사회변동에 대응하여 중앙정부가 군현단위로 일정한 액수의 조세량을 미리 정해 줌으로써 조세수취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의도에서 시행된 것이다. 그러나 총액제적 부세운영은 조세수취업무를 군현의 수령과 향촌지배세력에게 전적으로 위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상호보장적 관계속에서 농민에 대한 무제한적 수탈이 가능하였다. 때문에 부농이나 서민지주들은 신분상승 등의 방법으로 조세부담에서 면제되었고, 이들이 부담해야 할 조세는 몰락해 가던 빈농층에게 전가되어 조세불균이 심화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면 하층농민들도 더 이상 가혹한 조세수탈을 감내할 수 없어서 대부분 유리와 도망의 방법으로 향촌사회를 떠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군현의 수령들도 이들에게 무한정의 수탈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군현에서는 군역에서의 洞布制·軍役田과 환곡에서의 里還·結還 등 면리단위의 공동납 관행으로 할당된 조세를 마련하고 있었다.0570)고동환,<19세기 賦稅運營의 변화와 呈訴運動>(≪국사관논총≫43, 1993). 이와 같은 공동납 관행으로도 부족한 군포와 환곡 등은 대부분 토지에 부과하여 보충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대부분의 조세는 地稅化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조세의 지세화는 신분제의 붕괴와 함께 토지생산력의 발전이라는 사회현상을 반영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향촌단위에서 신분제에 의거한 조세운영을 포기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0571)고동환,<19세기 부세운영의 변화와 그 성격>(≪1894년 농민전쟁연구 1-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역사비평사, 1991).

 이와 더불어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반영하여 조세의 금납지역도 확대되고 있었다. 특히 大同의 布木 징수지역은 19세기 중반에 가면 대부분 화폐납으로 전환되었고 군포도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代錢納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정부의 재정운영의 기조는 현물을 기초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금납화가 공인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농민들에게 화폐로 조세를 거두고 다시 현물을 구매하여 조세를 상납하는 稅穀防納이 성행하였다.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으로 인하여 환곡에서도 화폐경제를 이용한 수탈이 가중되어 갔다. 移貿·加作·錢還 등은 바로 이러한 방식의 농민수탈이었다. 이와 같은 세곡방납과 환곡수탈은 국가적 상품화폐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한 서리나 수령 등이 농민의 경리를 완전히 화폐화할 수 없었던 상품화폐경제의 미숙성을 이용하여 자행하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농민층은 더욱 몰락하고 있었다. 이처럼 조세의 화폐납의 진전 뿐만 아니라 부세운영의 화폐화가 진전되고 조세의 지세화가 진행되면서 새롭게 나타나는 부세운영방식이 도결제였다.0572)안병욱,<賦稅의 都結化와 봉건적 수취체제의 해체 1>(≪국사관논총≫7, 1990).

 도결제하에서는 모든 조세가 한꺼번에 화폐로 수납되었으며, 기존 작부제하의 민간조세 수취기구가 부정되고 관에서 조세수취기구를 장악하여 부세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초반 등장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중엽 무렵에는 대부분 군현에서 보편적으로 실시되었던 도결제는 결국 우리 나라 봉건적 조세수취제도의 최종적인 표현임과 더불어 근대적인 지세제도로 전화하는 과도적인 조세형태였다. 봉건적인 조세제도가 신분제, 지주제, 그리고 자연경제를 기초로 하여 각 단계의 생산력과 국가권력의 향촌사회에 대한 지배력에 조응하여 만들어진다고 볼 때, 도결제는 신분제의 붕괴, 지주제의 확대발전과 토지생산성의 증가, 그리고 상품화폐경제의 농촌경리에의 침투를 배경으로 하여 나타난 조세수취형태였다. 또한 도결제는 봉건국가의 향촌민에 대한 지배력이 향촌사회의 유력자를 매개로 하지 않고 곧바로 관료기구만을 매개로 장악되어 가는 국가공권력이 인민에 대한 개별적 지배력의 강화과정에서 나타난 조세수취형태이기도 하다. 이는 전반적으로는 근대적인 조세수취를 지향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봉건적 틀을 벗어나지는 못한 것이었다. 아직까지도 봉건적 조세를 부과, 수취하는 주요한 경제제도가 봉건적인 지주전호제로 고정화되고 있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조세수취의 기준이 각 향촌공동체 내에서의 세력관계의 강약에 따라 이루어지기 쉬운 結負制에 여전히 기초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였다. 즉 농업생산력의 발전으로 인한 토지생산성의 차별성이 약화되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세력의 강약에 따른 조세수취의 불균등성이 유지됨으로써 봉건적 조세수취의 한 본질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도결제는 19세기 이후 조세의 지세화와 금납화의 최종적인 도달점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므로 19세기 부세운영변화의 제도적 성격은 점차 봉건적 특권에 따른 부세불균을 지양하면서 균등한 조세부과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결제하에서도 여전히 총액제와 공동납원칙은 고수되고 있었다. 때문에 결가의 고액화현상은 빈농층의 유리를 막을 수 없었고, 나아가 빈농층의 유리로 발생한 조세부족분을 손쉽게 요호부민들에게 전가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각종 특권을 이용하여 조세부담에서 면제되었던 부농들도 결국에는 부세수탈의 주요한 대상으로 변해 갔던 것이다. 이는 조세의 토지집중과 상품화폐경제에 기초한 부세운영과정에서 신분적 특권이 더 이상 작용하지 않게 된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특히 개항이후 물가가 급등함에 따라 농민부담은 더욱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결가의 고액화는 소빈농층의 재생산기반을 완전히 붕괴시켰을 뿐만 아니라, 부농층에게도 더 이상 성장의 여지를 없애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러한 조세불균의 심화는 관과 민의 관계를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지주와 전호, 부농과 빈농사이의 계급대립을 첨예화시켰다. 또한 도결제는 각 군현단위로 달랐던 부세의 운영방식을 단일한 체계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는 결국 농민항쟁에서 군현단위의 분산고립성을 극복하고 전국적인 연대하에서 대국가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을 만든 것이었다.0573)고동환,<19세기 부세운영의 변화와 그 성격>(≪1894년 농민전쟁연구 1-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역사비평사, 1991).

 농민전쟁 당시 농민들은 폐정개혁안을 통해 대원군의 섭정 요구와 같은 정치적 요구나 탐관오리의 침학을 제거하는 요구와 더불어 삼정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주된 요구로 내걸고 있었다. 농민들의 부세수탈의 시정요구의 내용은 대체로 軍錢의 濫徵을 금지하고, 洞布錢의 정액화를 요구하였고, 結錢의 매년 증액금지, 臥還의 폐지, 陳結加稅의 금지, 稅米의 無名加捧금지, 각종 烟役의 疊徵을 금지할 것 등 다양하였다.0574)한우근,≪東學亂 起因에 관한 硏究-社會的 背景과 三政의 紊亂을 중심으로-≫(서울대 출판부, 1971). 19세기 후반 향촌사회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부세수탈의 문제는 단순히 봉건기강의 해이에서 비롯된 부세운영상의 문제라기 보다는 중세사회 해체기에 신분제의 동요와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에서 비롯된 구조상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저항은 빈농을 주력으로 하고 부농 그리고 중소지주층까지 포함한 세력들이 서리, 영주인층, 수령과 감사 등 국가적 상품화폐경제를 장악한 세력에 대한 투쟁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부세운영에 관한 한 지주-소작관계의 모순이 전면화되기 보다는 국가적 상품화폐경제를 둘러싼 대립관계가 보다 전면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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