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1. 동학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 4) 향촌사회의 변동과 농민항쟁의 고양

4) 향촌사회의 변동과 농민항쟁의 고양

 조선 후기 향촌사회의 지배구조였던 사족지배체제는 18세기 이후 점차 동요, 해체되고 수령-서리로 이어지는 공적 권력이 지배의 주체로 성장하였다. 종전 수령과 사족간의 견제와 협조를 통해 향촌민을 지배하던 관행이 점차 사라지고, 재지양반이 장악한 향청은 수령권에 철저히 종속되었던 것이다. 수령권에 의한 향촌장악과정에서 일부 사족들은 관권과 결탁하여 토호로 성장하였고, 새로운 향촌사회의 실력자로서 新鄕세력이 대두하였다.0575)고석규,≪19세기 조선의 향촌사회연구-지배와 저항의 구조-≫(서울대출판부, 1998). 그러나 향촌사회의 실력자였던 신향층이나 饒戶富民層은 구래의 사족의 권위를 완전히 부정하고, 새로운 지배체제를 형성할 단계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0576)안병욱,<19세기 壬戌民亂에 있어서의 鄕會와 饒戶>(≪韓國史論≫14, 1986). 이들은 상업적 농업이나 상업에의 투자 등 구래의 사족과 부의 축적기반이 다른 측면이 없지 않았으나, 대부분은 부세운영과정에 관권과 결탁하거나 또는 고리대 등의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는 등 구래의 사족과 부의 축적기반이 다를 바가 없는 계층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구래의 지배체제를 대체하여 새로운 사회를 열어 나갈 주체로 성장하기 보다는 새로운 사회체제와 봉건적 사회체제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계층이었다.0577)이윤갑,<19세기 후반 경상도 星州地方의 농민운동>(≪손보기박사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1988).

 이처럼 19세기 향촌사회는 구래의 사족지배체제가 동요되는 가운데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신향과 요호부민층이 대두하는 등 사회구조가 점차 변동하고 있었다. 18세기에 전면화되었던 향촌사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신향과 구향간의 대립은 적어도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고 잠복된 형태로 존재하였다. 향촌사회의 구체적인 대립은 지주와 소작관계, 나아가 수령-서리를 중심으로 전개된 부세운영을 둘러싸고 이에 반발하는 요호부민·빈농층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19세기에 이르면 농민층의 항쟁도 점차 고양되어 갔다.

 18세기 수령권에 대한 저항은 殿牌作變, 松田放火 등과 같은 간접적인 방법으로부터 수령에 대한 직접적인 위해행위까지도 나타나지만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저항에 그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0578)한상권,<18세기 중·후반의 농민항쟁>(≪1894년 농민전쟁연구 2-18·19세기의 농민항쟁≫, 역사비평사, 1992). 억울한 일이 있을 때에도 대부분 동리민인들이 관청앞에 몰려가 官門會哭의 형태로 시위를 벌이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면 이와 같은 농민층의 저항은 합법적인 공간속에서 呈訴運動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적어도 수령이나 서리의 잘못에 대해서 官門會哭이라는 소극적인 저항을 뛰어 넘어 所志를 작성하고 직접 수령에게 억울한 일을 시정해 줄 것을 합법적으로 요구하는 것이었다. 19세기에 이르면 이러한 정소운동은 대부분의 군현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정소운동의 전개는 당연히 농민층 내부에 문자를 아는 농민적 지식인층의 형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들은 문자를 모르는 농민들의 억울한 일을 대신하여 소지를 작성하거나 부세문제의 농민적 해결에 앞장서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1862년 晉州民亂의 柳繼春의 사례에서 보듯이0579)망원한국사연구실,≪1862년 농민항쟁≫(동녘, 1988). 특정 직업을 지니지 않고 ‘呈營呈邑’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었다. 1894년 고부민란단계의 전봉준의 경우도 처음에는 이와 같이 부세문제의 농민적 해결을 위해 농민들의 소지를 대신 작성해 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0580)≪全琫準供招≫乙未 二月二十一日 全琫準 再招問目.

 이러한 농민적 지식층의 성장은 향촌사회의 제반 문제들을 농민들의 요구에 맞게 제기하고, 농민적 해결을 추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1862년의 농민항쟁이 일시에 70여 개 군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민란이라는 봉기단계 이전에 이와 같은 합법공간에서의 다양한 정소운동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권력과 유착하여 농민들을 수탈하는 자도 없지는 않았지만 농민봉기에 돌입했을 경우 대부분 이들이 지도자로 추대되고 있었다.0581)고동환,<19세기 賦稅運營의 변화와 呈訴運動>(≪국사관논총≫43, 1993).

 한편 농민층의 조직역량도 성장하였다. 부세운영에서 도결제가 도입되면서 동리민인들이 부세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었고, 이러한 문제들을 논의하는 장으로서 민회나 리회 등의 농민집회가 대부분의 향촌에는 존재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촌계류의 생활공동체나 두레와 같은 노동공동체도 농민들의 일상적인 조직체로서 기능하였던 것이다.0582)김인걸,<朝鮮後期 村落組織의 변모와 1862년 농민항쟁의 조직기반>(≪진단학보≫67, 1989).

 특히 개항 이후 대원군 정권기에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라는 두 차례의 외세와의 전쟁을 경험한 뒤에도 농민항쟁은 계속되고 있었다.0583)고동환,<대원군 집권기 농민층 동향과 농민항쟁의 전개>(≪1894년 농민전쟁연구 2-18·19세기의 농민항쟁≫, 역사비평사, 1992). 특히 대원군이 하야하고 민씨정권이 들어선 이후 농민항쟁은 더욱 고양되고 있었다. 고종 25년(1888)을 경계로 민란은 더욱 활성화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0584)백승철,<개항이후(1876∼1893) 농민항쟁의 전개와 지향>(≪1894년 농민전쟁연구 2-18·19세기의 농민항쟁≫, 역사비평사, 1992). 민란의 일상화 속에서 축적된 항쟁의 경험은 농민적 지식인층의 주도하에 농민들이 항쟁의 주체로 대두되고 있었던 것이다. 개항 이후 향촌사회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이와 같은 농민적 지식층들도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봉준의 사례에서 보듯이 향촌사회 문제, 특히 부세운영에 관련한 사항들에 대해서 매우 해박한 지식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향촌에서 농민들로부터 상당한 신망을 얻고 있는 자들이기도 했다. 농민항쟁은 이들의 주도하에 촉발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향촌사회를 기본 공간으로 하여 전개된 항쟁 이외에도 처음부터 무장봉기를 목적으로 추진된 병란도 19세기 후반에는 빈발하였다. 고종 6년(1869) 광양란과 고종 8년(1871) 이필제란 등은 그러한 예였다. 또한 정감록류의 도참비기사상에 근거한 각종 변란도 19세기에는 자주 나타났다. 이들 병란이나 변란의 주도자들은 향촌내부에 존재근거를 지니기 보다는 동학이나 정감록류의 이념에 기초하여 조선왕조를 부정하던 지식인층이었다.0585)배항섭,<19세기 후반 ‘變亂’의 추이와 성격>(≪1894년 농민전쟁연구 2-18·19세기의 농민항쟁≫, 역사비평사, 1992). 동학농민전쟁은 이와 같은 두 부류의 움직임이 하나로 합일되면서 전국적 규모의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농민전쟁의 기본흐름은 향촌사회에 기반하여 사회적 모순을 농민적으로 해결하려는 민란의 흐름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동학사상은 농민전쟁의 지도이념이 될 수 없는 정치적 空洞性의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동학사상에서는 당시 농민의 현실을 죽을 처지에 빠진 인민 등의 상태로 파악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현실 그대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기는 했지만, 모순된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의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을 後天開闢·同歸一體·輔國安民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관념, 환상의 영역에서 존재하는 추상물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동학이념은 농민들의 생활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집단의 힘으로 투쟁해 갈 수 있는 이념을 제공할 수 없었다. 농민전쟁시 농민들의 사상과 행동은 동학에 근거하기 보다는 스스로의 사회적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농민들이 주체적으로 창조한 것이었다.0586)정창렬,≪甲午農民戰爭 硏究-全琫準의 思想과 行動을 중심으로-≫(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이러한 이념과 사상은 정소운동의 주도자라고 할 수 있는 농민적 지식인층, 즉 향촌사회에 뿌리를 굳건하게 내린 자들에 의해 마련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봉건적인 제수탈에 반대하는 반봉건 이념과 동시에 제국주의적 정치, 경제적 침탈에 반대하는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高東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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