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2. 동학교조 신원운동
  • 2) 교조신원운동의 전개
  • (3) 광화문복소와 척왜양방문 게시운동

(3) 광화문복소와 척왜양방문 게시운동

 공주와 삼례에서 행한 동학교도들의 신원운동은 당초 요구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지방 수령들의 성과를 거두는 데 성공하였다. 동학교도들에 대한 부당한 침학행위를 말라는 공식적인 명령을 충청감사와 전라감사로부터 얻어낸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충청·전라 양 감영의 공문은 별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의 공인문제와 교조의 신원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동학교단 지도부는 교도들을 더욱 조직화하여 중앙 조정을 향한 신원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양 감영에서 모두 동학의 공인문제는 중앙 조정의 권한이라 언명하였기 때문이다.

 중앙 조정을 향한 복합상소 계획은 이미 삼례취회 단계에서 결정되어 있었다. 삼례취회를 결산하는 1892년 11월 19일자 동학 지도부의 敬通이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임금님께 복합할 계획은 방금 상의해서 다시 도모하려 하니 다음 조치를 기다리라”0619)앞의 註 30)과 같음.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이 경통 내용은 광화문 복소가 공주·삼례 신원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준비되었음을 보여 준다. 동학교단 지도부는 우선 1892년 12월 6일경 복합상소에 대비한 도소를 충청도 報恩 帳內에 설치하였다. 12월 6일 도소를 설치하였다는 사실이 실린<本敎歷史>에 의하면, “당시 도소를 설치하자마자 각지로부터 오는 교도의 수가 폭주하여 迎送과 사무처리가 폭주했다”0620)<本敎歷史>(≪天道敎會月報≫28, 1912. 11), 24쪽.고 전한다. 광화문 복합상소 계획은 이같이 몰려드는 민중들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동학지도부는 1차적으로 도소에 몰려드는 교도들을 통제하기 위해 12월 6일자로 도소출입을 제한하는 경통을 보냈다. 그러나 복합상소는 쉽게 실행되지 못했다. 복합상소에 대한 지도부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고 복합상소 계획에 대해 최시형의 허락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복합상소의 성과가 어떻게 나타날 지 알 수 없는 상태였고 복합상소를 전후한 탄압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동학 지도부는 12월 중순께 서울로 직접 올라가지 않고 중앙 조정에 소장을 올렸다. 첫머리에서 “道란 사람으로서 다같이 행할 바를 이름한 것이니 邪가 있고 바름이 있으며 같음이 있고 다름이 있는 것은 모두가 사리를 바르게 구한 것이니 헛된 판단만이라 할 수는 없다”0621)<朝家回通>,≪韓國民衆運動史資料大系:東學書≫, 87쪽.고<朝家回通>0622)명칭 그대로라면 ‘조정이 어떤 글에 대한 답을 내린 글’이라는 뜻이지만 내용을 보면 東學 都所에서 조정에 보낸 소장임을 알 수 있다.이라는 상소장에서 지도부는 東學이 이단이 아님을 역설하고 충청도·전라도 지역에서 관리들의 탐학을 열거하면서 조정의 공평한 조처를 요청하였다. 동학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관리들의 탐학금지를 요구하는 이같은 상소에 대답이 없자, 동학 지도부는 상경투쟁인 복합상소를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그리하여 1893년 1월 淸州 松山에 있던 孫天民의 집에 奉疎都所가 설치되었다.0623)<權秉悳自敍傳>(≪韓國思想叢書≫, 330쪽).
<天道敎會史草稿>(≪東學思想資料集≫壹, 448쪽).
봉소도소의 임원은 姜時元·孫天民·孫秉熙·金演局·徐丙鶴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복합상소 계획을 각 지역에 알린 다음, 2월 초순경 서병학을 먼저 서울로 보내 都所를 정하는 문제와 숙소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서병학외 다른 지도자들은 2월 8일 과거보러 올라가는 선비차림으로 분장하여 일제히 상경했다. 이 무렵 서울에는 동학교도 수만 명이 외국인을 몰아내기 위해 상경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복합상소 당시 상경한 동학도의 수는 분명치 않다. 수만 명이라는 기록도 전하지만 당시 일본≪東京日日新聞≫이 게재한 수백 명 정도가 상경한 것으로 보인다.0624)≪東京日日新聞≫, 명치 26년(1894) 4월 19일. 복합상소는 2월 11일부터 시작됐다. 광화문 앞에 출두하여 복소한 인원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9명에서부터 80여 명에 이르기까지 분분하지만 대체로 동학지도부의 주요 인물들과 중견 동학지도자 40여 명이 복소에 나선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朴光浩를 疎首로 한 복소참여자는 13일까지 3일동안 상소문을 붉은 보자기에 싸서 상을 받들고 광화문앞에 나아가 엎드려 호소했다. 상소절차의 잘못을 들어 상소접수조차 거부하던 중앙정부는 14일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안주하면 원하는 바를 따라 해주겠다’는 내용의 傳敎를 내렸다. 정6품의 관원인 司謁이 전한 이같은 대답은 해산명령과도 같은 통고였다. 이리하여 1892년 10월부터 전개해 온 신원운동은 복합상소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함으로써 원점에 서게 되었다. 오히려 소두 박광호를 잡아 들이라는 왕의 명령으로 동학교도들은 더욱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됐다. 그러나 이같은 외형적인 별무성과에도 광화문 복소는 동학교인들의 역사적 자각을 불러 일으키게 했으며 향후 투쟁방향의 새로운 전환을 준비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광화문 복합상소 직후 京鄕에서는 斥倭洋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서울의 외국 공관과 교회당에 외국인을 배척하는 掛書가 나붙었으며 지방 관아에도 외국인을 배척하는 榜文이 게시되었다. 특히 미국인 선교사 기포드의 학당에 붙은 괘서를 시작으로 한 달 여동안 서울에서 잇따라 발생한 斥倭洋榜文 게시사건은 당시 국내외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광화문 복합상소 이전부터 수만 명의 동학교도들이 외국인을 배척하고 몰아내기 위해 상경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던 상황에서 외국인들을 더욱 불안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서울주재 외국공관에서는 유사시에 대비하여 본국과 연락을 취하고 자국민의 피난을 고려하는가 하면 조선정부에 대책을 촉구하는 등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다. 대내외적으로 큰 파문을 던진 이같은 척왜양방문 게시사건을 주도한 세력은 과연 누구이며 일련의 교조신원운동과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또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전면에 내세워진 ‘斥洋斥倭’의 주장과는 어떤 연결고리를 갖는가. 이같이 제기되는 여러 의문은 척왜양방문 게시사건을 주도한 주도세력 문제와 관련지어 최근 학계의 가장 뜨거운 쟁점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서울에서의 척왜양방문은 미국인 선교사 집에 붙은 두 건과 프랑스·일본 공사관에 나붙은 각 한 건의 榜文이 전부이다. 모두 한문으로 기록된 이들 괘서는 내용상 서양의 기독교 침투와 일본의 세력확장에 강한 증오심을 담고 있다.

 첫 괘서는 광화문 복합상소가 해산한 다음 날인 1893년 음력 2월 14일 밤 미국인 선교사 기포드 학당의 문에 붙었다. “아, 슬프도다. 소인배들은 이 글을 경건히 받을지어다. 헤아려 보면 우리 동방의 나라는 수천년 예의와 범절의 나라였노라. 이러한 예의지국에 태어나 이 예의를 행하기에도 오히려 겨를이 없거늘 항차 다른 가르침을 생각하겠는가. (중략) 우리 도의 근원은 하늘에 나서 밝은 하늘의 뜻을 천하에 비치니 감히 날뛰면서도 도를 능멸할 수 있는가. 세상을 一致할 도는 理致중에 있으니 어떻게 조심하지 않으랴. 소인배들은 대도를 함께 하여 사람마다 그 書冊을 불태우면 혹시 만의 하나라도 살 수 있는 길이 있을 지 모르겠다.”0625)≪舊韓國外交文書≫10:美案, 高宗 30년 2월 18일(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 1967), 718∼719쪽. ‘白雲山人 弓之先生’이라 하였을 뿐 정확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붙은 이 방문은 기독교를 믿는 조선인들에게 경고한 글로 보여진다. 기독교를 배척하는 방문은 이어 같은 달 18일 미국인 존스의 집 교회당에도 붙었다. “敎頭 등을 효유하노라”로 시작되는 이 방문은 그 말미에 “너희들은 빨리 짐을 꾸려 본국으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忠信仁義한 우리는 갑옷·투구·방패를 갖추어 오는 3월 7일에 너희들을 성토하겠노라”0626)≪舊韓國外交文書≫10:美案, 高宗 30년 2월 19일, 719쪽.라는 내용이 들어 있어 외국인들을 공포로 몰아 넣었다. 또 프랑스공관에도 같은 달 20일을 전후해 비슷한 내용의 괘서가 붙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 프랑스 공사는 본국에 兵船 세 척의 파견을 요청했고, 병선이 인천항에 대기중이라는 기록이 전한다.0627)金允植,≪續陰晴史≫上, 癸巳 2月 24日條, 257쪽. 1893년 3월 2일 일본공사관 앞벽에도 방문이 나붙었다. “일본 상려관은 펴보아라”로 시작된 이 방문은 “아직도 탐욕스런 마음으로 다른 나라에 웅거하여 공격하는 것을 으뜸으로 삼아 혈육을 본업으로 삼으니 진실로 무슨 마음이며 필경 어찌하자는 것인가. (중략) 하늘은 이미 너희들을 증오하며 스승님은 이미 경계하였으니 安危의 기틀은 너희가 취함에 달려 있다.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빨리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0628)≪舊韓國外交文書≫2:日案, 高宗 30년 3월 2일, 385쪽.라고 하여 당시 일본의 침략을 경고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광화문복소를 전후하여 榜文揭示를 통해 척왜양운동을 이끈 세력은 과연 누구일까. 방문 자체가 모두 익명으로 된 데다 당시의 척왜양의식은 어느 한 계층에 한정되지 않고 조선사회 전반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도세력을 지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까지 학계에서는 대체로 세 가지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첫째 동학교단 지도부가 복합상소운동과 병행하여 벌였을 가능성, 둘째 동학교단 내의 혁신세력이 독자적으로 주도했을 가능성, 셋째 동학과는 별개의 세력들이 벌인 척왜양운동일 가능성 등이 그것이다. 당시의 동학교단 지도부가 척왜양방문 게시사건을 주도한 세력일 것이라고 이해하는 입장은0629)張泳敏, 앞의 글 참조. 동학사상과 동학교단 안에서 일관되게 주장되어 온 척왜양의식을 강조한다. 특히 公州·參禮취회 단계에서 강하게 표출된 척왜양의식을 기반으로 동학지도부가 복합상소운동과 병행하여 배외운동을 벌였으며, 이후 보은취회에서 ‘斥倭洋倡義’의 깃발로 올려졌다는 입장이다. 동학지도부는 그동안 지방관리들의 탐학행위는 직접 체험했으나 외국세력의 위협은 현실적으로 느끼지 못했다. 광화문복소를 위해 상경한 뒤 비로소 외세의 위협을 실감한 지도부는 보국안민의 절박한 역사의식에서 배외운동을 제기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함께 광화문복소 직후 일어났다든지, 동학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 문구가 방문 내용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점도 그 근거가 되고 있다. 둘째 1893년 3월의 척왜양운동을 주도한 세력에 관한 또 하나의 입장은 동학의 혁신파를 지목하는 견해이다. 동학내에 지도부와 다른 성격의 혁신세력이 당시 이미 존재했음을 전제로 한 이같은 견해는 종래 학계의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이는 온건한 방법의 광화문복소 대신 실력 대결을 주장했던 徐丙鶴 등 혁신파가 지도부의 제지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복소와는 별도로 배외운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같은 견해는 천도교 일부 자료에 “서인주·서병학은 상소하여 진정할 뜻이 없고 교도로 하여금 兵服을 바꿔 입도록 하고 병대와 협동하여 정부 간당을 소탕하고 조정을 크게 개혁하기로 결정하였는지라, (중략) 神師(최시형)가 이에 부당함을 책하였다”0630)<天道敎會史草稿>(≪東學思想資料集≫壹), 449쪽.
<天道敎創建史>(≪東學思想資料集≫貳), 143쪽.
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이 견해에 대해서는 서병학이 복합상소를 비롯한 신원운동을 처음부터 주도하였고 보은취회에서 금구취회를 비난한 말, 무력침입의 시기적 폭발성을 들어 비판되고 있다. 또 당시 조선주재 일본 변리공사가 본국에 보낸 외교문서 등에 근거, 서울에서의 척왜양방문 게시사건이 전라도 지방의 동학의 여러 갈래가 중심이 됐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0631)鄭昌烈, 앞의 글 참조. 즉 여러 갈래의 동학교도들이 척왜양방문을 게시하고, 괘서에 나오는 3월 7일 서울에서의 왜양성토를 시도했으며 이를 위해 지방에서의 상경 움직임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여러 자료에서 보여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응집되어 이후 金溝에서 독자적인 취당을 갖는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그 지도자가 全琫準이라는 것이다. 셋째 척왜양방문 게시사건이 동학도의 복합상소 직후에 일어났고, 동학교도가 상경하여 외국인을 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근거로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된 척왜양사건으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0632)배항섭, 앞의 글, 34∼36쪽. 이와 관련 광화문복소를 계기로 동학과는 별도의 광범위한 배외세력들을 결집하여 일으킨 배외운동일 가능성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사회는 프랑스와 미국선교사들의 거리낌없는 활동, 방곡령에 따른 일본의 배상요구, 청·일상인들의 조선 상권의 잠식 등으로 외세에 대한 일반인들의 반감이 팽배해 있던 점에서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외세에 대한 조선사회의 반감은 괘서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이미 화적들의 외국상인 습격이나 중국상인 점포에 대한 방화, 1890년 서울 상인들의 집단적인 同盟撤市투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도 일반 세력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척왜양방문 게시사건의 주도세력을 놓고 이처럼 해석이 엇갈리고 있는 것은 이를 뒷받침할 만한 결정적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이같은 각 입장차이는 직접적인 근거 대신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머무르고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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