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2. 동학교조 신원운동
  • 2) 교조신원운동의 전개
  • (4) 보은취회와 금구취당

(4) 보은취회와 금구취당

 1893년 3월 11일, 報恩 帳內里에서 시작된 ‘보은취회’는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를 밝히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전라도 金溝懸 院坪에서 이루어진 ‘院坪聚黨’과 함께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학계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금구취당’이 동학농민전쟁의 前史로서 그 정치적 성격이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에 비해 ‘보은취회’는 물리적 투쟁을 되도록 자제하려 했기 때문에 한계를 보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보은취회가 동학교단의 조직역량을 확인시킨 집회였던 점, 이전의 신원운동이 ‘교조의 신원’이라는 종교적 요구 중심으로 이뤄졌던 데 비해 보은취회는 ‘척왜양’의 기치를 전면적으로 드러낸 집회였던 점, 그 목적이 척왜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탐학관리와 세도가들을 처단하고자 하는 데 있었던 점으로 볼 때 보은취회 역시 사회개혁운동의 한 맥락으로, 또한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 투쟁으로서 일정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보은취회는 우선 전국 각 지역에서 수만 명의 道人들이 참가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조정에서 파견된 宣撫使 魚允中이 올린 보고서를 보면, “처음에는 부적, 주술로써 무리를 현혹하고 참위를 전하여 세상을 기만하였는 데, 필경에는 才氣를 갖추고도 뜻을 얻지 못한 자, 貪墨이 횡행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민중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자, 外夷가 우리의 利源을 빼앗는 것을 분통하게 여겨 큰소리 하는 자, 貪士·墨吏의 침학을 당해도 호소할 바 없는 자, 京鄕에서의 武斷과 협박때문에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는 자, 京外에서 죄를 짓고 도망한 자, 營邑屬들의 부랑무리배, 영세농상민, 풍문만을 듣고 뛰어든 자, 부채의 참독을 견디지 못하는 자, 常賤民으로 뛰어나 보려는 자가 여기에 들어 왔다”0633)<聚語>(≪東學亂記錄≫上), 122쪽;(≪東學農民戰爭史料大系≫2), 66∼67쪽.라고 하여 당시 사회의 기층민중과 사회구조에 큰 불만을 가진 세력 등 다양한 계층에서 모여 들었음을 보여 준다. 3월 말까지 지속적으로 모여든 인원은 대략 3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0634)金義煥,≪近代朝鮮의 民衆運動≫, 68∼69쪽.
표영삼,<보은 장내리 척왜양창의> (≪新人間≫505, 1992. 5), 33∼36쪽.
이들은 산아래 평지에 성을 쌓고 그 안에서 대오를 정비하며 ‘斥倭洋倡義’라고 쓴 기를 내거는 한편 새로운 방문과 통문을 냈다. 날이 갈수록 숫자가 느는 데다 통문을 나붙이는 등 세가 더해지자 3월 16일 보은 군수 李重益이 해산령을 내렸으나0635)東學人令,<聚語>(≪東學農民戰爭史料大系≫2), 39쪽. 이에 대해 도인들은 “창의함은 오직 척왜양에 있으니 비록 巡營의 甘飭이나 主官의 面諭라도 그칠 수 없다. 또 동학은 처음부터 邪術이 아니며, 설사 사술이라 하여도 임금이 욕을 당하고 신하가 죽는 지경에서는 忠義 하나 뿐이니, 각처 유생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죽음을 맹세하고 충에 진력하고자 한다”0636)<聚語>(≪東學農民戰爭史料大系≫2), 35쪽.라고 하여 해산을 거부하고 다시 “왜양지사를 치는 것으로 죄삼아 가둔다면 和를 주장하는 매국자를 상준단 말인가? 어찌 우리 순상의 밝음으로써 헤아리지 못함이 이처럼 심하단 말인가? 혹 미혹하여 왜양의 신복이 되려는 자는 관령을 따르라”0637)<聚語>, 위의 책, 35∼36쪽.라는 榜을 내걸어 척왜양의 의지를 과시하였다.

 이처럼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보은군수의 해산령을 거절하면서 척왜양의지를 더욱 강력하게 표출했다. 보은집회의 세력들이 척왜양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물론 그것이 큰 목적이기도 했지만 당시 유림에 풍미하고 있던 衛正斥邪사상과 동일한 선상에 놓여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그들이 집회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척왜양은 조선사회를 이끌고 있던 봉건적 지배층에 의해 무난하게 용납될 수 있었던 봉건적인 대외사상에 부합되는 것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3월 22일 보은군수의 해산령도 거절하고 “지금에 이르러 생명이 도탄에 빠진 것은 방백수령의 탐학무도함과 세호가의 무단에 있으니 만약 지금 소청하지 못하면 어느 때에 국태민안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지방수령들의 탐학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갈수록 확대되는 보은취회의 양상을 방관하고 있을 수 없게 된 조정에서는 3월 25일 충청감사 趙秉式에게 책임을 물어 파직시키고 이들을 해산시킬 선무사로 어윤중을 보내는 한편, 충청병사 洪在羲에게 군사 3백 명을 이끌고 장내리로 가게 했다. 양호선무사 어윤중은 보은출신이었다. 그는 장내리로 가서 접도들을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하고 협박하면서 왕의 칙유문을 발표했다. 이에 보은취회 지도부는 해산을 약속하고 노약자와 어린이를 돌려 보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집회는 이합집산의 양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특히 보은취회 지도부는 4월 1일 순무사 어윤중이 公州營將, 淸州兵營 軍官, 報恩 군수를 대동하고 찾아와 왕의 綸音을 읽고 퇴산을 명하자 3일 안에 해산하기로 약속을 하였고 崔時亨·孫秉熙·徐丙鶴 등은 도인들을 남겨 둔 채 4월 2일 밤을 틈타 도망하고 말았다.

 광화문 복합상소에 이어 보은취회 역시 무력하게 해산되고 만 것은 결국 지도부가 무력투쟁을 회피한 결과였다. 이같은 보은집회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되고 있다. 첫째는 보은집회 지도부의 기만성, 불철저성, 패배주의로 인해 별다른 성과없이 실패한 점을 들어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로서 높은 위치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고,0638)趙景達, 앞의 글 참조. 둘째는 이 집회를 통해 민권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종교운동에서 벗어나 정치적 방향으로 나아간 성격을 보이고 있는 점에서 그 의의를 어느 정도 평가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금구취당을 주도한 세력의 독려에 힘입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0639)鄭昌烈, 앞의 글 참조. 지금까지 학계의 연구성과로 볼 때 보은집회는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로서 큰 위상을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신원운동의 차원에서 정치적 투쟁의 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는 역사적 의의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한편, 보은취회가 열리던 시기에 전라도 금구현 원평에서도 취회가 열리고 있었다. ‘金溝聚黨’이 바로 그것이다.0640)≪日省錄≫, 고종 30년 3월 21일. 충청도 보은의 장내리에서 이른바 보은취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全羅道 金溝懸 水流面 院坪里0641)현재의 김제군 金山面 院坪.에서도 동학교도들의 별도 집회가 열리고 있었음은 여러 자료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원평은 전라감영이 자리잡고 있는 전주에서 서남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큰 場이 서 인근에서 생산되는 物産이 풍부하게 거래되었으며 따라서 사람의 왕래가 잦은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대규모 집회를 가질 수 있는 여건이 충족된 데다 官衙가 있는 금구로부터 적당한 이격거리를 두어 여러 모로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母岳山과 金山寺로 상징되는 독특한 지리적 배경은 종교적 집회장소로의 선택에 중요한 고려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 즉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원평지역 일대는 예나 지금이나 비결신앙의 상징처럼 일컬어지고 있다. 당시에도 민간신앙의 근거지였고 이 곳을 항상 감싸고 있는 적당한 신비로움이 고단한 현실에 찌들고 지친 민중들을 효과적으로 끌어모아 주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원평집회가 수월하게 이뤄질 수 있었던 배경 중의 하나는 이곳이 보은으로 가는 전라도지역 교인들의 중간 기착지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원평은 정읍·고창·장흥·영광·나주·함평·무안·순천·영암쪽에서 올라 오는 교도들이 반드시 거쳐 지나야 하는 거점이었다. 더욱이 金溝는 동학지도자 金德明包의 본거지로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金德明이 동학교단의 大接主 위치에서 일정 정도의 역할을 맡았으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0642)원평은 금구취회의 집결지로서 뿐 아니라 동학농민들이 원평주위에서 성장하거나 활동했으며 사건의 주요한 지역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반경 20㎞이내에 자리잡고 있다. 멀리 북쪽으로 삼례가 20㎞ 거리에, 전봉준의 舊居가 있는 정읍군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이 서남으로 17㎞ 지점에, 金開南의 고향이자 全州和約 이후 전봉준이 기거했다는 정읍군 산외면의 지금실이 남쪽 9㎞지점에 각각 위치해 있다. 전봉준이 어린 시절 한때를 보냈던 정읍군 감곡면 계룡리 황새마을 또한 서쪽 1.5㎞에 불과하며 말목장터는 서남쪽 13.5㎞, 1894년 3월 25일경 동학농민군이 연합하여 결진했던 白山은 서쪽 19㎞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또 대접주 金德明이 출생한 용계마을은 원평 동쪽 1㎞ 지점에 있고 그가 성장하고 활동의 본거지로 삼았던 巨野마을은 원평 동쪽 2.5㎞ 지점에 자리해 있다. 따라서 이들 지역은 오늘날로 치면 원평을 중심으로 한 1일 생활권이었으며 한편으로는 院坪 市場圈에 속하는 곳이다. 이처럼 원평은 동학농민전쟁의 태동과 전개과정에서 항상 지리적 밀접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전봉준장군이 지휘하는 최후의 전투인 구미란전투(1894년 11월 25일)를 원평은 직접 체험하게 된다.

 ‘금구취당’은 1893년 3월 21일(음력) 이전에 이뤄지고 있었다. 이 시기는 보은취회가 진행되고 있던 때이다.≪일성록≫高宗 30년(1893, 癸巳) 3월 27일자 기사는 새로운 전라감사에 부임하는 金文鉉이 고종에게 辭陛하는 자리에서 나눈 대화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고종이 가로되 ‘湖南은 왕조가 일어선 터전이고 御眞을 모신 慶基殿이 있어 다른 지방과 달리 소중하고 나라 살림의 창고와도 같은 곳이다. 근래에 이르러 어찌된 까닭인지 풍속이 타락하고 인심이 간사, 교활해져 일종 동학의 무리가 창궐하여 날뛴다 하니 백성들을 안도하게 할 계책과 없애버릴 방책을 경이 판단하여 처리토록 하라.’ 文鉉이 답하기를 ‘신의 역량이 보잘 것 없어 제대로 보답하지 못할 듯하오나 이른바 비도들이 준동한다는 것은 참으로 변괴라 할 것입니다’ (중략) 고종이 이르기를 ‘말이란 한 번 두 번 옮기다 보면 터무니 없는 말을 지어내게 되는 것이니 족히 믿을 것이 못된다. 호남에서도 金溝에 가장 많다 하니 전주 감영에서 어느 정도 거리인가. 먼저 그 소굴을 격파하여 금단하고 일소하는 방도를 삼도록 하라.’ 文鉉이 답하기를 ‘30리 가량 되는 데 금구, 원평에 과연 취당하고 있다 하옵니다.”0643)≪日省錄≫, 고종 30년 3월 21일.

 금구취당을 확인해 주는 또 다른 보고서는<討匪大略>이다. 1894년 11, 12월의 농민군 토벌기사가 주로 실린<토비대략>에는 “계사년(1893년) 4월 동학군 4, 5만 명이 일부는 湖西의 報恩 帳內에서 屯據하고 있었고 일부는 湖南의 金溝·院坪에 둔거해 있었다”0644)<討匪大略>(≪韓國民衆運動史資料大系:1894년의 農民戰爭篇≫, 驪江出版社, 1986), 395쪽.며 보은취회와 더불어 금구에서도 일정한 규모의 집회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금구 원평집회에 모여든 동학교도들은 1만 명이 넘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신임 전라감사 김문현이 전주감영에 도착했을 때 軍司馬 崔永年으로부터 “금구에 운집한 東徒가 거의 만여 명이나 된다”0645)<東徒問辨>(≪東學亂記錄≫上, 國史編纂委員會, 1959), 155쪽.는 보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충청도 沔川에 유배돼 있던 金允植의 ‘沔陽行遣日記’에도 “또 금구 원평취당 수만 인은 장차 제물포로 直走하겠다고 聲言했다고 한다”0646)<沔陽行遣日記>癸巳 3월 28일조,≪續陰晴史≫上, 262쪽. “전라도에서는 금구 원평에서 도회하였는 데 그 괴수는 보은에 사는 黃河一·茂長접주 孫海中(孫化中의 誤記)이며, 만여 인을 거느리고 21일 도착한다는 뜻을 私通했다고 한다”0647)위의 책, 癸巳 4月 5日條, 264쪽.며 적어도 1만 명 이상의 동학교도들이 집결, 세를 과시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금구취당은 과연 누구에 의해서 주도됐으며 이들은 어떤 형태의 시위를 벌였을까. 금구취당의 주도인물은 全琫準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견해이다.0648)鄭昌烈, 앞의 글 참조.≪日省錄≫등의 자료에 의하면 보은취회 해산 이후 ‘湖西의 徐丙鶴, 湖南의 金鳳集·徐章玉을 該道의 감사로 하여금 營獄에 체포 구금토록 하라’는 주모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의정부로부터 발령됐는데 ‘金鳳集’은 全琫準의 가명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김윤식의 ‘면양행견일기’, 吳知泳의 ‘東學史’ 등이 金鳳集을 ‘全哥나 全琫準으로 고쳐 기록하고 있으며, 전봉준이 ‘金鳳均’ 등 여러 가명을 실제 사용했다는 자료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동학교문측의 기록인≪侍天敎歷史≫에서도 “법소에서는 교도의 난동을 금하였다. 이것이 전봉준이 교도들을 사사로이 빼앗아서 전라도 금구 원평에 주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며 금구취당을 전봉준이 거느리고 있던 집단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던 자료에는 금구취당이 현지에서 보인 행동들이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실제 이들은 가시적인 시위를 벌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금구취당은 보은취회에 일부가 직접 참여, 일련의 급진적 행동을 보였으며 전봉준도 참여를 시도했다는 주장도 있다.0649)張泳敏, 앞의 글, 257쪽. 따라서 院坪에 모여 있되 별도의 행동은 하지 않고 보은취회 세력과 聲氣를 통하면서 보은쪽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 금구취당이 보은취회에서 벌인 행동들은 서병학이 선무사 어윤중에 보낸 密報에서 간접 확인되고 있다. 보은취회의 주모자였던 서병학은 보은취회의 해산을 종용하는 어윤중에게 “湖南聚黨은 얼핏 보면 우리와 같지만 종류가 다르다. 통문을 돌리고 방문을 게시(發文揭榜)한 것은 모두 그들의 소행이다. 그들의 情形은 극히 수상하니 원컨대 공께서는 자세히 살피고 조사 판단하여 그들과 우리를 혼동하지 말고 玉石을 구별해 주시오”0650)<聚語>(≪東學亂記錄≫上), 121∼122쪽;(≪東學農民戰爭史料大系≫2), 69∼70쪽.라고 했다. 이같은 徐의 ‘밀고’에 따르면 보은취회에서 내걸린 척왜양의 기치들은 지도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두 금구취당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파악된다. 徐의 이러한 진술이 전적으로 사실이라면 금구취당은 교조인 水雲의 伸寃을 위해 계획 실행된 종교적 성향의 보은취회를 척왜양의 슬로건을 전면에 내세우는 정치집회로 변질시킨 動力으로 작용했다는 엄청난 정치적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학계에서는 실제 이러한 방향의 연구가 진행돼 금구취당의 성격을 脫종교적이며 보다 투쟁적이고 정치적 지향을 지닌 세력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최근 학계에서는 금구취회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있어 대체적으로 두 가지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첫째는 금구취회가 보은취회와는 달리 독자적으로 열렸으며 척왜양과 지방관의 탐학금지 등 강한 정치적 성향을 지녔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와 함께 일련의 교조신원운동의 과정에서 전봉준이 동학지도부와는 별도의 세력을 갖추고 금구취회를 계기로 완전히 성장,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주도케 된다는 견해이다. 둘째는 금구취회가 ‘전봉준에 의해 주도된 정치성 강한 집회’라는 데는 일단 동의하되 보은취회와 성격을 완전히 분리하거나 지나치게 정치성을 부여하는 데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연구이다.

 첫번째 견해에 따른 연구에서는0651)鄭昌烈,≪甲午農民戰爭硏究≫(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91), 44∼82쪽. ‘동학농민전쟁의 최대 지도자인 전봉준이 어떤 경로로 고부민란에서 갑자기 지도자로 출현하고 1893년 11월 사발통문 서명자의 한 사람으로 등장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금구취당’이라는 열쇠로 풀어 놓고 있다. 즉 김봉균이라는 가명으로 전봉준이 주도한 금구취당은 이미 1893년 2월 중순에서 2월 말 사이 서울서 척왜양방문 게시운동(이른바 괘서사건)을 전개했고 2월 말에서 3월 초까지는 전주에서 비슷한 운동(3월 1일경 전라감영문에 붙여진 榜文)을 벌였으며 3월 7일에는 서울에서 외국선교사, 상인의 축출과 지방관리의 압제와 탐학 제거를 위한 일대 정치공세를 벌이자고 선동하는 등 강도높은 척왜양 반압제운동을 전개한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응집돼 늦어도 3월 초에는 내부적인 규율을 갖춘 집단으로 성립되었고 적어도 3월 중순에는 금구에서 독자적인 집회를 가질만큼 완강한 세력으로 성장했다는 견해이다.0652)위의 글, 82쪽. 이처럼 전봉준을 주축으로 한 금구취당은 이른바 북접지도부와 노선을 달리하면서 투쟁의식을 강화해 동학농민전쟁의 주도세력으로서의 잠재력을 갖춰 나갔다는 것이다.

 이같은 논증은 탁월하고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으나 신진학자들에 의해 제기되는 몇가지 반론에 부딪혀 있다. 즉, 금구취회가 비록 독자적으로 會集하고 척왜양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강하게 내세웠다고는 하나 공주-삼례-광화문-보은으로 이어지는 동학교단의 신원운동과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은 서울에서 벌어진 괘서사건을 금구취당의 동학교도들이 주도했고 금구취당의 總代 20명이 서울에서 운동을 벌이다 포도청에 구류됐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사료의 오독이거나 지나친 추리라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금구취당이 남접과 합세해 보은취회를 좀더 정치적으로 몰고 가기 위해 보은에 집단적으로 참여하려 했으나 취회가 해산해 버리자 선발대 천여 명이 忠州로 방향을 돌려 上京하려 했다’는 해석은 명백히 사료를 오독한 것이라는 반박을 받고 있다.0653)張泳敏, 앞의 글, 253쪽. 4월 2일 보은취회가 해산하면서 ‘사잇길로 원평에서 충주로 간 자가 천여 명’이라는 한 報恩 將吏의 보고서가 전하는데 이는 서울에서 별도 계획을 실행하려고 상경하려던 금구취당의 선발대가 아니라 보은취회에 참여했다가 충주쪽으로 돌아가던 보통의 동학교도들이었다는 것, 여기서 나오는 원평은 보통의 전라도 금구 원평이 아니라 현재 ‘忠北 報恩郡 山外面 院坪’이라는 지적이다. 또 하나는 금구에서 보은과 별도의 취회가 이뤄진 것은 단순히 참여 교도들의 식량조달의 한계 때문에 집회를 분산시킨 것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보은·금구취회는 동일한 목적 아래 분산적으로 열렸던 신원집회라며 금구취당에 대한 별도의 의미 부여를 차단하고 있다.0654)표영삼,<보은 장내리 척왜양창의>(≪新人間≫505, 1992. 5).

 이상과 같이 금구취당은 동학교도들이 최대 규모의 세를 과시한 보은취회의 시기에 별도로 열리고 있었다는 점과 이를 전봉준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따라서 금구취회에 관한 배경과 올바른 성격 규정은 동학농민전쟁의 전반을 재조명하는 데 중요한 연결고리인 것이다. 1893∼1894년 사건 전반에 걸친 안타까움이긴 하나 특히 금구취회에 관해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건이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고 있음은 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朴孟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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