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1. 동학농민군의 봉기
  • 1) 고부민란
  • (1) 고부민란의 배경

(1) 고부민란의 배경

 동학농민전쟁의 발단은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이었다. 고부민란은 조선 후기의 여느 민란과 비슷한 원인과 과정으로 전개되었으나, 그 지도자와 민중이 민란의 경험을 통해 과거에 비해 한 차원 높은 농민전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데에 그 중요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부민란은 전라도 전역의 농민전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말기의 농촌은 수령의 수탈체제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고부민란은 조선 후기 다른 고을의 민란과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객관적 조건에서 시작되었다. 정치기강의 문란과 매관매직의 성행, 관리들의 극심한 부패에 농민들의 불만은 높아만 갔다. 이러한 모순 구조 아래에서 어느 지역이나 할 것 없이 계기만 주어지면 민란이 폭발할 구조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전라도는 삼남 중에서도 가장 넓은 평야와 비옥한 토질을 가진 조선의 곡창지대였다. 그리하여 중앙정부의 재정도 주로 전라도에 의존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궁방이나 관아에서도 조선왕조를 통해 다른 어떤 지방보다도 가장 많은 둔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따라서 궁방이나 관아에서 파견한 導掌이나 監官에 의한 조세 수탈과 탐학은 어느 지방에서보다도 더 혹심하여 농민들은 이중 삼중의 부담을 져야 했다.

 고부는 미곡의 집산지로서 전라도에서도 가장 번성했던 고을 중의 하나였다. 고부는 동진강을 끼고 김제평야와 만경평야를 연결하는 넓은 평야에 자리잡아 그 주변의 28개의 촌락을 거느린 곡창이었을 뿐 아니라, 이 고을을 둘러싸고 줄포, 염소, 동진, 사포 등 네 포구가 있어 여기서부터 원근 각처에 수출되는 미곡의 수량만도 적지 않았다. 특히 고을 서쪽으로 20리쯤 떨어져 있는 서해안의 줄포에는 捧稅漕倉이 있어 부안의 법성포와 더불어 稅米轉運의 중심지였다. 그런 만큼 고부군은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그 수탈의 가능성이 컸고 실제로 수령의 탐학이 심했다. 특히 古阜郡守 趙秉甲, 均田使 金昌錫, 轉運使 趙弼永의 수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여러 지방의 수령을 역임하는 동안 탐학행위로 악명을 떨쳐 온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부임해 온 것은 1892년이었다. 조병갑은 1893년부터 탐학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고부읍 북쪽 동진강 상류에 있던 萬石洑를, 아무 이상도 없는데도 새로 수축하기 위해 농민들을 강제로 징발하고 남의 산에서 수백년 묵은 나무들을 마구 잘라 썼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새 보의 수세로 논 한 마지기에 상답에는 米 2두, 하답에는 1두씩을 거두어 모두 700여석을 거두어 들였다. 또 조금 살만한 집을 골라 不孝니 淫行이니 하는 허무맹랑한 죄목을 씌워 재물을 빼앗은 것이 2만냥에 달했다. 황무지를 개간하면 세금을 받지 않겠다고 약속하고서도 추수할 때가 되면 강제로 세금을 거두어 갔다. 또한 대동미를 농민들로부터 징수할 때에는 1결에 정백미 열여섯말에 해당되는 돈을 받아 챙겼다가 정부에 바칠 때는 나쁜 쌀을 사서 갖다 바치고 나머지는 모조리 자기 배를 채우기도 하였다. 심지어 자기 아버지가 예전에 태인군수를 지냈다고 하여 그 공을 기려 비각을 세운다면서 군민들에게 천여냥을 강제로 거두어 들였다.0656)<全琫準供草>, 初招問目(≪東學亂記錄≫下, 國史編纂委員會, 1959), 522쪽.

 均田使 金昌錫의 수탈도 고부군민들은 참기가 힘들었다. 호남의 연해 지방은 1870년대 중반 이후 거의 매년 자연재해로 수확이 형편없었던 데다, 특히 1893년은 호남의 대부분 지역이 큰 가뭄으로 한 해 농사를 거의 망쳤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이런 식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어 고향을 떠나는 농민들을 붙들어 매기 위해 균전사를 파견하고 있었다. 호남균전사 김창석은 농민들에게 몇 년간 면세해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묵은 땅을 개간하도록 하였으나 추수를 하자마자 그 해부터 세금을 거둬 들였다. 이를 분하게 여긴 농민들이 이듬해에는 땅을 묵혀 농사를 짓지 않았는데도 김창석은 전년처럼 세금을 받아 챙겼다.0657)한우근,≪한국개항기의 상업연구≫(일조각, 1970), 252·255쪽. 白地徵稅나 다름없었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궁핍으로 생존을 위협받던 농민들의 저항을 더욱 부채질했다. 실제 봉기과정에서 재해를 많이 입은 군 북쪽의 면민들이 봉기에 적극 참여했다는 사실은 우연만은 아니었다.

 轉運使 趙弼永의 탐학도 여기에 뒤지지 않았다. 종래 조운과 선상에 의해 세곡을 나르다가 1886년부터 전운국을 설치하여 외국에서 구입한 선박에 의한 세곡운반제도가 도입되었는데, 1893년 공미 운수사업을 위해 이운사가 생기면서부터 선박 수선비 및 파손비 등 과외 세금을 거둠으로써 전운사 조필영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0658)한우근,<동학란 기인에 관한 연구-특히 일본의 경제적 침투와 관련하여->(≪아세아연구≫7호,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 1964), 32쪽. 조필영은 이에 불응하는 농민들을 붙잡아 고문했는데 수염을 뽑거나 상투를 매다는 악형도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 실제로 동학농민전쟁 단계에서 농민군들이 전운사에 대한 불만을 맨처음 적시한 것을 보면, 신식제도를 도입하면서 저지른 전운사의 탐학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전운 문제는 일 개 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라도 각 군에 공통으로 해당되는 문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893년 11월에 ‘沙鉢通文’이 돌자 민중들은 곳곳에 모여서 말하되, “낫네 낫서 난리가 낫서”, “에이 참 잘되얏지 그양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사람이나 어대 나머 잇겟나”하며 민란이 나기를 기다릴 정도였다.0659)<전봉준자료집> 沙鉢通文(≪나라사랑≫15, 1974, 외솔회), 134쪽. 이처럼 동학농민전쟁 전야의 고부에서는 민란이 폭발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구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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