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1. 동학농민군의 봉기
  • 1) 고부민란
  • (3) 고부민란의 전개

(3) 고부민란의 전개

 고부민란은 전봉준 등의 지도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계획되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민란의 발생 자체는 조선 후기의 일반 민란과 유사하게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부민란은 조병갑의 학정에 “온 고을의 인민이 참고 또 참다가 종말에는 더 참을 수 없어서 起鬧하였던”0670)<全琫準供草>, 初招問目, 524쪽. 것이므로 애초에 그것은 고부 농민만의 행동이었다. 황현의≪梧下記聞≫에서도 “백성들이 견딜 수 없어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도 수천 명이 모여서 진정호소하려 하였으나, 조병갑이 전주로 달아났다”0671)黃玹 著·김종익 譯,≪오하기문≫(역사비평사, 1995), 69쪽.고 하였다. 李復榮의≪南遊隨錄≫에서는 “고부민들이 처음에는 소원하기 위해 관문 밖에 모였는데, 몇 명에 불과하였으나 점차 소문을 듣고 모인 자가 많아져 무리를 이루었으며, 전봉준이 거기에 뛰어들고 선동하여 민란으로 발전”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0672)李復榮,≪南遊隨錄≫, 甲午 4월 9일자.

 다만 고부민란이 여느 민란과 달랐던 점은 자연발생적 민란에 전봉준이라는 지도자가 자신의 의도를 가지고 개입한 점이다. 즉 고부민란은 조병갑에 대한 고부민의 원한이 자연발생적으로 민란 발발 직전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고, 그에 따라 모여든 고부민들이 전봉준을 지도자로 추대하자, 앞의 사발통문 거사계획에서 보는 바와 같이 때를 기다리던 전봉준이, 준비가 미흡하였지만 고부민의 자연발생적 동요를 이용하여 거사를 일으키려 결심함으로써 발발한 것으로 생각된다.

 전봉군은 중민이 글자깨나 알고 있는 자신을 추대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도자가 되었다고 법정에서 진술하였지만,0673)<全琫準供草>, 初招問目, 525쪽. 그가 단순히 피동적으로 떠밀려서 민란의 주도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전봉준은 민란 중민과는 달리 일찍부터 ‘濟世安民’의 대업을 이루기 위한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재판과정에서 전봉준은 “너는 고부군수에게서 피해도 많지 않았는데 무슨 목적으로 민란을 일으켰는가?”하고 묻자, “세상 일이 날로 그릇되어 갔으므로 개연히 한 번 세상을 건지려는 목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0674)<全琫準供草>, 再招問目, 534쪽. 즉 고부군수 조병갑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백성’과 ‘세상’이라는 보다 열려진 의식 지평이 지도자 전봉준에게 이미 획득되었기 때문에, 고부민란은 종래의 다른 민란과는 달리 농민전쟁으로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이다.

 1894년 1월 11일 아침 일찍 말목장터에 모인 1천여 명의 민란 중민은 전봉준을 지도자로 추대하고 두 대로 나누어 고부 관아를 향해 행진해 나갔다. 한 대는 영원 운학동을 거쳐서, 다른 한 대는 천치재를 넘어서 고부관아에 들이닥쳐 고부관아를 힘들이지 않고 점령했다. 민란 중민의 습격을 눈치챈 조병갑은 단신으로 뒷문으로 빠져나가 담장을 넘어 재빨리 도망쳤다. 그는 입석리 진선마을 부호 정참봉의 집에 숨었다가 변장을 하고 정읍, 순창을 거쳐 전주감영으로 허겁지겁 도망쳤던 것이다. 민중들은 이청의 아전들을 끌어내서 악정의 시말을 엄중하게 취조 처벌하고, 무기고를 부셔서 무기를 차지하고, 수세로 거두어 들인 양곡 1,400여석을 몰수하고, 진전에서 거둔 세곡을 주인에게 돌려 주며, 만석보 밑에 새로 쌓은 둑을 허물었다. 그러는 동안 민란 중민은 읍내에 진을 치고 밤에는 모닥불을 피웠다. 6일 뒤인 1월 17일에는 말목장터로 다시 진을 이동하였다. 이 때 노약자들은 모두 돌려 보내고 장정들만으로 민란군을 구성하였다. 일정한 지휘를 받는 농민군이 형성된 것이다.

 이처럼 고부민란의 양상은 처음부터 여느 민란과 다른 점이 많았다. “진영은 정숙하였고, 호령은 명석하여 여느 席旗軍(일본에서 농민들의 봉기시에 석기를 내세우고 일어난 데서 온 말) 같지가 않았다”거나, 조병갑을 쫒아낸 것이나 다름없고, 관아를 점령하여 탐묵한 이서배를 징치하였으며, 창고를 헐어 곡식을 나누어 가지는 등, ‘난민’들로서는 요구하던 바를 일정하게 쟁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해산하지 않고 민란이 장기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지속된 것도 바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0675)巴溪生,<古阜民擾日記>(≪주한일본공사관기록≫1, 국사편찬위원회, 1986, 번역본), 54쪽.

 그러나 민란이 전봉준의 뜻대로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난민’과 거사계획을 사전에 가졌던 지도부 사이에 의식상의 차이가 있었고 사전에 조율이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지도부와 민란 중민들 간의 갈등은 민란 초기부터 나타났다. 관아를 점령한 후 창고의 곡식을 헐어 나누어 가지는 등 민란 중민들의 요구가 일정하게 관철되자 중민들은 “요구하는 바를 이루었으니 돌아가겠다”고 하였다.0676)≪南遊隨錄≫, 갑오 4월 9일자. 그러나 사전에 거사계획을 가지고 있던 지도부로서는 그러한 분위기를 용납할 수 없었다. 전봉준은 해산하려는 민란 중민들에게 “너희들은 官米를 먹었으니 죽을 죄에 해당한다. 그러니 함께 살 길을 도모하자”고 하면서 위협 또는 설득을 통해 민란 중민들의 이탈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또한 백산으로 진을 옮긴 뒤에 전봉준이 민란 중민들에게 “함열 조창에 나아가 전운영을 격파하고 전운사 조필영을 징치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군중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것은 民擾가 월경을 하면 반란의 칭을 받는다는 이유”였고, 민란 중민들은 해산하고자 하였다.0677)張奉善,<全琫準實記>(≪井邑郡誌≫, 履露齊, 1937), 353쪽;배항섭, 앞의 글, 67쪽. 민란 중민들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일반적인 민란의 양상을 벗어나는 ‘반란’에는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란 중민과 지도부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도부와 민란 중민 간의 이러한 의식상의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전봉준은 동장·집강 등의 향촌자치기구를 중간 매개기구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들(전봉준 등)은 책임을 자신들에게만 한정시키지 않고, 각 촌의 동장·집강 등으로 하여금 모두 같은 책임을 지게 하였다. 때문에 하루 아침에 일이 그르쳐지는 경우에는 18개 區面의 동장·집강도 곧 같은 책임을 지기 때문에, 백성들도 오활하게 퇴산하거나 혹은 싫증을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지 않고 단결도 일층 공고해지는 경향이 있었다.”0678)巴溪生, 앞의 글, 56쪽. 그러나 끝내 지도부와 중민 사이의 괴리는 해소되지 못하였고, 신임 고부군수로 부임한 朴源明의 효유로 민란 중민들은 해산하고 말았다.

 고부민란이 전봉준의 의도대로 전개되지 못한 데는 인근 고을의 호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고부읍 단독으로는 불가능하고, 고부읍에서 시작하면 인근 고을에서 호응할 때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전봉준은 인근 고을과의 연계를 꾸준히 모색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고부민란의 발발이 사전에 인근 고을과의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직적인 호응이나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와 같이 고부민란의 발발은 거사계획을 가진 전봉준의 입장에서 볼 때 미처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폭발한 것이었다. 민란의 폭발을 보고 전봉준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준비가 미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도부와 민란 중민 사이에는 갈등이 노정되었고 이웃 고을의 호응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농민군은 관아에서 물러났지만, 해산하지 않고 말목장터를 거점으로 둔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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