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1. 동학농민군의 봉기
  • 1) 고부민란
  • (4) 관권의 대응

(4) 관권의 대응

 민란군이 고부읍을 점령하고 말목장터에서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전라감사 김문현은 조병갑을 재부임시킨 책임을 추궁당하는 것이 두려워 중앙에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은밀히 영병을 출동시켜 농민군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우선 김문현은 전주감영의 군위 정석진과 부하 10여 명을 말목장터 안의 농민군으로 가장하여 전봉준의 진영에 잠입시켜 내부 사정을 정탐케 했다. 정석진은 스스로 전봉준의 막사를 찾아 군민들의 해산을 종용하는 한편, 병정들을 시켜 전봉준을 습격하여 그를 체포하도록 꾀하였으나 도리어 그 정체가 드러나서 정석진은 농민군의 죽창에 살해당하고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0679)장봉선, 앞의 글, 383쪽.

 2월 15일 김문현의 장계가 중앙에 보고되자 의정부는 조병갑의 仍任을 추천했던 김문현에게 越俸三等의 감봉처분을 내리고 조병갑을 잡아 들여 국문하기로 하였다. 이어 조병갑의 후임으로 용안현감이었던 朴源明을 신임 고부군수로 임명하고, 장흥부사 李容泰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민란을 조사·보고케 하고 읍폐의 교정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신임군수 박원명은 온건무마책의 일환으로 전봉준의 민란군 부대에 글을 보내어 “새로이 명을 받고 이 지방에 도임한 뜻은 백성의 휴양에 전념하려는 것이며 지금부터는 卿 등의 일당과 이 지방의 施政을 의논하려고 하니 民軍 중에서 吏部 이하 중요한 자를 선발하라”0680)巴溪生, 앞의 글, 56쪽.고 하면서 민란군과 시정을 의논하고자 하였다. 또 “3월 3일에는 음식상을 크게 차려놓고 난민을 초대하여 조정에서 농민군들의 죄를 용서하고 돌아가 농사짓고 편히 살 것을 허용하는 뜻으로 타일렀다. 난민은 모두 해산하였고 장두 전봉준 등 3인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0681)≪오하기문≫, 71쪽.고 하듯이 그의 온건무마책으로 3월 3일 무렵에는 민란 중민들은 해산하고 말았다. 민란 중민들은 전임군수가 수탈한 양곡도 되돌려 받고, 군수도 원만한 인물로 교체되었으며 민란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겠다고 했으니 해산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안핵사로 임명된 이용태는 농민군의 주력이 해산하기를 기다리다가 강경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이용태는 2월 16일에 안핵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게하여 시일만 끌다가 3월 2일에 역졸 8백여 명을 거느리고 고부에 난입하였다. 이용태는 “박원명이 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일을 처리하였는데, 병갑을 두둔하면서 난민들은 반역의 죄목으로 몰아 넣어 죽이고자 하였으니,”0682)≪오하기문≫, 71쪽. “신임군수 박원명을 협박하여 그로 하여금 민란 참가자와 그 괴수를 색출케 하였으며, 역졸은 온 고을에 퍼져 마을에 횡행하면서 부녀자를 강간하고 생선꿰미 같이 포박하니 온 고을 백성의 원한이 골수에 맺혔고”,0683)崔永年,<東徒問辨>(≪동학란기록≫상), 157쪽. “기포 인민을 모두 동학이라 일컫고 이름을 열기하여 잡아 들이고 그 집을 불태웠다. 본인이 없는 경우에는 그 처자를 잡아 들이고 살육을 감행하였다.”0684)<全琫準供草>, 初招問目, 526쪽. 신임군수에 의해 거의 가라앉으려던 군민에게 안핵사 이용태의 포학은 보다 더 큰 불씨를 안겨준 꼴이었다. 이용태의 이러한 학정은 제1차 농민전쟁의 불을 지피는 데 중요한 소재가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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