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1. 동학농민군의 봉기
  • 2) 전봉준의 기병과 격문
  • (1) 무장기포

(1) 무장기포

 제1차 동학농민전쟁은 1894년 3월 20일(일설 3월 21일) 무장에서 창의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0694)신용하,<갑오농민전쟁의 제1차 농민전쟁>(≪한국학보≫40호, 1985). 2월 20일 각 고을에 농민전쟁을 촉구하는 격문을 띄운지 약 한 달만에 각지에서 모인 농민군이 결집하여 농민전쟁의 봉화를 올린 것이다.

 전봉준이 무장에 잠행하여 동학의 도소를 설치한 것은 동학농민전쟁의 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동학은 이미 충청도 보은에 최시형을 대접주로 하는 대도소를 설치하고 있었다. 동학의 조직체계로서는 각지의 包, 接은 직접 이 대도소의 지휘를 받는 것이었지 따로 도소를 둘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은 호남의 동학을 공공연히 ‘南接’이라고 부름으로써 대도소(北接)에 대해 조직의 독자성을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봉준이 독자적인 남접도소를 설치한 것은 동학 내부의 헤게모니 문제라기보다는, 동학의 조직과 활동을 종교의 범주에 한정시키고 싶어 하는 北接의 제약과 간섭에서 벗어나서 동학의 조직과 활동을 종교의 범주를 벗어난 전체 국가와 사회의 개혁운동에 적극 활용하고자 한 목적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0695)위의 글, 123쪽.

 무장 堂山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농민전쟁의 봉기를 알리는 창의문을 전국에 선포하고 통문을 전국에 발송하였는데 여기에서 농민전쟁의 목표를 천명하였다.

倡  義  文0696)<聚語>(≪東學亂記錄≫上), 142∼143쪽;<東匪討錄>(≪韓國學報≫제3집, 一志社, 1976), 235쪽;吳知泳,≪東學史≫(영창서관, 1940), 108∼109쪽. 이 창의문은 종래에는 고부에서 기포한 농민군이 흥덕, 고창을 거쳐 4월 9일 무장을 지나면서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신용하에 의해 3월 20일 농민군의 최초 봉기 때 발표된 것으로 밝혀졌다. 신용하, 앞의 글 참조.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귀하다 하는 것은 人倫이 있기 때문이다. 君臣父子는 인륜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고 아들이 효도한 이후에야 집과 국가에 無彊이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임금은 仁孝慈愛하고 神明聖叡한지라, 賢良方正의 신하가 있어서 그 聰明을 도울지면 堯舜의 德化와 文景의 善治를 가히 써 바랄 수 있을지라.

 그러나 오늘날의 신하된 자는 報國은 생각지 아니하고 한갓 祿과 位만 도둑질하여 총명을 가리고 아부와 아첨만을 일삼아 忠諫하는 선비를 妖言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匪徒라 하여 안으로는 輔國의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虐民의 관리만 많도다. 人民의 마음은 날로 흐트러져 들어서는 즐거운 삶의 生業이 없고 나가서는 몸을 보존할 대책이 없도다. 虐政은 날로 더해가고 怨聲은 그치지 아니하니 君臣의 義와 父子의 倫과 上下의 分이 드디어 다 무너지고 말았다. 管子가 가로되 四維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국가는 멸망한다 하였으니 오늘의 형세는 옛날의 그것보다 더 심하도다. 公卿부터 方伯守令까지 모두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아니하고 한갓 자신의 살찜과 가문의 윤택의 계책만을 도둑질하며, 科擧의 문을 돈벌이의 길이라 생각하고 應試의 장소는 매매하는 저자로 변하고 말았도다. 허다한 돈과 뇌물은 國庫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도리어 私腹을 채우고 있도다. 국가에는 누적된 빚이 있으나 갚을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교만과 사치와 음란과 더러운 일만을 거리낌없이 일삼으니, 八路는 魚肉이 되고 萬民은 도탄에 빠졌도다.

 守宰의 貪虐에 백성이 어찌 곤궁치 아니하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쇠잔하면 나라는 반드시 없어지는 것이다. 輔國安民의 방책은 생각지 아니하고 밖으로 鄕第를 설치하여 오직 제몸 하나 온전함의 방책만을 꾀하고 오직 祿과 位만을 도둑질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는가!

 우리는 비록 草野의 遺民일지라도 君土를 먹고 君衣를 입고 사는 자이라, 어찌 국가의 危亡을 앉아서 보기만 하겠는가! 八路가 마음을 합하고 수많은 백성이 뜻을 모아 이제 의로운 깃발을 들어 輔國安民으로써 死生의 맹세를 하노니, 금일의 광경은 비록 놀랄만한 일이기는 하나 驚動하지 말고 각자 그 業을 편안히 하여 昇平日月을 함께 빌고 임금의 덕화를 함께 입게 되기를 바라노라.

甲午  月  日

湖南倡義所   

全琫準

孫和中

金開南

 이 창의문에서는 기존의 유교적 윤리를 준거로 하여 양반관료를 중심으로 하는 봉건체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농민군 봉기의 정당성을 농민 대중에게 선포하고 있다. 이전의 민란 단계에서 고을 수령이 주요 타격목표가 되었던 것에 비해 여기서는 ‘公卿부터 方伯守令까지’의 봉건통치층 전체가 규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농민군이 지역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서 조선봉건체제 전체를 문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한 ‘輔國安民의 방책은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제몸 하나 온전함의 방책만을 꾀한다’고 하는 데에서 반제 민족주의 의식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창의문은 동학농민전쟁 최초의 창의문이기 때문에 아직 농민전쟁에의 호응도가 불확실한 조건에서 일반 농민의 지지를 널리 구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당시 일반 농민들의 이데올로기적 인식정도를 의식하여 儒敎의 용어와 사상에 근거하여 자신들이 국왕에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 충성하는 것임을 누누히 강조하는 어조로 되어 있다.0697)신용하, 앞의 글(1985), 126쪽. 즉 이 창의문에서는 농민군 지도부의 봉기목표를 명확하게 제시하는 데 중점이 두어졌다기 보다는 봉기의 대중적 지지를 겨냥하는 데 일차적 목표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무장에서 편성된 농민군의 수는 약 4천 명이었다. 이 외에 동학의 비밀조직을 통하여 태인접주 최경선이 3백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해서 대기하도록 준비되었고 고부읍에서 1천여 명의 농민군이 동원되기로 되어 있었다. 전봉준이 단기간에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규모의 농민군 부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보은집회 시기의 남접의 금구취당 세력을 활용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0698)정창렬, 앞의 글(상) 참조. 황현은 무장 기포에 대해 “어리석은 백성들은 이 말에 솔깃하여 우도 일대 10여 읍이 일시에 봉기하여 열흘 정도에 수만 명이 모여들었고 동학이 난민과 함께 어우러진 것이 이때부터였다”0699)≪오하기문≫, 72쪽.고 쓰고 있는데, 이로 보아 茂長봉기에는 동학의 조직이 매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장기포 때의 농민군의 무기는 그동안 민란 때 관아의 군기고에서 빼앗은 무기와 민간의 무기로서 소총·화승총·창·칼·활·도끼·철퇴·죽창 등이었으나 잘 무장되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 밖에 말목장터에 집합하기로 약속된 농민을 무장시키기 위하여 말목장터 근방의 민가에 총창 수백개를 은닉해 놓았다. 무장기포 때의 군량은 이 지방 부민에게서 징수하고 봉납케 하여 충당하였다. 군량 뿐만 아니라 짚신과 군용전도 징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편성된 4천여 명의 농민군은 당시로서는 매우 큰 규모였으며 농민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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