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1. 동학농민군의 봉기
  • 2) 전봉준의 기병과 격문
  • (2) 고부점령

(2) 고부점령

 무장에서 기포한 농민군은 ‘東徒大將’ 전봉준의 지휘와 손화중·김개남의 인솔 아래 농민군의 제1차 공격 목표로 미리 결정된 고부읍을 향해 3월 20일 오후 사기 충천하여 진군을 시작하였다. 농민군이 맨처음 공격목표를 고부로 택한 것은 안핵사 이용태 군에게 짓밟히고 있는 고부농민의 참상과 일부 체포된 고부민란 주동자들의 목숨이 위태로웠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전주성을 함락하고 경사로 직향”한다는 ‘사발통문’ 거사계획의 실행과정이기도 하였다.

 전봉준이 지휘하는 농민군 4천여 명은 3월 20일 무장의 굴치를 넘어 흥덕을 거쳐서 고부로 전진하는 중에 태인접주 최경선이 인솔하는 농민군 3백여 명의 합류를 받고 그날 밤 고부군 북면 말목장터에 도착하여 미리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던 고부 농민 약 1천여 명과 합류했다. 전봉준은 여기서 말목장터 부근 마을의 민가에 준비해 감추어 두었던 총창 수백 개를 거두어 들여 비무장의 농민들을 무장시켜 농민군에 편입한 다음, 계속 진군하여 그날 밤 고부읍의 북성안으로 들어서서 총을 쏘고 고함을 지르며 고부군아를 향하여 야습을 감행하였다.

 이 때 고부군 안핵사 이용태와 고부 관졸들은 처음에는 대항해 보려고 했으나 5천여 명의 사기충천한 농민군에 압도되어 이용태와 역졸들은 전주를 향하여 도망치고 座首와 吏屬들만 남아 있다가 대세가 이미 틀렸다고 생각하여 모두 나와서 농민군에 항복하였다. 농민군은 고부읍을 점령한 것이다.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우선 옥문을 열어 고부민란으로 투옥된 주동자들과 억울하게 투옥되어 있는 농민들을 석방하고, 군기고를 열어 총창과 탄약을 수습해서 농민군의 무기를 보충하고 읍내에 있는 청죽을 베어 죽창을 만들어 총없는 농민을 무장시키는 한편, 관속 중에서 안핵사 및 군수에 부화뇌동하고 탐학한 자 수 명을 색출하여 처형하고, 식량창고를 열어 빈민들을 구휼하고 고부읍의 폐정을 대략 정리하였다.

 농민군이 고부읍을 점령하여 만 3일간 농민통치를 하는 사이에 무장기포 때에 미리 조직화하여 창의를 통지해 둔 각지의 동학 두령들이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읍에 도착하였다. 3월 20일부터 24일까지 고부읍에 모인 농민군을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0700)吳知泳,≪東學史≫(영창서관, 1940), 111쪽 참조.

포 별 지 역 별 두 령 농민군수
손 화 중 포 고창두령 오하영, 오시영, 임형로, 임천서 등
무장두령 송경찬, 강경중 등
흥덕두령 고영숙 등
정읍두령 손여옥, 차치구 등
1,500
1,300
700
1,200
김 개 남 포 태인두령 김낙삼, 김문행 등 1,300
김 덕 명 포 태인두령 최경선
김제두령 김봉년
금구두령 김사엽, 김봉득, 유한필 등

2,000
합 계   6,700

<표>농민군의 고부점령 직후 고부에 모인 농민군

 위의<표>를 보면 무장에서 봉기해 온 4천여 명을 빼고 고부에 도착한 농민군은 약 2,700명 정도였다. 여기에 고부에서 무장한 고부농민 1천여 명을 합하면 농민군 총 수는 7,700명까지 추산해 볼 수 있다. 농민군의 신분적 구성은 양인 노비 출신이 주를 이루었으며, 계급적으로는 주로 빈농 혹은 소작농이었다.0701)신용하,<갑오농민전쟁의 주체세력과 사회신분>(≪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 일조각, 1993), 62∼84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