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2. 동학농민군의 격전
  • 1) 관군의 남하와 황토현·장성전투
  • (1) 농민군의 진군과 감영군의 출동

(1) 농민군의 진군과 감영군의 출동

 갑오년 3월 25일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하는 농민군 부대는 정연한 기율 속에 백산에서 전주성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이들의 1차 목표는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성 점령이었다.

 ‘保國安民’과 ‘東徒大將’ 기를 앞세우고 그 뒤에 청·홍·묵·백·황의 오색기를 벌려 각기 방향을 표시했다. 포사의 어깨에는 弓乙을 붙이고 등에는 同心義盟 넉자를 붙였다. 전봉준 대장은 백립·백의 차림에 손에는 염주를 들고 입으로는 ‘三七’주문을 외며 지휘했으며 대오는 삼삼오오 진법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행진했다.0707)崔琉鉉,≪侍天敎歷史≫,≪東學思想資料集≫3(아세아문화사, 1978), 616쪽.

 이즈음 각 고을의 관청은 자체방어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아전들의 상당수가 농민군에 투신했다. 농민군은 3월 28일 태인현 동헌과 내아를 점령하여 군기를 탈취하고 4월 1일 오전 10시경에는 금구현 원평까지 진출하였다.0708)≪오하기문≫, 75∼76쪽;≪주한일본공사관기록≫1, 2쪽. 이들은 원평에서 진을 치고 하루를 묵으며 전주감영의 동향을 살피는 한편 무장을 강화하고 양식을 확보하는 등 전주성 입성 전략을 모색했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농민군의 심상치 않은 동향을 수시로 조정에 보고하는 한편 감영군을 출동시킬 것을 결심한다. 우선 이서와 군교를 풀어 전주성의 서·남문 경비를 강화하는 한편 농민군을 제압할 감영군을 소집했다. 감영군의 주력은 1893년 설치된 武南營의 병력이었으며 각 고을에서 징병한 향병과 보부상들이 합세했다. 우영관 李璟鎬를 총지휘관으로 하여 영병 7백여 명, 토병 5백여 명, 보부상 1천여 명 등이 진압군으로 편성되었다.0709)鄭碩謨,<甲午略歷>(≪동학란기록≫상), 63쪽. 이들은 4월 3일 오전 10시경 농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금구쪽으로 진출했다.

 감영군의 출동소식을 접한 농민군의 주력부대는 3일 오후 4시경에 재빨리 방향을 바꿔 태인현의 인곡·북촌·용산 등지로 진을 옮겨 버렸다.0710)洪啓薰,<兩湖招討謄錄>(≪동학란기록≫상), 163쪽;≪오하기문≫, 78쪽.

 한편 농민군의 일대는 백산에서 곧바로 부안으로 진출하여 그곳에서 봉기한 세력과 하동면 분토동에서 합류했다. 이들은 약 5백명이었으며 홍·백의 ‘保國安民旗’와 부안·고부·영광·무장·흥덕·고창 등의 읍이름을 새긴 소기 등을 내걸고 행진했다. 부안으로 진출한 농민군 중 2백여 명은 4월 1일 부안 현아에 들이닥쳐 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풀어준 뒤 분토동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아침에는 부안 공형에게 ‘장시에 폐막이 없도록 하라’는 경고문을 보냈으며 일부는 이날 오후 6시경에 분토동에서 서쪽으로 2리 떨어진 서도면 부흥역으로 진을 옮겼다.0711)≪남유수록≫, 甲午 4월 1일;<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163쪽.

 농민군의 주력부대는 4월 3일 밤을 태인에서 지낸 다음 일부 견제병력만을 현지에 남기고 부안으로 이동했다. 4일 오전에는 부안에 진을 치고 있던 농민군 일대와 합세한 농민군 주력부대는 부안 동헌에 돌입하여 현감 李喆和를 감금하고 아전들을 결박한 뒤 군기를 탈취했다.0712)≪남유수록≫, 甲午 4월 5일;<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163쪽. 또한 이날 영광 법성포의 이향에게 다음과 같은 통문을 보내었다.0713)<동비토록>(≪한국학보≫3, 一志社, 1976, 여름), 244쪽.
≪주한일본공사관기록(번역본)≫1, 20쪽.

… 또 우리가 오늘 의거한 것은 위로 宗社를 보존하고 아래로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을 죽음으로써 맹서하였으므로 두려워 동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차례로 살펴 보건대 앞으로 고쳐야 할 문제들로서, 전운영이 吏民에게 폐단이 된 것, 균전관이 폐단을 제거한다면서 폐단을 만드는 것, 각 시정에서 금전으로 나누어 세금을 거두는 것, 각 포구의 선주들이 강제로 빼앗는 것, 외국의 潛商들이 고가로 사들이는 것, 염전에 대한 시장세, 여러 물품을 도매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 起田과 陳田을 막론하고 私田에 백지징세를 하는 것, 오래된 환곡의 본전을 뽑는 것 등등 폐막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농공상의 네 가지 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은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위로 국가를 돕고 아래로 빈사상태에 있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濟衆義所

 이 통문은 폐정개혁에 대한 농민군의 구체적인 요구조항들이 처음으로 제시된 것으로서 영광 법성포 뿐 아니라 당시 농민군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고부·부안·흥덕·태인·정읍·장성·무장·함평 등의 수십 개 고을에 발송되었다고 생각된다.

 4월 6일 오전 농민군의 주력부대는 부안을 떠나 고부를 향해 진군을 계속했다. 태인쪽의 잔여세력들도 진을 풀고 고부쪽으로 향했다. 이들의 합류목표지점은 도교산이었다.0714)<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163쪽. 도교산은 황토산이며, 황토산은 곧 황토현이다.

 감영군은 농민군의 뒤를 쫓아 원평을 지나 백산쪽으로 진군해 왔다. 부안의 농민군을 압박해 가던 감영군은 6일 죽산쪽으로 진출해 있던 일대와 백산에서 합류하여 고부쪽으로 향한 농민군 주력을 추격했다. 감영군은 농민군을 추격하면서 연도에서 닥치는대로 노략질을 일삼아 백성들의 빈축을 샀다. 농민군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던 黃玹은 관군과 농민군의 행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관군은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향병과 영병이 뒤섞여 행군하였다. 행군을 하게 되면 연도에서 닥치는대로 노략질하였고, 점포를 망가뜨리고 상인들의 물건을 겁탈하는가 하면, 마을로 가득 몰려가니 닭이나 개가 남아나는게 없었기에 백성들은 한결같이 이를 갈면서도 겁이나 피했다. (중략) 적(농민군-필자)은 관군의 소행과는 반대로 하기에 힘써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게끔 명령을 내려 조금도 이를 어기지 않으면서 쓰러진 보리를 일으켜 세우며 행군하였다. 이때 관군이나 도적들 양 진영은 모두 양식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만 민간으로부터 먹을 것을 구하여 힘들게 옮겨와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적들의 진영에는 음식을 담은 광주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관군은 굶주린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다.”0715)≪오하기문≫, 79∼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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