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2. 동학농민군의 격전
  • 1) 관군의 남하와 황토현·장성전투
  • (2) 황토현전투

(2) 황토현전투

 황토현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은 4월 6일 오후부터였다. 전봉준이 지휘하는 농민군은 최소 4천여 명이었다. 감영군은 무남영의 정예 병력 3백여 명을 포함하여 도합 2천여 명이었다.

 오후 4시경에 첫접전이 이루어졌다. 첫 접전은 일종의 탐색전이었는데 농민군은 짐짓 패한 척하며 황토현에서 후퇴하여 남쪽의 시루봉 자락으로 진을 돌렸다.

 감영군이 이를 추격하여 황토현에 이르렀을 무렵 날이 저물고 더 이상의 진격이 불가능하게 되자 이곳에서 숙영을 했다. 감영군은 이 일대의 지리에 전혀 생소했고 때마침 비가 그친지 얼마되지 않아 안개마저 자욱했다. 농민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감영군은 소를 잡고 술까지 마셔가며 한가로운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대치 상황에서 때를 기다리던 농민군은 4월 7일 새벽 4시경에 무방비 상태에 있던 관군의 진영을 일시에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오하기문≫은 당시의 전투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이미 날이 어두워져 양쪽이 모두 병영을 점검하여 움직이지 않고 다만 군호를 알리는 포성만 들렸다. 밤이 깊어지자 적(농민군) 진영은 조용해졌고 포성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관군은 의아스러워하며 소나무를 잘라 횃불을 만들고 진영 가득히 장작을 쌓아 놓고 불을 붙이자 진중이 마치 대낮과 같았다. 그러나 막사 밖으로는 연기가 자욱하였고 때마침 안개가 크게 끼어 사방을 분간할 수 없었는데 갑자기 콩 볶듯이 포성이 들리더니 포탄이 발 밑에 떨어지자 관군은 마치 삼이 쓰러지듯 엎어지고 자빠졌다. 적은 삼면을 포위하고 서쪽 한 방향만 열어 놓고 함성을 지르며 압박하자 관군은 일시에 무너졌다. 이 때 날은 이미 훤하게 밝았고 안개도 걷혔으므로 적은 지방에서 모집된 병사로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뒤쫓지 않고 영병으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과 보부상으로 붉은 도장을 찍은 것을 등에 붙인 사람들만 끝까지 따라잡아 어금니를 악물고 칼을 휘두르는 품이 마치 사적인 원수를 갚듯이 하였다. 또 산 아래 너른 들녘에는 봄갈이를 끝내고 물을 받아 놓았는데 아득하니 넓었다. 패잔병들은 물을 보고 뛰어 들었지만 물이 깊고 진흙은 질어 허우적거리다 내리치는 창·칼에 맞아 피가 땅을 적시고 논물을 붉게 물들였다. 관군이 버린 군수물자가 도로에 가득하였다.”0716)≪오하기문≫, 80쪽.

 이날 전투에서 감영군은 1천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다. 영관 李昆陽·태인 보부상의 우두머리 劉秉直·서기 李敦昇 등이 모두 죽었고, 영관 이재섭·유수근·정창권·백낙유 등은 모두 도망쳤다. 관군의 참패였고 농민군의 첫 승리였다.

 황토현 전투에서의 승리는 제1차 동학농민전쟁에서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첫 전투에서 관군을 물리쳐 농민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듯이 올라갔을 뿐 아니라 봉기를 관망하던 일반 농민들이 봉기의 대열에 가담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실제로 황토현 전투 이후 전주성 점령에 이르기까지 농민군의 전력은 양적·질적으로 강화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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