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2. 동학농민군의 격전
  • 1) 관군의 남하와 황토현·장성전투
  • (3) 경군의 남하와 농민군의 남행

(3) 경군의 남하와 농민군의 남행

 한편 농민군의 무장기포와 백산대회의 보고를 받은 정부는 4월 2일 전라감사 겸 壯衛營 정관령이던 洪啓薰을 兩湖招討使로 임명하고, 전라병사에 李文永을 임명하여 농민군의 진압에 나섰다. 장위영 군대는 외국인 교관에 의해 훈련되고 최신무기를 갖춘 정예부대였다.

 홍계훈은 8백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6일 군산에 도착했다. 홍계훈 부대가 군산을 떠나 임피를 거쳐 전주에 도착한 것은 전주감영군이 황토현 전투에서 농민군에 참패를 당한 4월 7일이었다.0717)<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162쪽. 초토사 홍계훈이 거느린 경군은 감영군이 농민군에 패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2∼3백명이 도망해 버려 5∼6백명만 남게 되었다.0718)≪주한일본공사관기록≫1, 12쪽. 도망자 중 상당수가 농민군에 가담했다고 한다. 또한 “초토사는 출병하지 않고 전투도 하지 않았으며 土兵만 앞세웠기 때문에 불평이 많았다”0719)위의 책, 23쪽.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관군 내부에 갈등이 있었고 사기 또한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농민군은 곧장 전주성으로 향하지 않고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정읍·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장성 등 전라도 서남부 지역을 차례로 제압했다.0720)정읍에서 함평까지의 농민군의 행로는<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166∼170쪽 참조. 농민군이 전주성으로 북상하지 않고 남행을 한 것은 농민군의 자체 세력을 강화하고 배후 세력을 완전히 제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농민군은 황토현 전투로 상당한 조직력을 갖추었고 사기 또한 충천했지만, 농민군 토벌을 위해 파견된 감영 주둔 정부 정규군에 정공법으로 맞서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라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남하과정에서 농민군의 세력은 더욱 확대되었고,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경군을 대파함으로써 손쉽게 전주를 점령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곧바로 정읍으로 진출했다. 농민군은 정읍현을 습격하여 옥을 부수어 6명의 죄수를 풀어 주고 군기고를 열어 무장을 강화했다. 농민군은 또 아전들과 농민군 토벌에 앞장선 보부상들의 집을 불태웠다.

 이날 저녁 10시께 고부 삼거리(현 정읍군 소성면 소재지)에서 잠을 잔 농민군은 다음날 8일에는 흥덕으로 나아가 군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확보한 뒤 다시 고창으로 진출했다. 고창읍에 들어간 농민군은 옥문을 깨어 7명의 죄수를 풀어 주고 군기를 탈취했다. 동헌을 파괴하고 인부를 빼앗으려 할 때 고창현감은 도주해 버렸다. 또한 고창 부호 殷大靜의 집을 부수고 불사른 농민군은 다음날인 9일 무장으로 나아갔다. 이 때 농민군의 수는 1만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농민군은 동헌과 공해를 부수고 갇혀 있던 40여 명의 죄수를 석방했으며 향임·이속들을 잡아 들였다. 농민군은 성을 둘러싸고 수시로 포를 쏘며 위세를 나타내는 한편 무장읍 외곽 여시메봉에 진을 쳤다.

 3일 동안 무장에 주둔한 농민군은 12일 아침 영광으로 출발했다. 영광을 점령할 무렵 군수 민영수는 세미를 거두느라 법성포에 있다가 읍의 함락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도망했다. 농민군은 14일께 법성포의 전·후 산과 구곡산 등에 진을 치고 창과 칼을 들고 포를 쏘면서 법성포에 정박한 선박에 들어가 일본인과 선원들을 구타했다. 당시 법성포에는 조창이 있어 세곡을 나르기 위한 전운선의 출입이 잦았으며, 전운영의 횡포에 피해를 본 농민군들은 법성포의 전운선을 몰아내고 세곡 수송을 두절시켰다. 농민군은 4일 동안 영광에 주둔하면서 “매일 진법을 조련하고 밤이면 경문을 송독하는”0721)≪주한일본공사관기록≫1, 19쪽. 등 세력을 정비 강화했다.

 4월 16일 농민군은 두 대로 내누어 3∼4천명은 계속 영광에 머물고, 본대인 6∼7천명은 함평으로 남하했다. 농민군이 함평으로 진격할 때 이 지역 교리·官奴사령·수성군 등 150여 명이 관문을 지키며 대항했으나 농민군의 우세한 병력에 역부족이었다. 관속의 대부분이 부상을 입고 달아나 버렸다.

 이에 앞서 농민군이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접한 영광 각 면 사민 1백여 명이 동헌을 보호하는 것을 보고 농민군은 “우리가 탐관오리를 징치하고 읍폐를 교정코자 왔는데 사민이 자진 수성하는 것을 보니 수령의 치적을 알겠다”0722)<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170쪽.며 선화당에서 물러났다. 대신에 농민군은 공해에 머물며 부민과 공형을 잡아들여 곤장을 친 다음 쫓아버렸다.

 농민군이 남행하여 전라도 전역을 석권하고 있는 동안 초토사 홍계훈은 농민군의 기세에 눌려 접전을 위한 추격을 하지 않고 전주성에 앉아 있으면서 병력을 파견하여 농민군의 꽁무니만 따라다녔다. 농민군이 정읍·흥덕·고창을 거쳐 무장을 점령한 4월 9일 홍계훈은 농민군의 전주 진격을 막기 위해 경병 160명과 향병 200명을 금구·태인으로 파병했다. 초토사 홍계훈은 농민군의 위세가 갈수록 강화되고 있음을 정부에 보고하고 淸兵의 借兵을 건의하는 한편, 진압에 자신을 잃고 증원병을 요청했다. 홍계훈은 전주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 농민군이 영광으로 진격한 이틀 뒤인 4월 14일에야 무장현 근처에 일부 병력을 파견하여 농민군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그는 또 전라감사에게 영을 내려 향병을 동원시켜 순창-담양-광주-나주에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했다.0723)위의 책, 195쪽. 정부는 16일 총관령 산하 강화도 병정 4백명을 증파하기로 결정하고 다음날 일부 증원군을 파병했다. 농민군이 무장에서 영광을 거쳐 함평에 주둔하고 있던 18일에야 홍계훈은 직접 경군을 이끌고 전주를 출발하여 농민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0724)위의 책, 196쪽.

 함평에 주둔하고 있던 농민군은 18일 나주 공형에게 대원군의 재집권과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통문을 보냈다.0725)≪오하기문≫, 87쪽.

우리들의 오늘의 의거는 위로는 국가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케 함이라. 여러 읍을 거쳐 오면서 탐관을 징치하고 청렴한 관리를 표창하며, 읍폐와 민막을 바르게 개혁하며 전운영의 폐막을 영구히 혁파한 것이다. 임금의 명을 듣고 국태공을 받들어 국사를 감독하며, 난신에게 아첨하고 비루한 자들을 모두 쫓아내려는 데 본래 뜻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 官司들은 나라의 형세와 백성들의 실정을 생각지 않고 각 읍의 군대를 동원하여 공격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살육하기를 힘쓰니 이는 진실로 어떤 마음인가. 그 행한 바를 조사하여 마땅히 서로 만나 죄없는 이민을 가려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다. (중략) 이 같은 뜻을 관사에 곧바로 고해 각 읍의 모군을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갇혀 있는 도인들을 바로 풀어 준다면 우리들은 그곳에 들어가지 않겠노라.

 탐관을 징치하고 권귀를 몰아냄으로써 보국안민을 실현하겠다는 농민군의 목표를 여기에 담고 있다. 농민군은 이어 19일에도 경군을 끌고 내려온 초토사 홍계훈에게 呈文을 띄었는데, 역시 폐정개혁을 통한 보국안민이 봉기의 목적임을 강조했다.

 또 다음날인 19일에는 폐정개혁의 항목을 열거한 원정서를 초토사 홍계훈에게 보내었다.0726)≪오하기문≫, 88∼89쪽. 원정서에서 열거한 지방관들의 탐학을 보면 1)軍錢은 아무때나 부과하고 2)환곡은 원본을 회수하고도 이자를 독촉하며 3)세미는 명목도 없이 징수하며 4)민가에 부과하는 각종 잡역은 나날이 늘어가고 5)인척에게 재물을 빼앗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6)轉營官은 실제보다 더 거두어들이면서 독촉이 심하고 7)균전관은 토지면적을 속여서 세금을 징수하고 8)각 관청의 구실아치들은 백성들로부터 강제로 빼앗고 가혹하게 구는 것 등이다. 이러한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서 농민군은 “모든 백성들이 마음을 합치고 온 나라가 상의하여 위로는 국태공을 모시어 부자의 도리와 군신의 윤리를 온전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안정시켜 종묘사직을 온전히 보전하기”0727)≪오하기문≫, 89쪽.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4월 21일 경군이 영광에 도착할 무렵 전봉준은 홍계훈의 경군을 분산시킬 의도로 농민군을 나주와 장성으로 나누어 진격시켰다. 경군을 영광에 묶어 둘 정도의 부대를 나주로 보내는 한편, 본진은 장성쪽으로 향했다.0728)≪주한일본공사관기록≫1, 30∼31쪽. 인천을 출발한 증원군 부대가 목포에 상륙하여 홍계훈의 경군과 함께 남북으로 협공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때문이었다. 보름여에 걸쳐 전라도 서남부 지역을 휩쓴 농민군의 군세는 이때쯤 크게 강화되어 있었다. 농민군의 수가 수천에서 수만으로 불어났고 탈취한 무기로 화력이 강화되었으며, 전술 또한 치밀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곧장 북상하지 않고 남행한 작전의 효과가 나타났던 것이다. 장성에 도착한 농민군 본대는 월평 장터에서 쉬면서 삼봉 아래에 진을 쳤다. 함평에서 나주로 들어간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사잇길로 빠져 장성으로 들어가버린 농민군의 진로는 홍계훈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18일 전주를 출발한 홍계훈의 경군은 금구·태인·정읍·고창을 거쳐 21일에야 영광에 도착하여 농민군의 동향을 살폈다. 이 때 농민군은 함평에서 장성으로 이동한 뒤였다. 경군은 다음날 농민군을 쫒아 장성으로 향했다. 마침내 농민군과 경군 간에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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