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2. 동학농민군의 격전
  • 2) 전주성의 점령과 화약
  • (1) 전주성 점령

(1) 전주성 점령

 갑오년 4월 27일 아침이 밝았다. 삼천에서 하루밤을 묵은 1만여 명의 농민군은 전봉준 대장의 지휘 아래 아침 일찍부터 전주성 공략에 나섰다. 용머리 고개를 중심으로 진을 편 농민군은 성내외의 동정을 살피다 마침내 정오 무렵부터 전주성 공격을 개시했다. 27일은 마침 서문 밖에 장이 서는 날이었다.≪동학사≫는 농민군의 전주성 입성 장면을 다음과 같이 실감나게 기록하고 있다.0737)≪동학사≫, 123쪽.

동학군은 장꾼들과 함께 섞여 이미 수천명이 시장 속에 들어와 있었다. 때가 오시쯤에 이르자 장터 건너편 용머리 고개에서 일성의 대포소리가 터져 나오며 수천방의 총소리가 일시에 장판을 뒤덮자 장꾼들이 정신을 잃고 뒤죽박죽되어 서문과 남문으로 물밀듯이 들어가는 바람에 동학군들은 이들과 섞여 문안으로 들어서며 함성을 내지르고 총질을 했다. 서문에서 파수보던 병정들은 도망질하기에 바빴다. 순식간에 성안에도 동학군 소리요, 성밖에도 또한 동학군의 소리다. 전대장은 유유히 대군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들어와 선화당에 자리하니…

 이른바 무혈입성이었다.

 사실상 전주성은 무방비 상태였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4월 18일자로 이미 파면되었고 ‘督判交涉通商事務’으로 있던 金鶴鎭이 후임으로 임명되었으나 아직 부임하지 않고 있었다. 감영의 군사들은 초토사 홍계훈 군에 배속되어 있었기에 전주성은 이미 무장해제 상황이나 다름 없었다.

 농민군은 동문을 제외한 서·남·북문에서 공격했으며 장성전투에서 노획환 대환포로 서문을 깨뜨렸다. 곧 성문이 열렸고 전봉준은 전라감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을 접수했다.0738)이하 전주성 함락 상황은≪동학사≫, 123∼124쪽 참조.

 전라감사 김문현은 체통도 잊은 채 가마를 버리고 떨어진 옷과 짚신으로 변복한 뒤 동문을 빠져나가 공주까지 도주했다. 달아난 것은 김문현 뿐이 아니었다. 중영장 임태두, 판관 閔泳昇 등도 자신의 목숨 하나를 도모하는 데 바빴다.

 경황중에도 조경묘 참봉 장효원은 慶基殿에 모셔져 있는 태조의 御影을 둘둘 말아 허리에 꽂고 조경묘에 있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李翰의 위패를 끌어안고 위봉산성을 행해 내달렸다. 홀로 달아나던 판관 민영승이 장참봉을 발견하고는 어영을 재빨리 넘겨받아 위봉사 대웅전에 모셨다.0739)<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173쪽. 성을 버렸다는 죄를 훗날 면제받고자 하는 영악함이었다.

 선화당에 자리한 전봉준은 농민군의 대오를 정비하고 4문을 굳게 방비하는 한편 기강을 세우며 농민군의 무질서를 바로잡아 나갔다. 이들은 성 안에서 검가와 검무를 즐겼으며, 옷감을 거두어 오랫동안 갈아 입지 못한 겨울옷을 벗고 여름옷을 새로 지어 입기도 했다.

 한편 전봉준의 계략에 말려 5백여리를 뒤쫓아 다닌 홍계훈의 경병들은 전주성이 함락된 27일에야 뒤늦게 금구에 도착했다. 홍계훈은 장성 전투에서 선봉 이학성이 패배하고 농민군은 갈재를 넘어 정읍으로 향했다는 보고를 받고도 곧바로 출발하지 않고 영광에 머물러 있다가 25일에야 영광을 출발하여 고창, 정읍을 거쳐 금구에 도착했던 것이다.0740)위의 책, 172쪽. 홍계훈은 금구에서 ‘전주성이 비도의 손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주성이 점령된 이유를 “감영부의 관속배 중 내응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0741)위의 책, 173쪽.이라고 중앙정부에 보고했다.

 전주성 점령은 동학농민전쟁의 전기간에 걸쳐 농민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이자 최후의 승리이기도 했다.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상지이자 전라도의 심장부였으며 호남일대의 으뜸가는 부였다. 따라서 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은 중앙정부에까지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전주감영의 점령은 곧 전라도의 장악을 의미했고 나아가 조정에 대한 실질적 도전을 뜻했다.

 전주성 점령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4월 29일 긴급 대신회의가 고종의 주재하에 열렸다. 이 자리에서 고종은 淸兵借兵案을 제기하였다. 김병시 등의 반대의견도 있었으나 여러 대신들은 ‘事勢가 부득이 하다’고 하여 동의하였다.0742)<甲午實記>(≪동학란기록≫상),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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