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2. 동학농민군의 격전
  • 2) 전주성의 점령과 화약
  • (2) 완산전투

(2) 완산전투

 전주성을 점령함으로써 농민군은 1차목표를 달성했다. 무장기포 이후 한달여 남짓 전라도 서남부 지역을 잇따라 점령하여 치밀한 작전으로 관군을 유인한 뒤 전주성을 마침내 함락시킨 것이다. 그러나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농민군은 그동안 유인작전으로 관군을 효과적으로 분산시켰으나 전주성 입성으로 관군과의 정면 전투가 불가피해졌다. 전주성을 놓고 농민군의 수성과 관군의 공성으로 치루어진 완산전투는 향후 동학농민전쟁의 방향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되었다.

 농민군의 뒤를 쫓아온 홍계훈의 관군은 4월 28일 전주 용머리고개에 도착했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한 다음날이었다. 관군은 바로 완산에 진을 쳤다. 내칠봉, 외칠봉, 좌우칠봉의 삼면칠봉으로 이루어진 완산은 최고봉이 해발 186m밖에 안되지만 전주성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전주성 남쪽을 빙둘러 요소요소에 주력부대를 배치한 관군과 성을 차지한 농민군이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대치함으로써 전주는 일촉즉발의 전운속에 휩싸였다.

 수성과 공성의 입장이 바뀐 농민군과 관군의 완산전투는 관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홍계훈의 관군은 28일 진을 친 직후 곧바로 농민군이 주둔한 전주성을 향해 야포공격을 퍼부었다. 이에 농민군 수백 명이 성을 나와 동서로 완산칠봉을 오르려했으나 저지당했다.

 이날 오전부터 날이 저물도록 양군 간에 공방전이 벌어졌다. 전투 결과에 대해 홍계훈은 “갑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고 천보총을 쏠 수 있는 자 30인을 포함하여 수백 명의 적을 참획했다”0743)<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173쪽.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농민군 측에 다소 피해가 컸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관군이 성 안을 향해 대포를 쏘아대서 경기전이 훼상했고0744)<全琫準供草>, 初招問目(≪동학란기록≫하), 528쪽. 성 안밖의 수천 호가 불에 탈 정도로0745)<갑오약력>(≪동학란기록≫상), 64쪽. 관군의 포격이 격심했다.

 이후 며칠간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29일에는 농민군이 북문으로 나와 황학대를 공격할 때 관군이 회선포를 쏘아 농민군 수백 명이 사살당했다.0746)<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173쪽. 5월 1일에는 “적은 남문으로 대대가 떼거리로 몰려 나왔지만, 관군이 회선포를 발사하자 맥없이 흩어져 다시 달아났다. 이때 죽은 사람이 300여 명이었다.”0747)≪오하기문≫, 99쪽. 2일에는 농민군이 서문쪽으로 몰려나와 용머리고개의 관군 진영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관군이 또다시 대포를 계속하여 발사하자 다시 물러났다. 연이은 대포공격에 농민군은 점점 흐트러지기 시작하였다.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사활을 건 대접전은 5월 3일에 이루어졌다. 농민군은 이날 오전 10시께 서문과 북문으로 진출해 사마교와 구근 하류를 건너 유연대를 공격했다. 농민군의 위세에 눌린 유연대 주둔 관군은 남쪽으로 도주했고 이를 추격한 농민군은 일거에 다가산을 점령한 뒤 관군의 본영이 있던 완산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이날 농민군의 모습에 대해≪오하기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0748)≪오하기문≫, 100쪽.

선봉에 선 이복룡은 커다란 깃발을 세우고 유연대를 거쳐 황학대를 지나 곧바로 완산으로 올라갔다. 이들은 마치 굴비를 꿰듯 한 줄로 늘어서서 진격하였으므로 다만 좌우의 상황만 살필 수 있었을 뿐, 앞뒤의 상황은 알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앞에 가던 사람이 꼬꾸라져도 뒤에 오는 사람들은 알지 못한 채 용기를 내어 봉우리를 기어 오르며 더욱 기세등등하였다. 계훈은 칼을 뽑아 손에 들고 큰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하였고 경병은 연달아 대포를 쏘았다.

 설욕을 노리던 농민군은 이날 전투에서도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전주성으로 다시 후퇴했다. 이날 전투에서 농민군은 전봉준이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고 소년장사 이복룡(당시 14세)과 용장 김순명을 잃었다. 그외에도 수백 명의 농민군이 전사하고 농민군 전열이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0749)<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174쪽. 농민군 중에 도망자가 속출하고, 일부에서는 전봉준을 잡아 홍계훈에게 바치고 목숨을 빌어보자는 논의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날 전투를 끝으로 관군과 화약을 맺어 5월 8일 농민군이 자진해산할 때까지 더 이상의 전투는 없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