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2. 동학농민군의 격전
  • 2) 전주성의 점령과 화약
  • (3) 전주화약

(3) 전주화약

 5월 3일 대접전 이후 농민군의 동요가 있자 전봉준은 5월 4일 홍계훈에게 읍폐민막의 개혁을 위한 폐정개혁안이 포함된 所志를 제출하였다.0750)위의 책, 207쪽. 5월 5일 內署에서 홍계훈에게 보낸 전보에서는 “귀하의 말을 믿을 수 없다. 기어이 소멸하도록 하라”0751)<兩湖電記>, 39쪽;정창렬, 앞의 글, 160쪽. 시달하였는데, 조정에서는 5월 5일 현재로서는 전봉준의 휴전제의를 거부하기로 결정하였다고 생각된다. 5월 6일 오후 2시경에 전봉준의 使者 2명이 홍계훈에게 와서 다시 휴전을 제의하였다. 5월 7일에는 그 사자가 일전에 소지한 바 민원을 상계하고 실시하면 해산하겠다는 供文(각서)을 제출하였다. 5월 5일 이후 조정에서는 논의를 거쳐 전봉준의 휴전제의를 수락하기로 결정하고 고종이 홍계훈에게 수락을 지시함으로써 5월 7일에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즉 정부에서는 27개조의 폐정개혁안을 실시하고 농민군은 전주에서 철수하기로 협정되었던 것이다. 이에 제1차 농민전쟁은 전주화약으로 종결되었다.

 전봉준이 전주성을 점령하여 서울로 진격한다는 애초의 계획을 중단하고 정부군과 화약을 맺은 연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정부군이 농민군 토벌의 목표를 성취하지 않은 채 휴전에 합의한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농민군과 정부군이 각각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먼저 농민군의 상황을 보자. 첫째로 농민군 최고 지도자 전봉준은 淸兵의 파병을 크게 의식했다. 조선정부가 4월 29일 청군의 파견을 요청하는 조회문을 청국에 보내자 이를 기다리고 있던 청국의 북양대신 이홍장은 5월 2일 즉시 910명의 병력을 출발시키고, 뒤이어 1,500명의 병력을 출동시켰다. 이에 5월 5∼7일에 걸쳐 2,500명의 청군이 충청도 아산만에 상륙하였다.0752)신용하,<갑오농민전쟁 시기 집강소의 설치>(≪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 일조각, 1993), 163쪽. 농민군은 전주화약 후 5월 12일의 통문에서 “듣건대 청병은 3천명 뿐이라고 하는 데 수만 명이라고 와전되었고 또 각군 군대가 길에 쫙 깔려 있다고 하기 때문에 우선 잠시 퇴병하였다. 지금 들으니 그렇지 않아서 후회가 막급이다. 일이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청병이 퇴거하기를 기다려서 다시 의기를 들 것이다”0753)≪주한일본공사관기록≫1, 89쪽.고 하였다.

 둘째로 청·일 양군의 진주로 인한 국제분쟁의 확대와 국가적 위기를 막기 위해 전봉준은 휴전을 제의했다. 일본은 4월 30일 조선 조정이 청국에 청군의 차병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는 보고를 받자 즉시 수상 伊藤博文의 주재하에 참모총장과 차장을 참석시킨 내각회의를 열어 조선정부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일본은 청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기 전인 5월 6일부터 약 6,000명의 혼성 여단을 인천 부평지구에 상륙시키고 5월 10일에는 주조선 일본공사 大鳥圭介가 420명의 육전대와 20명의 순사에 대포 4문을 이끌고, 농민전쟁의 ‘진압’을 위해서 경군이 모두 남하하여 무방비 상태에 있는 서울에 침입하였다.0754)박종근,≪청일전쟁과 조선≫(일조각, 1989), 16∼17쪽. 일본군과 청국군 침입의 정보가 들어오자 그 이전까지 결사적으로 관군에 공격적이었던 농민군 총대장 전봉준은 나라의 앞일을 염려하여 관군과의 화약을 모색하게 되었다.

 세째로 戰勢上의 불리함과 농민군의 동요로 화약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군은 무장기포 이후 승승장구, 승리의 쾌거로 이끌어왔던 전세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이곳 전주성에서 맞고 있었다. 28일의 첫싸움에서부터 손실을 입은 농민군은 싸움을 걸기도 하고 선공을 당하기도 하면서 치러낸 싸움마다 전과보다는 피해를 거듭 입었다. 가뜩이나 열세 속에 놓여 있던 농민군 진영이 참패한 것은 5월 3일의 전투에서였다. 그간의 접전에서 관군의 신식무기를 제압한 농민군이었지만 이미 대포로 무장한 관군의 위력을 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동안 전투마다 승리로 사기가 진작되어 있던 농민군에게 예상치 못한 전세가 펼쳐지자 농민군 내부에서는 예상보다 큰 충격으로 동요가 일어났고 지도부 또한 이러한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한 전략이 필요했을 것이다. 게다가 농심을 천심으로 알고 살아 온 농민군으로서는 농번기가 닥쳐 있어 어떤 형식으로든 이 상황을 돌파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네째로 제1차 농민전쟁과정에서 농민군은 폐정개혁안을 끈질기게 제기하고 휴전교섭 과정에서도 완강하게 요구하였는데, 이로 보아서 농민군은 위정자들이 청일양국군의 침입으로 조성된 국가적 위기를 고려하여 농민군의 현실성있는 요구를 수락하여 폐정을 개혁하리란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었고, 그러한 이유에서 휴전화약을 제기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관군의 입장에서도 전주성 공방을 계속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관군의 병력만으로는 농민군의 진압이 힘들다고 판단한 조선정부는 淸兵의 차병을 요청하여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일본군이 제물포조약을 빙자하여 군대를 출동시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 출병을 강행하려는 일본을 막기 위해 정부는 원세개에게 청국군의 상륙을 중지시킬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군은 기민하게 5월 6일 이미 제물포를 통해 입경했고, 같은 시각에 청국군 또한 아산의 백석포에 상륙하여 정부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농민군의 위압적인 대세를 외세에 의존해 쉽게 해결하려했던 정부로서는 스스로의 계책에 옭아매인 셈이어서 이에 대한 해결이 시급했다. 거기에다 전주성에서의 전투가 관군의 승리로 역전되자 당초의 원병 빌미가 이미 없어진 상황에서 청·일 병력의 출병은 빨리 들어내야 하는 화약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정부로서는 청일 양국군을 철수시킬 명분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든 빠른 시일 내에 전주성을 되찾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실제로 조선정부는 화약 후 5월 10일에는 청국에, 5월 11일에는 일본에 철병요구를 했다.0755)위의 책, 29쪽.

 양측의 이러한 사정이 맞물려 협상이 시작되었다. 고종은 외국군, 특히 일본군 주둔의 빌미를 없애기 위해 신임 전라관찰사 김학진에게 신속히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전권을 주었고, 김학진은 농민군과 협상을 해서라도 전주성을 수복하여 자신의 임무를 완성해야만 했다. 전봉준은 청일 양국에 군사주둔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화약을 맺되, 봉기의 시초부터 주장해 온 폐정개혁의 실시를 요구하였다. 27개조항으로 된 농민군 측의 요구를 김학진과 홍계훈이 받아들임으로써 협상이 타결되자 5월 7일 ‘전주화약’이 비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그리하여 홍계훈은 농민군의 안전을 보장하는 勿侵標를 발급하였고 농민군은 5월 8일 전주성을 관군에게 비워주고 ‘귀화’라는 형식적 이름 하에 자진해산하였다.

 제1차 동학농민전쟁은 ‘전주화약’이 이루어지고 농민군들이 일단 전주성에서 나와 해산하였으므로 막을 내렸다. 비록 농민군이 당초의 목표대로 서울로 직향하여 중앙권력을 변혁시키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관군을 격파하고 정부가 파견한 경군까지 곤경에 몰아 넣어 ‘폐정개혁’의 약속까지 받아냈다는 것은 어찌됐든 농민군으로서는 눈부신 성과임에 틀림없었다. 이는 과거의 민란에서 국지적으로 고립되어 안핵사에 의해 주모자가 체포되어 효수되고 민란군이 해산되는 것을 반복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엄청난 진전이었다. 이런 점에서 전주화약은 성공적인 쾌거로 평가되고 있는 제1차 동학농민전쟁의 승리를 상징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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