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3.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
  • 1) 조세수취체제에 대하여
  • (4) 환곡에 관한 요구조항

(4) 환곡에 관한 요구조항

 9)∼11)은 還穀제도에 관련된 요구조항이다. 還穀은 본래 빈민구제를 위하여 설치한 대부제도인데 조선 후기에는 그 성격이 변질되어 소위 삼정의 문란 중에서도 환곡의 폐가 가장 심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이것은 지방관의 고리대업의 수단이 되었으며, 지방관은 帳簿위조에 의한 불법징수, 이중징수, 이자율의 인상 등으로 농민을 항상적 채무자로 몰아간 것이었다. 환곡을 통한 농간에는 군현의 수령 뿐만 아니라 각 도의 감사도 개입하고 있었다. 환곡 시행에 따르는 폐단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환곡을 分給·收斂할 때 폐단이 따랐으며 환곡 逋欠의 폐도 계속되었다. 가장 심각한 폐단은 元還穀이 없어진다는 것이었다.0770)위의 책, 157쪽. 게다가 수령이 교체되는 경우 기왕의 逋欠으로 인한 허부화된 원곡을 채우기 위해 다시 농민에게 징수하였다. 농민군이 환곡의 폐단 중에서 특히 ‘臥還은 그 본전을 뽑아 버릴 것’이라든지 ‘환곡은 옛 수령이 그 본전을 거둔 것은 다시 징수치 말 것’을 주장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이와 같이 농민군의 환곡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도 역시 제도 그 자체가 아니라 법에 정해진 대로 시행하고 관리의 부정을 없애자는 것이었다.

 10)은 社倉 혹은 賑庫를 철폐하라는 요구를 담고 있다. 고종 4년(1867)에는 환곡의 폐를 시정하기 위해 社倉制를 실시하기로 하였는데, 社倉節目에 의하여 먼저 社倉을 각 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동에 설치하고 근실하고 부유한 자를 택하여 社首로 삼아 이를 관장토록 하되 각 동의 근간인으로 동장을 삼아 사수의 지시를 받아 감독케 하였다.0771)위의 책, 164쪽. 그러나 据納者에 대한 감독은 당연하다 하더라도 流亡者에 대해서는 동민에게 공동책임을 지웠기 때문에 실제로는 종래의 白徵과 다름없었다. 또한 사창미까지도 환곡과 같이 중외의 경비보충의 주요한 재원으로 쓰이고 고리대금업으로 이용되자 농민에게는 이름을 달리한 또 하나의 수탈기구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농민군은 새로 생긴 社倉 혹은 賑庫를 혁파할 것을 주장한 것이었다.

 11)은 고리채에 관한 조항이다. 조선 후기에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환곡의 고리대화로 인해 사적인 고리대 행위는 널리 퍼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지방의 영읍에서는 庫債라 하여 均役·賑恤 등의 庫錢을 그 관리자가 유용하여 빌려준 다음 사리를 도모하는 일이 흔했다.0772)위의 책, 177쪽. 고리대 행위의 자행 중에서도 공금을 유용하여 이를 대부하거나 또는 公債를 빙자하여 사채를 勒徵하는 폐가 매우 심했다. 이와 같이 사채가 대부분 공금을 이용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낼 때에는 당연히 수령의 권력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농민군은 ‘오래된 私債를 官長을 끼고 억지로 받아 내는 것을 일체 금할 일’이라고 하여 사채를 강제로 대부하거나 억지로 빼앗는 것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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