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3.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
  • 1) 조세수취체제에 대하여
  • (7) 탐관오리에 관한 요구조항

(7) 탐관오리에 관한 요구조항

 위에서 살펴 본 田政·軍政·還穀 및 雜稅에 관한 폐단의 매개고리는 기실 거의 모두가 지방관리, 즉 守令과 吏胥의 불법·협잡·탐학이었다. 그리하여 동학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의 주요한 공격대상은 貪官汚吏이며 국정을 위태롭게 하는 매관매작을 행하여 국권을 조롱하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전봉준은 “각읍의 守宰는 上納을 칭하고 혹 結卜을 加斂하여 戶役을 횡탈한다. 조금 부유한 백성이 있으면 공연히 죄로 엮어 재산를 늑탈하고 토지를 횡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0782)<전봉준공초>, 재초문목(≪동학란기록≫하), 532쪽.고 보았으며, 이로 인한 농민의 피해를 없애기 위해 봉기했으며 그 구체적인 공격목표를 전라도의 탐학한 관리의 일소와 중앙의 賣爵權臣의 배제에 두고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또 농민군이 무장에서 기포할 때 발표한 倡義文에서도 관료층의 부패가 국가의 위망을 초래하며 만민을 도탄의 극에 빠뜨리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국가의 위망을 염려치 않고 오로지 ‘肥己潤家之計’를 꾀하고 있는 公卿 이하 方伯·守令에 이르는 탐학이야말로 농민군의 주요한 공격대상이었던 것이다. 16)에서 보는 바와 같이 거의 모든 개혁안에서 중복하여 貪官汚吏의 징치를 요구하는 조항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면 농민군의 공격의 목표를 잘 알 수 있다. 또 농민군은 이러한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자 실력으로 탐관오리를 징치하기도 하였다.

 수취체제의 문란과 직접 관련되는 조항 외에도 농민군이 구체적으로 제시한 守令·吏胥의 탐학행위가 여러 가지로 저질러지고 있었다. 17)은 守令이 인민의 토지와 묘지를 점탈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英朝朝 이후로 수령이 民家나 民塚을 점탈하는 것은 법으로 금해 왔지만, 수령이나 관찰사가 그들의 권세를 믿고 인민의 토지나 묘지를 점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宮房이나 班家에서 묘지의 경계를 무시하고 이를 광점하는 경우 민답이 이에 몰입되는 수도 있었다.0783)≪日省錄≫, 高宗 7년 9월 6일조;한우근, 앞의 책, 183쪽. 농민군은 이와 같이 지방관이 그 권세로써 民田을 점탈하고 묘지를 함부로 발굴하는 불법을 규탄하고 ‘各邑 守令이 자기 地方에서 田庄을 사들이는 것을 嚴禁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8)의 조항은 公金의 유용에 관한 것이다. 공금의 逋欠·犯用이 삼정을 여러모로 더욱 어지럽게 하였기에 농민군은 逋吏 자체를 규탄의 대상으로 삼았다. 조선 후기에는 경외를 막론하고 吏胥의 民에 대한 주구가 심하였다.0784)吏胥輩가 逋欠을 자행하게 된 이유는 그들에게 일정한 봉급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위에 그들은 신분지위의 향상을 좀체로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흔히 營邑의 各庫 色吏에 차출되어 여기서 생활비를 마련하게 되어 있었다. 한우근, 앞의 책, 188쪽. 결세는 물론 각종의 상납까지도 모두 포흠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중 대동·저치미 등을 포함한 환곡에 있어서 그 폐가 가장 심하였다. 이러한 이서의 逋欠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관부에서의 감독이 없을 수도 없어서 그것이 바로 民斂·族徵의 폐단을 자아내었다. 농민군에 ‘各邑의 포흠한 吏胥는 千金이상이면 죽이고 族徵하지 말 것’을 주장한 것은 이와 같은 사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19)는 任債에 관한 요구조항이다. 각 읍에서 새로 吏任을 선임할 때 차임되는 衙前은 금전을 상납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는데 이를 任債라고 했다. 그것은 또 비단 衙前 즉 吏任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랜 관습에 따라 鄕任(座首·別監)이나 校任(향교의 役員)·面任 등에까지도 예사로 되어 있었다. 탐학한 수령은 관례 이상의 뇌물을 받게 되기가 일쑤여서 이러한 뜻에서는 흔히 任賂라 하였다.0785)한우근, 앞의 책, 195쪽. 그러나 이같은 임채는 결국은 吏胥 등이 평민을 침탈하는 근원이 되었기 때문에 농민군은 ‘各邑의 吏屬을 임명함에 있어 任債하는 일을 嚴禁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20)은 각읍 관아의 잡비를 충당하는 데서 나타나는 징렴의 폐단을 지적한 것이다. 관아에서 사용하는 物種은 官庫와 임시물자를 다루는 民庫가 있어 각각 민간으로부터 구입하였는데 관아에서는 官需를 구입할 때 시가에 좇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공정가격이 낮게 정해져 시가보다도 헐값으로 강제 구매하는 일이 잦았다. 또한 관에서 권력을 의탁하여 가격조작에 의한 부당이득을 취하기도 하였다.0786)위의 책, 201쪽. 게다가 당시는 만성적인 인플레 상태에 있어 저가격에 의한 물자수용은 수용되는 측에 큰 손실을 가져 왔다. 그리하여 농민과 영세상인의 생활은 더욱 큰 핍박을 받았다. 농민군이 ‘각읍 관아의 物種所入은 時價에 따라 取用할 것’을 주장한 것은 인플레 하에서의 생활 방위였으며, 관리의 부정과 수탈에 대한 반대를 나타낸 것이다.

 21)은 京·營邸吏의 폐단에 관한 것이다. 京·營邸吏는 경저리, 영저리 등을 말하는데 그들은 공납문첩을 전관하여 왔을 뿐 아니라 대동법 실시 이후로는 공납청부업자의 구실도 하게 되었다. 경저리·영저리 役價米는 법정세 외에 邑用으로 읍민에게서 添徵되는 명색의 하나로 이른바 계판에 드는 것이었다.0787)≪日省錄≫, 고종 15년 4월 4일조;한우근, 앞의 책, 202쪽. 이들 邸吏는 흔히 환곡 등 公穀을 유용하여 고리대업을 하기도 하고, 邸吏 役價를 먼저 환곡의 利殖으로 받아 감으로써 결국은 읍민에게 피해를 주었다. 농민군은 이러한 京·營邸吏의 役價米를 첨징하지 말고 구례에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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