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3.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
  • 2) 무역·상업 문제에 대하여
  • (1) 일본의 경제적 침투에 대하여

(1) 일본의 경제적 침투에 대하여

 농민전쟁에서 제기되었던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은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의 정치·경제적 침략 양상과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농민군이 제1차 농민전쟁 시기부터 ‘斥倭洋倡義’·‘逐滅倭夷’의 기치를 내건 것은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적 침략에 그 원인이 있었다. 농민군이 폐정개혁안을 통해 직접적이고 명시적으로 일본의 침탈에 반대한 것은 미곡의 유출과 외국상인의 내지행상이었다.

 폐정개혁 분류목록 22)는 일본상인의 미곡 유출에 대한 농민군의 요구를 담고 있다. 농민군이 제시한 모든 개혁안에서 미곡의 국외 유출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개항 이후 일본으로의 미곡 유출이 날로 심하여지자 지방관들은 방곡령으로 이를 막아 보려고 하였지만, 그때마다 일본공사의 항의로 철회하게 되고 곡물유출은 늘어가기만 하였다. 이같은 곡물유출로 종래의 국내 곡물수급구조는 위협받았으며, 곡물의 대일 수출 증대에 따른 곡물 상품화의 진전과 곡가의 등귀는 직접적으로 임노동자층과 빈농의 생계를 압박하여 광범한 농민층의 저항을 촉발하는 원인이 되었다.0788)하원호,<곡물의 대일유출과 농민층의 저항>(≪1894년 농민전쟁연구≫1, 역사비평사, 1991), 273쪽. 농민층도 곡물의 상품화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상품화의 이익은 자가소비 부분까지 판매하는 경우에는 수탈의 다른 형식에 불과하였다. 농민이 잉여생산물을 판매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반드시 그 이익이 농민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었고, 조선의 곡물상인과 일본상인, 그리고 봉건지배계급이 농민의 잉여를 착취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0789)하원호, 위의 글, 269쪽. ‘각 浦口 潛商의 쌀거래를 엄금할 것’을 요구조항으로 내건 것은 미곡의 상품화 자체가 강요되고 있는 현실에서 미곡의 유통과정에서 농민층의 이익을 수호하려는 요구였다.

 폐정개혁안 분류목록의 23)은 외국상인의 내지행상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개항 후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한 청국상인과 일본상인은 서울시장에 침투하여 수입품만이 아니라 市廛상인의 전매상품인 백목면, 명태 등의 국내품까지 취급하였다. 이러한 일본상인의 내지행상은 곡물의 상품화를 가속화하며 가격의 등귀를 유발하여 농촌의 임노동자층과 빈농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뿐만 아니라 일본상인의 내지행상은 농민적 상품교환의 장으로서의 농촌 場市에 타격을 가하였다.0790)吉野誠,<李朝末期における米穀輸出の展開と防穀令>(≪朝鮮史硏究會論文集≫15, 朝鮮史硏究會, 1978), 110쪽.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농민군은 ‘各國人 상업은 各港口에서만 買賣케 하고 都城에 들어와 設市치 못하게 하며 各處에서 任意로 行商치 못하게 할 것’을 구체적인 요구로 내세웠던 것이다. 농민군은 수출시장과 연관되어 있던 미곡의 상품화 자체를 반대했다기 보다는0791)전봉준은 체포 후 법정 신문에서 “그러면 일본군대와 경성에 머무르는 외국인들을 모조리 구축하려고 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 다른 나라는 단지 통상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일본은 군대를 거느리고서 경성에 주둔하고 있어서 우리나라의 영토를 침략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아했다”라고 하여 외국과의 무역관계 그 자체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사실로서 전제하고 있었다.<全琫準供草>(≪동학란기록≫하), 538쪽. 미곡 매매를 농촌 장시의 시장질서 내부로 한정함으로써 場市를 중심으로 한 재래의 시장구조의 파괴를 막고, 그럼으로써 지역적인 재생산구조의 유지를 도모하려는 것이었다.0792)吉野誠, 앞의 글, 114쪽. 여기에는 소생산자로서의 농민과 소상인의 이해관계가 표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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