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3.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
  • 3) 기타 정치적 요구조항

3) 기타 정치적 요구조항

 사회경제적 요구조항 이외에 폐정개혁안에 나타나는 농민군의 요구사항으로는 전보국의 혁파, 동학인의 신원, 대원군의 섭정 요구 등 세 가지가 있다.

 먼저 폐정개혁 분류목록 26)은 전보국의 혁파를 주장한 것이다. 개항 이후 일본인이 설치한 전보국의 폐단은 전국 각지를 전선으로 연결하면서 세운 전신주가 농지를 침탈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농민들의 생활과는 전혀 관계없는 전신, 전화는 농민들에게는 토지 침탈로 밖에 해석되지 않았을 것이다.

 27)의 조항은 동학인이라는 이유로 피해를 받은 농민들의 신원을 요구한 조항이다. 동학은 정부에서 금했기 때문에 지방관리들은 동학교도들에 대해 온갖 협박과 박해를 가했을 뿐 아니라 수탈대상으로 지목되면 동학인으로 몰아 부치기도 하였다. 고부민란 후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 군민들에 대해 행한 학정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28)의 요구조항은 농민군의 권력구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조항이다. 제1차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주로 봉건지배층, 즉 민씨정권의 타도를 일차적인 목표로 내걸었다. 그러나 제1차 농민전쟁 단계에서는 농민군은 민씨정권을 타도한 후 대원군의 집정을 막연한 형태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단계에서는 독자적인 권력구상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농민군은 4월 20일경 招討使에게 보낸 湖南儒生原情書에서 “일이 이지경에 이르른즉 억조창생이 마음을 같이 하고 팔도의 백성이 뜻을 모아 위로는 國太公을 받들어 攝政을 맡겨 부자의 인륜과 군신의 의를 온전히 하며,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케 함으로써 宗廟·社稷을 다시금 보존할 것을 죽기로 맹서하고 변하지 않을 것이다”0800)<東匪討錄>(≪韓國學報≫3), 259∼60쪽;≪오하기문≫, 89쪽.라고 하였으며, 4월 18일 羅州公兄에게 보낸 通文에서도 폐정개혁을 “國太公을 받들어 맡김”으로써 폐정개혁을 할 수 있다고 설득하고 있다. 또 전주에서 화약 교섭중이던 5월 4일 招討使에게 보낸 所志에서는 “太公을 받들어 섭정을 맡기자는 것은 그 이치가 심히 당연하거늘 어찌하여 반역이라 일컫고 살해하는가”0801)<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207쪽.라고 하여 대원군 정권의 성립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상에서 제1차 농민전쟁 시기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의 구체적 요구조항들을 검토하였다. 폐정개혁안에 나타난 조세수취체제에 관한 농민군의 요구는 임술민란 단계의 농민들의 요구와 일맥 상통하는 것이었다. 임술민란에서도 농민군의 주된 요구는 전정, 군정, 환곡 등 삼정문란의 폐단을 시정할 것과 수세담당자인 관리들의 부정행위를 포함한 조세제도 운영상의 문제를 주요한 문제점으로 제기하였던 것이다.0802)망원한국사연구실,≪1862년 농민항쟁≫(동녘, 1988), 62∼69쪽 참조. 이것은 동학농민전쟁 시기의 봉건적 모순의 기본구조가 임술년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다만 이 시기에는 그 모순이 더욱 첨예한 형태로 드러났기 때문에 지역적인 봉기의 수준을 넘어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농민군이 제기한 폐정개혁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농민군이 제1차 농민전쟁에 봉기할 때 ‘四大名義’와 ‘檄文’에서 내세운 민씨정권의 타도나 사회신분제의 폐지 등 구체제를 붕괴시키는 근본적 요구를 하지 않고, 당시 봉건정부가 생각하기에도 당연한 봉건적 가렴주구의 폐정의 개혁만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위에서 열거한 개혁안이 전쟁의 적대편에 있다고 인식한 대상, 즉 봉건정부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0803)개혁안의 수취인은 巡邊使, 觀察使 등이었다. 이 경우는 일반적으로 운동의 전략적 목표를 천명하기보다는 상대방이 받아들여 즉각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최소강령을 제시하게 된다. 또한 농민전쟁에 여러 계층이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모든 계층에게 직접적인 생활상의 요구로 나타나는 최소강령을 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폐정개혁안의 분석은 농민들의 구체적인 생활상의 요구를 파악하는 데는 대단히 유용한 것이지만, 농민전쟁의 역사적 성격을 밝히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농민군의 폐정개혁안 자체는 당시의 객관적 조건으로 볼 때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농민군은 당시의 봉건적 수취체제의 모순에서 파생된 여러 폐단들을 들어 그 시정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것이 봉건적 수취체제 그 자체에 대한 공식적인 거부를 표현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通編의 예’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데서 보이듯이 봉건적 수취제도의 정상화라는 외양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 점은 아직 농민군이 봉건정부와의 싸움에서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던 전쟁의 초기 단계에 나타나는 의식과 행동의 미숙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어느 곳을 막론하고 築洑 收稅하는 것을 革罷할 것’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나듯이, 농민군은 봉건정부에 대하여 자신들의 즉자적인 생활상의 요구를 수세적으로 방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삼정문란의 책임을 이전의 민란단계에서는 각 군현단위의 守令·吏胥層에 돌리고 있었던 데 대하여, 농민전쟁의 최고지도자 전봉준은 “민폐의 근본은 吏胥들의 逋欠에 있고, 吏逋는 貪官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탐관은 집권자들의 탐람에 있다”0804)<東學軍通文>(≪나라사랑≫15, 외솔회, 1974), 136∼137쪽.고 하여 그 책임을 궁극적으로 집권세력에 돌리고 있다는 점이 한 단계 진전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개혁안에서는 농민들의 생활상의 요구를 즉자적으로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농민 대중의 의식의 한계를 넘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폐정개혁안에서 나타나는 농민군의 경제적 지향은 봉건적 조세수취체제의 모순이 파생시킨 여러 폐단들을 제거함으로써 소농민 경제의 자립성을 획득 내지 유지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개혁안 자체는 다분히 봉건적 지배질서를 근원에서 부정하고 있지 않을 뿐더러, 공세적이라기보다는 수세적인 요구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당시 봉건체제가 봉건질서 안에서 농민들의 요구를 수렴할 수 없는 객관적 조건에 처해 있었다면, 이러한 최소한의 요구도 봉건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농민군의 주관적인 요구가 설사 봉건체제의 개혁을 통한 구질서의 복귀에 있었다 할지라도, 그러한 요구가 전면적으로 실현된다면 조선왕조의 지배구조는 그 뿌리에서부터 붕괴될 수 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었다. 그 때문에 봉건정부는 그러한 농민군의 요구를 봉건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으로 받아 들여 농민군의 진압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무역·상업문제에 대한 농민군의 요구조항들은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세력의 경제적 침투와 이로 인해 변화된 상업구조에 대한 대응이었다. 조선 후기 이래 발전되어 오던 상품화폐경제는 개항으로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면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자본제 상품의 수입과 곡물의 유출을 통한 제국주의 침탈은 먼저 유통부문을 재편시키며 생산구조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봉건지배계급도 이에 편승하여 수탈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임술민란 단계에서는 아직 본격화되지 않은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여 봉기한 농민군의 상품문제에 관한 구체적인 주장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보면 첫째, 물가 앙등의 원인이 되어 농민들을 핍박하고 있는 미곡의 국외유출을 방지하고 외국 상인들의 내지행상으로 인한 상권 확대를 금지할 것 둘째, 국내의 특권적 상인층(객주, 선주, 보부상 등)의 활동을 제약할 것 등이다.

 첫번째와 관련하여 농민들은 미곡의 상품화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요컨대 필요한 식량을 확보할 수 없을 정도의 미곡수탈이 미곡수출로 귀결되고 있는 사실을 문제로 하고 있는 것이며 다른 한편 미곡상품화의 경로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개항 이후 미곡의 일본유출 경로는 지방관·吏胥가 농민으로부터 수탈한 미곡이 각 포구의 객주를 거쳐 일본인 미곡상을 통해 유출되거나 혹은 보부상이 장시에서 매입한 미곡이 객주를 경유하여 일본인 미곡상을 통해 유출되는 과정을 밟고 있었다. 이러한 경로에 의한 미곡의 상품화는 가격조작에 의해 농민의 불이익을 증대시켰으며 농민경영의 발전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었다. 농민군은 제국주의 침투로 변화된 이러한 미곡유통구조를 개편하려는 지향을 가졌던 것이다.

 두번째로 국내독점상인은 제국주의의 경제침투에 대응하여 더욱 독점이 강화되어 반동화되는 길을 걸었다. 조선정부는 전기적 특권상인들을 매개로 하여 제국주의 침투에 대응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영세 상인층의 활동이 극도로 제한되고 일반 농민들도 독점상인의 매점매석으로 생활에 핍박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농민군은 봉건적 상업구조의 철폐를 요구하고 소생산자적 상품유통의 길을 지향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보부상 조직에도 들어가지 못한 농촌의 영세소상인층이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경제적 요구를 내세웠던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동학농민전쟁은 제국주의 세력과 조선정부 및 독점상인의 이중적인 침탈이라는 모순구조 속에서 허덕이던 농민들이 소상인, 소상품생산자들과 연대하여 제국주의 세력과 봉건지배체제를 무너뜨리려 한 농민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제1차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반제·반봉건의 투쟁목표를 명확한 형태로 표현하고 있었으나, 그러한 투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농민군 스스로의 힘으로 구상하는 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0805)전봉준은 재판과정에서 제1차 농민전쟁의 봉기에 대하여 “무슨 의견으로 거병하였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한 번 세상을 건지고 싶었다”라고 하고 있는데 이 단계에서는 그 내용을 구체화시키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全琫準供草>, 재초문목(≪동학란기록≫하), 534쪽. 농민군은 대원군의 섭정을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하는 데서 보이듯이 아직 기존의 정치구조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제1차 농민전쟁의 단계에서 농민군은 경제적으로는 봉건적 억압과 외래 자본주의의 침략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소상품생산자로서의 자립·발전을 지향하였지만, 그러한 경제적 지향을 실현할 수 있는 독자적인 정치권력 구상을 형성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한계는 집강소 시기의 통치경험과 제2차 농민전쟁 과정을 통해 미구에 극복될 수 있는 것이었다.

<鄭診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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