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1. 동학농민군의 재기
  • 1) 남접농민군의 재기

1) 남접농민군의 재기

 전라도의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서 물러난 직후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청일 양국 군대가 국내에 파병되었고, 이들 군대들이 조선 영토 안에서 전쟁을 벌인 것이다. 국내에 들어온 강대한 외국 군대를 막아낼 힘이 없는 조선정부는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러한 위기는 침략 기회를 노리던 일본의 야욕에서 비롯되었지만 동학농민군의 봉기에 당황하던 당시의 집권층에게도 일부의 책임이 있었다.

 강화병을 이끌고 전라도로 내려간 초토사 洪啓薰은 관군 정예병조차 농민군을 진압하기가 어려운 것을 알게 되자 정부에 淸軍의 借兵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을 받은 민씨정권은 반대론에도 불구하고 全州城이 함락되는 급박한 시기에 淸兵 차병을 결정하였다. 淸의 실권자인 北洋大臣 李鴻章은 조선에 영향력을 강화할 기회가 온 것으로 생각하고 군함 두 척과 陸兵 1,500명을 파병하였다. 청병이 6월 10일 충청도 아산에 상륙하자 지역민들은 전란을 예상하고 동요하였다. 외국군대의 진주 소식을 들은 농민군은 관군의 강화요구에 응해서 정부와 타협을 하고 전주성에서 철수하였다. 조선 정부는 농민군과 화의가 성립되어 정국이 안정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청병의 철수를 요구하였지만 청은 이를 듣지 않았다. 오히려 증원군을 아산에 상륙시켜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고 시도하였다.0985)韓㳓劤,≪東學과 農民蜂起≫(일조각, 1983), 134쪽.

 이 같은 조선의 사정에 즉각 반응한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철병한 뒤 청과의 一戰을 각오하고 군비확충을 서둘렀다. 그리고 농민군이 봉기하고 조선 내부가 소란한 시기에 정탐원을 파견해서 그 같은 사정을 염탐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天津條約에 따라 청이 파병 사실을 통고해 오기 이전부터 군사개입을 결정하고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였다.

 일본 군함 3척이 인천에 도착한 것은 6월 10일이었다. 일본은 조선 정부의 항의도 개의하지 않고 병력을 서울로 진주시키면서 잇달아 인천에 증원병력을 파병하였다. 일본은 서울에 주재하던 러시아와 독일 등 외교관들의 출병 이유를 해명하라는 요청도 무시하였다.

 동학농민군이 해산해서 집강소를 설치하던 시기에 청일 양국 군대는 충청도 아산과 인천에 머물러 있으면서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청은 일본에 공동철병을 제의하였지만 일본은 청일 양국이 조선의 내정을 같이 개혁하자고 역제의하면서 노골적인 간섭 의사를 나타냈다. 그런 한편으로 조선 정부에 내정 개혁방안 강령 세목을 제시하고 개혁을 강요하였다. 일본 정부는 오토리공사에게 군사력으로 왕궁과 서울을 포위하고 조선 정부에게 강제 수단을 쓰라고 지시하였다.0986)陸奧宗光,≪蹇蹇錄≫, 6章.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오전 일본군이 돌연 경복궁을 습격하여 점거하였다. 동시에 京軍 병영에 침입해서 조선 관군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외국군대의 기습에 의해 전례없는 변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경복궁 안에 들어온 일본군은 경회루 부근에 주둔하면서 국왕과 관료들을 위협하여 그들의 뜻에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대원군이 왕명으로 입궐해서 중대한 政務와 軍務를 裁決하였고, 6월 25일 軍國機務處를 설치하여 중앙관제와 사회제도 개혁안을 의결 공포하였다. 전근대 조선의 법제를 개혁하는 甲午更張은 이와 같이 일본군의 궁궐 장악 하에 시작되었다.

 6월 23일 청일 양국 군함이 해전을 벌임으로써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일본 군함이 아산 앞바다에서 청의 군함 두 척을 포격전 끝에 침몰시킨 것이다. 27일에는 청일 양국군이 성환에서 충돌하고, 평택과 아산으로 전투가 이어졌다. 조선 정부는 일본의 강요에 따라 朝日攻守同盟을 체결했던 까닭에 일본군을 지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본은 대규모 군대를 동래에 상륙시켜서 육로를 통해 북상하고 있었고, 독단으로 경인과 경부간 군용전선공사를 벌였다. 일본군의 선제 공격을 막지 못하고 평택과 아산에서 패배한 청국군은 공주와 청주를 거쳐 평양까지 후퇴하였다. 8월 17일 평양에서 일대 회전을 벌였으나 청군이 대패하였다.

 백성들은 경악하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 소식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기감을 갖게 하였다. 이와 함께 국토가 외국군대의 전장터로 변한 소문이 전국에 전파되었다. 조선왕조에서는 외국의 침략을 받으면 유생들이 명분을 내세우고 의병을 일으켜서 침략군과 맞서 싸우는 것이 전통이었다. 삼남의 양반가는 壬亂 당시 의병에 참여한 선대를 가문의 자랑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丙寅洋擾를 맞이해서는 召募使가 임명되어 전국에 걸친 동원체제가 강구되기도 하였다. 1894년 여름 국왕이 외국군대에게 볼모와 같이 억매여 자유롭지 못하게 된 사건은 丙子胡亂 이래 최대의 國亂이었다. 따라서 國定敎學인 유학을 배우고 익힌 유생들은 당연히 擧義蜂起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향촌사회의 양반 유생들은 1894년 여름에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이들의 힘은 관아의 비호 위에 양반으로서 상천민에게 존경을 받을 때 나오는 것이었고, 지주로서 농민들을 지배할 때 유지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분 차별을 용납하지 않고 경제관행을 인정하지 않는 동학농민군이 대두함으로서 이 모든 힘의 원천은 상실되었다. 반면에 양반 유생들이 세거해 온 전라도·충청도·경상도·강원도·경기도의 향촌사회는 점차 동학농민군의 세상이 되어 갔다.

 전라도 각 군현은 전주에서 해산한 동학농민군이 돌아와 읍내를 장악해서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따라서 전라도의 유생들은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결집할 수 없었다. 그런 양상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지역도 같았다. 충청도에서도 동학 조직이 크게 세력을 증대시켜서 관아가 통제할 수 없었다. 경상도와 강원도 그리고 경기도의 많은 군현도 여름이 되면서 동학에 들어가는 농민들이 늘어났다. 거의 전국에서 양반들은 동학도들에게 압도되어 기를 펴지 못하는 상태였다.

 청군을 물리친 일본은 조선정부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하였다. 갑오경장의 급격한 개혁은 관료들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일본의 보호 속에 성립된 새 정권은 대원군과 개화파 인사로 구성되었다. 대원군은 민씨 일파를 배제하기 위해 옹립했지만, 軍國機務處를 다수결 방식의 의결기구로 운영해서 국정에는 간여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나 주요한 개혁은 일본공사 大鳥圭介의 지시대로 따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급격한 개혁에 따른 반발과 함께 일본의 내정 간섭에 대한 반감은 널리 확산되어 갔다. 전라도 구례의 유생 梅泉 黃玹은 일본공사의 標信이 없으면 百官이라도 대궐 출입을 하지 못하게 했다면서 제도개혁과 고위관직이 교체된 사실을 낱낱이 기록하였다.0987)≪梧下記聞≫, 2필 6월(≪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 1), 129∼150쪽. 서울 소식은 지방관에게도 큰 관심사였다.0988)≪固城叢瑣錄≫(필사본).

 1894년 여름에 유생들을 대신해서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했던 세력은 동학농민군이었다. 본래 동학은 외세 배격을 주요 교리로 내세우고 있었고, 일본에게는 강화도조약 이전부터 재침 의도를 우려하면서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아 왔다. 일본군이 서울에 난입하고 경복궁을 침범했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각지의 동학 조직은 즉각 반응하였다. 일본군을 쫓아내기 위한 전쟁 준비에 나선 것이다.

 동학농민군의 對日戰爭 준비는 지휘계통에 따라 체계있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각 지역의 동학 조직이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학교단에서 고위지도자들이 합의하거나 남접농민군 지도자들이 미리 결정을 하고 추진했던 것도 아니었다. 재봉기는 동학농민군의 하부 조직에서 스스로 시작한 무장강화 활동이 발단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0989)愼鏞廈,≪東學과 甲午農民戰爭硏究≫(일조각, 1993), 295∼296쪽. 남접농민군이거나 교단의 영향이 미치던 조직이거나 같은 시기에 준비를 시작하였다.

 일본과 전쟁을 하려면 철저히 대비해야 했다. 일본군은 京軍을 기습해서 일거에 무장해제를 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군대였다. 淸軍도 일방적으로 이겼을 정도의 막강한 일본군을 대적하려면, 관군과 싸웠던 것처럼 사전 대비없이 시작할 수는 없었다.

 동학농민군의 전쟁 준비는 두 가지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軍勢를 키우는 것이었다. 군세를 키우려면 동학에 사람들을 많이 입도시켜야 했다. 전국의 동학 조직에서는 입도자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농민들이 이에 적극 호응하여 대거 들어 왔다. 양반들도 참여해 왔지만 신분면에서 볼 때 농민군의 대부분은 상천민이었다. 입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압박을 가하였다. 양반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입도한 사람은 道人이라고 하면서 서로 도왔고, 입도하지 않은 사람은 俗人이라고 부르며 공세를 취했다. 양반들은 얼굴을 아는 동학도들을 만날 것이 두려워 전전긍긍하였다. 반면에 동학교도들의 활동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다음은 軍需錢과 軍需米를 모으고 武器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包接 단위로 수천 명 또는 수만 명의 군사력을 유지하려면 막대한 돈과 곡식을 마련해야 했지만 가난한 농민들이 이를 제공해 줄 수는 없었다. 동학농민군은 부농과 지주가를 찾아 다니면서 돈과 곡식을 헌납받았다. 각 지역의 동학 조직은 대접주 관할의 包나 수 개의 包가 연합한 都會가 중심이 되어 전쟁 준비를 하였다. 따라서 수십 명씩 떼를 이룬 작은 집단들이 읍내와 마을을 다니며 여러 차례 錢穀을 거두었기 때문에 부농들은 거듭되는 요구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양반지주들은 많은 재물을 헌납하도록 강요받는 동시에 집중되는 탈취에 시달린 까닭에 피신지를 찾아 숨는 사람이 늘어났다. 양반과 향리, 그리고 지주와 부농들은 동학농민군들의 활동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

 향촌사회 내의 이러한 사정은 여름과 가을에 걸쳐서 계속되었다. 동학농민군의 세력은 갈수록 커졌다. 전라도에서는 나주와 운봉만 동학농민군이 읍내를 점거하지 못했지만 다른 군현은 읍내까지 장악한 집강소체제가 대일전쟁을 준비하였다. 충청도의 군현들은 읍내를 제외한 지역이 동학농민군 세상으로 바뀌었다. 경상도는 전라도와 충청도에 이웃한 군현들이 같은 상태로 되었다. 충청도와 경상도의 일부 군현에서도 향촌사회의 질서를 집강이 통제하였다. 경기도 남부 군현과 강원도의 여러 군현에서도 동학 조직은 양반세력을 능가하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

 武器의 확보는 매우 어려웠다. 민간에서 보유한 칼과 창, 그리고 활 등을 수집한다고 해도 그 수량은 많을 수 없었다. 총은 관군이 무장한 것처럼 사정거리가 긴 신식소총은 구하지 못하고 얼마간의 火繩銃을 갖추는 형편이었다. 각 지역마다 대장간에서 칼을 벼려 지니기도 했지만 대개는 죽창을 만들어 무장하는 정도였다. 전라도에서 생산되는 대나무가 충청도와 경상도에 운반되어 죽창 재료로 이용되었다. 먼거리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활과 화살의 마련에도 힘을 쏟았다. 화살은 제작이 가능한대로 많이 만들어서 보유하였다.

 이처럼 전국 각지에서 동학농민군은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재봉기는 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제1차 봉기를 주도한 전봉준을 비롯해서 전라도의 주요 대접주가 합의하여 결정하는 방식을 취해야 가능한 문제였다. 남접농민군의 동원은 그러한 절차를 통해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다른 방식은 제1차 봉기 때 남접의 무장활동에 동의하지 않았던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이 교단의 고위지도자들과 논의해서 결정하는 것이다. 전쟁 준비는 전라도가 중심인 남접은 물론 충청도·경상도·강원도·경기도의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북접 교단조직도 마찬가지로 진행해 왔지만 최시형은 기포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6월 말 이래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에게 봉기에 나서도록 유도하는 시도가 외부에서 나오고 있었다. 하나는 흥선대원군이 밀사를 보내서 봉기를 촉구한 일이다.0990)李相佰,<東學黨과 大院君>(≪歷史學報≫17, 18합집, 1962).
金洋植,<대원군 일파의 정변계획과 농민군과의 관계>(≪근대한국의 사회변동과 농민전쟁≫, 신서원, 1996).
대원군은 정치 일선에 다시 나와 국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재결했으나 군국기무처의 설치와 동시에 실권을 빼앗겼다. 그 뒤 대원군은 청일 간의 전쟁이 청군의 승리로 종결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평양에 주둔한 淸軍과 연락을 취하였다.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병하고 친일개화파 정권도 무너질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삼남지역에 밀사를 나누어 파견하면서 전봉준 등에게 편지를 보내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 호응해 오기를 요청하였다. 전봉준 등은 이에 즉각 따르지는 않았지만 정국이 변화하는 양상에 따라 재봉기는 언제나 시작될 가능성이 있었다. 대원군이 밀사를 각지에 파견해서 봉기를 유도하고 정변까지 계획한 일들은 일본 공사관의 탐지망에 걸려서 세밀한 부분까지 파악되고 있었다.0991)≪駐韓日本公使館記錄≫5, 47∼49쪽.

 두 번째는 일본인들이 순창에 있던 전봉준을 찾아와서 봉기를 선동한 사실이다.0992)韓㳓劤,<東學軍에 대한 日人幇助說 檢討>(≪東方學志≫8집, 1967).
姜昌一,<天佑俠과 ‘朝鮮問題’>(≪史學雜誌≫97卷 8號, 1988).
韓相一,<동학과 일본우익:天佑俠과의 제휴에 관한 고찰>(≪갑오동학농민혁명의 爭點≫, 집문당, 1994), 265∼279쪽.
일본은 1차봉기가 일어났을 때부터 조선 내의 사태를 면밀히 주시하며 天佑挾의 浪人輩를 첩자로 보내서 정보를 수집하였다. 이들 浪人輩들은 동학농민군을 지지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전봉준 등과 만나 도와 주겠다고 하면서 재봉기를 사주하였다. 이들은 조선 내부에서 혼란을 야기시켜 일본이 개입할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였다. 낭인배들의 부추김은 그리 관심을 끌지 못했다. 반일 주장을 갖고 있던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 이들의 말에 미혹되었거나 이후의 사태 진전에 영향을 받은 흔적은 없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가운데 가장 먼저 재봉기의 움직임을 드러낸 사람이 김개남이었다. 김개남은 6월 25일 남원에 들어가서 전라도 동북부 군현들인 순창·용담·금산·장수 등지의 예하 조직을 독자 세력으로 관장하였다. 60여일 동안 결집한 세력은 무려 5∼6만에서 7만 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8월 25일경 김개남이 재봉기를 선언하자 전봉준이 남원으로 가서 만류하였다.0993)≪梧下記聞≫2필. 그 요지는 “청일 간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군대가 앞으로 우리를 공격할 것이니 지금은 歸化에 의탁해서 여러 군현에 흩어져 있다가 사태가 변하는 것을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全琫準은 동학농민군이 비록 수는 많으나 훈련이 되지 않아서 정예군과 싸우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같은 생각은 대접주 손화중도 같았다. 손화중도 농민군 조직의 내부 실상을 털어놓고 김개남의 봉기 주장에 반대하였다.0994)위와 같음. 봄봉기가 시작된지 반년이 지나서 전라도 전역을 장악했다고 하나 “이름있는 士族이 따르지 않고 재산있는 사람이 따르지 않고 글 잘하는 선비가 따르지 않았으며”, 합류해 온 사람들은 “愚賤해서 禍를 즐기고 剽竊을 기뻐하는 무리”이기 때문에 지금은 사방에 흩어져서 안전하게 지내는 편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김개남은 이러한 반대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의 주장으로 알려진 말은 “대중은 한 번 흩어지면 다시 모으기 어렵다”는 것 뿐이지만 정국을 파악하는 시각이 전봉준 등과 다르지 않았는가 한다. 8월 말은 각지에서 동학농민군이 이미 무장활동에 나서고 있던 시기였다. 전라도는 물론 충청도와 경상도 군현에서도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활발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기세를 몰아서 재봉기에 나서자는 주장은 일면 타당성이 있는 것이었다.

 당시 동학농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지역도 나타나고 있었다. 경상도 예천에서는 읍내의 민보군이 동학농민군 11명을 埋殺한 사건을 둘러싸고 13명의 대접주들이 都會를 열어 읍내를 봉쇄하였다가 28일 저녁 읍내 공격을 시도하였다. 비록 민보군의 완강한 반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동학농민군이 패배하였지만 이 사건은 南營兵을 순회시키고 일본군이 파견되는 등 경상도 북부 군현을 전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와 함께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충돌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일본군은 淸과 전쟁하기 위해 부산부터 서울까지 병참망을 구축하고 요지마다 병참기지를 두어 소수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경상도 북서부에는 해평·낙동·태봉·문경에 일본군 병참부를 설치하였는데, 태봉 인근의 山陽에서 동학농민군이 대규모로 聚會하고 일본군에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그러자 태봉병참부에서 대위 1명과 사병 2명의 정탐조를 파견하였으나 발각되어 竹內大尉가 피살되기에 이르렀다.0995)≪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16∼117쪽. 이 사건은 1894년에 처음으로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이 맞부딛친 사건으로서 그 즉시 일본군이 예천과 산양 일대의 동학농민군 근거지를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0996)위의 책, 126∼128쪽. 8월 29일 오전 일본군은 석문리를 기습해서 屋舍 11칸에 보관해 둔 화승총 103자루, 칼 천자루, 銅錢 9貫을 탈취해 갔다(≪甲午斥邪錄≫, 9월 1일자). 이미 8월 말이 되면 북접농민군은 민보군과 일본군에 맞서 전투를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전봉준이 8월 말에 재봉기를 결정하지 않고 미룬 것은 여러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직접 밝힌 내용은 다음 세 가지이다.0997)≪全琫準供草≫, 五招問目. 問;旣曰倡義 則聞宣卽行 何待十月고 供;適有矣病 且許多人衆을 不能一時齊動 兼之新穀未登 自然至十月이외다. 첫째, 수많은 사람들을 일시에 모두 집결시키기가 불가능하였다는 것이다. 전주성에서 나온 동학농민군들은 대개 출신지별로 각 군현에 흩어져서 활동하였고, 또 포접조직에 새로 합류한 사람들도 각기 근거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래서 한 지역에 모두 집결시켜서 체계를 갖춘 군사조직으로 만든다는 작업은 군사지도자로서 본다면 불가능하다고 표현할 만큼 어려웠던 것이다. 더욱이 ‘수만명’ 규모로 모인다면 이들을 위한 군량미와 무기 확보도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어렵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다음은 새 곡식이 익기를 기다렸다는 말이다. 동학농민군은 말 그대로 농민들로 구성된 군대였다. 따라서 논밭에서 곡식이 익어가고 곧 추수를 해야하는 때에 농민들에게 농촌을 떠나서 기포하라는 봉기령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갑오년은 조선 후기에 맞은 최대의 흉년이었다. 3년째 이어지는 가뭄 때문에 식량이 부족해서 고생을 한 농민들이 추수기를 앞두고 굶주리는 가족들을 남겨둔 채 전장터로 떠날 수는 없었다. 전봉준은 이러한 상황을 외면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는 전봉준 자신이 병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사로운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군사조직은 철저한 上命下服의 위계질서가 있어야 기능을 발휘하는 조직이다. 동학농민군이 무장봉기를 하면 수많은 병력을 장악해서 전투에 임해야 할 최고 군사지도자는 무거운 책임이 뒤따르게 된다. 따라서 전국에서 봉기할 동학농민군의 최고 지도자로서 그 책임을 져야 할 전봉준이 병약한 상태에 있으면 大軍의 지휘에 지장이 초래될 것이기 때문에 봉기를 늦출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9월 초순 전봉준의 결단에 따라 마침내 남접농민군의 재봉기가 결정되었다. 8월 하순까지 기포에 반대했던 전봉준이 생각을 바꾼 큰 이유는 상황이 급변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김개남이 봉기를 강행하려고 한 사실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0998)愼鏞廈, 위의 책, 298∼300쪽. 김개남은 남접농민군 조직에 지도력을 행사하는 점에서 전봉준과 경쟁하는 위치에 있었던 지도자였다. 그가 전봉준과 손화중의 만류를 듣지 않고 봉기에 나선다면 누구도 막을 방도가 없었다. 따라서 일부만 기포하는 상황을 지켜보기 보다 전면 봉기를 결정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재봉기 움직임은 김개남 뿐만이 아니었다. 각지에서 전쟁 준비에 나선 동학교도들은 무장을 하고 다니면서 이미 재봉기한 것과 다름없이 활동하였다. 주한일본공사 大鳥圭介가 외무대신 金允植에게 보낸 書翰을 보면0999)≪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32∼133쪽. “금년 8월에서 9월로 접어드는 때로부터 경상 전라 충청 각도에서 東學黨이 再起하여 良民들에게 심한 害를 입혔고 財物을 약탈하고 있으며 … ”. 일본군도 9월 초가 되면 再起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이 서한의 요지는 8월 말과 9월 초에 이미 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서 제1차 봉기 사태와 같은 상태가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에 일본군을 보내서 진압하겠다는 통고였다.

 전봉준은 淸軍이든 日本軍이든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러 올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평양 大會戰에서 일본이 승리한 소식은 일본군이 곧 동학농민군을 공격하러 내려온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전봉준이 적절한 시기라고 확신을 했던 하지 않았던, 9월에 들어서서 대세의 흐름은 재봉기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남접농민군의 대도소로 선정된 장소는 삼례였다. 삼례는 1892년 교조신원을 위한 동학집회가 열린 곳으로서 전주 북쪽의 넓은 벌판에 위치하였다. 전라도의 동학농민군이 북상하는 길목에 있는 要衝地이기도 하였다.1000)<全琫準判決宣告書原本>(≪東學關聯判決文集≫, 정부기록보존소, 1994), 30쪽. 삼례역의 집결지에는 1차봉기 때부터 전봉준이 이끌던 4천 명의 정예 동학농민군이 다시 모여들었다. 남원의 김개남은 독자 행동을 하고 삼례 집결지에 오지 않았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