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1. 동학농민군의 재기
  • 2) 북접농민군의 기포

2) 북접농민군의 기포

 동학교단은 1894년 봄 사전에 허락을 받지 않고 남접농민군이 무장봉기에 나선 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敎祖 崔濟愚가 정부의 탄압을 받아 처형된 이후 관헌의 추적을 받으면서 동학의 교세를 비약적으로 키워 온 제2세 교주 崔時亨은 兵亂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전에 이필제에게 이끌려서 교조신원을 표방한 兵亂에 휩쓸린 까닭에 동학조직이 거의 무너질 정도로 위기에 처했던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전라도와 충청도의 일부 동학조직을 책임진 접주들이 교주의 권위를 무시하고 독자 판단으로 무장봉기에 나선 일은 전례없는 사건이었다.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접주들은 교주 최시형과의 사이에 긴밀한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오랜 동안 관헌의 탄압 속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인맥은 동학의 전국망을 유지하는 바탕이 되었다. 최시형을 정점으로 하는 동학 조직의 내부에서 교주와 대접주 그리고 접주를 연결하는 위계질서는 엄격하였다. 전봉준이 동학의 포접조직을 중심으로 농민군을 결성하고 무장봉기한 사실은 이같은 질서를 크게 무너뜨린 사태였던 것이다.

 최시형은 남접농민군의 봉기에 대하여, 敎祖伸寃을 둘러싼 논란이 있을 때와 같은 내용으로 반대 논리를 폈다. 그것은 때를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시형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건져내려고 해도 “아직 운이 열리지 않았고 또 때가 오지 않았다”고 표현하였다.1001)≪侍天敎宗繹史≫二編下. “玄機不露 勿爲心急 此是先師之遺訓也 運旣未開 時亦未至 勿爲妄動 益究眞理 毋違天命也” 1890년대에 들어서서 동학에는 수많은 농민들이 입도해 왔고, 또 유능한 인물들도 들어와서 교세가 크게 증대되었다. 따라서 마음 급하게 행동하지 않고 시간을 기다리면 동학 조직이 전국에 걸쳐 견고하게 기반을 잡을 것이 예상되었다. 그러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대세를 장악하여 동학에서 지향하는 이상사회를 만들 기회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최시형과 동학교단은 무장봉기를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남접농민군에 뒤이어 輔國安民을 내세우면서 다투어 봉기하는 동학 조직들을 적극 막으려고 하였다.1002)위의 책. “是時各處敎徒 聲言輔國安民 爭相揭竿而起 師憂其不遵指敎 馴致厲階 遂另差都禁察 令束各包” 이 조치는 효과가 있었다. 전라도 일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학 조직이 최시형의 가르침에 순응하였기 때문이었다.

 충청도 회덕과 진잠에서 전라도지역과 동시에 일어났던 봉기의 기세는 대단하였다. 청산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4월 8일 회덕 읍내에 들어가서 관아에 보관된 무기를 탈취하고 진잠으로 향했는데 그 무리 중 흩어진 사람만 천여 명이라고 했다. 회덕에 남아 있던 이들은 청주의 진남영병이 들이쳐서 진압이 되었다.1003)<聚語>(≪총서≫2), 122∼123쪽.
<東匪討錄>(≪총서≫6), 165쪽.
충청도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이 쉽게 진압된 것은 감영과 진남영병의 재빠른 기선 제압이 효과가 있었기도 했지만 큰 이유는 주변 군현의 동학 조직이 호응을 하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최시형은 동학교도들에게 修道者로서 正業에 힘쓰며 天時를 기다리기를 요구하였다. 아직 그 때가 오지 않았는데 黨與를 모아 서로 응원하면서 과거의 불만을 터뜨리면 나라에도 해가 되고 생령을 도탄에 빠뜨리는 근심이 된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단호히 동학의 敎案에서 이름을 빼는 징계를 하겠다고 밝혔다.

 더 나아가 각 포에 명해서 都接主가 都講長을 겸하고, 副接主가 副講長을 겸하게 해서 매달≪동경대전≫과 동학가사를 배우는 講席을 열도록 하였다. 그래서 의문이 나는 구절은 계통을 따라 法所에 알리고 각 포의 都講長은 사계절의 마지막 달에 모여서 서로 會講하도록 했다.1004)위와 같음. 한창 전라도 일대가 동학농민군의 무장봉기로 격동하던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동학 교단의 지침을 따르던 조직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전라도의 남접농민군이 무장봉기한 사실은 관헌의 기찰에 쫓겨 오던 동학교도들에게 엄청난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더구나 황토현에서 監營軍을 물리치고 京軍과도 싸워서 이긴 다음 전라도의 首府인 全州를 점령한 소식은 충격처럼 들려왔다. 이와 더불어 각 지역의 동학 조직은 농민들이 다투어 입도해옴으로써 크게 고무되었다. 3월 이후에는 이전과 같이 은밀히 포교하는 것이 아니라 공개리에 활동하기에 이르렀다. 충청도와 경상도의 각 군현에서 활동하던 동학 접주들과 접소의 위치도 인근에 알려지게 되었다.

 충청도의 동학 교세는 크게 증대되어서 군현의 지방관은 물론 감사까지 막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충청감사 이헌영은 신임감사로 제수되어 新延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국왕에게 경내 전 지역이 보은집회 이래 동학교도들의 聚散을 거듭하며 소란한 상태에 있는 사정을 보고하고 있다.1005)<錦藩集略>(≪총서≫4), 4쪽. “所謂匪類 自昨春報恩經擾以後 餘黨尙此聚散無常 湖西則雖不若湖南之猖獗 而至於懷德鎭岑等邑 未免侵逼 全省自爾騷訛 及今撫綏安業 爲急先務” 충청도와 경상도의 일부 군현에서는 전라도의 집강소 설치를 본따서 집강을 差定하여 향촌 내의 문제를 처리하기도 하였다.1006)충청감사 이헌영이 永同 執綱 孫仁澤 등에게 보낸 別甘을 보면 감영에서 영동의 집강 선임과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나 한다. 또 경상도 金山에서도 片甫彦이 都執綱을 칭하고 활동한 기록이 나온다(<錦藩集略>(≪총서≫4), 57∼58쪽;<歲藏年錄>(≪총서≫2), 258쪽.

 일본군의 경복궁 습격 사건은 북접교단 예하의 동학 조직을 분격시켰다.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는 동정을 종합하면, 6월 말부터 동학 조직들은 일본세력을 조선 안에서 내몰기 위해 義兵을 일으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전쟁 준비에 나섰다. 이러한 변화가 최시형을 비롯한 대접주 등 고위지도자들의 결정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하부조직에서 독자 판단에 따라 노선을 바꾼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동학의 위계질서상 대접주가 모르거나 사전에 지침을 내리지 않았는데 말단 접주나 동학교도들이 독자 활동을 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최시형과 교단의 고위지도자들이 머물고 있었거나 출입이 잦았던 보은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보은군수 鄭寅亮이 감영에 보고한 牒呈에 따르면, 7월 2일 동학교도 수백 명이 보은 사각면 고승리의 냇가에 모인 일이 있었다. 한 老敎徒의 생일을 맞이하여 회집한 것인데 군수가 해산시키려고 현장에 갔더니 五里 밖의 山谷에 따로 자리를 만들어서 억지로 데리고 간 뒤 이번 모임이 倡義를 위한 것이라며 군수에게 倡義頭領이 되어 주기를 청했다.1007)이 때 군수 정인량이 반대하며 제시한 이유는 첫째 지금 서울 사정을 알지 못하고 妄發하는 것은 불가하고, 둘째 지방관으로서 東學輩 두령이 될 수 없고, 셋째 창의한다고 해도 巡兵營 兩營에 먼저 보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군수 정인량은 관리로서 동학교도들과 함께 할 수 없다며 반대했지만 동학이 아니라 士儒로서 창의한다며 정인량을 都約長으로 이름을 올리고, 副約長에는 任圭鎬1008)任奎鎬의 誤記. 임규호는 또 任局鎬(≪駐韓日本公使館記錄≫)와 任局浩(≪討匪大略≫)로 잘못 표기되기도 한다.·黃河一·李觀榮·金在顯과 이방 李商準을 기록했다.

 이 사례는 두 가지 주목할 점을 전해 준다. 첫째는 7월 2일이란 시점이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 날자는 6월 21일이었는데 불과 10일만에 보은에서 동학교도들이 봉기를 위한 준비 모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 소식을 들은 즉시 대응에 나선 모습을 전해 준다.

 다음은 副約長에 이름이 오른 인물들이 동학 교단의 고위지도자라는 점이다. 任奎鎬와 李觀榮은 忠慶大接主와 尙公大接主로서 예하에 수많은 교도를 거느린 교단의 고위지도자였다. 임규호는 청주 옥산출신으로 동학에 입도한 뒤 보은 일대에서 포교하여 이 지역의 실력자로서 부각된 사람이다.1009)북접농민군 대군이 공주 우금치공방전 이후 충청도로 귀환할 때 상주 소모영유격병대가 그 지도자를 정탐하였는데, 이 지역사람들이 북접농민군을 이끄는 최고지도자로서 임규호를 지목하였다(金奭中,≪討匪大略≫). 이관영은 경상도 북서부에서 가장 강력했던 동학조직인 상주 공성면에 근거를 가진 대접주였다. 황하일은 그가 속한 包名은 확인할 수 없으나 대접주 반열에 속한 인물로서 남접지도자들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고, 일본군의 정보보고에도 보은의 동학 ‘巨魁’로 임규호보다 앞서 기명하고 있는 사람이다.1010)≪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94∼196쪽.

 교단의 고위지도자들이 가담한 이러한 시도를 교주 최시형이 사전에 허락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각면은 교단의 고위 지도자들이 수시로 회동하는 보은 장내리의 대도소와 최시형이 주로 머물던 곳의 인근 지역이기 때문에 그 같은 동향은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최시형이 이를 우려했다거나 금지했다는 기록은 없다. 대접주들이 앞에 나섰던 이 사건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 소식이 전해진 뒤 동학 교단의 분위기가 義兵 봉기로 집약되고 있었던 사실을 분명히 전해 준다.

 교단의 고위지도자들이 관할한 포접조직의 동학교도들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활동한 모습을 보여 준다. 對日戰爭에 관한 의지는 교단과 하부조직이 서로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각처의 접소에는 입도하는 농민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세력을 가진 동학교도들이 관아의 통제력을 무시하면서 활동 내용도 달라지게 되었다. 경전을 익히고 주문을 외우며 수행하기에 힘쓰기 보다 양반과 향리들에게 억압받아 온 농민 집단으로서 한풀이하는 사건들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수십 명씩 떼를 지어 上典家나 地主家에 난입해서 과거사를 보복하는 사례는 지역별로 수없이 일어났다. 진천에서는 현감이 교체되었지만 동학교도들이 舊官을 願留한다면서 新官이 오는 것을 막기도 하였다.1011)<錦藩集略>(≪총서≫4), 58쪽. 왕조정부의 지방관 교체까지 동학교도들이 간여하려고 한 일이었다.

 충청감사 이헌영과 호서선무사 鄭敬源은 이를 막을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없는 까닭에, 전라도에서 실시하는 방책처럼 충청도에서도 집강을 임명하여 동학교도들이 스스로 불법행위를 금지하도록 하였다.1012)≪洪陽紀事≫, 甲午 7月 20日. 7월 15일 밤 정경원이 공주 감영으로 찾아가 감사와 만나는 자리1013)≪錦藩集略≫, 7月 15日.에서 이 조치가 논의된 듯 보인다. 집강으로 선임된 사람들은 동학의 대접주 또는 접주들로서 그 명단은 감영에 보고가 되었는지 8월 하순 충주에서 동학농민군을 진무하던 宣撫使가 소지하고 있었다.1014)≪駐韓日本公使館記錄≫2, 61∼64쪽. 일본군은 宣撫使(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으나 음력 8월 하순에 巡行하는 것으로 보아 李重夏로 추정됨)에게 명단을 받아 大鳥圭介공사에게 보고하고 있다. 충청감사 이헌영은 영동에서 천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인가에 들어가 錢財를 탈취해 간 것을 금지하지 못했다고 영동집강 孫仁澤1015)≪駐韓日本公使館記錄≫2, 64쪽에는 孫仁澤의 이름 중 가운데 글자를 읽지 못해서 口字로 覆字임을 표시하였다.에게 甘結을 보내서 질책하고 있다.1016)<錦藩集略>(≪총서≫4), 57∼58쪽.

 충청도 군현의 집강소는 최시형이 허락해서 설치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1017)朴孟洙,≪崔時亨硏究≫(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6), 242쪽. 그렇지 않으면 대접주나 접주가 집강이란 이름으로 활동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시형이 머물던 보은·청산·옥천·영동·황간 등지에는 동학의 유력한 지도자들이 두 명씩이나 집강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또한 청산에는 八路都執綱이란 직함으로 활동한 인물도 있었고,1018)<討匪大略>(≪총서≫11), 468∼469쪽. 金景淵은 權吏로서 집강이 되어 현감까지 협박하고 무단을 꺼리지 않은 인물이라고 정탐되어 상주 소모영 유격장 金奭中이 체포 처형하지만 이 사건까지 포함해서 청산현감은 越權을 이유로 김석중을 감영에 고발하고 있다. 八路都省察과 副省察도 있었다. 이들이 이런 직함을 가지고 전국의 동학 조직이나 집강소의 개혁활동을 관장하는 일이 가능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폐정개혁을 수행하는 군현 단위의 接所를 동학 교단 또는 대접주가 나서서 지도하는 모습은 확인이 된다.

 경상도 예천에서는 백성들이 訟詞가 있으면 관부를 찾지 않고 동학 접소를 찾았으며, 마치 道伯처럼 행장을 차린 東徒 檢察官 張克元이 수행원을 데리고 각 읍을 순행하였는데 風威가 호랑이와 같아 가는 곳마다 소송자가 모여들어 저자를 이루었다고 한다.1019)≪甲午斥邪錄≫, 8月 20日. 동학농민군의 包事는 보은의 교단과 상의해서 조정했으며 擧事도 그렇게 해서 결정되었다고 했다. 이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按廉使 姜華山은 같은 시기에 풍기와 예천을 순회하였다.1020)≪渚上日月≫, 8月 14日. 이런 모습은 1894년 여름에 교단과 대접주 차원에서 包接의 동학 조직을 이끌어 나가는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같은 교단의 간여나 지도가 교주 최시형의 지침과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최시형은 남접농민군이 전라도 일대에서 폭력을 행사하며 俗人을 능멸하고 非法을 저지르는 행위를 걱정하였다. 그런 상태는 점차 충청도와 경상도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 동학 조직에 대거 들어온 新入道人들과 말단 접주들이 휩쓸려 다니면서 양반과 지주들에게 보복행위를 하는 소식이 교단에 속속 전해졌다. 官令은 위세가 떨어졌고 세금은 거둘 길이 없었다. 향리들은 읍내를 떠나 面里에서 공무를 수행하는 것을 두려워 했다. 包에 따라서는 强包가 弱包를 위협하는 일도 생겼다. 무장활동을 앞세우는 남접계통의 조직이 교단의 지침을 따르는 조직에 적대하는 행위였다.

 충청도 정산에서는 동학 조직에 힘이 있는 것을 이용해서 수십 명이 무장을 한 채 떼를 지어 십수 년 전의 빚을 받아 내는 일이 있었고,1021)<錦藩集略>(≪총서≫2, 260∼261쪽), 甲午 7월 7일, 定山縣監 牒呈. 경상도 김산에서는 명당을 빼앗은 지주가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끌어낸 뒤 錢財를 탈취해 가는 일도 있었다.1022)<歲藏年錄>(≪甲午以後日記≫). 이런 일은 전국에서 무수히 일어났다. 최시형은 여러 차례 불법을 저지르는 동학교도들을 만나서 깨우치고 또 편지를 보내서 경계하였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따라서 8월에 들어와 이를 금지하는 강력한 내용의 통유문을 각지에 보내고 11條의 지침을 정해서 ‘金石之典’으로 삼도록 했다.1023)<侍天敎宗繹史>(≪총서≫29), 109∼112쪽.

 이 지침은 다음 몇 갈래로 정리된다. 첫째는 신입도인의 증가로 혼탁해진 동학조직의 계통과 위계질서를 바로잡는 내용이다. ‘각 包의 사무는 한 가지로 당해 主司와 別任의 知委에 좇을 事’와 ‘각 포 교도가 法所와 布德所의 文憑을 가지지 않고 마음대로 聚黨하는 사람은 즉시 제명할 事’, 그리고 ‘각 포 사무는 대소를 막론하고 法所와 布德所의 指諭에 따라 삼가 봉행할 事’는 모두 조직 질서를 강화하기 위한 조항이다.

 둘째는 교도로서 건실한 생활을 강조한 것이다. ‘修身行事는 반드시 忠孝로서 根本을 삼고 居家執事는 耕讀에 힘쓸 事’와 ‘주정, 도박, 騙財는 결코 도인의 행위가 아니니 일깨워도 좇지 않는 사람은 영구히 제명할 事’가 이 범주에 들어간다.

 셋째는 包接 간과 교도들 사이에 서로 다투지 말도록 하는 내용이다. ‘무리한 일로 서로 詰難하며 毆打하는 사람은 同門 交友로서 대할 수 없으니 鳴告하여 각 포에 回示할 事’로 표현했지만 여기에는 坐包와 起包의 다툼을 금지하는 뜻이 있다. 더 강력한 항목은 ‘他包의 교도가 侵勒의 폐가 있으면 指名해서 法所에 즉각 알릴 事’이다. 이것은 일찍이 무장을 하고 包勢를 키운 남접의 교도들이 교주의 지시에 따라 무장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북접 계통의 교도들을 위협해 온 행동을 금지시킨 항목인 것이다.

 넷째는 사회관행상 불법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킨 일이다. ‘남의 무덤을 강제로 파헤치고 錢財를 강탈하는 사람은 실정에 따라 관에 알려서 罪를 科할 事’와 ‘각 포 교도가 黨勢를 믿고 마땅히 갚아야 할 재물을 갚지 않고 도리어 부당한 재물을 취하는 사람은 엄히 징벌할 事’ 그리고 ‘누구든지 오래되었건 근래의 것이건 빚 문제에 절대 간여하지 말 事’는 동학교도들이 주로 양반과 지주 또는 향리들에게 취했던 공세를 사안별로 나열한 것이다. 그 중 극심하다고 본 勒掘人塚이나 錢財奪取 등 화적과 같은 행위를 하면 관아에 알려서 죄값을 치루도록 하였다.

 다섯째는 官衙와의 관계를 설정한 것이다. ‘官令에 복종하고 세금을 제때에 내도록 힘쓰며 營邑에 죄를 짓지 말 事’란 항목은 수 많은 군현에서 관아의 농민통제력이 상실된 당시의 실정을 생각하면 오히려 놀랄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최시형은 국왕이 임명한 지방관의 권위를 인정하고 동학교도들에게 관령에 복종하기를 요구하였다. 농민들에게 무겁게 조세를 부과하고 그 위에 중간 수탈이 가중되어 온 것을 고려하면 公稅를 제때에 납부하도록 정한 지침도 보복이나 한풀이를 인정하지 않는 최시형의 지도방향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갑오년 8월은 교단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에서도 동학교도들이 동학농민군으로 그 성격을 전환해 가던 시기였다.1024)동학농민전쟁 연구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동학교도와 동학농민군은 구별해야 한다. 말 그대로 동학농민군은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이 군사편제를 하고 武裝을 갖춘 뒤 군사활동에 나섰을 때 쓸 수 있는 용어이다. 갑오년의 사정을 서술하는 글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동학에 입도한 사람들을 모두 동학농민군으로 표현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대일전쟁을 준비하던 동학농민군은 지방관아나 민보군과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으며 일본군과도 충돌하고 있었다. 8월 2일에는 동학농민군 수천 명이 무장한 채 깃발을 앞세우고 감영이 있는 공주 부내로 들어와서 시위를 하였다. 12일에는 천안에서 동학교도들이 일본인 6명을 살해한 일이 일어났다.1025)≪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18쪽. 19일에는 수천 명이 금강 근처에 모여 공주로 들어간다고 해서 감영의 군졸과 각 동민을 동원해서 밤새 防守하는 일이 있었다. 노성현에서는 무기를 탈취당해서 현감이 罷黜되었다.1026)<錦藩集略>(≪총서≫4), 43∼44쪽. ‘金石之典’이 동학 조직에서 준수되기에는 어려운 시기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관동포의 예하 조직인 경상도 예천에서 이 지침을 따른 실례가 확인된다. 8월 11일 首接主 崔孟淳이 유천접주 趙成吉을, 읍내에 東徒 10여 명을 보내 지주 李裕泰에게 보복 구타한 사실을 기록한 罪案과 함께 읍내에 압송한 것이다. 동학농민군과 읍내의 민보군이 극단의 대치상태에 있었던 때의 일이었다. 교주 최시형의 지침은 교단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하부 조직에서 이처럼 존중되었다.

 9월에 들어서도 최시형의 우려는 그치지 않았다. 남접 各包는 아직 재봉기를 결정하지 않았지만 擧義를 내세워서 민간을 侵掠하는 일이 두드러졌고, 동조하지 않는 북접 교도들을 戕害하는 등 용납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만약 잘못되면 동학교도들이 玉石의 구분없이 모두 다칠 위험도 있었다. 그래서 또다시 이를 금지하고 전국의 敎友들이 오로지 각 포 두령의 지시와 단속에 따르도록 하라는 통유문을 발하게 된다.

 이러한 통유문에는 일본군의 침략과 관계된 언급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1027)1915년 간행된≪侍天敎宗繹史≫는 처음 저술된 동학사 기록이기 때문에 뒤에 나온 교단사 저술에 큰 영향을 주지만 무단지배가 혹심했던 일제강점기라는 간행 시기와 侍天敎側의 기록이란 점에서 한계가 있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일본과 관련된 자료는 세심한 사료비판이 요구된다. 반면에 최시형이 결정하지 않았으면 진행되기 어려운 대일전쟁의 준비사업은 교단의 내부에서 오랜동안 추진되어 왔다. 대접주들이 나서서 동학농민군의 확대와 무기 및 군량 확보를 위한 노력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淸義大接主 孫天民은 근거지인 청주 松山에서 기포 준비를 하였다. 가을 찬바람이 난 이후 본격화되면서 화승총을 구하여 사격 연습을 하고 화약을 몰래 제조하였다. 칼은 대장간에서 벼려서 가져오고 전라도에서 운반해 온 대나무로 날을 세운 죽창도 만들었다. 예하 접조직에는 돈과 무기를 보내서 각기 봉기에 대비하도록 하였다.1028)≪다시피는 녹두꽃≫, 321∼332쪽.

 예천은 關東大接主 李元八이 주재해서 강원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상도의 13접주가 모여 회합을 가졌던 곳이었다. 동학농민군과 읍내의 민보군은 서로 대치하는 속에서도 斥倭와 通文을 전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상반된 의견을 나누었다. 동학농민군 수천 명이 읍내를 공격하기 전에 민보군에게 같이 합세해서 일본과 싸우기를 원했지만 민보군은 “斥倭는 朝家와 관계된 일”이라서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라고 거부하였다.1029)≪甲午斥邪錄≫, 8월 28일.

 교단의 지침을 충실히 따르는 包接에서도 9월에 들어 오면 남접지역과 같은 상황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상도에서는 눈앞에 공격할 대상이 보였다. 일본군 병참부나 전신선로였다. 동학농민군은 전신주를 뽑아내고 전선을 절단하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고, 근거지에 집결해서 병참부를 기습하려고 시도하였다. 일본군은 즉각 대응해서 인근 병참부의 주둔병 등을 보복을 위한 증원군으로 파견하였다.

 성주에서는 읍내에 접소를 설치하고 활동하던 10여 명의 동학교도들을 향리들이 체포한 뒤 처형하였다. 영남 북서부에 세력을 편 영동포·상공포·선산포·충경포는 연합해서 보복할 것을 결의하고, 9월 초 수천의 동학농민군을 동원해서 읍내를 점거하고 인가에 방화하였다.1030)≪星山誌≫,≪歲藏年錄≫,≪討匪大略≫. 이로 인해 읍내가 전소하고 인근의 지배층은 전전긍긍하였다. 이처럼 시국은 동학조직을 지키려는 최시형이 감내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전봉준의 남접농민군이 재봉기해서 삼례에 대규모로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은 교단의 영향 아래 있던 조직들도 자극시켰다. 예천 읍내를 공격한 동학농민군은 민보군에게 패배하였다. 예천의 민보군은 동학농민군이 집결했던 마을과 동학교도들에게 호되게 보복하였다. 그에 뒤이어 일본군과 남영군도 경상도 북서부 일대를 순회하면서 동학농민군 가담자들을 체포하는대로 처형하였다.

 강원도에서도 9월 4일, 영월·평창·정선과 충청도 제천 등지에서 온 수천명의 동학농민군이 강릉 읍내를 점거하였다. 삼정 폐막의 개혁과 보국안민한다는 게시문을 내어 걸고 읍내에 머물던 동학농민군은 양반과 향리들이 민보군을 만들어 야밤에 기습해 온 것을 막지 못하고 다시 대관령을 넘어 후퇴하였다.1031)<東匪討論>(≪총서≫12), 123쪽.
<臨瀛討匪小錄>(≪총서≫12), 246∼251쪽.
이와 같은 상황과 함께 각지에서 동학교도들이 慘殺된다는 보고가 최시형에게 잇달았다.

 한편, 남접농민군이 봉기하면서 북접 교단조직과의 사이에 갈등이 심각해졌다. 최시형의 지시를 따르는 포접 조직은 전라도에도 적지 않았다. 이들 조직은 최시형의 기포령이 내려 오지 않았기 때문에 삼례 집결지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로 말미암아 서로간에 언쟁과 육박전을 벌이다가 殺傷을 하는데 이르기까지 충돌하게 되었다.1032)吳知泳,≪東學史(草稿本)≫(≪총서≫1, 483∼485쪽). 충청도에서도 충주와 진천 일대에서 남접 계통의 徐璋玉·許文叔과 북접 계통의 辛在蓮이 벌이는 갈등은 정도를 넘어섰다.1033)≪兩湖右先鋒日記≫, 갑오 9월.

 최시형은 각 포의 대접주들을 청산에 불러 모아 대책을 논의하였다. 남북접 지도부를 오가며 조정에 노력했던 오지영도 호남의 정세를 보고하고 남북접 조화책을 제시하였다. 마침내 9월 18일 최시형은 기포령을 내렸다. “先師의 宿寃을 쾌히 펴고 宗國의 急難에 같이 나아가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기포령은 무장활동을 승인한 것인데, 무기 확보를 위한 읍내 관아의 점거와 북접농민군을 대도소가 있는 보은으로 집결시키도록 하는 것이 주요 내용인 것처럼 보인다.

 기포령이 전달되자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해 왔던 전국의 동학조직은 즉각 봉기에 나섰다. 북접농민군은 일제히 읍내 점거를 시도하였다. 경상도의 대읍인 상주와 선산이 9월 22일경 각각 수천의 농민군에 의해 점거되었다. 상주에서는 함창·예천·상주의 동학 조직이 동원되었고, 선산에서는 김산·선산 등지의 조직이 합세하였다. 대접주가 지휘를 해서 예하 포접 조직을 모두 동원하거나 몇 개의 포조직이 연합해서 점거에 나선 것이다.1034)≪召募日記≫,≪討匪大略≫,≪甲午斥邪錄≫,≪歲藏年錄≫.

 청주는 9월 24일경 수 천의 동학농민군이 읍성을 포위해서 공격하였다. 이 공격에는 손천민의 포조직은 물론 서장옥 계열의 동학농민군도 합세하였다. 병영이 있는 청주목의 공격은 난관에 봉착했다. 병사 李長會가 지휘하는 진남영은 우수한 무기를 지니고 반격에 나섰던 것이다.1035)경군 각 병영은 6월 말 일본군이 무장을 해제했지만 진남영병은 홍계훈이 병사로 있을 때 갖춘 신식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읍성에서 시작된 전투는 무심천을 사이에 두고 여러 날 동안 지속되었다. 청주 목사와 병사는 인근 군현과 감영 그리고 조정에 구원병 파견을 청하는 급보를 계속 보냈다. 정부는 경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이미 경기도와 충청도에 파견된 장위영과 경리청 병대를 시급히 청주로 가도록 했다.1036)<兩湖右先鋒日記>(≪총서≫15), 16쪽,≪先鋒陣日記≫.

 충주에서는 기포령이 내린 후에도 辛在蓮包와 許文叔包의 대립이 9월말까지 계속되었다. 신재련은 광혜원에 진을 치고 허문숙은 충주 용수포에 집결시켜서 동학농민군이 양측으로 나뉘어 접전을 하려는 기세였다. 신재련의 주장은 최시형과 같았다. 호남과 호서의 남접이 倡義라 칭하고 무리를 이끌어 취당해서 말과 병기를 거두고 평민을 侵掠하고 道員을 살해한다는 것이다. 新入道儒는 道의 大體를 모르면서 빚을 받아 내고, 남의 무덤을 파고, 옛 원한을 갚는 일만 한다고 하였다.1037)≪兩湖右先鋒日記≫(≪총서≫15), 10∼12쪽. 동학의 주요 근거지인 충주 외서촌을 둘러싼 남북접 간의 갈등이 치열한 전투까지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충주 일대에 있던 허문숙 조직은 일본군과 충돌하였다. 충주는 일본군의 병참선을 연결하는 요지였다. 일본에서 부산을 거쳐 오는 군대와 물자는 충청도의 안보와 가흥을 통해 서울 방면으로 올라갔다. 허문숙의 동학농민군은 가흥의 일본군 병참부를 공격하려고 준비하였으나 이를 정탐한 일본군이 선제 기습해 왔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우월한 무기를 당해내지 못하고 9월 16일에서 17일 밤에 이르는 동안 30명이나 살해당한 채 패산하고 말았다. 9월 25일에는 청안의 동학농민군이 일본군 정탐병을 찾아내서 처형하였다.

 괴산 읍내는 동학농민군이 10월 6일에 읍내를 점거하였다. 괴산 읍민들이 접주를 격살한 뒷탈로 인해 민가가 放火되어 읍내가 전소하는 혹심한 피해를 입었다. 진천 읍내는 9월 29일 안성과 이천에서 온 동학농민군이 읍내를 포위, 현감과 공형을 결박하고 軍庫를 부순 뒤 무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가져갔다. 보은으로 진군하는 길목에 있는 군현이 점거되었던 것이다.

 북접농민군은 기포와 동시에 관군과 민보군 그리고 일본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9월 22일 동학농민군 진압기구인 兩湖都巡撫營을 설치하였다.1038)≪日省錄≫, 고종 31년 9월 22일. 그리고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막지 못한 경기도와 충청도 군현의 지방관에 경군 지휘관을 임명하였다. 경기도의 죽산부사에는 장위영 영관 李斗璜, 안성군수에는 경리청 부영관 洪運燮, 충청도의 서산군수에는 경리청 영관 成夏永을 겸임시켜서 병대를 이끌고 가도록 한 것이다.

 일본군은 각지의 병참부에 주둔한 병력을 인근 지역의 사태에 즉각 개입시켰다. 낙동병참부는 상주 읍성을 기습해서 동학농민군을 퇴각시켰고, 해평병참부는 선산 읍성을 공격해서 관치질서를 회복시켰다. 가흥병참부는 충주 일대의 집결지를 공격하였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새로 증파되어 온 후비보병 제19대대 병력도 북접농민군을 1차 공격목표로 삼아 三路로 나누어 내려 왔다. 대대본부가 포함된 中路軍은 청주를 목표로 내려 왔다.1039)≪駐韓日本公使館記錄≫6, 64쪽. 西路軍은 직산·천안을 거쳐 공주로 직행하였고, 東路軍은 이천·충주를 거쳐 강원도로 들어갔다. 공주 우금치로 간 일본군은 1개중대 병력이었고, 그 중 支隊는 홍주에 있었다. 즉 우금치전투가 끝날 때까지 증파된 일본군과 맞서 싸운 동학농민군은 주로 북접농민군이었던 것이다.

 민보군은 여러 군현에서 결성되었다. 경상도의 거창과 안의는 지방관이 중심이 되어 경내 민정을 동원해서 결성하였고,1040)≪甲午以後日記≫(필사본). 경기도 지평은 前監役 孟永在가 결성하였다. 상주와 선산에서는 일본군이 읍성의 동학농민군을 내몬 뒤에 향리들이 민보군을 조직하였는데, 그 선례가 된 것이 예천의 민보군이었다.1041)<甲午斥邪錄>(≪총서≫11), 95∼96쪽.
<召募日記>(≪총서≫11), 149쪽.
경군과 일본군이 지나간 군현에서는 儒會所 등이 조직되었다. 조정에서는 전국 각지에 召募使·討捕使 등을 임명해서 민보군을 결성하도록 軍權을 부여하였다.1042)≪日省錄≫, 고종 31년 9월 25·26일.

 강원도의 동학농민군은 두 계통으로 연합해서 활동하였다. 하나는 홍천대접주 차기석이 이끄는 계통으로 홍천 일대에서 근거를 가진 세력이었다. 다른 하나는 평창·정선·원주·영월을 기반으로 활약한 세력으로 관동대접주 이원팔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강원도에서만 활약한 것이 아니라 경상도 북부와 충청도의 단양·충주지역 그리고 경기도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동학농민군에는 평창과 강릉의 양반도 참여하였고, 집강과 같은 유력자도 들어왔다.

 강원도의 주요 활동 지역은 평창·정선·영월·원주·횡성·인제·강릉·삼척·양양·간성·기린·춘천·김화·금성 등지이다. 그 중 두드러진 군사활동을 편 지역이 평창·정선·영월·홍천·강릉·삼척이었다. 10월 하순에는 영월·평창과 제천·청풍의 조직이 합세해서 정선 읍내를 점거하였다. 이 때부터 11월 초 사이 정선읍에 3천 여명, 평창과 후평에는 1천 여명이 집결해 있었다.

 이 시기 전열을 정비한 민보군과 관군이 진압에 나섰다. 전승지 李會源이 강릉부사로서 관동소모사를 겸임하였고, 원주 감영의 영군도 뒤늦게 출동하였다. 孟英在가 이끄는 경기도 지평의 민보군은 강원도의 동학농민군이 경기도를 거쳐 보은으로 남하하는 길목을 막았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의 동로군은 이천·장호원·가흥·충주를 거쳐 강원도로 들어왔다. 이 일본군이 강원도로 직행한 것은 무엇보다 삼남 일대의 동학농민군이 험준한 산골에 들어와서 장기전을 펴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이유 때문이었다. 동로군은 인천 주재 일본군사령관이 직접 통제해서 10월 25일부터 11월 17일까지 22일간 강원도 여러 군현을 순회하였다. 일본공사 井上馨은 인천병참사령부에게 강원·함경도방면으로 올라가는 길목을 막도록 다시 1개중대 병력의 증파를 요청하였다.1043)≪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65쪽.

 10월 중순부터 동학농민군은 진압군의 우세한 무기를 막지 못해 거듭 참패하게 된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도계 양쪽 지역에 걸쳐 있던 대접주 차기석 예하의 조직은 교단의 지시에 따라 경기도를 거쳐 보은으로 남하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지평의 맹영재 민보군에게 반격당하여 저지되었다. 대접주 차기석과 접주 박종백의 농민군은 10월 11일 홍천의 내촌면 東倉을 점거해서 곡식을 탈취하였다. 맹영재와 횡성 현감이 지휘하는 민보군과 관군은 차기석부대가 주둔한 장야촌과 서석면으로 몰려와 공격을 가했다. 맹영재는 다음과 같은 전투 기록을 남겼다. “10월 21일 행군해서 홍천 장야촌에 이르러 비류 30여 명을 포살했다. 다음날 서석면에 가니 비류 수천 명이 흰 기를 세우고 진을 쳐 모여 있었다. 총을 쏘며 접전을 벌였는데 탄환에 맞아 죽은 자의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1044)≪甲午實記≫, 11월 초2일.

 서석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봉평 내면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대접주 차기석은 강릉·양양·원주·횡성·홍천 5읍의 동학조직을 지휘해서 진압군의 공격에 대비하였으나 다시 포위공격을 받게 된다.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추위 속에 벌어진 협공을 막아내지 못하고 대접주 차기석과 주요 간부들이 체포되었다.

 평창의 동학농민군은 11월 5일 서울에서 증파된 병력과 합류한 일본군 동로군 및 원주 소모관 鄭俊時가 인솔한 관군을 맞아 격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평창에 집결한 약 3천 명의 동학당을 공격했다. 동도가 사격으로 저항하여 격전 2시간에 점차 퇴각의 기세를 나타내서 오후 1시에 평창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동도의 사상과 포로는 즉사 70명, 부상 미상, 포로는 뒤에 저항하므로 10여 명을 총살했다”고 보고했다.1045)韓㳓劤,<東學農民軍의 蜂起와 戰鬪>(≪韓國史論≫4, 1978), 373쪽. 이시모리(石森)대위가 이끄는 일본군의 화력이 동학농민군이 지닌 화승총과 창칼을 압도한 까닭에 일방적으로 패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험한 지세를 이용한 강원도의 동학농민군은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전투상황을 비교하면 전라도와 충청도의 동학농민군들이 여러 지역에서 소수의 일본군이 진격해 들어오는 것만 보고도 흩어졌던 사례와는 다른 양상으로서 마지막까지 굳건히 대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험난한 과정을 거쳐서 충청도·경상도·강원도·경기도에서 보은으로 속속 집결한 북접농민군은 영동과 황간으로 분산해서 주둔하였다. 장내리는 많은 군대가 모여 훈련을 하거나 오랜 기간 주둔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 개활지에 인접하여 외부에 노출되기 쉬웠고, 잠자리와 물도 부족했다. 따라서 깊은 산골로 집결지를 옮겨서 出陣에 대비하였다.

 영동과 황간에 머문 한 달 정도의 기간 동안 북접농민군 대군은 軍需錢과 軍需米를 구하기에 전력을 다했다.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직접 확보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1046)≪召募日記≫, 10月 22日字에는 다음과 같은 전문들을 기록하였다. “此時騷訛不可一一取信 而胥以黃永間 匪徒之結陣者 不知幾萬名 府吏鄕人 轉相興訛 有妨軍政” “永同匪徒 不過千餘名 而自相蹂亂 全無統率 食盡路窮 方嗷嗷思逃云” 충청도 동남부 군현은 물론 추풍령을 넘어서 김산과 상주까지 사람을 파견해서 錢財를 강제로 헌납받아 왔다. 그러는 과정에서 무리도 뒤따랐다. 타지에서 원정 온 동학농민군은 넉넉한 집들을 지정해서 곡식과 돈을 내도록 하였는데 헌납을 못하면 후환을 꺼리지 않고 폭력을 가했다.1047)≪甲午以後日記≫(필사본). 이런 소문이 떠돌면서 영동과 황간의 북접농민군은 인근 군현의 양반지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기포령은 일본과의 전쟁이 목적이었지만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뒤에는 전쟁 준비과정에서 양반 향리에 대한 신분투쟁과 지주 부농에 대한 경제투쟁이 병행되었다. 斥倭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양반지주층이 민보군 결성에 앞장서고 동학농민군 토벌에 잔혹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최시형은 북접농민군을 총지휘하는 統領으로 손병희를 지명하였다. 그리고 鄭璟洙包와 金奎錫包를 각각 선봉군과 후군으로 삼고, 李鍾勳包와 李容九包를 각각 좌우익으로 정했다. 당시 북접농민군의 주요 지휘자는 孫天民(청주)·李觀永(상주)·李元八(원주)·任奎鎬(보은)·李鍾勳(廣州)·鄭璟洙(안성)·朴容九(음죽)·高在堂(양지)·洪秉箕(여주)·金奎錫(이천)·吳一相(문의)·趙在璧(옥천)·姜建會(옥천)·辛在蓮(충주)·李容九(충주) 등이었다. 충청도 서해안 지역과 강원도 지역의 동학농민군은 여러 포 조직이 현지에서 읍내를 공격하거나 경군과 일본군에 맞서느라고 합류하지 못했다.

 북접농민군은 대군1048)북접농민군의 수는≪天道敎創建史≫에서 약 6만 명으로 추산했고,≪東學史≫는 약 10만 명이라고 했다. 이 수가 다 집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愼鏞廈 교수는≪東學과 甲午農民戰爭≫, 312쪽에서 손병희의 직할부대를 약 1만 명으로 추정하였다.을 二隊로 나누어 一隊는 손병희가 이끌고 남접농민군과 만나기로 약정한 논산으로 10월 중순1049)북접농민군은 일시에 出陣한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나누어서 행군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도의 사정 파악에 힘을 기울인 상주 소모사에게 다음과 같은 정탐 사실이 전해졌다(<召募日記>(≪총서≫11), 161쪽. “各處探吏回告內 黃永諸賊 自二十三日 始踰沃川 將向公州”).에 출발하였다. 또 一隊는 오일상·강건회가 이끌고 회덕으로 가도록 하였다. 경군과 일본군이 충청도 청주·옥천 방향으로 남하하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였다.1050)이 시도는 결과적으로 성공하였다. 후비보병 제19대대의 중로군을 공주로 가지 못하게 길목을 막는 임무를 다했기 때문이다. 또 金子先에게도 10월 17일 일부 북접농민군을 이끌고 청주를 공격하도록 했는데 초정리 부근의 가는다리(細橋)에서 일본군을 만나서 패산하기도 하였다(<討匪大略>(≪총서≫11), 461쪽). 손병희의 북접농민군과 전봉준의 남접농민군이 논산에서 만남으로써 남북접 연합군이 이루어졌다.

<申榮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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