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2. 반일투쟁의 전개
  • 1) 반일투쟁의 발발

1) 반일투쟁의 발발

 농민군이 1894년 9월에 들어 다시 일어난 일차적인 목적은 일본의 침략행위를 물리치고 輔國安民하려는 데 있었다.1051)<全琫準供草>(≪東學思想資料集≫壹, 亞細亞文化社, 1979), 318∼319쪽 및 340, 362쪽. 농민군은 제1차 농민전쟁에서도 ‘斥倭洋’ 구호를 제기하였지만, 그들의 행동이나 요구내용을 볼 때 일차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民에게 해악을 끼치는 폐정을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농민전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출병하는 뜻밖의 심각한 상황이 초래되었다. 6월 이후에는 일본의 경복궁 강점과 청일전쟁 개전, 내정간섭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 속에서 일본의 침략의도가 점차 노골화하였다. 이에 따라 농민군 지도부, 특히 全琫準의 관심은 폐정개혁으로부터 반외세문제, 곧 ‘斥倭’ 쪽으로 급격히 선회하였다.1052)裵亢燮,<執綱所 時期 東學農民軍의 활동양상에 대한 一考察>(≪歷史學報≫153, 1997) 참조.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여 국가가 멸망한다면, 폐정개혁은 고사하고 生民이 하루도 편히 살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1053)<東京朝日新聞>, 명치 28년 3월 5일(≪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2), 367쪽.

 이미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 강점과 청일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전라도 일대에서는 반일투쟁의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경복궁강점 직후인 6월 23일경부터 일주일 안에 고부·부안·무장·김제 등지에서 농민군이 다시 봉기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들의 巨魁들은 6월 8, 9일경에 모의하여 6월 16일 김제에서 대회를 가지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며, 일본이 大兵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 하므로 나라를 생각하는 자라면 모두 무기를 들고 일어나 막아야 한다며 사방의 士夫도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고 한다.1054)<東京日日新聞>, 명치 27년 8월 5일(≪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2), 509쪽.

 6월 29일 장성에서는 “倭兵이 장차 이를 것이므로 일이 매우 급박하다”면서 500∼600명의 농민군이 관아에 쳐들어와 무기를 탈취하여 갔다.1055)≪古文書≫2, 서울대 도서관, 412쪽. 6월 22, 23일 무렵부터는 군산과 전라도에 인접한 강경지역에서도 농민군들이 청국병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싸운다고 하며 총, 말 등 전쟁에 사용할 물품들을 민가에서 거두어 들였다.1056)≪駐韓日本公使館記錄≫3(國史編纂委員會, 1986), 236∼240쪽. 7월 9일에는 전라도 부안의 농민군이 서천군으로 들어와 방포하며 “전라도 연해에 정박해 있는 일본선박이 몇백 척이나 되어 전라도 전체가 놀라고 있다. 계엄하지 않을 수 없으나, 부족한 것이 마필과 군기이다”라고 하며 총과 화약, 馬匹 등을 빼앗아 갔다.1057)<錦藩集略>別啓, 7월 7일조(≪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4), 34∼35쪽. 위 기사의 내용은 7월 9일에 일어난 일이지만, 7월 7일조에 잘못 실려 있다. 8월 25일에는 전봉준보다 오히려 더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金開南이 남원에서 대규모 대회를 열고 기포를 결의하였다. 8월 19일 경부터 농민군이 남원으로 모여 들었으며, 9월 1일에는 김개남과 기맥이 통하던 금구출신의 대접주 金仁培가 광양·순천의 농민군을 이끌고 경상도 하동을 공격하면서 사실상 재기포를 시작하였다.1058)<梧下記聞>2筆(≪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209∼210, 217∼218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2, 71∼72쪽;<嶺上日記>8월 19일(≪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 286∼287쪽.

 전봉준도 이미 일본군의 경복궁 강점사건 발발 전인 6월 중순 경에 추수를 한 후 다시 일어날 계획임을 밝힌 바 있다.1059)海浦篤彌,<東學黨視察日記>(≪日本人≫18호, 1895년 2월), 130∼136쪽. 또 일본군의 경복궁 강점 소식을 늦어도 7월에는 접하였지만,1060)<全琫準供草>, 372쪽. 8월 말까지도 재기포를 미루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전봉준은 자신에게 병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농민군들을 한꺼번에 불러 일으키기가 수월치 않았으며, 군량에 필요한 곡식의 수확을 기다리느라고 기포가 늦어졌다고 하였다.1061)<全琫準供草>, 364쪽. 그러나 재기포를 연기한 요인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전봉준으로서는 중앙정국의 동향과 청일전쟁의 추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없었고, 명확한 판단도 내릴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집강소시기 전봉준의 정세인식과 행동방침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미 1893년 3월의 보은집회 무렵부터 권력장악을 위해 농민군을 이용하고자 하였던 대원군세력은 일본군의 경복궁 강점 직후 섭정을 시작하면서 농민군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채우려는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갔다.1062)대원군과 농민전쟁의 관계에 대해서는 李相栢,<東學黨과 大院君>(≪歷史學報≫27·28합집, 1962);柳永益,<全琫準 義擧論>(≪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下, 1994);김양식,<대원군일파의 정변계획과 농민군과의 관계>(≪근대한국의 사회변동과 농민전쟁≫, 신서원, 1996);張泳敏,<大院君의 東學農民軍·保守兩班 動員企圖에 관한 一考察>(≪重山鄭德基博士華甲紀念韓國史學論叢≫, 1996);양상현,<대원군파의 농민전쟁 인식과 동향>(≪1894년 농민전쟁연구 5≫, 역사비평사, 1997);배항섭,<전봉준과 대원군의 ‘밀약설’ 고찰>(≪역사비평≫, 1997년 겨울호) 참조. 섭정을 시작한 대원군은 6월 말에서 7월 초에 걸쳐 徐璋玉·徐丙學·張斗在 등 주요한 동학접주들을 석방하였다.1063)≪駐韓日本公使館記錄≫8, 54쪽. 이 가운데 장두재는 7월 초 무렵에 대원군을 만나서 청군과 합세하여 일본군을 물리치기로 합의한 후 7월 9일에는 金德明·金開南 및 孫化中 앞으로 기포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1064)≪駐韓日本公使館記錄≫8, 54∼55쪽. 전봉준에게도 대원군의 밀사들이 수 차례 왕래하였을 뿐만 아니라,1065)<全琫準供草>, 347쪽. 8월 10일에는 전봉준의 처족 7촌이자 全羅左右道 都執綱을 맡고 있던 宋熹玉이 善工主事로 임명된 바 있다.1066)≪舊韓國官報≫1, 8월 초10일, 166쪽. 이는 대원군측이 자신들의 정변계획에 전봉준을 끌어들이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하였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전봉준측과 대원군측 사이에는 기맥이 일정하게 통하고 있었으며, 장두재의 편지 내용이나 대원군측의 의도도 전봉준에게 전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봉준의 생각과 행동은 대원군측의 의도와는 달랐다. 대원군과 밀의한 장두재가 농민군의 재기포를 촉구하는 편지를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에게 보낸 지 일주일 정도 후인 7월 17일 전봉준은 무주집강소에 다음과 같은 통문을 보냈다.

방금 外寇가 범궐하였다. 국왕이 욕을 당했으니, 우리들은 마땅히 달려가 목숨을 걸고 의로써 싸워야 하나 저 도적들이 바야흐로 청나라와 전쟁 중이어서 그 예봉이 매우 날카로우므로 갑자기 맞서 싸웠다가는 그 화가 宗社에 미칠지도 모른다. 물러나 은둔하여 시세를 관망한 연후에 기세를 올려 계책을 취하는 것이 萬全之策이다. 바라건대 반드시 경내의 각 접주에게 통문을 돌려 서로 상의하여 각자 安業하고 경내에서 胥動하는 무리를 일절 금단하여 마을에서 횡행하며 소동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기를 切望한다.1067)<隨錄>, 茂朱執綱所, 甲午 7月 17日(≪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5), 278∼279쪽.

 ‘마땅히 달려가 싸워야 할 것’이라는 표현에서 이 통문이 재기포를 촉구하는 장두재의 편지로 인하여 자칫 동요할지도 모를 접주들을 자제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약 한 달 후인 8월 11일에도 전봉준은 일본군에 의해 민씨정권이 축출되었고, 대원군이 집정하면서 폐정을 개혁하고 政法을 바로잡아 자신들이 원하던 바가 많이 달성되었으나, “일본이 하고자 하는 바와 대원군이 하고자 하는 바를 우리들은 아직 상세히 알 수 없어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때문에 나는 힘써 동지들의 분격을 가라앉힘과 동시에 우리 정부의 동태를 알려고 한다.”고 하였다.1068)<時事新報>, 명치 27년 10월 5일(≪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2), 331∼332쪽;≪日淸交戰錄≫12, 명치 27년 10월 16일, 43쪽. 이러한 전봉준의 입장은 8월 25일 무렵 김개남이 남원에서 재기포하는 데 반대할 때까지도 이어졌다.1069)<梧下記聞>2筆(≪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210∼211쪽.

 그것은 무엇보다 중앙정국이나 일본의 동향, 대원군의 의도 등에 대해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대원군측이나 일부 농민군 지도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섯불리 움직이기보다는 중앙정국이나 일본측의 동태를 좀더 신중하게 관찰하고자 하였다. 또 청일간의 전쟁이 끝나면 어느 나라든 농민군 진압에 개입할 것이지만, 현실적인 농민군의 역량으로는 그에 맞서기 어려우며, 그럴 경우 자신들이 소망했던 바를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8월 말까지도 전봉준은 官과의 물리적 충돌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관민상화’체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농민군의 역량을 효과적으로 보존·강화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일단 중앙정국과 청일전쟁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필연적으로 도래할 반외세투쟁에 대비하여 士族이나 재산이 있는 계층까지 포괄하는 연합을 추진해 나가려는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070)이 시기 전봉준의 정세판단과 행동방안에 대해서는 裵亢燮,<執綱所 時期 東學農民軍의 활동양상에 대한 一考察>(≪歷史學報≫153, 1997) 참조.

 이러한 정세 인식에 입각하여 재기포를 유보하던 전봉준이 재기포를 결심하는 것은 대원군측의 밀사와 접촉한 직후인 9월 10일 무렵이었다. 전봉준이 제2차 기포, 곧 반일투쟁을 결심하기 직전인 9월 2일 대원군측 밀사인 朴東鎭과 鄭寅德 등이 전주로 내려왔다. 이들은 기포하여 상경할 것을 촉구하는 대원군의 密敎를 가져와 9월 7, 8일경 전봉준에게 전달하였다.1071)<隨錄>(≪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5), 296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8(國史編纂委員會, 1993), 55쪽, 361쪽;<全琫準供草>, 341쪽, 358∼359쪽. 이들은 먼저 전봉준의 처족 7촌이자 全羅左右道 都執綱을 맡고 있던 宋憙玉과 접촉하였다. 송희옥은 대원군측의 밀사를 만난 다음날 휘하의 농민군들을 거느리고 전주성을 빠져 나갔으며,1072)<隨錄>(≪東學農民戰爭史料大系≫5, 驪江出版社, 1994), 296쪽. 9월 6일 전봉준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띄웠다.

앞으로 더 일을 계획하고자 삼가 묻고자 합니다.

 (중략) 과연 어제 저녁 또 두 사람이 비밀리에 내려왔기에 상세히 그 전말을 알아본즉 과연 이는 開化邊에 압도되어 먼저 효유문을 발하고 뒤이어 秘計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려온 두 사람을 곧 가두어 두고 이들을 엄중히 지키도록 하여 서로 말을 통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여 두었으니, 밤을 아랑곳하지 말고 올라오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湖中에도 이런 일이 있어서 벌써 발각되어 잡혀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대체로 속히 행하면 萬全策이 되고 늦으면 기밀이 발각되는 것이므로 이를 양찰하시고 대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천번 만번 빕니다. 호서지방에서는 초 10일에 대회를 갖고 한 쪽에서 올라가도록 명령하였다 하므로 계속하여 뒤쫓아 간 다음에야 일이 완전하게 합치될 수 있습니다. 들뜨지 마시고 제대로 하시기 바라며 나머지는 아직 갖추어 올리지 못합니다.

甲午 9月 初6日

接弟 宋熹玉 再拜1073)≪駐韓日本公使館記錄≫8(國史編纂委員會, 1993)(이하 생략), 55·361쪽.

 송희옥의 편지를 받은 전봉준은 삼례로 가서 박동진과 정인덕을 만났고,1074)<全琫準供草>, 341쪽. 9월 8일 이전 李建英이 남원의 김개남을 찾아가서 국태공의 명령이라며 ‘起兵赴京’할 것을 密諭하였다.1075)<甲午略歷>(≪東學亂記錄≫上, 國史編纂委員會, 1959), 67∼68쪽.
<梧下記聞>3筆, 247쪽.
같은 무렵 전봉준도 삼례에서 이건영을 만나 다음과 같은 국왕의 밀지를 받았다.1076)<全琫準供草>, 341쪽.

너희들은 선대 왕조로부터 교화하여 내려 온 백성들로서 선왕의 은덕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이다. 조정에 있는 자는 모두 저들에 아부하고 있어 서로 은밀히 의논할 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외롭고 의지할 데가 없어 하늘을 향하여 통곡할 따름이다. 방금 왜구들이 침범하여 화가 국가에 미치었는 바 운명이 조석에 달렸다. 사태가 이에 이르렀으니 만약 너희들이 오지 않으면 박두하는 화와 근심을 어떻게 하랴. 이로써 교시하노라.1077)≪駐韓日本公使館記錄≫8, 54·360쪽.
<東學文書>(≪東學農民戰爭史料大系≫5), 99쪽.

 “국가의 운명이 조석에 달렸다”는 국왕의 밀지를 받은 전봉준은 국왕의 밀지가 도착한 사실과 그에 대한 비밀을 당부하는 회람을 義龍·月波·和中 등으로 명기한 동지들에게 돌렸다.1078)≪駐韓日本公使館記錄≫8, 54쪽, 361쪽.<東學文書>에는 자신이 밀지를 보낸 사실이 누설될 경우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므로 철저히 비밀로 하라는 8월 14일자로 된 국왕의 밀지가 실려 있다(≪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5, 112쪽).

 이러한 몇 가지 자료들은 재기포 직전인 9월 초순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와 대원군측 사이에는 긴밀한 접촉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전봉준이 재기포를 결심한 것은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우선 전봉준이 아직까지 勤王主義的 의식을 엄연히 가지고 있음을 고려할 때1079)鄭昌烈,≪甲午農民戰爭硏究≫(延世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1), 255쪽. 起兵하여 상경해 줄 것을 절박하게 요청하는 밀지를 국왕이 직접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輔國安民’을 위한 기병을 결심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대원군 밀사와의 접촉을 통해 8월 16일에 있었던 청일간의 평양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한 사실, 일본이 명백한 침략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농민군 진압에 본격적으로 투입될 것이라는 사실, 대원군은 집정은 하고 있으나 일본이 내세운 개화파에 포위되어 사실상 자신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었다는 점 등 청일전쟁과 중앙정국의 추이, 일본군의 침략의도와 농민군 진압계획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았을 것이라는 점이다.1080)≪駐韓日本公使館記錄≫8, 55∼76쪽.
<全琫準供草>, 3차문목·5차문목 참조.
이에 따라 전봉준은 위에서 언급한 바 반일투쟁의 개시를 연기한 이유들 가운데 아직 수확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특히 농민군의 역량이 취약하다는 점이 해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의 참화를 연상하며 “국가가 멸망하면 생민이 어찌 하루라도 편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서 “국가와 멸망을 함께”하기 위해 재기포를 결심하였던 것이다.1081)<東京朝日新聞>, 명치 28년 3월 5일(≪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2), 367쪽.

 재기포를 결심한 전봉준은 9월 10일경 삼례에 大都所를 설치하고 기병준비에 착수하였다. 삼례는 백여 호도 안되는 작은 고을이었지만, 도로가 사방으로 통하는 요충이었고 다수의 농민군이 임시거처로 사용할 수 있는 邸幕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 삼례에서 모여 전봉준과 함께 모의한 인물은 진안의 접주 文季八·金永東·李宗泰, 금구의 접주 趙駿九, 전주의 접주 崔大奉·宋日斗, 정읍의 접주 孫如玉, 부안의 접주 金錫允·金汝中·崔卿宣·宋熹玉 등이었다. 전봉준은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5, 6일 후에는 직접 손화중과 최경선이 있던 광주와 나주로 갔으며, 김개남에게도 연락하였다. 전봉준은 각지의 “忠義之士”에게 함께 일어날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이번 거사에 호응하지 않는 자는 不忠無道한 자”라는 통문을 돌렸다.1082)<全琫準供草>, 321∼322쪽, 373∼375쪽, 378쪽, 381∼382쪽.
<判決宣告書>(≪東學關聯判決文集≫, 總務處 政府記錄保存所, 1994), 30쪽.
<梧下記聞>3筆(≪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253쪽.

 전봉준은 각지의 官衙에도 재기병을 알리는 통문을 보내 군수품 조달에 협조할 것을 촉구하였다. 9월 10일 태인현에는 거사를 위해 公穀과 公錢을 이용해야겠으니, 軍需米 300석과 동전 2,000냥을 금구·원평의 대도소로 수송하기 바란다는 전봉준의 통보가 전달되었다. 17일에는 백미 300석, 동전 2,000냥, 白木 15同을 여산으로 보내라는 농민군 大都所의 傳通이 고산 관아에 도착하였다. 이외에도 9월 10일부터 20일 사이에 김제, 능주, 광주, 군산, 전주 등 각지의 관아에 화약·탄환 등의 무기와 쌀·白木 등 군수물자를 농민군 도소로 보내라는 통문이 날아들었다.1083)≪駐韓日本公使館記錄≫1(國史編纂委員會, 1986), 129∼130쪽.
≪駐韓日本公使館記錄≫8, 51쪽.
9월 18일경에는 장차 서울로 쳐들어가려 하니 군량을 준비해 두라는 통문이 충청도 각읍에도 전달되었다.1084)金允植,≪續陰晴史≫上, 9月 18日(國史編纂委員會, 1960), 340쪽.

 이와 함께 인근 지역의 官衙를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기도 하였다. 9월 9일에는 전라도 금구의 농민군이 고산 관아를 공격하고, 다음 날에는 무기를 탈취하여 전주쪽으로 향하였다. 10일 밤에는 삼례에 집결하였던 농민군이 여산을 공격하였고, 13일 밤에는 무기를 탈취하여 돌아갔다. 14일에는 삼례에 모여 있던 농민군 8백여 명이 전주성으로 쳐들어가 화포 74문, 탄환 9,773발, 탄자 41,234개, 환도 300자루 등 무기를 탈취해 갔고, 16일에는 백여 명의 농민군이 威鳳山城을 공격하여 무기를 빼앗아 갔다. 또 8월 말부터 남원에서 재기포를 준비한 金開南도 이 무렵 인근읍으로부터 무기와 군수물자를 적극적으로 끌어 모았고,1085)≪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29∼130쪽.
≪駐韓日本公使館記錄≫8, 51쪽.
9월 26일에는 孫化中도 통문을 돌려 인근 농민군을 광주에 결집시켜 전봉준에 호응하였다.1086)朴冀鉉,<日史>, 甲午 9月 23日(≪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7, 1996), 485∼486쪽. 농민군의 재기병 준비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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