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2. 반일투쟁의 전개
  • 4) 농민군의 북상과 공주전투

4) 농민군의 북상과 공주전투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재기병을 준비하던 전봉준은 1개월이 지나도록 삼례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전봉준에게 병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9월 초에 재기포를 결심할 때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겨져 있던 두 가지 문제, 즉 추수가 끝나지 않아 군량과 농민군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점, 농민군의 현실적인 역량이 취약하였다는 점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추수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한편, 각지에 통문을 띄워 함께 기포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 전라 각지 邑鎭의 무기고를 탈취하여 무장력을 강화한 농민군은1136)9월 중순무렵 전라 각지 邑鎭 가운데 농민군에게 무기를 탈취 당한 곳은 29개 지역이었다(≪啓草存案≫, 고종 31년 9월 17일). 추수가 거의 끝날 무렵인 10월 12일경 북상을 개시하였다.1137)전봉준은 삼례에서 재기한 날짜가 10월 12일이라고 진술하였고(<全琫準供草>, 368쪽), 삼례를 출발하여 논산에 도착한 날은 12일이었다(≪東學亂記錄≫下, 382쪽). 이때는 이미 관군과 일본군의 무력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다음이었다.

 북상에 앞서 전봉준은 농민군의 군수품 조달을 위해 충청 각 고을에도 장차 서울로 갈 계획이므로 군량을 준비해 둘 것을 요청하는 통문을 보낸 바 있다.1138)金允植,≪續陰晴史≫上, 9月 18日(國史編纂委員會, 1960), 340쪽. 북상 당시 농민군은 약 4,000명이었고 이들은 주로 전라우도의 농민군이었다. 손화중과 최경선도 원래는 공주로 함께 북상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이 바다를 통해 내려 온다는 정보를 접하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가 주둔하기로 했다. 전봉준은 김개남에게도 함께 출전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김개남은 49일을 채워야 한다는 참위설을 내세우며 남원에 머물렀다.1139)<全琫準供草>, 325∼326쪽, 375쪽;<梧下記聞>, 253쪽.

 한편 9월 18일을 기해 기포를 결정한 북접 동학교단은 산하의 각지 접주들에게 동원령을 전달하는 한편, 10월 2일에는 청산에서 대규모 대회를 개최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1140)≪東學亂記錄≫上, 276·279·407쪽. 북접에서는 청산대회의 소식을 늦어도 10월 11일에는 전봉준에게 통보하였으며,1141)≪東學亂記錄≫下, 382쪽. 대회를 마친 다음 남접세력과 합세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142)10월 16일 일본군은 보은에서 체포한 농민군으로부터 “최시형은 14일 청산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15, 16일에 걸쳐 2만여 명의 농민군을 규합한 후 황간·영동을 경유하여 전주로 가서 전봉준과 합세할 계획이라”는 진술을 받아냈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19쪽). 재기포를 결심하고서도 한 달여 동안 삼례에 머물며 무장을 강화하고 있던 전봉준이 10월 2일 무렵에 북상을 개시한 것은 이 무렵 북접으로부터 청산대회에 대한 통보를 받았다는 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북상을 시작하여 논산에 도착한 것은 10월 12일이었다.1143)≪東學亂記錄≫下, 382쪽. 여기서 전봉준은 다시 농민군을 초모하였다. 삼례에서 북상하는 과정에서 농민군의 수는 불어났으며, 10월 12일부터 16일 사이에는 손병희가 이끌고 온 북접의 농민군과 논산에서 합세함으로써 논산에서 공주로 진격할 때에는 1만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1144)<全琫準供草>, 324·377쪽;<判決宣告書原本>(≪東學關聯判決文集≫, 政府記錄保存所, 1994), 30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8, 51쪽.

 북상하는 농민군의 일차 공격목표는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였다. 공주는 서울로 통하는 길목이자 삼면이 산으로 둘러쳐 있고, 북쪽으로는 금강이 흐르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군 소위 스즈키(鈴木)도 후비 19대대장 미나미에게 “공주를 동학도에게 넘겨주게 되면 사방의 동학도가 금방 봉기해서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될 것”이다라고 하여 공주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였다.1145)≪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74쪽. 이 때문에 전봉준은 공주성을 점령하여 지키면 일본군이 쉽게 공격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공주성을 점령한 후 일본군과 담판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1146)<全琫準供草>(≪東學思想資料集≫壹), 319∼320쪽.

 공주공격을 앞둔 전봉준은 남북접 농민군이 합세한 직후인 10월 16일 兩湖倡義軍領袖의 자격으로 골육상쟁을 피하고 항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관군의 동참을 촉구하는 글을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냈다.

<全琫準上書>

 兩湖倡義軍의 領袖 全琫準이 삼가 湖西巡相 閤下에게 글을 올립니다.

 (중략)일본 오랑캐(日寇)가 분란을 야기하고 군대를 출동하여 우리 국왕을 핍박하고 우리 백성들을 뒤흔들어 놓았으니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임진왜란 때 오랑캐가 왕릉을 능멸하고 궁궐을 불태웠으며, 국왕과 우리 부모들을 능욕하고 백성들을 살륙하여 臣民들의 公憤을 샀으니 千古에 있지 못할 원한입니다. (중략)지금 朝廷의 大臣들은 망령되이 자신의 몸만 보전하고자 위로는 국왕을 협박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속이며 東夷와 내통하여 남쪽 백성들의 원망을 사자 親兵을 妄動하여 先王의 赤子들을 해치고자 하니 실로 무슨 뜻이며, 마침내 무슨 일을 저지르려는 것입니까. 금일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는 실로 그것이 지극히 어렵다는 사실을 알지만, 一片丹心은 죽음과도 바꿀 수 없으며, 人臣으로서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을 掃除하여 先王朝가 五百年 동안 遺育해준 은혜에 보답코자 하니, 엎드려 원컨대 閤下도 깊이 반성하여 죽음으로써 義를 함께 한다면 千萬 다행일 것임.

갑오 10월 16일

在論山謹呈1147)≪東學亂記錄≫下, 383∼384쪽.

 전봉준은 논산에서 10여일 이상 체류하였다. 박제순에게 동참을 촉구하는 글을 띄우고서도 1주일 이상을 더 머물렀다. 이것은 농민군의 역량을 최대화하려는 의도였으며, 아직 농민군의 역량이 취약하였음을 말한다. 그러나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의 농민군과 합류한 이후부터 전봉준은 공주공격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10월 19일 무렵에는 은진·노성 사이에 농민군의 활동이 분주하였고, 노성의 창고미를 경천으로 옮기는 것이 관군에게 발견되었다.1148)≪東學亂記錄≫上, 79·222·406쪽. 논산에서 북상하기에 앞서 공주전투에 필요한 군량을 미리 확보해 두려는 의도였다. 드디어 23일 밤 논산의 농민군은 공주에서 남쪽으로 30리 지점에 위치한 경천을 점령하였다. 이 무렵 북접에서 온 옥천포 농민군은 공주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大橋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남북접이 연합한 농민군은 남쪽과 동쪽에서 공주를 협공하려는 것이었다.1149)≪東學亂記錄≫上, 419·426쪽;≪東學亂日記≫下, 10쪽. 이때부터 약 20여 일에 걸쳐 농민군과 관군 및 일본군 사이에는 공주감영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게 되며, 이 전투는 농민전쟁의 성패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150)공주전투에 대한 최근의 연구로는 이이화,<전봉준, 반제의 봉화 높이들다>(≪역사비평≫1990년 여름호);韓㳓劤,≪東學과 農民蜂起≫(전정판), 1992;鄭昌烈, 앞의 글, 1991;우윤,<공주대회전과 최후의 항전>(≪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 1993);愼鏞廈,<甲午農民戰爭의 第2次農民戰爭>(≪東學과 甲午農民戰爭≫, 1993);서영희,<농민전쟁의 2차봉기>(≪1894년 농민전쟁 연구≫4, 1995);양진석,<1894년 충청도지역의 농민전쟁>(≪1894년 농민전쟁 연구≫4, 1995) 등이 있다.

 한편 충청감사 박제순은 전봉준이 논산에서 글을 보내는 등 공주를 압박해 오자 순무영과 일본군측에 급히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관군과 일본군은 공주로 속속 이동하였으며, 농민군의 공주성 공격이 개시된 10월 24일 경에는 관군 810명, 일본군 2개 소대와 2개 분대, 약 120여 명이 공주로 집결하였다. 이외에도 감영병과 민보군이 있었을 것이나 자세한 병력수는 알 수 없다. 여기에 맞서는 농민군의 수는 많게는 4만여 명에 달하였다.1151)전봉준은 공초에서 1만여 명이었다고 진술하였으며(<全琫準供草>), 10월 23일 경천으로 들어올 당시의 농민군 규모에 대해 관군측에서는 4만여 명으로(≪東學亂記錄≫下, 10쪽), 일본군측에서는 우금치전투 당시 농민군 규모를 2만여 명으로 각기 추산하였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47쪽). 대교방면에 집결해 있던 농민군의 수에 대해 관군측에서는 수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민간기록에는 3, 4천명으로 되어 있다〔(<若史>(≪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 227쪽〕. 청주방면으로 남하하였던 교도중대와 일본군 미나미의 대대본부, 그리고 중로분진대의 일부도 공주의 위급함을 듣고 공주로 향하여 공주 동쪽으로 50여리 떨어진 부강까지 왔다가 회덕·문의 지역의 농민군이 크게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회군하여 돌아갔다.1152)≪東學亂記錄≫上, 456쪽.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304쪽;3, 310·387쪽;6, 29쪽.

 공주성을 둘러싼 최초의 전투는 10월 23일 이인에서 벌어졌다. 경천에 주둔한 전봉준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북접계 농민군을 이인쪽으로 보내고 자신은 효포로 향하였다. 이인역에 진을 치고 있던 농민군은 10월 23일 스즈끼 소위가 인솔하는 일본군 50여 명,1153)관군측 기록에 따르면 이때 공주감영에는 100명의 일본군이 있었다고 하였으나〔≪東學亂記錄≫上, 439쪽;<公山剿匪記>(≪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 420쪽〕, 아직 서로분진대가 도착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鈴木이 거느리는 1개소대 병력 뿐이었다. 성하영의 경리청 1개 소대 병력, 구완희가 이끄는 감영병력 4개 분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취병산까지 후퇴하였다가 다음날 이인에서 물러났으며, 관군도 감영으로 후퇴하였다. 10월 24일에는 대교까지 진격하여 진을 치고 있던 북접 옥천포의 농민군이 경리청 副領官 洪運燮의 공격을 받고 20여 명의 전사자와 6명의 생포자를 남긴 채 40, 50리 이상 퇴각함으로써 이들은 농민군본대의 공주성 공략에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2개 소대 병력을 이끌고 효포에 주둔하며 지키고 있던 홍운섭은 23일 밤 논산으로부터 경천을 향해 4만여 명의 농민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들의 형세가 위태로와질 것으로 여겨 24일 새벽에 효포의 병력을 철수하여 대교의 농민군을 공격한 것이다.

 같은 날 전봉준은 효포 건너편의 산쪽에 주력부대를 배치하고 있다가 홍운섭이 이끄는 경리청군이 大橋의 농민군을 공격하러 간 사이에 효포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성하영·백낙완이 이끄는 관군이 이들을 공격하였으며, 24일 저녁에는 공주에 막 도착한 森尾대위 인솔하의 일본군 100여 명과 이규태가 이끄는 관군이 가세하였다. 陵峙를 중심으로 농민군은 관군에 대항하며 일대 접전을 벌였다. 농민군은 일본장교가 보기에도 병법을 아는 자가 있다 할 만큼 민첩하게 대응하며 항전하였으나, 50∼70명의 전사자를 내고 거너편 時也山으로 후퇴하여 진을 치고 있다가 밤에는 경천으로 후퇴하였다. 효포에서 후퇴한 전봉준은 농민군의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다시 노성·논산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논산으로 물러난 전봉준은 흩어진 병사들을 불러 모으는 한편, 각지에 원병을 요청하며 농민군을 다시 결집시켰다. 전봉준은 김개남에게도 구원을 요청하였으나,1154)<公山剿匪記>(≪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 429쪽;≪東學亂記錄≫下, 309쪽. 김개남은 이때 청주일대를 공격하는 중이었으며 공주전투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전봉준이 삼례에서 북상할 때 함께 출전할 것을 요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참위설을 빙자하여 남원에서 49일을 머문 김개남은 10월 14일 남원을 출발하여 북상을 시작하였다. 이때 농민군의 수는 8,000여 명이었으며, 16일 전주에 도착하였다. 22일 직전에는 삼례를 출발하여 22일 선봉대가 고산을 거쳐 금산을 점령하였다. 이후 금산은 11월 9일까지 농민군 수중에 떨어져 참혹한 보복을 당했다.1155)鄭昌烈, 앞의 책, 259쪽;李眞榮,<金開南과 동학농민전쟁>(≪한국근현대사연구≫제2집, 1995년);김양식,≪근대한국의 사회변동과 농민전쟁≫, 1996, 347∼350쪽. 일본군에 밀린 김개남 부대는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11월 10일 오후 2시경 錦山 등지에서 鎭岑으로 진격하였다. 이들은 관청을 부수고 문서를 모두 불태웠으며, 창고를 털어 환곡을 탈취하는 한편, 읍내 민가를 침탈하여 재산을 빼앗았다. 이어 留鄕 및 公兄들과 邑屬들을 옥에 가두고 때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11일 정오 무렵에는 청주로 가기 위해 懷德 新灘津을 향해 출발하였다. 13일 오전 8시경 신탄진 방향에서 진격해 간 농민군은 청주성을 공격하였으나, 淸州에 들어와 있던 일본군 및 청주병영의 관군의 공격을 받아 2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크게 패하였다. 이들은 진잠방면으로 후퇴하여 13일 밤 다시 진잠을 공격하였으나 관군에 밀려 연산방면으로 도주하였다. 14일에는 청주에서 패하여 도주한 일군의 농민군이 신탄진에 모여 있는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1156)≪東學亂記錄≫上, 499쪽, 504∼507쪽.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49∼250쪽.

 한편 전봉준은 논산일대에서 다시 결집한 농민군이 2만여 명에 이르자 노성과 경천으로 다시 진출하여 군량을 나르고 포대를 설치하며 전투를 준비하였다. 감영에서는 일본군과 관군이 3개의 부대로 나누어, 두 부대는 판치와 이인으로 나가 주둔하고 하나는 감영에 남아 있는 방식으로 서로 순환하며 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전투는 11월 8일 오후 3시쯤 시작되었다. 농민군은 두 갈래로 나누어 하나는 논산에서 곧장 고개를 넘어 오실산 옆길을 따라 이인을 향하여 공격해 왔고, 다른 부대는 노성현 뒷산과 경천쪽에서 판치와 효포를 공격하였다. 敬川에서 板峙로 진격한 농민군은 판치를 지키고 있던 구상조의 경리청병을 공주쪽 산 위로 밀어붙이고 효포 능치 일대의 산 위로 올라가 깃발을 꽂고 진세를 과시하며 관군과 대치하였다. 이인으로 진격한 농민군은 이인에 주둔하고 있던 성하영의 경리청군을 牛禁峙까지 후퇴시키며 공세를 펼쳤다. 이에 森尾대위가 일본군을 이끌고 와서 지원하며 맞섰으며, 성하영과 함께 이인에 나가 진을 치고 있던 백낙완은 농민군에 포위되었다가 저녁늦게야 포위망을 뚫고 감영으로 돌아왔다.

 우금치가 위급해지자 11월 8일밤 森尾 대위는 우금치 옆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 진을 쳤다. 우금치 전투가 벌어진 11월 9일 아침 농민군은 동쪽으로 板峙 뒷산으로부터 서쪽으로는 鳳凰山 뒷기슭에까지 3, 40리에 걸쳐 마치 병풍을 펴놓은 듯한 진세를 펼치며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관군은 金鶴洞에 통위영 대관 吳昌成과 敎長 朴尙吉을, 陵峙에는 경리청 영관 洪運燮·具相祖, 대관 曹秉完·李相德 등을, 孝浦 烽燧臺에는 통위영 영관 張容鎭, 대관 申昌熙 등을, 우금치에는 성하영, 우금치 견준봉에는 백낙완을, 주봉에는 영장 이기동 등을 배치하였다. 농민군은 11월 9일 오전 10시쯤 이인에서 우금치방향과 오실 뒷산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하였다. 오후 8시경까지 양측은 치열한 공방전을 4, 50차례나 펼쳤다. 결과는 농민군의 패배였다. 농민군은 많은 손실을 입고 퇴각하였으며, 11일·12일 경에는 능치 등 공주 부근 산봉우리에 남아있던 농민군마저 관군에 쫒겨 계룡산 등지로 후퇴함으로써 20여 일에 걸친 공주공방전은 농민군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1157)공주전투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에 대해서는≪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09∼210쪽, 246∼248쪽;≪東學亂記錄≫上, 228∼238쪽·426쪽·440∼444쪽;下, 10∼22쪽·28∼32쪽;<公山剿匪記>(≪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에서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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