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2. 반일투쟁의 전개
  • 5) 항일연합전선의 추진

5) 항일연합전선의 추진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농민군들은 노성에 머물면서 다시 진영을 수습하려 하였다. 농민군은 東徒倡義所의 이름으로 11월 12일 京軍과 營兵, 吏校 및 市民에게 알리는 순한글로 된 고시문을 내걸어 斥倭와 斥化를 위해 동심합력할 것을 호소하였다.

고시경군여영병이교시민

 "무타(無他)라 일본과 됴선이 국(開國) 이후로 비록 인방(隣邦)이 누(累代) 젹국(敵國)이더니 성상(聖上)의 인후(仁厚)심을 힘입어 삼항(三港)을 허(許開)하사 통샹이후(通商以後) 갑신십월의 흉(四凶)이 협적(俠敵)야 군부(君父)의 위(危殆)미 됴셕(朝夕)의 잇더니 종사(宗社)의 홍복(鴻福)으로 간당(奸黨)을 쇼멸(消滅)고 금년뉵월의1158)그 동안 학계에서는 ‘금년뉵월’이라는 구절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개화간당이 왜국을 체결하여 승야입경하여 군부를 핍박하고 국권을 천자한” 사건은 문맥상 1894년 6월 21일 새벽에 일어난 일본군의 경북궁강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東學亂記錄≫에는 ‘금년십월’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정창렬 교수가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되어 있는 원본 사진과 대조해 본 결과 ‘금년십월’은 ‘금년뉵월’의 오기임이 밝혀졌다. 그외에도 몇 군데 자구상의 오류가 있는 부분은 밑줄로 표기해 두었다. 이 자리를 빌어 자료를 보내주신 정창렬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화간당(開化奸黨)이 왜국(倭國)을 쳐결(締結)여 승야입경(乘夜入京)야 군부(君父)를 핍(逼迫)고 국권(國權)을 쳔(擅恣)며 우황 방수령(方伯守令)이 다 화중 쇼쇽으로 인민을 무휼(撫恤)지 안이코 살륙(殺戮)을 죠하며 녕(生靈)을 도탄(塗炭) 이졔 우리 동도가 의병을 드러 왜적을 쇼멸고 화를 제어며 됴정(朝廷)을 쳥평(淸平)고 직(社稷)을 안보 양 의병 이르 곳의 병졍과 군교(軍校)가 의리를 각지 아니고 나와 졉젼(接戰) 비록 승(勝敗) 업스 인명이 피의 샹니 엇지 불샹치 아니 리요 기실은 됴션기리 샹젼(相戰)쟈   아니여늘 여시(如是) 골육샹젼(骨肉相戰)니 엇지 닯지 아니리요  공쥬한밧(公州大田) 일로 논지여도 비록 츈간의 보원(報怨) 것시라 일이 혹며 후회 막급이며 방금 군이 압경(壓京)의 팔방이 흉흉 폄벽도이 샹젼만 면 가위 골육샹젼이라 일변 각컨 됴션람 기리야 도(道) 혹은 다르 척왜(斥倭)와 척화(斥化)1159)원래 이 고시문은 순한글로 쓰여진 것이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활자화하면서 임의로 한문을 병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척화’를 ‘斥華’로 기입하였으나, ‘斥化’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鄭昌烈, 앞의 글, 1991, 253∼254쪽 참조. 기의(其義)가 일반이라 두어 글로 의혹을 푸러 알게노니 각기 돌여 보고 츙군(忠君) 우국지심(憂國之心)이 잇거든 곳 의리로 도라오면 샹의야 갓치 척왜척화(斥倭斥化)야 됴션으로 왜국이 되지 안이케 고 동심합녁야 를 이루게 올라

갑오 십일월 십이일

동도창의쇼(東徒倡義所)1160)≪東學亂記錄≫下, 379∼380쪽. 같은 날 농민군은 이와 비슷한 내용의 한문으로 된 격문<示京軍營兵>을 동시에 내놓았다(≪東學亂記錄≫下, 185∼186쪽).

 같은 날 倡義所 명의의 한문으로 된 고시문(示京軍營兵)도 제시되었다. 그 요체는 양차에 걸친 공주전투에 대해 후회막급임을 밝히는 동시에 앞으로는 절대로 서로 싸우거나 죽이지 말고 힘을 합하여 보국안민하자는 것이었다.1161)≪東學亂記錄≫下, 185∼186쪽.

 제2차 농민전쟁, 곧 반일투쟁에서 보이는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위의 고시문에서 보이듯이 다양한 세력을 포괄하는 항일연합전선의 구축을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는 점이다. 우선 10월 16일 전봉준이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올린 글이나 위의 고시문에서 강조하는 관료 및 경군·영병에 대한 합세촉구는 제1차 농민전쟁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았던 주장이다. 제1차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吏胥層을 끌어 들이려는 노력은 보였지만, 관료들에게는 자신들의 행동이 반역이 아니며, 어쩔 수 없이 봉기한 것이라는 점을 호소하는 정도였지, 이들을 끌어 들이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1162)裵亢燮,≪東學農民戰爭硏究≫(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96), 104∼108쪽 참조. 또 농민군은 초기단계에서는 경군과는 적대행위를 삼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영병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공격하였고, 4월 23일의 장성전투 이후에는 경군과도 거리낌없이 적대하였다.1163)鄭昌烈, 앞의 글, 156쪽.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지도부는 농민전쟁에 임하기 이전부터 ‘반봉건’과 ‘반외세’의 과제를 동시에 포착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특히 전봉준은 손화중·김개남·최경선·김덕명 등 변혁지향적인 인물들 뿐만 아니라, 儒林을 비롯하여 褓負商·기름장수·鍮器장수·엿장수·솥장수를 포괄하는 다양한 세력과의 연합전선을 構想하였다.1164)吳知泳,<東學史>(≪東學思想資料集≫2, 1979), 517∼519쪽;<東學史>(草稿本)(≪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455쪽. 5월 초 청·일 양국군이 조선에 출병한 이후 일본군이 내정개혁을 강요하는 데서 나아가 경복궁을 강점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자 ‘반외세’, 특히 反倭문제는 전봉준의 초미의 관심으로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전봉준의 연합구상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전봉준은 전라감사 金鶴鎭이 7월 6일 ‘共守全州 同赴國難’ 하자고 제의하자 고심 끝에 전주로 가서 전라감사 김학진과 ‘官民相和’를 맺고 함께 협력하여 국난을 극복하기로 약속하였으며, 士族이나 지주층까지도 포괄하는 ‘반외세’를 위한 ‘민족적 대연합’을 통해 광범위한 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주체적으로 연합전선을 추구하였다는 사실은 농민군의 역량이 그만큼 성장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연합의 성격과 대상 면에서 제1차 농민전쟁과 제2차 농민전쟁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농민군의 궁극적 목표는 ‘輔國安民’으로 집약할 수 있지만, 제1차 농민전쟁 시기에는 ‘安民’을 우선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반봉건 개혁을 위한 ‘계급중심의 연합’이었다. 이에 비해 제2차 농민전쟁 시기에는 ‘輔國’을 우선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斥倭斥化 투쟁을 위한 ‘반외세 연합’으로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이렇게 볼 때 제1차 농민전쟁에서는 기본역량을 “양반과 부호 앞에 고통받는 民衆과 方伯守令 아래서 굴욕을 받는 小吏”에서 구하였지만1165)<東學史>(≪東學思想資料集≫貳), 467∼468쪽. ‘반봉건’ 개혁 특히, 민씨정권의 축출이라는 면에서 농민군과 개화파와의 연합가능성이 열려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제2차 농민전쟁에서는 개화파세력이 일본과 함께 가장 주요한 타도대상이 되었다. 반면에 “조상의 뼈다귀를 우려 행악을 하여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양반·보수유생층은 제1차 농민전쟁에서는 중요한 공격대상이었지만, 斥倭斥化를 1차적 과제로 한 제2차 농민전쟁에서는 보수유생층이 중요한 연합대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1166)裵亢燮,≪東學農民戰爭硏究≫(高麗大博士學位論文, 1996), 204∼213쪽 참조.

 객관적으로도 일본군의 침략행위가 명백해진 다음이었기 때문에 1차 기포에 비해 척사적 유생층들과의 연합 가능성은 그 만큼 넓혀져 있었다. 실제로 일부 유생들 사이에서는 ‘反倭倡義’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다. 예컨대 공주의 유생 徐相轍은 7월 2일에 안동에서 향청 명륜당에 모이라는 반왜창의문을 돌렸고, 8월 초에는 집결한 의병이 2,000여 명에 달하자 태봉병참부를 공격한 다음, 청풍(9월 18일)·경기 광주 곤지암(20일) 등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고 곤지암쪽으로 피신하였다.1167)金祥起,<朝鮮末 甲午義兵戰爭의 展開와 性格>(≪한국민족운동사연구≫3, 1989), 46∼53쪽;朴宗根 著·朴英宰 譯,≪淸日戰爭과 朝鮮≫, 201∼208쪽. 서상철은 위로는 縉紳으로부터 아래로는 匹夫에 이르기까지 임진왜란 때 참화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음을 상기하면서 일본이 경복궁을 강점하여 국왕과 관료들을 협박하고 군대를 쫓아낸 일은 임진왜란 때보다 더 심하다고 하였다. 또 일본은 우리 나라의 백세의 원수이며, 우리 나라 일은 우리가 자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有義君子들은 모두 무기를 들고 모이라고 촉구하였다.1168)<日本外務省外交史料館 所藏文書>(≪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9), 428∼432쪽.

 9월 11일 전후 충청도 공주일대에서도 湖州大義所 명의로 “조정에서 密敎가 있었으며, 청나라도 우리 나라를 위해 진력하고 있으니” 輔國安民을 위해 창의할 것을 촉구하는 격문이 충청 각지에 발포되었다.1169)<黃海道東學黨征討略記>, 公州湖西九接中(≪韓國民衆運動史資料大系≫1, 驪江出版社, 1986), 539쪽;<大阪朝日新聞>, 명치 27년 12월 1일자(≪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3, 1996), 126쪽. 또 정확한 시점은 모르나 8월 말에서 9월 초로 추정되는 시기에 호남지역의 창의를 촉구하는 恩津義兵所 명의의 통문이 나돌았다. 조정에서는 매국자들이 원수의 군대를 불러 국왕을 협박하고 있으며, 大國에 저항하는 것은 의리상 잘못된 것이니 호남 53현에서 모두 창의하라고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뒤에 첨부된<의병소조약>에는 통문을 먼저 고산향교에 보내니 한 부를 베껴 놓고 다시 전주로 보내면 전주에서 여러 장을 만들어 각 읍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1170)<隨錄>, 285∼290쪽. 이외에도 8월 28일 경상도 예천 花枝 都會에서 보수집강소로 보내는 통문에는 “오백년의 왕정에 倭酋가 득세하여 억조창생이 덕화를 입지 못하였다. 千里邦畿 어느 지역도 도탄에 빠졌으니 생령을 어찌 보존하겠는가. 바야흐로 지금 道中의 본의는 척왜다. (중략)도인은 곧 의병이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1171)≪甲午斥邪錄≫, 8월 28일조. 또 이미 9월 초에 倭賊을 섬멸하고 그들의 잔당을 토멸하자는 대회를 가진 바 있는 진주지역의 ‘東學黨’은 1894년 9월 10일 忠慶大都所의 명의로 다음과 같은 掛書를 내걸었다.

우리 나라는 옛날부터 소중화라 칭해 왔으며, 삼천리는 예의의 나라이고 풍부한 강토이다. 그러나 지금은 국운이 否塞하고 人道가 頹廢하므로 간신들이 화를 불러 들여 왜적들이 우리 국경을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중략) 아! 東土의 의사들이여 어찌 피를 뿌리며 분개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가?1172)≪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40∼141쪽. 병사 閔俊鎬가 1년도 안되어 이임하고 倭의 세력을 업은 신병사가 부임하는 데 대한 부당함을 장황하게 역설하고 있다. 또 이들은 관군과 대적하여 싸우지도 않을 뿐 아니라 민준호도 이들을 탄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기세를 도와준다고 하였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70쪽).

 예천의 화지 도회를 제외하고 湖州大義所·恩津義兵所·忠慶大都所의 실체나 반일통문이 나온 배경은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지만 그 내용이나 정황으로 볼 때 적어도 유생층이 개입했거나 유생층을 반일투쟁에 적극적으로 끌어 들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농민군측에서도 이들을 끌어 들이기 위해 격문이나 구호에서 보수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전봉준에 앞서 10월 15일 농민군측에서는 公州倡義所義將 李裕尙 명의의 글을 박제순에게 올렸다. 이 글에서 이유상은 “감히 묻건대 청나라를 막자는 것인가 일본을 막자는 것인가 의병을 막자는 것인가. 청나라를 막자는 것은 大義를 멸시하는 것이고, 義兵을 막자는 것은 그 계책이 잘못되었다. 일본을 막자는 것은 壬辰倭亂 이후 누군들 이러한 마음이 없었겠는가”1173)≪東學亂記錄≫下, 381∼382쪽.라고 하여 역시 임진왜란 이래의 대일 적대감을 강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청에 대한 적대는 大義를 어그러뜨리는 것이라 하고 있어서 ‘反日親淸的’ 태도와 함께 斥邪的, 華夷論的 분위기를 보여 주고 있다.

 전봉준도 10월 16일 박제순에게 보낸 글에서 ‘日寇’의 침략행위로 말미암아 국왕이 욕을 당하는 일, 조정대신(개화파-필자)들이 東夷와 連腸하여 국왕을 협박하고 백성들의 원한을 산 일 등을 임진왜란 당시 국왕이 욕을 당한 치욕·통분 등과 연결하여 강조하고 있다. 또 선왕의 적자로서 二心을 품은 자(개화파-필자)들을 공격하여 선왕조 오백년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일어섰음을 강조하며 박제순에게도 斥倭斥化투쟁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전봉준의 글은 물론 ‘민족적 대연합’을 추진하기 위한 전술적 고려가 전제된 것이지만, 일본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를 당하여 전봉준의 의식 속에 온존되어 있던 근왕주의적 의식이 강하게 표출되어 있다.1174)≪東學亂記錄≫下, 383∼384쪽. 또 11월 13일의 고시문에서는 척왜척화를 위한 연합전선에 대한 강조와 동시에 반왜의식의 강렬함이 왜와 조약을 체결한 개화간당에 대한 소멸, 나아가 개화 자체에 대한 제어로까지 발전해 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일부 유림에서는 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그 원인을 제공한 집권층의 부패를 비판하기도 하였고, 특히 斥倭와 관련하여서는 동정 내지 공감을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부 관리들과 유학자들은 농민군에 직접 가담하기도 하였다.1175)裵亢燮,<1894년 東學農民軍의 反日抗爭과 ‘民族的 大聯合’ 推進>(≪軍史≫35, 1997), 121∼124쪽 참조. 그러나 보수유생층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하였다. 관리나 유생 가운데는 농민군에 동조하거나 가담하는 인물도 있었지만,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연합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대부분의 관리들이나 유생층은 민보군을 조직하여 반농민군활동을 벌이거나 일본과 연합한 민보군의 농민군 탄압에 침묵할 따름이었다.

 연합을 이끌어내지 못한 가장 큰 요인은 보수층의 계급적 속성이나 이념적 한계 때문이지만, 여기에는 농민군의 역량이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해 낼 만큼 성장해 있지 못했다는 측면도 작용하였다. 집강소 시기 이래 곳곳에서 분출된 농민군 대중의 사적인 보복이나 약탈적 행동은 항일연합전선의 기반을 축소할 수 밖에 없었다. 충청도 예산 일대에서 기포한 접주 朴熙寅은 재기포 당시 “많은 道衆이 招募되었으나, 군율이 있을 수 없고 법적 규제가 지켜질 수 없는 이 烏合之衆으로는 日軍까지 합세한 관군과의 싸움은 아무리해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견해를 보이고 있었다.1176)<昌山后人 曺錫憲歷史>(≪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0), 137쪽. 이 점에서 전봉준이나 손화중 역시 다를 바 없었다. 8월말 무렵 전봉준은 농민군에 대해 “무리가 비록 많으나 烏合之衆이어서 쉽게 무너져 소망하였던 것을 끝내 이루지 못할 것이다”고 평가하였으며, 손화중은 농민군이 “어리석고 천하여 禍를 즐기거나 빼앗고 훔치는 일을 즐겨하는 무리들”이어서 일이 성사되기 어렵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다.1177)<梧下記聞>2筆, 210∼211쪽.

 농민군 대중의 이러한 행동은 2차전쟁 시기에 들어 열세에 몰리게 되자 대중들을 강제로 동원하는 과정에서 더욱 심하게 노정되었다. “광양·순천 지방의 적은 거리낌없이 평민들을 협박하여 날마다 억지로 동학에 가입시켰으므로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할 수가 없었으며”,1178)<梧下記聞>3筆, 256쪽. “최근에 들리는 소문에는 비적들이 강제로 양민을 몰아서 모두 저들의 무리에 끌어 넣어 집을 버리고 생업을 잃어버린 채 울부짖게 만든다고 하는데 추종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열이면 아홉이나 된다”고 하였다.1179)<梧下記聞>3筆, 291쪽. 10월, 11월에 들면서 강제로 농민군에 끌어 들이는 행동은 더욱 심화되었다. 일부 농민군 지도자가 선량한 양민을 전투시에 앞에 세우거나 돈을 받고 강제 징집을 면제해 준다거나,1180)<梧下記聞>, 279∼289쪽. 일부 지역에서는 민인들을 강제로 동원하는 과정에서 돈을 받고 제외시켜 주는 사례가 나오기도 하였다.1181)<嶺上日記>(≪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 289쪽. 이 점은 충청도나 경상도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1182)裵亢燮, 앞의 글(≪歷史學報≫153), 101쪽 참조. 지도부에서 추구한 보수유생과의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데도 적지 않은 방해요인이 되었다.1183)이 점과 관련하여 집강소시기 “전라도 作亂의 일은 잘못된 것”이었다는 오지영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東學史>, 5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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