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2. 반일투쟁의 전개
  • 6) 농민군의 후퇴와 농민전쟁의 좌절

6) 농민군의 후퇴와 농민전쟁의 좌절

 우금치에서 패배한 후 논산쪽으로 후퇴한 전봉준은 11월 14일 밤 강경·논산 어름에서 김개남 부대와 합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개남은 11월 13일 청주전투에서 패배한 후 진잠을 거쳐 14일 연산에서 다시 집결하여 일본군 및 관군과 접전하였으나, 오후 5시쯤 노성·은진방면으로 퇴각하였던 것이다.1184)≪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52쪽;<梧下記聞>3筆(≪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268쪽;≪東學亂記錄≫下, 463쪽. 전봉준과 김개남 부대가 합세한 농민군은 15일 魯城 烽火山·논산 大村의 圓峯과 小土山·은진 黃華臺 등에서 추격하는 관군과 일본군 공격을 받고 오후 4시경에는 남쪽으로 후퇴하여 전라도로 들어갔다.1185)≪東學亂記錄≫上, 245∼248·317∼319·523∼530쪽;下, 39∼43·187∼189쪽. 김개남부대가 합류하기 전인 14일 오후 노성 봉화대에 주둔해 있을 당시 농민군의 수는 공주전투시의 1만∼4만여 명에서 2,500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 김개남이 합류한 이후인 15일에는 3,000여 명이었다.1186)≪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53쪽. 관군측에서는 이때 농민군의 수를 만여 명이라 하였다(≪東學亂記錄≫下, 39쪽). 남원에서 북상할 당시 8,000여 명에 달하던 김개남 휘하의 농민군은 500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1,0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전라도로 후퇴한 전봉준은1187)전라도 쪽으로 후퇴할 당시 농민군의 수는 1,000명 정도였다(≪東學亂記錄≫上, 318쪽, 528쪽;≪東學亂記錄≫下, 43쪽). 11월 19일 전주로 들어갔으며, 23일에는 금구쪽으로 이동하였다.1188)<札移電存案>, 甲午 11月 30日(≪各司謄錄 63:啓草存案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2), 288쪽. 전주까지 전봉준과 김개남은 함께 행동하였으며, 자신들의 본거지인 이곳에서 흩어진 농민군을 다시 모아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23일 전주를 떠났으며, 이때 두 개의 부대로 나누어 전봉준은 고부·태인 방향으로, 김개남은 남원방향으로 간 것 같으며, 전봉준이 이끄는 부대는 적어도 6,000∼7,000명 정도는 되었다.1189)≪駐韓日本公使館記錄≫6, 45쪽. 관군측에서는 23일 금구 원평으로 간 농민군이 數三千명, 25일 원평에 집결해 있는 농민군의 수가 1만여 명 이상인 것으로 보고하였다(≪東學亂記錄≫上, 553쪽;下, 199쪽).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25일 원평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일본군 및 관군과 접전하였다. 오전 9시경에 시작된 전투는 오후 4시경에 끝났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37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며, 관군과 일본군은 回龍銃 10정·조총 60정·鉛丸 7石·화약 5櫃·子砲 10坐·刀鎗 200자루·米 500石·錢 3,000냥·木 10同·소 2마리·말 11필·牛皮 10장·虎皮 1令·文書 2籠 등을 노획하였다.1190)≪東學亂記錄≫上, 553쪽.

 원평에서 물러나 태인으로 간 농민군은 11월 27일 태인의 주산인 성황산·한가산·도리산 등 3개 산 9개 봉우리에 진을 쳤다. 태인까지 추격해 온 관군과 농민군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오전 10시부터 약 12시간에 걸쳐 농민군은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4, 50명이 생포되고 3, 40명이 전사하였으며 회룡포 15정, 조총 200여 정과 다수의 탄약·죽창·말 6필 등을 노획당하는 참패를 당하고 고부와 남원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때 전봉준·金文行·劉公萬 등이 이끄는 농민군의 수는 8,000여 명이었으며, 경군은 230명, 일본군은 40명이었다.1191)≪東學亂記錄≫上, 326∼327쪽·565∼566쪽. 일본군은 태인전투시에 농민군의 수가 대단히 많아 수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기도 했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6, 44∼45쪽). 관군측에서는 8,000명, 혹은 5,000∼6,000으로 추산하기도 했다(≪東學亂記錄≫上, 565·327쪽;下, 85쪽). 전봉준은 태인전투에서 패한 후 농민군을 다시 결집하였으나 이미 더 이상 전투에 임할 대오조차 갖출 수 없었다. 전봉준은 여기서 농민군을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1192)<全琫準供草>, 320쪽.

 사실 재기포를 시작할 당시 농민군의 역량은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에는 취약하였다. 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제2차 봉기에 직접적으로 진압에 가담한 일본군에 비해 농민군의 군사력이 턱없이 취약하였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농민군은 관군측으로부터 노획한 회룡포(에피르)·回旋砲(캇트링)·極老砲(크르프)·레밍턴총이나 스나이더총과 같은 근대적 화기로 무장하기도 하였지만1193)≪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61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6, 28쪽. 대부분은 鳥銃으로 무장하였고, 그것도 없을 경우 창이나 죽창으로 무장하였다. 따라서 농민군측에서도 일본군과 1대 1로 맞설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농민군측에서도 농민군 100명 정도가 일본군 1명을 당해낼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1194)≪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17쪽. 또 일본군에 비해 조총은 사거리가 짧았기 때문에 전투에서 극히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따른 전투상황을 황현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우리 나라 총의 사거리는 100보 정도에 불과하지만, 일본총의 사거리는 400∼500보도 더 되었으며, 불이 총대안에서 저절로 일어나 불을 붙이는 번거로움이 없었다. 따라서 비록 눈이나 비가 내린다고 하여도 계속 쏠 수 있었다. 적과 수백 보 떨어진 거리에서 적의 총탄이 미치지 못할 것을 헤아린 다음 비로소 총을 쏘았으므로 적은 빤히 쳐다보면서 감히 한 발 쏘지 못하였다.1195)<梧下記聞>3筆, 254∼255쪽.

 이에 따라 일본군 1인이 농민군 수천 명을 당해낼 수 있고, 관군 1인은 수십 명을 상대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전력평가가 나오기도 하였다.1196)≪東學亂記錄≫上, 91쪽. 농민군 지도부에서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전봉준은 “동학당의 軍, 그 무리들은 훈련받지 못하였고 무기는 玩具와 같다. 사람, 무기 모두 정예한 일본군에 비길 수 있다고는 본디 믿지 않았다”고 하였고,1197)<東京朝日新聞>, 명치 28년 3월 5일(≪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2), 366쪽. 10월 16일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내는<上書>에서도 자신들의 “하고자 하는 바가 극히 어려움을 실로 잘 알고 있다”고 하였다.1198)≪東學亂記錄≫下, 382쪽.

 그러나 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또 하나 이유로 지적해야 할 점은 조직적 결합도나 의식 등 농민군 내부의 문제점이다. 농민군의 역량에 대한 위와 같은 부정적 평가도 농민군 내부의 문제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것은 의식을 성장시키고 조직적 결합도를 강화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던 집강소시기에 농민군이 전개한 개혁활동이 왜곡 내지 저지되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는 외세의 개입이라는 정세변화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전봉준은 5월초 청·일군대의 조선진출이라는 예기치 않은 사태를 맞아 관심의 초점을 폐정개혁이라는 내부적 문제로부터 반외세 문제로 전환시켜 갔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5월 8일 전주성에서 철수한 이후 청·일군이 계속 주둔할 수 있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농민군들의 私的인 雪憤행동을 엄금하고자 하였다. 이어 경복궁 강점이 일어나면서 반외세문제가 더욱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자 7월 6일 전라감사 金鶴鎭과 ‘官民相和’를 맺고 함께 협력하여 국난을 극복하기로 약속하였으며 士族이나 지주층까지도 포괄하는 ‘반외세’를 위한 ‘민족적 대연합’을 통해 광범위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반외세, 곧 반일투쟁이 당면과제로 제기되면서 연합의 내용과 대상이 바뀜에 따라 전봉준은 제1차 농민전쟁시기에 제기하였던 폐정개혁요구의 수위나 내용을 일정하게 양보 내지 유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官民相和’의 한 주체인 김학진의 입장과 크게 상치되거나 반외세투쟁을 위한 연합세력으로 인식하고 있던 보수유생층과 재산이 있는 자들을 자극할 경우 압도적 힘의 우위를 가진 외세의 침략행위를 목전에 두고 敵前分裂을 자초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급격한 폐정개혁활동을 자제하면서 ‘官民相和’에 입각한 체계적인 폐정개혁을 추진해 나가는 한편 농민군의 私的인 雪憤행위를 제지시켰다.

 그러나 전봉준의 이러한 생각과 행동은 농민군의 그것과는 달랐다. 각지에서 치안의 공백을 틈타 등장하였던 ‘무뢰배’들은1199)<梧下記聞>首筆, 108·110쪽. 논외로 치더라도, 집강소시기 농민군의 주력층을 이루던 것은 신분적으로는 상천민, 계급적으로는 소빈농이었다. 집강소 시기에는 천민층이 집중적으로 입도하였고,1200)<梧下記聞>수필, 109쪽. 농민군의 활동도 대체로 향촌사회에 着根하지 못한 유랑적 부류에 의해 이루어졌다.1201)<兩湖電記>(≪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6), 148쪽. 이러한 농민군 대중과 일부의 지도자들은 ‘민족적 모순’보다 ‘계급적 모순’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이들은 ‘경제적 균산주의’와 ‘사회적 평등주의’에 입각한 민중적 이상사회의 실현을 추구하였으며, 그들이 평소에 품어 왔던 양반과 지주에 대한 원초적 반감이나 저항의식이 폭력을 수반하며 집단적으로 표출되었다.1202)裵亢燮, 앞의 글(1996), 154·159쪽 참조.

 이에 따라 전봉준과 농민군 대중 간에는 갈등과 균열상이 노정되었고, 지도부 간에도 내분의 조짐이 일어났으며,1203)<梧下記聞>首筆, 110쪽. 그렇지 않아도 느슨하던 농민군 내부의 결합도는 더욱 취약해졌다. 이러한 사정에 대해 농민군 진압에 투입되었던 후비보병 독립 19대대장 南小四郞은 농민군 조직에 대해 6월 이전에는 농민군에게 일정한 지휘계통이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각 지방에는 각각 巨魁라고 하는 자가 있어서 配下를 통솔하지만, 거괴들을 통솔하는 대거괴는 없다 …… 각 거괴는 각자의 의견에 따라 각 지방에서 기포하여 자기 의사를 결행하려고 한 것 같다”1204)≪駐韓日本公使館記錄≫6, 25∼26쪽.고 할 정도로 조직적 결합은 느슨하였다.

 초기에 보여준 농민군들의 엄격한 기율도 약화되면서 제2차 기포 초기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김개남은 자기 휘하의 중간 지도자인 남응삼에게 10월 旬頃 기병할테니 무리를 이끌고 올 것을 요청했으나 불응하였다. 이때 남응삼의 書記는 김개남을 ‘烏合之卒鼠竊之將’이라 하며 출전하자마자 패배할 것이라고 평가하였다.1205)<甲午略歷>, 74∼76쪽. 9월 16일 청풍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동학도들이 접주를 무기로 위협하면서 “너는 왜 우리를 간교한 말로 동학에 끌어들였느냐. 이제는 하루 속히 사죄하고 우리 모두가 화를 입지 않도록 하라”하고 상주부에 그를 송치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1206)박성수 주해,≪渚上日月≫, 갑오년 9월 16일조, 217쪽. 상주에서도 교도들이 접주를 잡아 笞杖을 치며 “너 때문에 우리들이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하며 해산한 일이 있었다(위와 같음, 9월 19일조, 217쪽). 논산에서 공주로 북상하는 과정에서도 농민군 내부의 결속도가 저하되고 있었다. 매일 點考할 때마다 闕額이 수백 명에 달하였고, 추위와 배고픔을 못이겨 도망하는 자가 많았으며, 서로 선봉에 서기를 꺼려 내분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따라 충청감사 박제순은 이때 농민군을 공격하면 쉽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며 빨리 지원병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1207)≪東學亂記錄≫上, 222·399·406쪽;下, 79쪽.

 전봉준은 우금치전투에서 “두 차례 접전 후 1만여 명의 군병을 點考하니 남은 자는 3천여 명을 넘지 않았으며, 그후 또 두 차례 접전한 후 점고하니 5백여 명에 불과했다”고 하였으며, “금구에 이르러 다시 초모하였을 때 농민군의 수는 증가되었으나, 기율이 없어 다시 개전하기 어려웠다”고 진술하였다.1208)<全琫準供草>(≪東學思想資料集≫壹), 320쪽. 이러한 사정은 농민군 내부의 결속도가 그만큼 취약하였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거기에는 ‘민족적 모순’을 중시하는 전봉준 등 지도부와 ‘사회적 평등주의’와 ‘경제적 균산주의’에 입각하여 ‘계급적 모순’을 중시하던 일부 지도자와 빈농·천민으로 구성된 농민군 대중 사이에 가로 놓여 있던 이념 내지 지향에서의 차이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전봉준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민족적 대연합’에 의한 항일전선의 구축이 실패하고 농민군 내부의 결속도마저 취약해진 상태에서 우세한 화력으로 압박해 오는 일본군 및 관군의 연합세력을 상대하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공주전투를 고비로 농민군은 퇴각의 길을 걷게 되었고, 농민군지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농민전쟁은 좌절하고 만다.

 전봉준은 11월 29일 입암산성을 거쳐1209)≪東學亂記錄≫下, 287·300쪽. 김개남과 만나기 위해 순창 피로리로 잠입하였다가 12월 2일 밤 주민 한신현 등이 끌고 온 주민들에게 체포되었다. 전봉준 스스로는 상경하여 서울의 정국을 상세히 탐지하기 위해 상경하려다가 체포되었다고 하였다.1210)≪東學亂記錄≫上, 253·574·580쪽;下, 208쪽;<全琫準供草>, 320쪽. 전봉준은 순창관아에 수감되어 있다가 12월 7일 일본군에 인계되어 초토영이 설치되어 있던 나주로 이송되었으며, 최경선과 함께 임시로 설치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서울로 압송되었다가1211)≪東學亂記錄≫上, 61∼62·611쪽;下, 221쪽.
≪駐韓日本公使館記錄≫6, 52쪽;<梧下記聞>3筆, 309쪽.
3월 29일 처형되었다.1212)<二六新報>, 명치 28년 4월 26일(≪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2), 272쪽.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농민군은 공주전투에서 패배한 뒤 논산·전주를 거쳐 원평·태인전투까지 전봉준과 행동을 함께 하였다. 태인전투 이후에는 순창을 거쳐 최시형이 머물고 있는 임실로 가서 합류하였다. 이후 북접 농민군은 장수를 거쳐 금산·茂朱 등지를 거치는 동안 전투를 치르며 북상하여, 12월 9일에는 黃澗을 공격한 후 12월 10일경에는 永同 龍山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12월 12일 관군 및 보부상, 민보군의 공격을 받고 報恩·청주로 퇴각하였다.1213)<天道敎會史草稿>(≪東學思想資料集≫壹), 468∼469쪽;<天道敎創建史>(≪東學思想資料集≫貳), 156∼157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3, 250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6, 68∼70쪽;≪東學亂記錄≫上, 619쪽;≪東學亂記錄≫下, 73쪽. 이후 靑山을 거쳐 報恩 鐘谷에 진을 치고 있던 북접 농민군은 12월 17일 밤부터 12월 18일 일본군과 尙州 민보군의 공격을 받아 3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화양동을 거쳐 충주 외서촌으로 갔으나, 다시 관군의 공격을 받았다. 12월 24일에는 忠州 無極장터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아 농민군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최시형·손병희 등 북접의 지도자들은 이때 잠적하여 체포되지는 않았다.1214)≪駐韓日本公使館記錄≫6, 68∼70쪽;<天道敎會史草稿>(≪東學思想資料集≫壹), 470쪽;申榮祐,≪甲午農民戰爭과 嶺南 保守勢力의 對應≫(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91), 265∼266쪽.

 김개남은 11월 23일 전주에서 남원 방면으로 퇴각하였다가, 12월 1일 태인 종송리에서 강화영병에게 체포되었다.1215)≪東學亂記錄≫上, 579쪽.
≪東學亂記錄≫下, 60쪽, 218쪽.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97쪽.
심영의 중군 황헌주가 김개남을 포박하여 12월 2일 전주로 이송하였다. 이도재는 전주 인근에 아직 농민군들이 다수 둔취해 있을 뿐만 아니라 서울로 이송도중에 탈취당할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12월 3일 오후에 참수하고, 수급만 서울로 보냈다.1216)≪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97쪽;6, 2∼4쪽, 8쪽.
황현은 감사 이도재의 심문에 대해 김개남이 “우리들이 한 일은 모두 대원군의 은밀한 지시에 의한 것이다. 지금 일이 실패한 것은 또한 하늘의 뜻일 뿐인데 어찌 국문한다고 야단이냐”고 하였기 때문에 김개남을 살려 두었다가는 혹여 난을 불러올까 두려워 서울로 이송하지 않고 전주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고 하였다(<梧下記聞>3筆, 302∼303쪽;<嶺上日記>(≪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 294쪽).

 광주에서 활동하던 손화중과 최경선은 11월 27일 광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전봉준부대가 태인에서 패하고 전봉준이 입암산성으로 들어간 직후인 12월 1일 손화중은 부하들을 해산하고 광주를 떠나 고창으로 잠입하였으며, 12월 11일 고창에서 주민들에게 체포되어 고창현에 갇혀 있다가 일본군에게 넘겨졌다.1217)≪東學亂記錄≫上, 572쪽;≪東學亂記錄≫下, 206쪽, 709쪽;≪舊韓國官報≫1, 867∼878쪽. 최경선 역시 12월 1일 귀화한다는 방문을 남기고 광주를 떠나 잠입하였다가 12월 3일 화순 동복에서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인도되었다. 손화중과 최경선은 전봉준과 같이 나주에 수감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었다.1218)≪東學亂記錄≫上, 572쪽;≪東學亂記錄≫下, 206, 288, 707쪽;<梧下記聞>3筆, 309쪽.

<裵亢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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