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3.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
  • 1) 결합의 유대

1) 결합의 유대

 1894년의 농민전쟁에서는 사람들이 전쟁에 참가하는 결합방식이 다양하고 다원적이었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으로는 농민들의 결합·유대 형성에 동학교문의 조직이 크게 기여하였다는 사실이다. 동학교문의 接主가 그대로 농민군의 지도자인 경우가 많았다. 1895년 2월 11일의 제2차 법정신문에서 전봉준은 “이른바 접주는 모두 동학이었고 그 이외의 구성원은 충의의 자원자(忠義之士)가 많았다”1219)<全琫準供草>, 을미 2월 11일, 再招問目(≪東學亂記錄≫下, 국사편찬위원회, 1971), 535쪽.고 하였고 1895년 2월 9일의 제1차 법정신문에서는 “고부민란 때에는 寃民과 동학이 합세하였지만 동학은 적었고 원민이 많았다”1220)위와 같음, 을미 2월 9일, 招招問目, 위의 책, 525쪽.고 하였다. 동학의 조직도 더러는 농민전쟁의 진전에 따라 창출되기도 하였으니 전봉준은 “접주·접사는 기왕에 본래 있었으나 혹은 기포시에 창설되기도 하였다”1221)위와 같음, 을미 2월 11일, 再招問目, 위의 책, 535쪽.고 말하고 있다.

 동학교문의 조직이 농민군의 결성에 하나의 결합원리로 될 수 있었던 것은 동학의 교리가 일정하게 백성의 希願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였지만 공주·삼례·광화문·보은 등지에서의 교조신원운동을 통하여 특히 호남지역의 동학교문이 혁명적인 방향으로 크게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동학교문의 조직이 농민군의 결합원리로 됨으로써 농민운동이, 종래 고을의 차원으로 폐쇄되어 있었던 지역국지성에서 벗어나 한 道를 포괄하는 지방의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농민군의 결성에 또 하나의 결합원리로 등장한 것은 고을공동체에 있어서의 鄕權에 이미 상당하게 진출하였던 새로운 향임층으로서의 농민적 향권세력이었다고 보여진다. 고을공동체의 기본단위인 촌락공동체의 향임에서 上尊位는 양반이 담당하고 閑丁塡代·還上 등의 실무는 평민에서 차출되는 副尊位의 담당이었다. 조선후기, 시대가 내려올수록 촌락공동체=里의 향직인 존위·里正·집강 등은 평민이 담당하는 것이 더욱 일반화되어 갔던 바, 1889년 전라도의 어느 고을에서는 평민이 座首가 되기도 하였으며, 따라서 향권의 주도권을 두고 士族과 평민층간에 대립과 각축전이 전개되었다.1222)金仁杰,<朝鮮後期 鄕權의 추이와 지배층 동향>(≪韓國文化≫2, 1981), 178∼182쪽.

 1862년 3월 16일에 발생한 咸陽민란에서는 ‘향권을 장악하려는 목적’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으며,1223)<右兵營狀啓 6月 25日>(≪壬戌錄≫, 국사편찬위원회, 1958), 45쪽. 그 해의 다른 민란들에서도, 향임·향리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 공통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향권쟁취의 의식이 있었다고 짐작된다.1224)鄭昌烈,<백성의식·평민의식·민중의식>(≪역사와 인간≫변형윤·송건호 편, 두레, 1982), 20쪽.

 농민전쟁의 5∼9월의 단계에서 시행된 집강소는 형식에 있어서 종래의 향소의 집강제도를 계승한 것이며1225)瀨古邦子,<甲午農民戰爭期에 있어서 執綱所에 대하여>(≪朝鮮史硏究會論文集≫16, 1979), 127쪽. 1893년 11월의 金溝院坪 전봉준 세력집단의 ‘사발통문’에서도 통문의 수신자가 各里 里執綱으로 되어 있는 사실로 보아 농민전쟁에서 농민의 결합원리의 하나가 농민적 향권세력을 중심으로 한 사회관계였다고 생각된다.

 또 하나의 결합원리는 각 고을의 지역적 반란을 하나의 유기적인 지방반란으로 통합한다는 원리였다. 1894년 1월 11일에 발생한 고부민란은 농민전쟁의 단서를 이룬 것이었으며, 민란 이후 전봉준이 3월 20일의 본격적 농민전쟁 때까지 대세를 관망하면서 기다렸던 것은 고부민란의 각 고을에로의 확산을 기다린 것이었다. 안핵사 이용태의 만행에 격분하고 있는 전라도의 고을들에 통문을 발하여 전면적으로 봉기할 것을 제기하였고 무장·고창·홍덕·태인·정읍·김제·금구 등에서 농민군 8천여명이 이에 호응하여 백산에 집결하였다.

 이렇게 집결한 농민군은 대장에 전봉준, 총관령에 손화중·김개남, 총참모에 김덕명·오시영, 영솔장에 최경선, 비서에 송희옥·정백현으로 하여 연합체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1226)吳知泳,≪東學史≫(永昌書館, 1940), 111∼112쪽. 그러나 이것은 “내가 일체를 지휘하였다”1227)<全琫準供草>, 을미 2월 11일, 再招問目(≪東學亂記錄≫下), 537쪽.는 유기적 통일체로서의 연합체라는 전봉준의 법정진술과는 달리 형식상의 체제에 불과하였다. 각 농민군 부대는 각기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5월 이후의 집강소 단계에서도 “전봉준은 수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금구원평에 근거하여 전라우도를 장악·지휘하였고 김개남은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남원에 근거하여 전라좌도를 장악·지휘하였으며 그밖에 김덕명·손화중·최경선 등도 각기 한 지방을 근거하였”1228)鄭碩謨,<甲午略歷>(≪東學亂記錄≫上), 65쪽.듯이 전라일대를 각 농민군 부대장이 분할·장악하였으며, 5월 중순 이후 전봉준은 금구·김제·태인·순창·남원·운봉·옥과·담양·장성·창평·순천 등 전라좌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손화중은 전라우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정부와의 협조에 의한 집강소 개혁의 실시를 각 농민군 부대에 권유하였던 것이다.1229)<全琫準供草>, 을미 3월 7일, 四次問目, 위의 책, 551쪽. 그러나 김개남은 정부와의 협조하에 집강소에 의한 개혁정치의 실시를 권유하는 전봉준의 제의를 끝내 거절하였기 때문에 이후 김개남과 전봉준은 서로 상의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1230)위의 책, 558쪽.

 그러나 전라도 일대 고을마다의 집강소가 전혀 독립적이지는 않았다. 집강소의 총본부를 전주에다가 두고 이를 大都所라고 하였으며 “전봉준은 귀화하였다고 일컫고 단신으로 감영에 들어와 감사의 일을 맡아 하였다. 감영의 關文·甘結은 반드시 전봉준의 결재가 있은 연후에야 열읍에서 거행하였다”1231)李容珪,≪若史≫2.라고 하듯이 형식상으로는 전봉준 대도소가 통일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농민전쟁의 결합원리는 지역적 반란을 하나의 유기적인 지방반란으로 통합해 나아가려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결합원리는 貪虐 증오의 共感에 의한 心情的 紐帶였다. 黃玹은 제1차 농민전쟁의 茂長에서의 발발에 대하여 “동학은 代天理物하고 輔國安民하며 죽이거나 약탈하지 않으며 오직 탐관오리만은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倡言함에 愚民이 響應하고 右沿 일대 10여읍이 일시에 봉기하니 열흘 남짓 사이에 수만명에 이르렀다. 동학이 난민과 합함이 이에서 시작되었다”1232)黃 玹,≪梧下記聞≫1, 47쪽.라고 하고 또한 호남에서는 財物이 풍부하여 수령과 아전의 탐학이 가장 심하였고, 따라서 서울의 속담에서는 “아들을 낳아서 호남에서 벼슬살이 시키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하였으며, 그러므로 호남에서는 民과 吏가 서로 미워하고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함이 ‘백대에 걸친 원수 갚기’와 방불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1233)위의 책, 41쪽.

 이러한 상황에 겹쳐서 趙弼永이 전운어사로 와서 교묘하게 名目을 늘리고 稅 위에다가 稅를 첨가하여 호남 전체가 병들고, 金昌錫이 均田御使로 내려와서는 白地徵稅하고 國結을 宮庄으로 돌림으로써 湖南右道가 더욱 병들고, 게다가 金圭弘·金文鉉의 탐학이 겹쳐서 千金의 부자는 밤에도 잠을 못잘 만큼 불안하였고, 小民은 假貸할 데가 없어서 숨을 헐떡이고 있다고 黃玹은 지적하였는데,1234)위의 책, 42쪽. 요컨대 庶民富豪와 小民이 모두 감사·관리·수령·아전에게 수탈당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姦民思亂者가 庶民富豪와 小民을 선동함에 이에 그들이 東學黨에 저자에 몰려가듯이 몰려드니, 호남우도에서 호남좌도의 골짜기까지 동학당이 없는 곳이 없었다”1235)위와 같음.라고 하였다.

 전라도의 사정 특히 전라우도의 사정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창의문이 한번 세상에 떨어지자 백성들의 수선거리는 소리는 참 굉장하였다. 옳다 인제는 잘 되었다. 天理가 어찌 무심하랴. 이놈의 세상은 얼른 망해야 한다. 망할 것은 얼른 망해버리고 새 세상이 나와야 한다”1236)吳知泳, 앞의 책, 109∼110쪽.는 반응이 일어났던 것이다. 따라서 3월 말에는 “3월 20일 이후 (중략) 수령은 모두 도망하고 아전 군교도 따라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賊이 오기도 전에 邑內가 먼저 텅텅 비어버린다. 또 여러 고을이 본래 성곽이 없고 (중략) 설사 금성탕지라 한들 民이 평소에 수령과 아전을 원망하는데, 누구와 더불어 지킬 것인가. 이로 말미암아 누구하나 衆民에 호소하여 城을 지키려는 자가 없었다. 城이 떨어졌다는 소식은 날마다 들리지만 실인즉 賊은 일찍이 하나의 城도 포위공격한 일이 없었다”1237)≪梧下記聞≫1, 50쪽.는 것처럼 농민전쟁에의 民의 호응이 있게 되었다.

 이러한 탐학증오의 심정적 공감대를 탐학증오라는 소극적 레벨에 정지시키지 않고 적극적 代案으로, 추상적으로 높은 차원에까지 레벨엎시킨 것이 民惟邦本이념이었다. 즉 이러한 심정적 공감대가 민유방본이념의 기반으로 되었던 것이다.

국가에는 누적된 빚이 있으나 갚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교만과 사치와 음란한 일만을 거리낌없이 일삼으니, 八路는 魚肉이 되고 만인은 도탄에 허덕이도다.

守宰가 貪虐하니 백성이 어찌 곤궁치 아니하랴.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라, 근본이 쇠잔하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는도다.1238)吳知泳,<倡義文>(≪東學史≫), 108∼109쪽.
<東匪討錄>(≪한국학보≫3, 1976 여름호, 일지사), 235쪽.
黃 玹,≪梧下記聞≫1, 48∼50쪽.
‘茂長東學輩布告文’<聚語>(≪東學亂記錄≫上), 142∼143쪽. 이 布告文은 전봉준이 쓴 것이라고 생각된다. 茂長봉기를 전봉준이 주도하였고, “전봉준 자신의 집필이었다고 전하는 만큼”(이선근,≪한국사 현대편≫, 을유문화사, 1963, 58쪽) 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추정된다.

 탐학행위와 민유방본은 항상 대극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었다. 포고문에서는 위에 바로 이어서 “輔國安民의 방책을 생각지 아니하고 밖으로 鄕第를 설치하여 오로지 제 몸만을 위하고 부질없이 國祿만을 도적질하는 것이 그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는가!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일지라도 나라에 몸붙여 사는 자라, 국가의 危亡을 앉아서 보겠는가! 八域이 마음을 합하고 수많은 인민이 뜻을 모아 이에 義旗를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死生의 맹세를 하노니, (하략)”1239)위와 같음.라고 하여, 민유방본이념을 조금 현실화하여 輔國安民이념을 내세우고 있다. 보국안민이념을 더욱 level down시켜서 현실화하고 구체화한 것이 농민군의 폐정개혁안 27개조였다.

東徒가 격문을 전하여 그 취지를 명백하게 한 때에 이르러서는 公州監營의 高官(監司 아래 3번째 되는 重職人과 면회할 때 친히 同官의 말을 들었다 함)과 같은 사람도 東徒가 열거하는 時弊는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에 해당되는 것으로써 東徒가 일을 일으킨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라고 공언할 정도이다. 일반의 감정이 이와 같은 이상 지방의 弊政을 근저까지 革除하지 않는 이상 東徒는 가령 일시 해산한다 해도 다른 날에 기회를 기다려 재연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저들은 한통의 請願書를 남기고 全州를 떠나 長城地方으로 갔으나, 그 후 그 請願이 관철되지 않으면 그 지방의 東徒들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떠들썩하였다.1240)≪주한일본공사관기록>3, 215쪽.

 위의 상황은 5월 10∼15일의 것이지만, ‘동도가 열거하는 時弊’는 농민군의 폐정개혁안 27개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폐정개혁 27개조가 농민들에게 현실적합적인 것으로 인식된 것은, 기본적으로는 탐학증오의 심정적 유대에 의하여 농민들이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또 다른 결합의 원리는 공동의 힘으로 侵漁를 막아내는 것이었다.

各地道人이 解歸以後에 各地官吏들의 東學黨 逮捕侵虐이 前日과 조금도 다름없어 安居의 望이 없는지라 道人들은 할 수 없이 官屬과 對抗策을 講究할 밖에는 다른 道理가 없음을 알고 各包各接이 서로 團結을 지어 어느 地方에서 일이 생기든지 하면 그 卽時로 보발을 띄워 그 附近으로부터 솔밭을 흔들고 일어서서 잡혀가는 사람을 빼앗아 놓기로 하였다. 그렇게 團結이 되었기 때문에 제골서 잡으러 온 將校使令이라든지 鎭營이나 監營이나 서울에서 내려온 捕校라 할지라도 東學黨을 잡아갈 때에는 東學黨이 四面으로 쏟아져서 捕校들을 둘러싸고 잡힌 사람을 빼앗아간 일이 많았었다. 이러한 일은 忠淸道나 慶尙道보다도 全羅道에서 먼저 생겼으며 全羅道에서도 井邑 大接主 孫和中包에서 먼저 始作이 되었었다.1241)≪東學史≫, 86∼87쪽.

 이것은 1893년 보은취회 해산 후의 상황이지만 주로 전라도 지역, 그 중에서도 孫和中包의 경우에 많았던 경우로서 무리의 힘으로 侵漁를 막아내는 것이었는데, 包에로의 결집에 현실적인 유대로 기능하였다. 1894년 5월 20일 李偰은 상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1242)≪梧下記聞≫1, 90쪽.

臣은 오랫동안 시골에 살면서 요즈음 方伯守令들의 행위를 보면, 報國의 마음은 없이 肥己의 욕심만 있어서, 혹 부지런히 힘써 농사짓거나 장사하여 밥술이나 먹는 백성이 있으면 어거지로 匪類로 몰거나 무거운 죄목을 씌워서 옥에 가두고 차꼬 채워 닥달한다. (중략) 이 때 東學徒가 꾀어서 말하기를 ‘자네가 우리 당에 들어오면 侵漁를 면할 수 있고 이런 고생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민이 이에 줄지어 동학당에 들어갔다. (중략) 이것이 東徒와 亂民이 합하여 하나로 되는 까닭이다.

 공동의 힘으로 侵漁를 방어하는 결합의 원리는 특히 ‘勤力農商 可繼朝夕者’인 中農이나 商人이 농민군에 합류하는 데에 큰 誘因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4월 하순의 시점에서 富商豪農이 농민군에 돈과 곡식을 제공하여 농민군은 군량에 차질이 없었고,1243)≪萬朝報≫, 명치 27년 6월 8·9일. 나아가서는 豪農紳商이 적지 않게 동학당에 참여하였는데1244)≪二六新報≫, 명치 27년 6월 10일. 참여의 이유는 앞에서와 같은 수탈에서 벗어나고 富 축적의 안정을 원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1245)≪萬朝報≫, 명치 27년 6월 10일. 예컨대 順天의 李士維, 麗水의 金成五는 富民으로서 농민전쟁 때의 接主·巨魁였다.1246)≪廉記≫, 경자 10월(洪性讚,<1894년 집강소기 設包下의 향촌사정>(≪東方學志≫39, 1983), 106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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