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Ⅰ. 청일전쟁
  • 1. 청일전쟁과 1890년대의 동아시아

1. 청일전쟁과 1890년대의 동아시아

청일전쟁은 청·일 두 나라간에 1894년 7월에 아산 앞 바다 풍도의 해전으로 시작되었다. 조선의 영토 내에 상륙해있던 청군과 일군이 성환과 아산에서 육전을 연 뒤 전선은 북으로 진행되어 9월에는 평양전투를 거쳐 10월에는 압록강을 넘어 청의 영토로 확대된다. 일본 육군은 육로로 랴오뚱(遼東)반도를 가로지르고 해군은 해전과 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1895년으로 해가 바뀌는 사이에 랴오뚱반도와 샨뚱(山東)반도의 전략적 요충들을 점령하게 된다.

수도 뻬이징(北京)을 언제나 위협할 수 있는 보어하이(渤海)만과 쩌어리(直隷)해협이 일군에게 장악당하자 청은 서둘러 종전을 위한 강화협상에 들어간다. 청국은 전쟁의 초입부터 이 지역에 이해관계가 깊은 영국을 비롯한 열강에게 중재를 요청했으나 전쟁의 목표에 있어 청국과는 차원이 전혀 달랐을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예상을 깨뜨리고 승전을 거듭하던 일본으로서는 중재는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다.

강화를 위한 교섭은 청의 수도가 직접적 위협을 받게되는 1895년 3월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4월에<시모노세키(下關)조약>(청국은<마꾸안(馬關)條約>으로 부른다)이 전쟁 당사국 대표들에 의해 조인됨으로써 끝났다. 이 과정에 열강의 직접적인 개입은 없었으나 뻬이징과 토오쿄오(東京)에 주재하던 외교관 등 미국인들의 간접적인 간여가 있었다.

이 조약으로 청국이 정치적으로 잃은 것은 조선과의 전통적 종법관계 부정이었고, 영토적으로 잃은 것은 랴오뚱반도, 타이완(臺灣), 펑후(澎湖) 및 부속 열도였으며, 경제적으로 잃은 것은 2억 냥[까오핑인(庫平銀, 일화로 약 3억 엔)]의 배상금과 주로 창쨩(長江) 유역에 위치한 주요 산업지역의 개방이었다. 전통적 화이질서는 완전히 무너졌고, 아편전쟁 이래 최초로 영토가 상실되었고, 뒤따르는 통상조약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경제력은 중국 경제의 핵심지역으로까지 침투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은 이처럼 1894년 7월 25일에 시작되어 1895년 5월 8일<청일강화조약>이 비준되어 교환됨으로써 막을 내린다. 따라서 국제법상으로 이 전쟁은 아홉 달 만에 끝나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이 전쟁을 수행할 戰時大本營을 설치하는 것이 94년 6월 5일, 그리고 군사행동의 종결은 타이완에서의 저항이 완전히 종결되는 것은 96년 3월 31일이므로 광의의 전쟁 기간은 근 2년에 가깝다.001)전쟁의 기점과 종점에 관해서는 藤村道生,≪日淸戰爭前後のアジア政策≫(동경:岩波, 1995), 207∼217쪽 참조.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전쟁의 원인과 배경 그리고 그 파급 효과를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이 청일전쟁에 관련된 기간은 이보다 훨씬 더 길다. 이 전쟁이 일본의 근대사에 있어 1868년에 시작된 명치 시대 45년간 가장 큰 대외전쟁 두 개 중의 하나이자 첫째 전쟁이라는 점, 그리고 이 전쟁은 사실상 1904년∼5년의 러일전쟁의 서곡으로 볼 경우 이 전쟁사는 하나의 독립된 전쟁사라기 보다는 두 개의 전쟁사가 일본 근대사상 공시적 의미에서는 하나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전쟁의 싸움터가 중국만이 아닌 조선에서도 치루어 진 점, 그리고 전쟁 강화와 위에서 살펴보았듯 강화조약 자체가 열강들의 간섭으로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점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때 공간적으로는 이미 청·일 양국의 국경을 훨씬 뛰어 넘게된다. 따라서 청일전쟁의 역사적 실체를 재구성하고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전쟁사의 범위를 필요한 만큼 확대해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건<시모노세키조약>의 제2조에 따라 일본이 랴오뚱반도를 할양받게 되자 중국의 동북지역과 황해 연안을 따라 이해관계를 축적해 온 러시아·프랑스·독일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세 나라는 중국의 영토 중 특히 랴오뚱반도의 일본 영토화는 “청국의 수도를 위협하고 동양 평화에 영구적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일본에게 반환을 요구했다. 무력 시위도 뒤따랐다. 흔히 ‘대륙세력’으로 불리는 이 3국의 공동간섭에 일본의 군사력과 외교력은 아직은 대응할 수 없었다. 영·미의 ‘해양세력’은 일본과의 공동 대응을 맺을 만큼 긴밀한 관계도 아니었고 무력을 동원할 만큼의 여유나 동기가 없었다.

일본으로서는 향후 10년 뒤에 치르게 될 ‘러일전쟁’은 이 공동간섭 사건의 감성적 또 논리적 귀결일 수 있었다. 두 전쟁 사이의 이 10년 동안에 일본과 영국 사이에 동맹관계가 수립되고, 러시아와의 전쟁은 미국의 중재와 미국 포츠머스(Portsmouth)에서의 강화조약으로 결말이 나게 된다.

전쟁터가 조선이었을 뿐 아니라 전쟁이 개시된 1894년 7월 풍도 앞 바다에서의 해전이 일본함대가 조선에 증원군을 파견하던 영국 선적의 까우셩(高陞)號를 격침시킨 사실, 그리고 승전국 일본에게 예상밖의 전리품인 중국 본토의 영토 분할이 유럽 3국에 의해 좌절된 사실 등은 이 전쟁이 청·일 두 당사국간에 치루어 진 양국 전쟁이 아니라 국제적인 요소가 적지 않게 작용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실제로 그러했던 것은 이 전쟁의 시기가 아편전쟁의 그것과는 이미 달라져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전쟁의 올바른 시각과 해석을 위해서는 몇 가지 공시적이자 구조적인 조건이 전제된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0년대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동아시아 뿐 아니라 세계 근현대사에서 19세기를 마감하고 20세기로 들어서는 세기 전환기라는 숫자상의 의미를 뛰어넘는 획기적인 중요성을 갖는 시기이다.

첫째, 유럽세계 중심의 이른바 ‘근대사’가 막을 내리고 말 그대로 ‘세계사’로서의 ‘현대사’가 시작되는 조짐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시기가 1890년대이다.002)G. 배러클러프 著, 金鳳鎬 譯,≪現代史의 性格≫(삼성미술문화재단 문고, 1977) 참조. 여러 조짐 가운데 동아시아 세계에서 특히 두드러진 점은 舊제국주의의 퇴장과 새로운 팽창주의의 등장이다. 아편전쟁 이래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집중되던 영국이 주도하던 구제국주의를 대신하여 미국과 러시아 일본이라는 새로운 제국주의적 팽창이 동아시아에 도달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시베리아로 향한 러시아의 東進과 태평양으로 향한 미국의 西進이 모두 태평양의 서안, 즉 동아시아 세계를 도달점으로 했다는 점은 20세기의 동아시아 세계가 아편전쟁이래 구제국주의의 동진이 주도했던 19세기 후반의 ‘근대 동아시아史’와는 판이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동아시아 세계를 둘러싼 국제적 환경도 바로 이 시기에 근본적인 변환을 맞게 된다. 우선 미국의 전통적 대외정책이 1890년대에 들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크게 전환하였다.003)R. Beisner, From the Old Diplomacy to the New, 1865∼1900(N.Y.:Crowell, 1975)을 참조할 것. 19세기 중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자기 규정 아래 남·북미 대륙안에서 미국의 독자성을 위주로 하는 ‘먼로주의’로 대표되던 舊 패러다임은 그 활동 범위가 우선 서반구 즉 미 대륙에 국한된 것이었다. 따라서 서반구를 넘어서는 세계적 문제에 대해서는 기껏 영국 외교를 편승함으로써 자족하는, 나름대로의 주체성을 갖추지 못한 소극적 미국외교였다.

19세기 중엽 산업화와 남북전쟁을 거치고 국내가 정돈되던 19세기 후반을 거치면서 미국은 자신에 대한 定義를 달리하게 된다. 미합중국은 정복과 전쟁, 합병과 매수 등으로 현재의 미국의 판도를 그리면서 대서양과 태평양 두 대양에 걸친 국가로 확실히 형성된다. 1890년대 초에 터너(Frederick Jackson Turner)가 일컬었듯 이른바 미국의 역사는 하나의 막이 내리고 새로운 막이 오르는 시대였다.

미국의 이해가 걸리는 세계 각 지역에서의 자주적 행동과 정비되고 전문화된 미국외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1890년대 말에는 가능한 지역에로의 적극적 팽창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1898년 쿠바·하와이·괌·필리핀을 비롯한 카리브해와 태평양으로 ‘폭발적인 팽창’에 이어, 이듬해에는 이미 구제국주의에 의해 실질적인 영향권 분할이 이루어진 청국에 대해 ‘문호개방’ 압력을 넣는 등 동아시아의 제국주의 세계에 새로운 일원으로 등장한 것이다.

러시아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깔기 시작하면서 미국의 서진과 때를 같이 하여 동진에 나섰다. 한반도에도 깊은 이해관계를 심고 영국과 일진일퇴의 외교 공방을 벌이는가 하면, 1890년대에는 ‘삼국간섭’에서 보이듯 일본과 본격적인 각축·대결의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유럽 아시아’로부터 ‘아시아태평양 러시아’에로의 팽창적 변환을 보여주는 일이다.

한반도에서 러시아 팽창주의의 등장은 러·일간에 한반도의 남북 분할 점령론이나 만주에서의 각축으로까지 나아간 사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1885년 영국의 巨文島 점령 사건은 러시아의 동진에 대한 영국의 견제 조치였다. 1891년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철도 부설을 개시하자 영국·러시아간의 대립은 더욱 첨예화되었다. 1891년 5월 시베리아철도 기공식에 참석하는 도중에 일본을 방문한 러시아 황태자가 테러를 당한 이른바 오오츠(大津) 사건은 세계적 규모의 영·러의 대립이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에 곧바로 또 하나의 대립관계로 투영되고 있는 사례이다.004)이 시기 미국·러시아 등 열강들의 동아시아 정책에 관해서는 崔文衡,≪列强의 東아시아政策:특히 1898년 前後의 美·露의 進出을 中心으로≫(一潮閣, 1979) 참조.

청국이 조선의 ‘방어전쟁’에 나서게 된 데에는 이 시기에 이미 형성된 일국 대 일국간의 근대국가간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 청국은 아직 조선을 屬邦으로 여기고 있었고 그러한 종법론적 인식은 청국으로 하여금 일본과의 일전을 불사하게 만든 하나의 요인이었다. 즉 ‘事大’를 기축으로 하는 조·청 양국관계란 것은 전통적인 ‘화이질서’라는 국제질서의 연장선상에 있는 하나의 역사 틀에 바탕한 관계였던 것이다. 근대적 국민국가간에 존재하는 국제·외교관계와는 달리, 이를테면 16세기말 임진왜란에 명군의 조선출병 배경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인식이 청일전쟁 당시의 조·청 두 나라 사이에 아직도 잔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005)Bonnie Bongwan Oh, “Sino-Japanese Rivalry in Korea, 1876∼1885”, in Akira Iriye ed., The Chinese and the Japanese:Essays in Political and Cultural Interactions(Princeton Univ. Press, 1980), pp.35∼57 참조.

서양 제국에 비해 후발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이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 이래의 군사적 발전과 팽창적 이념으로 무장하고 지리적으로 근접한 왕조 말기적 상황에 빠져 있던 한반도를 침략하고 중국과 전쟁을 일으킨 일은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 본격적 해외 팽창의 분기점을 이룬 사건이었다. 건국 초기인 1870년대에 이미 신정부를 뒤흔든 ‘정한론’이라는 조선침략 논쟁은, 논쟁의 본질은 차치하고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비현실성으로 인하여 중절되었지만, 20년 뒤인 1890년대가 되면 국면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1889년 메이지 헌법(大日本帝國憲法)의 공포와 이듬해의 국회 개원으로 메이지 일본은 대내적으로는 건국 이래의 어지러운 정치 항쟁이 헌정질서라는 하나의 테두리 속에 틀이 잡히게 되고, 대외적으로는 ‘불평등조약’ 체제의 수정을 서양제국에 요구할 수 있는 바탕으로서의 제도적 장치를 갖추게 된 셈이었다.

일본에게 1890년대란 대외적으로 두 개의 중요한 계기를 가진다. 하나는 이 불평등조약 체제의 종언이며 다른 하나가 바로 청일전쟁에서의 승리이다. 전자가 서양 제국주의 세력들과의 국제법적인 평등관계의 구현이었다면, 후자는 동아시아 이웃 나라들에 대한 압박국으로서의 등장이었다.006)中塚明,≪日淸戰爭の硏究≫(東京:靑木書店, 1968). 특히 일본은 이 전쟁으로 명치유신이래 경제·군사적 근대화 노력의 성과를 확인하였을 뿐 아니라 나라의 목표를 근대화와 자립으로부터 본격적 팽창주의로 전환하였으며, 이에 따라 1890년대는 한국을 포함한 대외관계에서도 전혀 새로운 발상과 정책이 전개된 시기였다.

중국에게도 역시 1890년대는 주체적 역사의 전환을 맞는 시기였다. 아편전쟁이 중국의 자생적 근대화 노력을 재촉한 기폭제였다면 청일전쟁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이 지배하는 세기말적 국제관계 속에서 중국이 자신을 근대적 국민국가의 하나라는 인식을 고착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중화주의에 입각한 화이질서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으로 타격을 받았고 1861년의 總理(各國通商事務)衙門의 설치는 그 제도적 변화의 효시였다.

양무-자강을 과제로 삼은 수십 년의 근대화 노력은 청일전쟁에서 신생 국민국가 일본의 군사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청일전쟁 직전까지의 중국은 국민 국가적 대응의식과 천하관적 현실간의 괴리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베트남(安南) 등 ‘천하’를 구성하는 주변 구성분자들이 하나씩 궤도를 이탈해 나가는 사이에도 이러한 인식과 현실은 서로 접점을 찾지 못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간섭이 처음 다가왔을 때부터 임오년의 군인 항쟁이나 갑신년의 정변, 그리고 마침내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의 대등한 공동 간섭권을 인정한 티안찐조약(天津條約)을 거치면서도 중화제국의 기본구조에 대한 확신은 결정적으로 도전 받고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007)이 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인들의 세계 인식을 종합적으로 요약한 논문으로 戚其章,<甲午戰爭と近代中國人の世界認識>(東アジア近代史學會 編,≪日淸戰爭と東アジア世界の變容≫上, 東京:ゆまに書房), 287∼313쪽 참조. 1890년대란 일본의 경우 대내적으로 국력을 정비한 바탕 위에서 對조선 침략정책이 서서히 영글어 가는 시기였지만, 중국에 있어서는 반청 국민혁명운동이 활발히 조직화되어가면서 반청·반만의 전통적 종족주의와 반외세·반왕조적인 근대적 민족주의가 중층적 모순으로 첨예화되던 시기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청일전쟁의 시대적 배경을 이루는 1890년대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본다면 중·영 아편전쟁이래 반세기의 국제질서가 새로운 국면으로 재편된 시기였으며 그 특징은 무엇보다도 먼저 러시아와 미국 그리고 일본의 동아시아 지역을 겨냥한 팽창주의 세력화를 그 으뜸가는 새로운 요소로 꼽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전쟁 당사국인 청·일 그리고 여기에 관련되는 열강들의 정책은 동아시아에서 재편되고 있던 이러한 국제관계의 새로운 틀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침략국 일본의 경우 그 독자적인 대외 팽창정책의 형성이 자신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의 신제국주의 특히 미국의 이 지역에 대한 적극적 출현과 시기를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전쟁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의 전개란 미국과 일본 두 나라의 경쟁과 전쟁으로 나아가는 도정으로 그 핵심을 그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1941∼45년의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연결선상에서 뿐 아니라 1945년 이후 이 지역의 현대사의 전개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008)20세기 전반의 이러한 역사적 전개를 한국을 중심으로 한 실증적 연구로는 구대열,≪한국 국제관계사 연구≫ 1·2(역사비평사, 1995)가 있다.

일본으로서는 안으로는 메이지유신 이래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이 일단 완성되는 단계로서의 1890년대, 그리고 밖으로는 새로운 국제환경이 조성되는 1890년대라는 안팎의 이중적 구조가 만나는 시간적 좌표 위에서 청일전쟁의 주역으로서의 일본의 자리를 매김해야 할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왕조말기로서의 19세기말에 공시적으로 일어나는 反滿 민족주의의 대두라는 대내적 조건과 천년의 수명을 누린 화이질서의 종언 그리고 제국주의 교체기에 신·구 제국들의 최종목표로서의 수동적·부정적 주체와 객체로서 이 전쟁을 치르는 구조적 국면이 고찰되어야할 것이다.

조선은 물론 이 전쟁의 주체가 아니다. 조선은 흔히 이 전쟁의 원인과 구실을 제공한 전쟁터로 설명되는 부차적인 의미로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이 전쟁의 배경과 전개 그리고 결과에 조선의 지도층과 인민들이 어떻게 대응했는가 하는 문제는 단지 조선 일국의 역사적 의미만을 갖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이 청일전쟁이 일본과 중국의 19세기 후반 ‘근대화’노력의 성과를 겨루는 전쟁으로 해석되어 왔듯이, 동아시아 나라들이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국제관계에서 어떻게 대응하는가 라는 주제는 이 지역 근대사의 해명에 공시적이고도 구조적인 접근에 하나 하나가 모두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전쟁에 대한 조선의 주체적 대응과 그 운동 범위를 설정하면서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것이 합리적이자 논리적인 절차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청일전쟁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에 접근할 때 다음과 같은 전제를 두어야 한다. 첫째는, 19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이미 예상된 무력 침략전쟁이었지만 一國 대 일국간의 전통적인 침략전쟁이라기 보다는 일단 국민국가의 형성에 성공한 일국이 아직도 천하관으로 자신을 정의하고 있던 나라에 대해 감행한 침략전쟁이라는 국면이다.

둘째, 한국의 의지와는 무관하면서도 한국은 전장이 되고 그 운명이 결정된 전쟁이며, 이를테면 1950년 발발의 한국전쟁처럼 후세에 유사한 사례로 인정될 경우, 조선의 국내문제를 구실로 외세가 개입하는 전례를 세웠다는 점이다.

셋째, 영국 등 구제국주의가 동아시아에 강요한 타율적인 재래 질서를 일본이라는 새로운 제국주의가 재편성한 전쟁이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이 전쟁의 추이가 당시 동아시아에 이해를 지닌 서양 열강의 예리한 주목의 대상이었고 전쟁의 결말이 서양 제3국들의 ‘간섭’으로 끝났다는 사실은 서양 열강이 주도하는 국제관계란 것이 이전 동아시아에서 어떤 전쟁에서도 볼 수 없었던 중요성을 지닌다는 의미에서 이 전쟁이 다분히 ‘현대사적’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덧붙일 것은 이러한 성격을 지니는 이 전쟁부터 20세기 동아시아 전쟁의 연구에는 청·일의 자료뿐 아니라 조선과 영국 미국 러시아 기타 유관국의 자료도 때로는 필수적으로 인용되어야 할 경우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 싶다.009)최근 중국에서의 이 전쟁에 관련된 중국·조선·일본·영국 등의 公刊 자료를 집대성한 것으로 戚其章 主編,≪中日戰爭≫ 11冊(中國近代史資料叢刊續編, 北京:中華書局, 1989∼96)이 있다. 일본이나 영국 자료도 모두 중국어로 번역해 싣고있기 때문에 중국사 전공자이거나 일문 자료보다 한문 자료가 이용하기에 편리한 국사 전공자들에게는 이 자료 총서가 더욱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총서는 이 글에서 다룬 1차 자료 거의 대부분을 망라하고 있으나 지난 수십 년 자료를 수집·정리한 필자로서는 수집 당시의 자료로써 인용하기로 한다.

<朴英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