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Ⅰ. 청일전쟁
  • 2. 전쟁의 배경과 전개
  • 1) 조선에서의 청·일 대립

1) 조선에서의 청·일 대립

청일전쟁에 이르기까지 19세기 후반 청·일 양국관계는 류큐(琉球), 타이완과 조선을 둘러싼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긴장관계의 뇌관을 터뜨린 것이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이었다. 일본이 근대화의 노력과 더불어 청과의 전쟁에 뜻을 두고 청과 대립관계를 생성하면서 조선에서 갈등관계를 일구어 낼 때까지의 사정을 19세기 후반 동아시아 세계에서 연속되는 국제적 긴장을 구조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청·일간에 근대적 외교관계가 수립되는 시점부터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신정부가 수립된 2년 뒤인 1870년 10월 외무성 외무 大丞 야나기와라 사키미츠(柳原前光)를 청국에 특사로 파견하여 청국이 서방국가와 맺은 것과 동등한 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청의 總理(各國通商事務)衙門은 일본이 이미 샹하이(上海)에서 통상활동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할 수 있으며, 또한 청·일 양국은 서양과의 관계와 달라 상호 신뢰가 있는 터이니 새삼스럽게 조약을 체결할 필요는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일본 사절은 直隷總督이자 중국의 실권자인 리훙장(李鴻章)을 찾았다. 설득의 초점은 서양 열강들이 중국을 압박하여 통상한 역사적 사실을 들어 서양 열강에 대한 공동 대응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이 같은 권유와 함께 한편으로는 싼쿠오(三口) 통상대신 청린(成林)을 통해서는 만약 청이 끝까지 이 제안을 수락하지 않을 경우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힘을 빌어 압력을 행사할 수도 있으리라는 암시도 주었다. 리훙장이 내린 결론은 당시의 중국이 일본과 같은 제3국 그러나 동양 세계의 일원인 일본의 협조를 받을 경우 열강과의 관계에서 해로울 것은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리훙장은 총리아문으로 하여금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게 하였다.010)彭澤周,≪明治初期日韓淸關係の硏究≫(東京:塙書房), 24∼32쪽.

1871년 7월 일본은 조약체결 전권사절로 흠차대신, 전권대신으로 타테 무네나리(伊達宗城), 야나기와라 등을 중국에 파견하여 청국의 전권대신으로 된 리훙장과 수교를 협의하였다. 일본은 청국이 서양 각국과 맺은 조약에 준해서 일본과도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으나 물론 청은 거절했다. 당시 청의 당국자들은 아직도 일본은 중국의 주변국이라 생각하고 있었다.011)이를테면 안후에이(安徽)巡撫 잉한(英翰)은 공공연히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을 조공국의 하나로 말하고 있었다(≪籌辦夷務始末≫, 同治朝 제77권, 35쪽;79권, 7쪽).

淸廷 내부에서는 일본과의 조약체결이란 ‘왜구’를 끌어들이는 행위이며 앞으로 후환이 되리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일본과의 수교가 지니는 이점을 인정하고 있던 리훙장도 일본의 위치가 중국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중국 영토에 환난이 될 가능성을 언급하고는 했다.012)≪李文忠公全書≫, 奏稿 제17권, 54쪽. 결국 청은 조약은 체결하더라도 최혜국 조항을 삽입하지 않았으며, 內地通商이나 양쯔쟝(揚子江) 운항권 등의 특권도 부여하지 않았다. 또 조약상의 모든 규정은 반드시 쌍무원칙을 지켰다. 1871년 티안찐(天津)에서 조인된<淸日修好條規>와<通商章程>은 대체로 청의 의견에 따라 체결되었던 것이다.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한 일본정부는 조약의 비준을 연기한 채 이듬해 1872년 5월 야나기와라를 다시 중국으로 파견하여 조약 개정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들의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크게 보아 당시 일본의 조야 일부에서는 타이완·조선·류큐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메이지정부의 핵심들은 현실적 태도를 고수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중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꾀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약 개정의 요구를 거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1873년 3월에 외무대신 소에지마 타네오미(副島種臣)를 청국에 보내 일단 조약을 비준하였다.

이 조약에 대해서 당시 미국의 주일본 대리공사가 본국 국무성에 보내는 보고에서 이 조약이 중국과 일본의 공동방위동맹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지적할013)Roy Hidemichi, Japan's Foreign Relations, 1542∼1936:A Short History (Tokyo:Hokuseido Press, 1936), p.69. 정도로 청국과 서양 열강이 지니고 있던 관계와 청국과 일본이 가지게 될 국제관계의 위상 차이를 드러내 준 조약이었다. 그러나 열강의 일원으로 중국의 국제관계에 참여하고자 했던 일본의 본래 의도와는 전혀 빗나간 것이었다. 얼마 안 되어 양국간에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1871년 11월 류큐의 선박 한 척이 해상에서 폭풍으로 표류하다 타이완 동부 해안에 당도, 선상의 류큐인과 타이완의 고산족간에 충돌이 발생하여 다수가 피살된 사건이 있었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타이완 침공의 계기를 마련한다. 류큐는 1372년(明 洪武 15년)부터 중국과 종번관계에 있었으나 1609년 일본의 사츠마(薩摩)藩이 무력으로 류큐를 정벌하고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구실로 일본정부는 메이지유신 이후에 적극적으로 류큐를 병탄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참이었다. 1872년 10월 일본은 류큐를 일본의 ‘內藩’으로 선포하고, 외무성이 일체의 대외관계를 관장한다고 선언했다.

1873년 당시 外務卿 소에지마가 1871년에 조인한 수호조약을 비준하러 뻬이징을 방문한 기회에 야나기와라로 하여금 타이완 고산족의 류큐 어민 살해사건을 총리아문에 질의하게 하였다. 총리아문의 대답은 두 섬(타이완과 류큐)은 모두 청국의 영토이며, 領民끼리 살해한 사건은 청정부의 판결사항이며, “우리도 류큐민을 동정하여 자체적으로 조치를 취하고자 하는데, 어찌하여 귀국의 일처럼 이렇게 번거롭게 문의하느냐”는 반문이었다.

이어서 “살인자가 모두 生番에 속하는 까닭에 모두 문명의 바깥에 있어 철저히 다스리기가 쉽지 않다”014)王芸生,≪六十年來中國與日本≫제1권(天津:大公報社, 1939), 59쪽.고 덧붙였다. 일본은 중국이 두 지역을 ‘생번’으로 표현한 사실을 꼬투리로 잡고 이는 곧 두 섬이 중국의 영토가 아님을 인정한 것이라는 자의적인 해석 아래 무력 침략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1874년 4월 일본정부는 ‘타이완 사무국’을 설립,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隅重信)를 책임자로 임명하는 동시에 육군 중장 사이고오 츠쿠미치(西鄕從道)를 타이완 사무국의 都督으로 임명하여 3,000여 병력을 이끌고 타이완을 침공했다.015)전반적인 사정과 전개에 대해서는 彭澤周, 앞의 책을 참조할 것.

타이완에 대한 이 무력 침공을 일본은 열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즉 이미 1873년에 소에지마가 뻬이징에서 청국정부로부터 일본의 타이완 징벌에 대한 동의를 획득했으며, 중국정부 스스로 타이완 동부가 중국의 영토에 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일본의 타이완 징벌은 중국에 대한 전쟁이 아니라 단지 ‘생번’에 대한 징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열강은 일본의 타이완 침략을 그들의 이해에 이롭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고 일본의 타이완 침략과 일본을 지원하고 있던 미국에 대해 항의를 표시했다.016)일본의 타이완 침략과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趙佳楹 編,≪中國近代外交史, 1840∼1919≫(太原:山西聯合出版社, 1994), 304∼20쪽을 참조할 것. 이에 일본은 적당한 선에서 조정이 필요로 했고 1874년 10월 청 조정과 뻬이징에서 화약을 맺게 되어 결국 이 조약을 계기로 청국은 류큐가 일본 영토임을 모호하나마 묵인하게 되었다.

뻬이징조약으로 청국이 애매한 태도를 취한 이후 일본은 류큐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해서 1875년 5월 류큐 국왕에게 중국에 대해 조공을 중지할 것을 명령하고 일본군을 류큐에 파견 주둔시켰다. 같은 해 6월 일본의 메이지 연호를 사용하도록 하고 1876년에는 일본의 사법기구와 경찰기구를 설치, 직접통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본의 이러한 일련의 조처에 대해 1877년 주일공사 허루짱(何如璋)은 일본의 국력은 결코 강성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중국이 무력으로 시위를 한다해도 전쟁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일본과의 항쟁을 주장했다. 그러나 류큐에 대한 리훙장의 판단은 달랐다. 류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청국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간주했다.

따라서 허루짱의 주장에 대해 리훙장은 ‘하찮은 일’이라거나 ‘조그만 나라의 자질구레한 조공문제를 가지고 다투는 것은 쓸데없는 일’로 치부하고 이 문제는 장기적인 전략에 따라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며 전쟁과 같은 강경 조처를 취할 이유도 의미도 없다는 판단에 따라 류큐를 방치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017)≪李文忠公全書≫, 譯署函稿 제8권, 2∼4쪽. 1879년 3월 일본은 류큐를 오키나와(沖縄)縣으로 개칭하고 일본 영토로 공식 편입하게 된다.

한편, 일본정부는 1868년 메이지유신 직후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서를 보내고 일본에서의 정치적 변화를 통고하고자 했다. 새로운 국체의 탄생을 알리면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동아시아 전통적 국제질서 인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帝’ ‘勅’ 등 관례에 어긋나는 표현을 들어 국서의 접수를 거절했다. 막부시대의 국서는 대개 ‘타이쿤(大君)’으로 칭하고 있었기에 분명히 구례를 벗어난 것이었다.018)막부 시기와 명치 초년의 조·일관계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沈箕載,≪幕末維新 日朝外交史の硏究≫(京都:臨川書店, 1997)를 참조할 것. 1870년에 일본은 다시 두 차례에 걸쳐 사절을 파견하고 접수를 종용했으나 역시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했다.

일본은 타이완 침략과 그에 따른 교섭에 성공한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에 대한 압박에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다. 국내에서의 조선침략논쟁(이른바 세이칸론〔征韓論〕)을 둘러싼 정부 내외의 갈등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 일본은 1875년 9월 군함 운요오호(雲揚號)를 파견하여 조선을 위협하게 했다.

부산에 기항하거나 동해안을 따라 영흥만에서 무력 시위를 하는 둥 마침내 한강 어구와 강화도 부근의 조선 영해를 침입했다. “조선의 해로 측정을 위한 항행”이라는 구실을 달았으나 이는 엄연한 무력 도발이었다. 강화도 초지진의 조선 포대는 당연히 정당방위 조처로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일본함정은 이에 응하면서 영종도에 상륙하여 관아와 민가에 불을 지르고 38문의 포문 등을 노획하고 나가사키(長崎)로 돌아갔다.019)白鍾基,≪近代韓日交涉史硏究≫(正音社, 1977), 102∼105쪽 참조.

이듬해 1876년 초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는 6척의 함정을 이끌고 조선에 재차 무력시위를 벌이고 동시에 모리 아리노리(森有禮)를 중국에 보내어 조선의 개국을 둘러싼 교섭을 돕도록 했다. 총리아문이<청일수호조규>에 따라 “양국의 예속 영토는 각자의 예에 따라 대하는 것이니 한 치도 침략할 수 없다”고 한 쌍무 규정을 들어 거절했다.

모리는 리훙장에게 조약에 조선은 중국의 ‘屬邦’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하고 나아가 조약은 통상을 위하여 만든 것일 뿐이며, 국가간의 일에 대해서는 국력에 따라 결정될 뿐이므로 “조약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020)≪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北京:文海出版社, 1963), 1-1 附件 2, 2쪽.고 위협적인 언사로 압박했다.

청은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도를 찾았지만 뾰쪽한 방도가 없었다. 양무운동을 주도하던 리훙장에게 대외문제는 되도록 피하고 싶은 과제였다. 그는 “조선은 빈약하여 일본에 대적할 힘이 없고 게다가 임진왜란때 처럼 청원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국력이 이에 응할 형편이 못된다”는 이유로 방관자적인 불간섭원칙을 취하게 되었다. 조선과 일본과의 조약체결은 청국의 방관 내지는 묵인 아래 이루어 진 것이었다.021)김종원,≪근세 동아시아관계사 연구:朝淸交涉과 東亞三國貿易을 중심으로≫(혜안, 1999), 317쪽.

1876년 2월에 체결된<조일수호조약>, 이른바<강화도조약>제1절은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로 시작된다. 그러나 한일관계의 실제에서 이 조약은 전형적인 불평등조약으로 조선에서의 영사재판권, 통상항의 개방, 해안의 측량권을 일본이 가지는 것이었다.022)이에 대해서는 彭澤周, 앞의 책, 49∼81쪽 참조.

1879년 일본이 류큐를 병탄한 사실을 목격한 청은 일본의 이 행동이 중국의 종주권을 부인하는 첫 걸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장차 조선에 대한 종주권 문제에도 자의로 행동할 날이 오리라는 데 대한 우려가 확산되었다.023)≪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1-33, 附件 1, 32쪽. 따라서 류큐 병탄 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세력 확장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현안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조선은 청조의 화이질서를 이루는 구성원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조선은 청의 발생지인 東三省과 맞붙어 있는 나라로 이 지역을 지키지 못하면 청조의 통치 위신이 심각한 타격을 받기 때문이었다.

고심 끝에 나온 방안의 하나가 사태의 본질을 뒤집어 보는 시각이었다. 1879년 6월 총리아문 대신 띵러창(丁日昌)은 조선이 각국과 화약을 체결함으로써 오히려 일본을 견제할 수 있으리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장차 양국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 화약을 맺은 국가들이 모두 일어나 그 잘못됨을 따져 일본은 지탄을 면하기 어려우리라”024)위와 같음.는 논리였다. 이 의견은 곧 조정에 의해 수용되었다. 리훙장은 청국에 와있던 李裕元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이 서양 각국과도 조약을 체결하도록 권유하게 된다.

이와 같은 청의 생각은 열강의 의도와 대체적으로 부합하는 것이었고 특히 영국은 러시아의 조선 장악이 두려웠고, 러시아 세력을 황해 이북으로 제한하는 것이 남중국에서 영국의 우위를 보증하는 중요한 관건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주청 영국공사 웨이드(Thomas Wade)는 조선으로 하여금 각국과 조약관계를 수립하도록 중국에 건의한 바 있다.025)비단 이 사정뿐 아니라 한·청·서양 각국과의 이 시기의 관계에 관해서는 Kim, Key-Hiuk, The Last Phase of the East Asian World Order:Korea, Japan, and the Chinese Empire, 1860∼1882(Berkeley:Univ. of California Press, 1980), pp.284∼300을 참조할 것.

청의 이와 같은 정책을 가장 먼저 이용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1880년 해군제독 슈펠트(K. W. Shufeldt)를 파견하여 일본의 알선을 통해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려고 했지만 조선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허루짱은 총리아문에 건의하여 조선의 외교를 중국이 주재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1882년 3월 티안찐(天津)에서 슈펠트와 담판을 할 때 청은 조선이 자신의 속국임을 분명히 밝히고자 노력하였지만 거부당하고, 다만 조선국왕이 미국대통령에게 보내는 조회에서는 조선을 청의 속국이라고 하자는 동의를 얻어내는 데에 그쳤다. 1882년 5월 22일 인천에서 조미조약이 체결되자 청국은 이때부터 적극적으로 조선에 대한 간섭정책을 전개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 또한 조선에서의 침략활동을 가속화한다.026)청·한 그리고 영·미관계에 대해서는 陳偉芳 著, 權赫秀 譯,≪淸·日甲午戰爭과 朝鮮≫(백산자료원, 1966), 45∼68쪽 참조.

이때 조선 통치계급 내부의 갈등은 일본이 조선에 발붙이는 데 결정적인 빌미로 제공되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대립의 확대가 그것이다.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국은 티안찐의 道臺 마찌엔쫑(馬建忠)과 수사제독 띵루창(丁汝昌)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사토록 하고, 다시 우장칭(吳長慶)에게 군사를 이끌고 조선에 가서 대원군을 체포하여 청에 압송하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난을 일으킨 병사와 민중을 진압하게 했다. 청국이 이처럼 노골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한 첫째 목적은 사태의 확대를 막음으로써 일본이 간섭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본은 임오군란을 이용하여 하나부사 요시토모(花房義質)에게 병력을 이끌고 조선으로 가서 제3자의 조정을 거부한다고 밝히면서 중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중국의 종주적 지위를 부정하고자 했다. 1882년 8월 30일 일본은 조선과<제물포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수도에 병력을 주둔시킬 권한을 획득함으로써 조선에서의 지위를 한층 공고히 하고자 한 것이다. 일본공사 타케조에 신이치로오(竹添進一郞)는 임오군란의 손해배상액 가운데 상환하지 않은 40만 원을 면제해주는 조건으로 조선의 독립을 권유한다.

청국 또한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서 자국의 지위를 강화하려고 했다. 군란이 평정된 뒤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외교와 군사업무를 관장하고자 했다. 상무위원을 파견하거나, 조선의 군대를 훈련시키고, 독일인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ellendorff)와 마찌엔창(馬建常)을 조선의 세관업무에 참여시키도록 추천한 것이 좋은 실례이다.

일본은 청이 마침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조선에 대해 신경을 쓸 여유가 없는 틈을 타 개화파로 하여금 쿠데타를 일으켜 그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고 했다. 프랑스도 일본이 조선에서 진일보한 침략활동을 전개하여 중국을 견제하도록 적극적으로 종용했다.

1884년 12월 4일, 조선의 개화파는 郵政局청사 낙성식을 기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국왕을 일본군이 호위하도록 했다. 조선주재 防營 營務處會辦의 직위에 있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이 소식을 듣자 병력을 이끌고 궁궐로 들어가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 사건이 끝나고 일본은 외상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를 직접 파견하여 조선이 독립국임을 강조하고 청국을 배제한 조선과의 담판을 진행하게 된다.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청의 기본적인 태도는 청국과 일본 사이에 오해로 말미암은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그 단서를 미리 막는 장치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일본과의 교섭에서 일본측의 책임을 추궁할 의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일찍부터 조선에서의 철군에 동의하고 있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티안찐에서 열린 담판에서 일본이 노렸던 목표는 중국의 조선에서의 철군이었으나 리훙장은 일본이 철수하면 중국도 철군하겠다고 주장, 결국 양국은 조선에서 변란 등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상대방의 동의를 얻어야만 파병이 가능하다는 합의에 도달하게 되었다.027)이 시기의 전반적인 청·일·한의 관계에 관해서는 白鍾基, 앞의 책, 172∼210쪽 참조.

이처럼 조선은 1882년∼1886년간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영국은 조선을 러시아가 남중국 연해로 확장하는 것을 막는 방파제로 삼고자 했다. 구체적으로는 조선에서 청의 지위를 확고히 함으로써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에서 부동항을 얻고자 했던 러시아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조선이 러시아와 적대적 관계인 영국이나 일본의 통제 아래 들어가는 것을 우려했다. 한편 미국은 한반도에서 자신의 이익을 일본과의 협조를 통하여 확보하려 하였고, 일본은 조선을 장차 대륙 팽창의 교두보로 굳힐 생각을 하고 있었다.

1885년 4월 영국의 극동함대가 거문도를 점령하고 일시 조차한다고 선언했을 때 이 같은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반응이 명확히 나타난다. 리훙장은 영국과 손을 잡고 러시아와 일본을 방어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영국의 이번 점거는 러시아를 막기 위한 것으로 조선과 중국 모두에게 아무런 손해가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영국공사 오코너(Nicholas R. O'Conor)에게 거문도의 일시 점령에 대해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고 공언했다.028)≪李文忠公全書≫, 電稿 제5권, 30쪽. 주영공사 쩡찌쩌(曾紀澤)는 영국은 거문도에 대한 세금을 조선정부에 납부해야 하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준 공로로 영국정부로 하여금 조선을 중국의 ‘속방’으로 승인 받고자 하였다.029)≪李文忠公全書≫, 譯署函稿 제17권, 12쪽.

그러나 영국은 이내 거문도에 거액을 투자하여 군사적인 기지를 설립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청정을 통해 러시아가 조선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구두 보증을 받아 내고서는 1887년 2월 거문도에서 철수하게 된다.

러시아는 조선세관 총세무사였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와 합작하여 국왕을 러시아가 보호하도록 하고, 주일 참사관 드 스페이에르(Alexei Nikolaevich de Speyer, 士貝耶)를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정부를 압박하여 군사교관을 러시아인으로 두게 하는 등 입지를 확대하고자 노력했다.

조선에서 러시아의 이러한 적극적인 활동은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보다 한발 앞서 러시아를 견제할 필요를 느끼게 했다. 이에 따라 청과의 협조관계부터 열게 된다. 1885년 7월 일본공사 에노토모 다케아키(榎本武揚)는 티안찐에서 리훙장을 접견하고 조선의 외무업무에 관한 여덟 개의 조건을 제시했다. 그 핵심은 청정부가 조선의 인사정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청국은 청국대로 조선에서 러시아의 활동에 대응해 먼저 군사력을 정비하여 러시아를 막는 일이 우선한다는 판단 아래 일본과 손을 잡고 러시아를 막는 방편을 고려하고 있었다.030)≪李文忠公全書≫, 海軍函稿 제2권, 9쪽. 따라서 청정은 일본의 건의를 받아들여 1885년 9월 대원군을 석방하여 귀국토록 하였으며, 11월에는 위안스카이를 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임명하게 된 것이다.

1885년부터 1894년 청일전쟁의 발발까지 10년간은 청이 조선에서 리훙장의 지지하에 위안스카이를 통해 소위 ‘監國’정책을 실시한 시기였다. 청은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의 팽창을 견제하려 하였으며, 조선이 독자적으로 유럽이나 미국과 사절을 교환하는 일도 방해하고 사전에 청국의 인준을 받도록 요구하였다. 경제부문에서도 통제를 강화하여 조선의 육상 전신선을 중국이 관리하도록 하였고, 일본과 조선 사이에 부설한 해저 전선도 통제하고자 하였으며, 조선에 대한 일본의 차관까지 저지시켰다. 또 인천·원산·부산 등 세 항구를 통한 수출을 증가시켜 조선에서 일본의 수출 점유율을 잠식해 들어갔다.031)조선을 둘러싼 청의 무역과 대일 견제 사정에 대하여는 김종원, 앞의 책, 291∼350쪽 참조.

일본은 이 시기에 두 가지 이유로 중국을 견제하지 않고 있었다. 하나는 앞서 말한 대로 중국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중국의 역량을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886년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중국이 “현재 외부적으로는 수륙 각 군이 잘 정돈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나 내가 보기에는 모두가 헛소리다. 지금은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한 후라 마치 활기가 있는 것처럼 보이나, 1∼2년 지나 다시 일상적인 국면으로 접어들면 서양인들의 언급대로 다시 잠들 것이 분명하다”032)≪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10, 第452件 附件 2, 2쪽.고 당시 중국의 힘을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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