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Ⅰ. 청일전쟁
  • 2. 전쟁의 배경과 전개
  • 2) 일본의 전쟁 준비와 갑오농민전쟁

2) 일본의 전쟁 준비와 갑오농민전쟁

일본의 전쟁준비는 민·관 양쪽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참모본부와 ‘대륙낭인’을 중심으로 하는 팽창주의 지향의 민간단체들이었다.

1878년 참모국에서 확대 개편된 참모본부는 1879년 독일에서 갓 돌아온 카츠라 타로오(桂太郞) 중좌를 管西局長으로 앉히면서 중국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서 작전 방안을 작성하는 한편 십여 명의 장교를 중국 현지로 파견하여 스파이로서 중국의 군사지리나 군비 현황 등을 조사·연구시켰다.033)佐伯有淸,≪廣開土王碑と參謀本部≫(東京:吉川弘文館, 1976), 6쪽. 1880년에는 시베리아 등지로도 참모본부 요원을 파견했는데, 그러한 조사 연구를 토대로≪支那地誌≫·≪隣邦兵備略≫등의 군사지리서와 작전지침을 편찬한 것이 바로 참모본부 편찬과였다.

청일전쟁의 개전 준비과정에서 이 편찬과를 중심으로 광개토왕비에 대한 연구를 비롯한 학술적인 작업이 진행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참모본부 편찬과는 일본의 전문가들이 광개토왕비문의 존재를 알기 이전부터 자체적으로 비문의 내용과 탁본을 습득하여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청국에 파견된 장교로 뻬이징에서 중국어를 습득하고 중국인 의사로 변장하여 만주 일대를 조사했던 사코오 카케아키(酒勾景信) 중위가 1883년 광개토대왕비문의 墨本을 입수했다. 편찬과는 그 전인 1882년에≪任那考稿≫라는 고대 한일관계사에 관한 연구서를 발간한 적도 있다.034)李進熙 著, 李基東 譯,≪廣開土王陵碑의 探究≫(一潮閣, 1982), 17쪽. 사카와가 입수한 묵본은 1888년 메이지 천황에게 헌상되어 1890년에 제국박물관(현재의 토오쿄오국립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었고, 참모본부는 일본 근대역사학의 개척자인 쿠메 쿠니타케(久米邦武) 등 대표적 역사학자와 한학자들을 동원하여 비문 해독작업을 추진했다.

광개토왕비문을 고대 일본이 ‘남선을 경영(南鮮經營)’했던 증거로써 해석한 연구는 亞細亞協會가 1889년 발간한 잡지≪會餘錄≫제5집에<高勾麗古碑釋文>이라는 글로 처음 공포되었다. 이 시점이 참모본부가 조선 침략을 위한 청국 작전 구상을 구체화하고 있을 때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035)≪최근의 이집트≫는 잘 알려진 대로 영국의 크로머(Evelyn B. Cromer)가 지은≪근대 이집트(Modern Egypt)≫(N.Y.:Macmillan, 1908)를 번역한 책으로서 한국병합 직후인 1911년에 대일본문명협회에서 간행되었다.≪회여록≫의 논문과 아세아협회의 관계는 마치 이후 한국을 병탄할 때 나타나는≪최근의 이집트(最近埃及)≫와 대일본문명협회의 관계와 유사하다. 협회 회장이던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는 이 책의 서문에서 자신이 이 책의 원본을 당시의 한국통감 이토오 히로부미에게 헌정한 바 있는데, 그것은 영국의 이집트 지배정책이 한국에서의 ‘보호정치’에 참고가 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서였다고 털어놓고 있다.

전쟁에 대비한 정부의 이러한 빈틈없는 전쟁 대책의 수립과 병행하여 민간의 대륙 팽창주의자들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샹하이(上海)의 樂善堂을 근거지로 암약하던 이른바 ‘大陸浪人’들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륙낭인의 대표적 인물인 아라오 세이(荒尾精)나 네즈 히토시(根津一)는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참모본부에 소속된 첩보무관으로 1886년부터 낙선당을 거점으로 행상을 하면서 남부 중국의 지형 탐사와 정보 수집을 담당했다.036)이들의 공작과 활동에 관한 상세한 그림은 李文海·康沛竹,<甲午戰爭与日本間諜>(楊念群 主編,≪甲午百年祭:多元視野下的中日戰爭≫, 北京:知識出版社, 1995), 18∼38쪽을 참조할 것.

이들은 좀더 체계적인 첩보활동을 위해 1890년 샹하이에 일청무역연구소037)이 연구소는 1901년 東亞同文書院으로 이어지게 된다.를 설립하고 낭인들을 교육시켜 배출했고, 바로 이들이 청일전쟁 때 통역과 정보 수집원으로 활약하게 되었던 것이다.038)이에 관련된 인물들을 일본의 우익적 시각으로 정리한 참고서는 栗田尙彌, ≪上海 東亞同文書院≫(東京:新人物往來社, 1993)이 있다. 이들 대륙낭인 가운데 특히 일본의 조선 침략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玄洋社와 天祐俠라는 재야 민간 단체였다.

큐우슈우(九州)·후쿠오카(福岡)지역의 낭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겐요샤는 토야마 미츠루(頭山滿)를 지도자로 하여 대륙정책에 적극적으로 간여했다. 청일 개전 전에 金玉均이 샹하이에서 암살 당했을 때에는 겐요오샤 社員 마토노 한스케(的野半介)가 외상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와 참모차장 카와카미 소오로쿠(川上操六)를 찾아가 청국 응징과 청일 개전을 역설했던 적이 있다. 또 청일 양국군의 조선 파병 뒤 교착상태가 지속되자 아산만으로 청년 사원들을 보내 전쟁도발을 획책하기도 했다.039)상세한 기술은 趙恒來,<日本國粹主義團體의 一硏究:玄洋社를 中心으로>(歷史學會 편,≪日本의 侵略政策史硏究≫, 一潮閣, 1984) 참조.

또 겐요샤의 우치다 료오헤이(內田良平)를 포함한 소수의 ‘조선 낭인’들은 별도로 텐유쿄라는 조직을 만들어,<全州和約>이후 소강상태에 있던 농민군을 선동하려 했으며 전쟁 발발 이후로는 통역과 스파이 역할을 하면서 종군했다.040)姜昌一,<天佑俠と‘朝鮮問題’:‘朝鮮浪人’の東學農民戰爭への對應と關連して>(≪史學雜誌≫97∼8, 1988) 참조. 이들 낭인 세력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현지에서 지원하는 민간 침략도구로서 자발적으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1894년 2월 전라도 고부에서 궐기한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각지의 지방 관청을 습격하며 5월에 접어들면서 그 세력을 급속히 확대시켰다. 조선정부는 당초 이 농민혁명을 종래의 民亂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농민 봉기의 원인을 지방관의 불법적 수탈 탓으로만 판단하고 있었다.

그것은 전라도 병마사 겸 壯衛營 正領官인 洪啓薰을 兩湖招討使로 임명하여 현지로 파견한 직후의 대신회의에서 지방관의 엄격한 선발을 농민 봉기에 대한 대안으로써 강조한 점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좌의정 趙秉世처럼 문제의 근원을 ‘弊政’ 일반에 두는 주장은 오히려 예외적이었다.041)≪日省錄≫, 고종 31년 4월 4일.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京軍을 내려보냈으나, 전라도 관찰사의 허위 보고와 달리 해산하지 않고 있던 농민군은 황토현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조선정부는 홍계훈의 증원군 요청에 따라 5월 19일 壯衛兵 300명과 沁營兵 500명을 증원하여 진압태세를 강화하는 한편, 농민군의 표적이었던 전라도 관찰사 金文鉉, 按覈使 李容泰, 고부 군수 趙秉甲 등의 처벌과 고종의 칙유에 의한 폐정 시정 약속을 통해서 농민군의 해산을 회유하고자 했다. 재래의 민란 대책이라면 상당한 수준의 대책이었을 터였다.

그러나 농민군에 대한 조선정부의 진압 태세도 몹시 취약했다. 종래의 민란과는 딴판으로 농민군은 규율, 조직력과 전투력이 뛰어났고 민중의 유례없는 지지를 받고 있었던 반면에, 정부군은 재정의 피폐로 인한 사기 부진, 그리고 중앙군과 지방군 사이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규율과 전투력이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황토현전투에서 여실히 입증되었고 5월 27일의 長城전투에서도 되풀이되었다. 결국 농민군은 정부군의 방어망을 뚫고 5월 31일에 全州를 함락시키기에 이른다.

홍계훈은 황토현전투에서 패배한 직후인 5월 14일경부터 증원군 요청과 동시에 청국군의 ‘借兵’ 방안을 정부에 제기하고 있었다. 요원의 불길처럼 확대되는 농민혁명을 자력으로 진압하고 수습할 능력이 정부군에게 없음을 잘 알고 있던 홍계훈으로서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선례에 따라 중국으로부터 진압병력을 도입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장성전투를 며칠 앞둔 23일에도 농민군을 진압할 방도는 “바깥으로부터 병력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즉 “지금의 정세를 보면 우리의 숫자는 적고 저들은 많아 군대를 나누어 추격하기 어려우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외국의 군대를 빌어 [토벌군을] 돕는다면 저들로 하여금 꼬리와 머리를 잇지 못하게 하고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인즉, 저들은 반드시 세가 외로와 흩어질 것이오 힘이 다하여 무너질 것입니다”042)田保橋潔,≪近代日鮮關係の硏究≫下(京城:朝鮮總督府中樞院, 1940), 274쪽. 라고 하는 청원이었다.

청국군 차병문제는 1893년 동학의 보은 집회에 대한 대책을 정부가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미 제기된 바 있었다. 당시 영의정 沈舜澤이 동학 집회를 진압하는 데 중앙군까지 투입하자는 안을 제기한 데 대해, 고종은 중앙군을 수도 방위에 전념시키고 집회의 진압은 청국군에게 맡기자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고종은 청국이 태평천국운동(1851∼1864)을 진압할 때 영국군을 ‘빌렸던’(借兵) 사례를 상기했을 것이다.043)≪日省錄≫, 고종 30년 3월 25일. 이때의 차병론은 결국 군량미 조달의 재정적 문제점을 든 심순택과 우의정 鄭範朝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반대파 역시 청국의 병력 도입은 타국에 대한 파병 요청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인식은 공유하고 있었다. 즉 당시 조선정부는 전통적인 ‘屬邦’체제에 가탁한 중국의 근대적 식민지지배 시도를 기본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044)具仙姬,≪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제4장 淸日戰爭과 朝·淸關係(혜안, 1999), 220쪽.

이러한 경위를 지닌 청국군 차병문제가 홍계훈의 요청에 의해 다시 제기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정부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기본적인 대응 방안으로 두 가지를 거론하고 있었다. 첫째는 조병세처럼 민중의 바람에 부응하여 폐정을 크게 개혁하자는 내정개혁 방안이었고, 둘째는 閔泳駿처럼 청병을 빌리자는 군사적 진압 방안이었다.045)日本外務省 編,≪日本外交文書≫27-2(東京:日本國際連合協會, 1936), 152∼153쪽.

전자는 결국 국정을 장악하고 있던 민씨 척족의 축출을 의미하기 때문에 실행하기가 곤란했지만 후자는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모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5월 16일 민영준은 “賊勢가 갈수록 더 창궐하여 剿滅할 수가 없습니다. 招討使로부터 청병이 와 도와주기를 요구하는 전신이 도착했는데 아마도 [지금의] 사정에 합당하다”고 고종에게 상주하고 있었다.046)≪日本外交文書≫27-2, 153쪽.

이리하여 청군 차병문제는 5월 18일의 대신회의에서 논의되었지만 세 가지 이유로 반대 의견이 우세했다. 하나는 나라의 근본이 백성인데 외국군에 의해 수많은 생명, 즉 농민군이 절멸되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점이었다. 둘째는 국내로 진입한 외국 군대의 통과지역에 막대한 폐단이 생겨 민심을 동요시키리라는 점이었다. 셋째는 외국군의 입국을 기화로 일본과 서구 열강이 공관 혹은 거류민 보호를 구실 삼아 군대를 파견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차병 요청을 둘러싼 논의는 부결되었다.047)≪日本外交文書≫27-2, 153∼154·156쪽. 전반적으로 농민군의 무력 진압보다는 내정개혁을 매개로 한 해결 방식을 모색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로부터 정치적 후원을 받고 있던 민영준은 청군 차병에 대해 별도로 비공식적인 협의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5월 26일경 위안스카이는 민영준을 방문해 농민군의 세력 확대를 우려하면서 자신에게 병력을 주면 5일 내에 평정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농민군이 전주를 함락한 5월 31일, 민영준은 위안스카이를 방문하여 원군의 파병을 논의했다.

위안스카이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고종에게 설득한 요지는, 자신이 스스로 고종의 뜻대로 현지로 내려가 조선 병력을 지휘할 것이며 수도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일본 군대가 진입할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자신 휘하의 군을 진입시키지 않으리라는 약속 등이었다. 더 이상 뾰쪽한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고종은 내키지 않은 채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048)고종의 청군 파병 자진 요청의 허구성에 관해서는 이태진,<1894년 6월 淸軍 朝鮮 출병 결정 과정의 眞相-조선정부 자진 요청설 비판>(≪韓國文化≫24, 1999. 12)을 참조할 것〔<1894년 6월 淸軍出兵 과정의 진상-자진 請兵說 비판>,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191∼228쪽에도 수록〕.

앞서 위안스카이의 보고에 근거해서 쩌어리총독·뻬이양대신(北洋大臣) 리훙장이 5월 25일 뻬이징에 알린 사항은, 조선 국왕으로부터 정식 파병 요청은 아직 없으며, 일본의 파병 움직임도 없지만 청군의 파병 준비에 만전을 기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049)≪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13, 942쪽. 6월 1일 총리아문에 대한 리훙장의 보고에 따르면 “(조선국)왕은 병력이 부족하여 (진압군을) 더 이상 늘려 파견할 수 없고 또 (그들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며, 중국이 군대를 파견해 대신 토벌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고 하며 파병 준비를 하면서 조선으로부터 공식 요청이 있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050)蔡爾康·林樂知 編, 藤野房次郞 譯,≪中東戰記本末≫(東京:博文社, 1898), 135쪽.

한편 일본의 조선 주재 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는 조선문제를 기화로 중국의 출병을 충돌질하고자 했다. 그는 위안스카이에게 일본은 중국이 “조선의 혼란에 신속하게 대처하길 바란다”고 요청하면서 일본정부는 “다른 뜻이 없다”고 밝히며 중국의 출병을 종용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일본이 “商民을 중시 여길 뿐 별다른 뜻이 없는 것 같다”051)≪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13, 제945·949件, 7∼8쪽.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일 공사 왕펑짜오(汪鳳藻)도 청정에 일본은 국내 권력 투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발생하는 일에 대한 대처 능력이 없다고 보고했다. 일본에 대한 청국의 정보는 토오쿄오 주재 청국 공사 왕펑짜오를 통해서 형성된 부분도 적지 않았는데, 그는 일본이 내정의 어려움 때문에 “도저히 다른 나라에 대하여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고 판단했고, 리훙장은 그러한 보고를 그대로 믿었던 것이다.052)리훙장 등 청의 오판에 관해서는 陳偉芳, 앞의 책, 162∼70쪽 참조.

청군의 파견에는 위안스카이의 개인적 오판도 작용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조선에 청병하면 5일 이내 비도를 진압할 수 있다”053)≪日本外交文書≫27-2, 문서번호 501, 155∼156쪽.는 등 호언장담을 서슴치 않았다. 리훙장은 위안스카이와 왕펑짜오의 보고를 근거로 조선정부의 구원 요청이 오는 즉시 조선에 파병을 결정하고 6월 7일<天津條約>의 규정에 따라 일본에 통보했다. 6월 9일부터 12일 사이에 청군 2,000여 명이 아산만에 도착했다.054)≪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2, 547쪽.

일본정부는 1894년 6월 2일 조선 주재 공사관의 보고를 통해 조선정부가 이미 중국에 청병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의에서 공사관과 교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에 출병할 것을 결의했다. 수상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외상 무츠는 일본은 “되도록이면 피동자적인 위치를 고수하고, 언제나 청이 주동자가 되게 해야” 한다는 점과, “사태를 일·청 두 나라에만 국한시켜 제3국과의 관계가 일어나지 않도록 피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다는 기본 방침을 설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는 선제공격을 하기로 따로 결정해 놓고 있었다.055)陸奧宗光,≪蹇蹇錄≫(岩波書店, 1940), 36쪽 및 54∼55쪽.

일본은 일차로 약 7∼8천 명의 대병력을 동원할 계획을 가지고 6월 5일 大本營을 설치하여 전쟁 준비를 완료해 놓았다.056)대본영의 히로시마 설치와 천황권의 군사적 성격에 관해서는 檜山幸夫<日淸戰爭と日本>(東アジア近代史學會 編,≪日淸戰爭と東アジアの變容≫上, 東京:ゆまに書房), 375∼383쪽 참조할 것. 또한 군사적으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청군의 출병 통지를 기다리지 않고 서울로 돌아오는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해군 3∼4백 명을 오오토리와 함께 먼저 파병하여 6월 10일 그들을 서울에 주둔시켜 놓았다. 이후 지속적으로 파병을 늘려 16일이 되면 약 4,500명이 증파되고, 이 병력만으로도 청군의 두 배를 이미 넘고 있었다.

군사적 배치를 완료한 일본은 외교적으로 도발의 구실을 찾고자 했다. 1894년 6월 7일 중국측에 일본도 <제물포조약> 제5조에 따라서 파병을 준비하고 있음을 통보했다. 이때 청정이 보낸 조회문 중에 소위 “속방을 보호한다”는 규정에 대해 항의를 표시,057)≪日本外交文書≫27-2, 문서번호 519, 169쪽. 도발의 외교적 구실을 찾는 첫걸음을 내디디게 된 것이다.

한편 사태가 예상 밖으로 비화하자 조선정부는 위안스카이에게 “이미 적이 흩어졌으므로 청국군도 조속히 철군해 줄 것”을 요청하는058)≪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2, 990件, 556∼557쪽. 한편 일본 공사에게도 같은 뜻을 전했다.059)≪秘書類纂朝鮮交涉資料≫中, 377∼381쪽. 오오토리가 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진주한 뒤 동학농민군은 적극적으로 그들의 행동이 외침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기 시작한다. 농민군에게 가장 충격을 준 소식은 일본군이 궁궐을 침범했다는 사실이었다.

전봉준이 이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전주화약이 성립된 후 남하 도중 全州에서였다.060)<全琫準供草>四草. 그러나 이때는 이미 화약이 성립된 이후여서 거병을 재론할 게재가 되지 못했다. 대원군은 그가 경사로 진격하여 함께 천하를 도모할 것을 암시한다.061)≪東學亂記錄≫下, 583∼584쪽. 그러나 전봉준의 지병 악화와 추수기라는 시기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농민군과 군량 동원은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농민군은 일본군과의 항전을 결정하고 공주를 그 결전지로 삼았다. 10월 22일부터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농민군은 무장의 열세로 계속 패배하여 1∼2차 공격을 마친 후 1만 명의 농민군 중 3천명이 남았으며, 3∼4차의 공격을 마쳤을 때 혁명군은 불과 5백 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062)<全琫準供草>初招. 농민군 세력이 급격히 줄어들자 일본군의 서울 진입은 국제적으로 의심을 사게 될 수밖에 없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일본은 외교적으로 피동적인 위치를 고수하려던 태도를 버리고 조선정부에 건의하여 일본군으로 하여금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려 일본군이 계속 진주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려고 하였다.

일본은 중국에 도발하기 위한 구실로써 두 가지 방략을 고려하고 있었으니, 하나는 중국과 조선간의 종속문제를 따지자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조선의 내정개혁 문제였다. 조선 주재 일본 공사 오오토리는 이 시점에서는 후자가 더욱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6월 28일 조선정부에 대해 6월 7일 청국이 일본에 보낸 조회문 중에 소위 ‘속방 보호’라는 주장에 관련해서 조선정부가 이에 동의하는지를 따지면서 하루 이내에 답변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난처한 질문에 봉착한 조선정부는 조선은 일본과의<강화도조약>을 존중하며, 중국에 원조를 청한 것은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일본정부는 조선에서 중국의 종주권 문제는 이미 진부한 주제로서 전쟁 도발의 계기로 삼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내정개혁을 도발의 구실로 삼는 것이 제3국의 동조를 얻는 데에도 유리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7월 3일 일본은 조선에 대해 개혁방안 5개조를 제시했다.063)제1조 중앙정부제도와 지방제도를 개정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제2조 재정을 정리하고 재원을 개발할 것. 제3조 법률을 정돈하고 재판법을 개정할 것. 제4조 국내의 민란을 진정시키고 안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군대와 경찰을 설치할 것(≪日本外交文書≫ 27-1, 문서번호 396, 586∼591쪽). 중앙과 지방제도의 전반적 개혁을 다룬 것이었다. 일본은 대원군을 끌어들이고 조선 병사들의 무장 해제부터 착수하여 7월 25일에 이를 완료하였다.

7월 24일부터 시작된 ‘개혁’은 軍國機務處를 설치하고 金弘集을 총재로 앉혔다. 관장할 수 있는 업무를 ①서울 이외의 모든 관청의 직제를 개정하며, ②행정과 사법 일체의 규칙을 새로 제정하며, ③토지·물품세와 재정 일반에 관한 규칙을 제정하며, ④학사 정책을 수립하고, ⑤군사 정책을 수립하고, ⑥식산 흥업과 상업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집행한다고 규정했다.064)杉村濬 著, 한상일 편역,<在韓苦心錄>(≪서울에 남겨 둔 꿈≫, 건국대 출판부, 1993), 135∼44쪽.

새로운 관제가 제정됨에 따라 8월에는 영의정 김홍집을 비롯한 대신들이 임명되고 각 아문들도 문을 열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 일본 주도의 내정개혁이란 조선을 청으로부터 분리시켜 일본 침략의 발판을 만들자는 것과 친청파이자 수구 세력인 민씨 일파를 제거하는 데에 그 궁극적 목표가 있었음은 두말 할 나위 없다.

조선정부는 6월 2일 동학농민군이 전주를 함락시켰다는 보고를 받고 다시 긴급 대신회의를 열어 차병문제를 논의했다. 이때에도 반대 의견이 많았으나 앞서 살펴 본 대로 이미 위안스카이와 비공식 교섭을 진행시키고 있던 閔泳駿은 위안스카이의 주장을 앞세워 고종을 설득해 반대 의견을 누르고 청국군이 파병되도록 했던 것이다.

결국 청군 차병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미 선택의 여지를 잃은 조정과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민씨 척족, 그리고 조선의 근대적 식민지화를 꾀한 위안스카이 사이의 이해를 조정한 결과 태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정부의 정식 파병 요청에 따라 청국은 6월 7일부터 쩌어리제독 예치챠오(葉志超), 띵루창(丁汝昌)이 이끄는 약 3천 명의 병력을 샨하이구안(山海關)으로부터 아산으로 파견하는<천진조약>에 의거하여 일본정부에 이 사실을 서면으로 통고하였다.065)朴宗根 著, 朴英宰 譯,≪淸日戰爭과 朝鮮:外侵과 抵抗≫(一潮閣, 1989), 13쪽.

조선정부에서 청군 차병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을 당시, 청원 휴가로 일본으로 돌아간 조선 주재 일본공사 오오토리 대신에 대리공사를 맡고 있던 이등 서기관 스기무라는 5월 22일자 보고에서 앞서 살펴본 조선정부의 두 가지 대응방안-내정개혁에 의한 회유와 청군 차병에 의한 무력진압-을 소개하면서 조선정부가 후자를 선택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일본] 관민을 보호하고 청일 양국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민란이 진압되고 청군이 철수할 때까지 공사관 호위를 명분으로 구 조약(<제물포조약>)에 따라 출병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066)≪日本外交文書≫27-2, 152∼153쪽.

일본은 메이지유신 직후부터 조선에 대한 정보활동에 적극적이었지만, 특히 참모본부는 황토현전투 뒤인 5월 20일 참모부원 이지치 코오스케(伊地知幸介)소좌를 조선에 파견하여 공사관 무관 와타나베 테츠타로오(渡邊鐵太郞)대위 등과 협력하여 대대적인 정보수집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와타나베의 경우에는 이미 1894년 3월부터 경기·강원·함경·충청·경상도를 유람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정부의 허가를 받아 조선의 정황을 정탐하고 있었다.

일본 해군도 측량을 명목으로 남해안에 군함을 파견해 정보 수집 활동에 나섰다. 서해안에 파견된 군함 '야마토(大和)'는 승무원을 군산에 상륙시켜 부근 실정을 정탐시키고 청국 군함의 움직임을 관찰하게 했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일본 군부의 정보 활동은 모두 농민군의 전주함락 이전, 즉 조선정부의 청군 파병 요청 이전의 시점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사실이다.067)朴宗根, 앞의 책, 13∼14쪽.

참모본부는 이미 5월 하순부터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대좌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조선 파병을 위한 수송 준비에 들어가, 육군의 대규모 연습을 명목으로 일본우편회사 소속 민간 선박을 징용하고 있었다. 또 5월 30일 조선 정세를 시찰하고 돌아온 이지치소좌의 보고를 받고 사실상 파견을 결정하고 있던 상태였다.068)參謀本部 編,≪明治二十七八年日淸戰史≫1(東京:育英社, 1904), 95쪽.

한편 일본정부는 대리공사 스기무라의 조선정부 청국 원병 요청을 알리는 6월 1일 타전을 접하고 이튿날 참모본부 차장 카와카미 등을 참석시킨 각의에서 중의원 해산을 결정하는 한편 무츠외상이 제출한 파병결의안을 채택했다. 5월 31일 중의원에서 정부 예산문제를 둘러싸고 내각 탄핵 상주안이 가결되는 등 정치적 위기 상황에 봉착해 있던 이토오내각으로서는 이 파병안이 천우신조처럼 보이지만, 전쟁 결정 당사자들은 앞서 살펴보았듯 이미 정치적 탈출구로써 개전의 시나리오를 준비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일본정부의 조선 파병 결정이 조선정부가 위안스카이에게 청군 차병을 공식 요청한 것보다 하루 먼저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파병 결의 직후 외상 무츠, 외무차관 하야시 타다스(林董), 참모본부 차장 카와카미는 파병에 대한 구체적인 군사적·외교적 책략을 협의하였다. 일본이 병력을 파견할 경우 청군은 반드시 공격해올 터인데, 청군의 병력은 5천 명 선을 넘지 않을 것이니 일본이 필승을 거두려면 6∼7천 명 수준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 청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경우 청국은 강화를 요청해 올 것이며, 그렇지 않고 만약 병력을 증파할 경우에 일본 역시 1개 사단을 증파하여 승리한다면 강화의 성립이 확실하므로, 먼저 혼성여단을 파병하여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069)藤村道生 著, 허남린 옮김,≪청일전쟁≫(서울:소화, 1997), 82쪽.

6월 5일 일본은<戰時大本營條例>에 근거해서 참모본부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혼성여단의 파견에 대한 칙허를 얻어 히로시마(廣島)의 제5사단에 대해 제1차 충원을 명령했다. 6월 5일 혼성여단의 지휘자 제5사단의 오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소장은 군함 ‘야에야마(八重山)’호에 해군육전대 488명과 순사 20명을 대동하고 요코스카(橫須賀)항을 출발하였다. 9일 인천에 상륙한 이들 일본군은 10일 곧바로 서울로 진주하였다.

동시에 상비함대 사령관 이토오 스케유키(伊東祐亨)중장의 지휘하에 기함 ‘마츠시마(松島)’를 파견, 이미 파견되어 있던 ‘츠쿠시(筑紫)’·‘치요다(千代田)’·‘야마토(大和)’·‘아카기(赤城)’와 함께 모두 6척의 군함을 인천에 집결시키고, 부산에는 군함 ‘타가오(高雄)’를 정박시키는 등 일본이 보유한 군함의 거의 절반을 조선 연안으로 파견하였다. 연이어 선발대인 보병 제11연대 1천여 명이 12일 인천에 상륙하면서 혼성여단 병력이 인천의 요지와 수도 서울을 제압해 나갔다.

청군과 달리 조선정부의 요청에 의거한 것이 아닌 자국의 군사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일본정부는 기존의 조약을 완벽히 이용하였다. 즉 1882년<제물포조약>과 1885년<천진조약>이 그것이었다. 외상 무츠가 “이번에 우리 정부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은 제물포조약상의 권리에 근거하며, 또 이를 파견함에 있어서<천진조약>에 준하여〔청국에게〕 문서로써 통지하였다”고 명시한 그대로이다.070)≪蹇蹇錄≫, 27쪽.

<제물포조약>은 제5조에 “일본공사관은 병사 약간을 두고 경위한다. 병영을 설치·수선하는 일은 조선국에게 맡긴다. 만약 조선국의 군민이 법률을 지킨다면 일년 후에 일본공사가 경비가 불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철수해도 무방하다”고 되어 있었다.071)日本外務省 編,≪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上, 90쪽. 또<천진조약>제3조는 “장래 조선국에 변란이나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 청국과 일본 두 나라 혹은 한 나라가 군대를 파견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사전에 서로 문서로 통지해야 한다. 사건이 진정되면 곧 군대를 철수해야 하며 그대로 남아 방비하지 않는다”072)≪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上, 103∼104쪽.고 했다.

일본정부는 이 조약에 따라 자국군의 파견을 청국에 통지했고,<제물포조약>에서 규정된 대로 공사관과 거류민의 보호를 빌미로 병력 파견을 합법화했던 것이다. 그러나 농민군과 정부군 사이에 전주화약이 성립되어 외국 군대의 간섭과 주둔의 명분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6월 15일까지 자국군을 인천과 서울에 포진시켰다.

이러한 정세에 대응하여 조선 주재 일본공사 오오토리는 위안스카이가 제안한 조선으로부터의 청·일 양국군 공동 철수를 위한 교섭을 추진함으로써 평화적 해결을 꾀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국 정부는 이 공동 철병안에 반대했다. 우선 청국과 일전을 벌임으로써 얻으려던 조선 지배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대규모 부대를 파견해 놓고 후퇴하는 것은 일본 국내 정치의 사정상 불가능한 선택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정부는 상황 돌파를 위한 고육지책으로서 6월 15일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이 내정개혁을 청·일이 공동으로 조선정부에 실행케 하도록 할 것을 청국에 제안했으나 청은 이를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이라고 거절했다. 이에 일본은 단독으로 개혁의 실행을 조선정부에 강요했다. 개혁을 강요받은 조선정부는 일본군이 철수한 후에 자주적으로 개혁을 시행하겠다고 주장하며 일본은 신속히 군을 철수부터 할 것을 거듭 요구했다.

일본정부는 현지의 오오토리 등과는 달리 조선정부의 강력한 요구와 열강의 압력 등으로 궁지에 몰린 일본군 철수문제를 내정개혁의 요구에 의해 무마하고 계속 주둔의 구실로 삼으면서, 이를 청·일 개전의 도화선으로 이용하려는 외교 정략은 변경될 수 없는 일이었다.073)高橋秀直,≪日淸戰爭開戰過程の硏究≫(神戶:神戶商科大學經濟硏究所, 1992), 44∼50쪽.

이런 사정을 배경으로 7월 16일 밤 무츠는 서울 주재 일본공사에게 “단호히 조치해 나갈 필요가 있다. 어떤 구실을 사용해서라도 행동하라”고 지령했다. 7월 19일 대본영과 외무성은 선전포고 없이 군사행동을 할 수 있는 권한을 현지 파견군에게 허용했다. 전쟁은 시작되었다.074)≪蹇蹇錄≫, 55·139∼144쪽.

<朴英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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