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Ⅰ. 청일전쟁
  • 3. 전쟁의 경과
  • 2) 중국에서의 전투

2) 중국에서의 전투

황해 해전까지의 전쟁 제1단계에서 예상외로 기선을 제압하게 된 일본군은 1894년 10월 24일 선발대를 투입, 압록강을 건너 중국 영토를 침범하기 시작했다. 25일에 찌오리엔청(九連城)과 안똥(安東)를 점령했다. 랴오뚱반도 평원에서의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11월 7일에 일본군은 찐죠우(金州)를 함락시켰고, 8일에는 따리엔(大連)까지 점령하기에 이른다. 일본이 만주족 청조의 근거지인 랴오뚱지역으로까지 침입하자 청으로서는 일본과의 화의가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10월 30일 위쑤는 미국에 조정을 요청했고, 11월 3일에는 각국 공사에게도 마찬가지 요청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독일과 미국, 영국은 조정에 나서기를 거부했고 러시아는 주저하고 있었다. 어떠한 열강도 연합 행동은 거부했고, 다만 전쟁이 계속될 경우 일본이 육상 및 해상에서 군사행동을 피할 수 없게 되는데 그럴 경우 이 지역에 이권을 가진 여타 국가들이 일본에게 불리한 해결 방법을 제시할 지 모른다는 권고를 해주는 정도였다.096)P. Joseph, Foreign Diplomacy in China(London:Macmillan, 1928), p.74.

청국은 이처럼 열강의 조정 가능성이 없어 보이자 일본에게 직접 화의를 요구하는 도리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1894년 11월 18일 청 조정은 티안찐 세관 세무사인 독일인 데트링(Gustav Detring)에게 리훙장의 화의서를 이토오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11월 26일 텍스트링이 일본에 도착하자 일본정부는 데트링이 청국인이 아니며 리훙장의 서신도 국서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접수를 거절하는 동시에, 청의 고위 관리가 황제의 欽差 사절로 파견되지 않는다면 결코 협상을 할 수 없다고 응수했다.

한편 이미 11월 22일에 일본군은 뤼쑨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찐죠우(錦州) 함락 직후 뤼따(旅順·大連) 전선을 총지휘하던 꽁샤오위(龔照嶼)가 티안찐으로 도망간 상태에서 후방 지원을 받지 못한 청국군은 17일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포위 공격을 감당하지 못한 채 뤼쑨을 내주고 말았다. 일본측 사상자는 겨우 3백 명에 불과했다.

뤼쑨은 1880년대부터 중국 해군의 요람이었다. 거액의 비용과 10수년 동안을 전력을 다해 구축한,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도크를 갖고 있던 군사 요새였다. 뤼쑨을 점령한 일본군은 비전투원을 포함하는 중국인들에게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28일자<뉴욕 월드>지에 의하면 점령 직후 부녀자와 유아를 포함한 비전투원까지 모두 6만 여명이 살해되었다고 하는데, 이 학살에 대해<월드>지의 크릴만기자는 “일본은 지금 문명의 가면을 벗고 야만의 본모습을 드러낸” 괴물이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정부의 언론 공작이 있어서 그 실상은 상당히 축소되어 보도되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잔학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사건이었다.097)이 학살에 관하여 다큐멘터리로 접근한 상세한 기술은 井上靖樹,≪旅順虐殺事件≫(東京:小學館, 1995)을, 중국인에 의한 최근 연구로는 秦郁彦,<旅順虐殺事件:南京虐殺と對比しつつ>(東アジア近代史學會 編,≪日淸戰爭と東アジア世界の變容≫下, 東京:ゆまに書房), 285∼298쪽 참조.

11월 23일 청 조정은 랴오뚱반도 궤멸의 책임을 물어 리훙장을 문책했다. 직무는 유지한 채로 직위만 파면하는 형식적인 조처를 내렸던 것이다. 군사와 외교에서 그의 역량을 대신할 인물은 당시 중국에는 없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요충지 뤼쑨을 장악한 뒤 청국 해군을 소멸시킬 작정으로 북양 해군 제2의 기지였던 샨뚱반도의 웨이하이웨이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이때 청군은 뤼쑨 함락 이후 방어선의 중점을 랴오뚱·션양(遼東·瀋陽)지역에 두고 있었다. 수도 북경을 방어하기 위해 병력을 티안찐 일대로 집결시키고 샨하이구안 부근에 10만 이상의 군인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샨뚱반도 방어선은 상대적으로 중요성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남아있는 수비 병력은 1만7천 정도에 불과했다.

특히 웨이하이웨이 인근의 룽청(榮成)을 방어하는 병력은 1,400명뿐이었다. 당시 웨이하이웨이 군항은 신식 대포 60문이 늘어선 포대를 갖추었고 육군 1만여 명이 방어를 하고 있었으며, 북양 해군의 함선이 20여 척 정박해 있었다. 11월 30일 리훙장은 웨이하이웨이의 북양 해군에 대해 황해 해전 때와 마찬가지로 ‘浪戰’을 하지 말고 포대를 방어하는 데 주력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오오야마 이와오(大山巖)를 사령관으로 한 일본 쌴뚱 작전군 약 2만 명은 일본 연합함대의 호송을 받으면서 일본을 출발하여 1895년 1월 23일 청샨쮜에(成山角) 부근의 룽쉬다오(龍須島)에 상륙한 뒤, 방어가 허술한 룽청을 곧바로 점령하였다.

일본군이 상륙할 때 샨뚱 방어 임무를 주관하던 리빙헝(李秉衡)은 상륙 뒤 피곤한 일분군을 제때 공격하지 않고 이틀이나 그들에게 휴식할 여유를 주었다. 1월 25일 일본군은 남북 두 갈래로 나뉘어 웨이하이웨이를 공략했다. 한편으로는 웨이하이웨이를 또 한편으로는 룽청의 남쪽에서 방포대를 단절시켜 청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는 한편, 북쪽에서부터 방포대로 진격해 들어가는 양면·양동작전을 구사한 것이다.

청군의 응수에도 불구하고 30일 웨이하이웨이의 남쪽 방포대가 함락 당함으로써, 일본군은 항내의 북양함대 군함에 대해 직접 공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2월 1일에는 북쪽 방포대까지 폭파됨으로써 청군은 육상 거점을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2월 3일 룽청만으로부터 출항한 일본 연합함대와 남쪽 포대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 육군은 청국 북양함대 및 류꽁다오(劉公島)에 대해 수륙 합동작전을 개시했다. 양국함선 다수가 격침되는 치열한 전투 끝에, 8일 일본 해군은 류꽁다오를 장악했고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지휘관 류부찬(劉步蟾), 띵루창은 잇달아 자살을 택했다.

2월 12일 쩐위엔(鎭遠) 등 북양함대의 살아 남은 군함은 외국 고용인 등에 의한 하극상의 협박 아래 일본군에게 투항했고 2월 17일 일본군은 정식으로 웨이하이웨이를 점령했다. 이 작전에서 일본 해군은 사상 최초로 水雷를 주로 이용한 야간 기습 공격을 벌였다. 북양함대는 전멸한 것이다.098)≪中國戰爭通鑑≫上(北京:國際文化出版, 1995), 762∼764쪽 및 앞에 든≪一億人の昭和史:日本の戰史-1:日淸·日露戰爭≫, 44∼45쪽.

웨이하이웨이 공략이 시작되기 전인 12월 13일 일본군이 하이청(海城)을 함락시키고 16일에는 푸조우(復州)를 점령하는 등, 상황이 급진전되자 청 조정은 12월 22일 湖南巡撫 샤오위린(邵友濂)을 戶部侍郞 짱인후안(張蔭桓)과 함께 전권대신으로 일본에 파견하고, 또 미국의 전 국무장관 포스터(J. W. Foster)를 초빙하여 대표단의 고문으로 삼았다. 그러나 포스터는 청국 주재 공사관을 역임했다고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본다면 무츠와 주미공사 쿠리노 신이치로오(栗野愼一郞)와 상당한 친분을 가진 일본에 가까운 인물이었다.099)<科士達回憶錄>(≪中日戰爭文獻彙編≫제7책), 463∼465쪽.

1895년 1월 31일 웨이하이웨이 공방전이 한창인 때 짱인후안과 샤오위린은 일본측이 지정한 장소인 히로시마(廣島)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토오는 전권 대신 위임받았다는 신임장의 형식과 전권대신의 형식상 자격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화의를 거절했다. 이토오는 중국 대표단 참사관 우팅팡(伍廷芳)에게 꿍(恭)親王이나 리훙장이 직접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2월 7일 청 조정은 일본정부에 조회하여 일본측 의견대로 전권위임장을 수정하겠다고 밝혔으나 일본은 짱인후안과 샤오위린을 귀국시키고 사실상 담판을 거절했다.

일본이 이들과의 담판을 파기한 데에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이때가 되면 일본은 최초의 전쟁 목표를 훨씬 넘어서는 전과를 올렸고 특히 랴오뚱반도와 샨뚱반도의 점령을 눈앞에 두고있을 시점이었다. 또 육군과 해군은 서로 전리품에 대한 희망이 달랐다. 육군은 랴오뚱이나 샨뚱 등 중국의 육지에서 영토(거점)의 확보를 원한 반면, 해군은 타이완 등 해양 세력의 팽창에 긴요한 지점의 점령을 원하고 있었다.

무츠 등 일본의 정책 결정자들은 이 희망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강화안을 입안하고 중국이 제국주의 침략을 당한 이래 일찍이 할양해 본 일이 없는 영토, 그것도 엄청난 규모의 땅 덩어리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써 일본과 담판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고 서명할 수 있는 고위급 실세가 강화회담의 상대방으로 나올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물론 짱인후안과 샤오위린은 그러한 지위나 힘을 갖지 못한 고위 실무자급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이 원한 상대는 물론 리훙장이었다. 따라서 무츠와 이토오는 짱인후안과 샤오위린의 전권위임장을 다시 고쳐 서식과 내용을 완벽히 하겠다는 청의 요청을 당연히 묵살했던 것이다.100)朴英宰, 앞의 글, 169∼174쪽 참조.

짱인후안과 샤오위린 양 사절이 빈손으로 청국으로 돌아오던 2월 12일은 류꽁다오의 북양함대 잔여 함선이 일본 해군에게 모두 투항했고, 이를 계기로 북양함대는 완전히 궤멸된 날이었다. 2월 17일 일본군은 정식으로 웨이하이웨이를 점령했다.

웨이하이웨이 함락 이후 청일전쟁은 최종 단계로 접어들었다. 전선은 랴오뚱 평원 깊숙이 집중되었다. 1894년 말부터 이듬해 초에 걸쳐 하이청(海城)과 까이핑(蓋平) 등 전략적 요충지가 잇따라 함락됨으로써 청국에게 샨하이구안 동쪽의 형세는 더욱더 엄중해졌다.

1895년 1월 꾸앙쉬제(光緖帝)는 兩廣總督 류쿤이(劉坤一)를 입경하게 하여 欽差大臣 겸 湖南巡撫 우따청(吳大澂)과 總統 쑹칭(宋慶)을 도와 샨하이구안 부근의 각 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1월 17일 랴오양(遼陽)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허이룽쟝(黑龍江)장군 이커탕아(依克唐阿)와 찌린(吉林)장군 창쑨(長順)이 연합하여 하이청 반격을 가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월 22일 이커탕아와 창쑨의 양군은 제2차 하이청 반격에서도 패배하였고, 이에 2월 11일 우따청이 청국군의 절대 방어선인 티엔쭈앙타이(田庄台)에 도착하여 청군 병력을 증가하였다. 2월 16일과 21일 쑹칭과 이커장아, 창쑨은 3만 여의 대군을 동원하여 제3·4차 하이청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역부족으로 실패로 끝났다.101)이 지역의 전투의 문제점과 지역 인민들의 항쟁에 관해서는 山東省歷史學會 編,≪甲午戰爭九十周年紀念論文集≫(濟南:濟魯書社, 1986)의 249∼62쪽의 潘國華·劉玉岐,<簡述甲午戰爭時遼東戰場:淸軍后勤的幾个問題>와 263∼76쪽의 孫克復,<甲午戰爭期間遼寧人民自發抗日鬪爭述略>두 논문을 참조할 것.

2월말 새로운 공격을 위한 청군의 조직이 준비되기 전에 일본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하이청을 출격해 안샨(鞍山)을 점령하였다. 3월 4일 일본 제1군 2개 사단 1만 2천 명은 청군의 뇨쭈앙(牛莊) 수비대 약 5천 명을 협공하였다. 청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일본군 사상자 4백 명을 내는 격전이 벌어졌으나, 청군은 2천명에 달하는 사상자와 포로 6백 명을 낳으면서 결국 뇨쭈앙 함락을 맛보아야 했다.

3월 7일 일본군은 잉쿠오(營口)마저 점령하게 된다. 치열했던 이 결전은 청일전쟁 최초의 시가전이기도 하였다. 양군 각 2만 명의 대군이 맞섰다. 9일 일본군은 드디어 티엔쭈앙타이(田庄台)를 공격하였고 쑹칭이 이끄는 청군은 대패하였다. 치엔쭈앙타이가 함락됨으로써 랴오뚱반도의 주요한 城鎭은 모두 일본군에 점령당했고 청군의 랴오뚱 전선은 모두 와해되었다.102)關捷·劉志超,≪沈淪與抗爭:甲午中日戰爭≫(北京:文物出版社, 1991), 도판과 설명 280∼292번.

육지에서의 전투는 이로써 거의 모든 전선에서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은 랴오뚱반도의 남해안 서북해안 그리고 내륙쪽의 평원을 모두 제압했다. 물론 티안찐에서 뻬이징에 이르는 지역의 급소뿐 아니라 황해바다를 제압하는 웨이하이웨이지역도 수중에 넣게 된 것이다. 수도 뻬이징으로의 진격은 시간문제로 되었다. 이제 청국에게 남은 길은 강화밖에 없었다. 청국은 일본의 뜻대로 리훙장을 강화회담을 위한 전권대표로 임명하고 시모노세키로 향하게 했다.

3월 17일 시모노세키에서는 휴전협정이 일단 체결되었으나 펑후도(澎湖島)와 타이완은 제외되어 있었다. 강화회담 직전 사세호(佐世保)를 출발한 일본의 혼성여단은 펑후 섬들을 공략하였다. 작전다운 작전이랄 것도 없이 南지나해의 제해권도 일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 전투로 인한 일본군의 전사자는 열 사람도 채 안되었지만 풍토병이라거나 돌림병으로 총동원 인원 6,100여 명 중 1,200여 명이 죽었다.

이 같은 일은 타이완 점령 전투에서도 되풀이된다. 작전에 동원된 일본군 2만 6천 명 중 전사는 160여 명 밖에 안 되었던 데 반해 병사한 인원이 4천 6백 명에 이르렀던 것이다.103)앞서 인용한≪一億人の昭和史:日本の戰史-1:日淸·日露戰爭≫(每日新聞社:1979), 23∼51쪽. 더욱이 타이난(臺南)까지 타이완의 주요 지점을 점령하기 위해 상륙·전진하는 일본군을 본토의 전투에서는 볼 수 없었던 드센 저항이 가로막았다. 타이완의 원주민들은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끈질긴 게릴라전으로 이후 수년 동안 일본을 괴롭혔던 것이다.104)타이완 인민들이 세운 공화국「臺灣民主國」과 항일투쟁에 관해서는 吳密察,<日淸戰爭と臺灣>(東アジア近代史學會 編,≪日淸戰爭と東アジア世界の變容≫上, 東京:ゆまに書房), 339∼369쪽을 참조할 것.

<朴英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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