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Ⅰ. 청일전쟁
  • 4. 중재와 강화
  • 1) 열강의 중재

1) 열강의 중재

청일전쟁은 열강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만큼 전쟁 발발 전부터 중재를 위한 시도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1894년 6월 9일 인천에 상륙한 일본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조선정부가 병력을 대동하지 말라는 요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튿날 해군 육전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서울로 진입했다. 청국군도 제1차 파견대 2천여 명을 8일부터 아산에 상륙시켜 충청도 일대에 포진시키고 있었다. 오오토리가 귀임했을 당시 서울은 평온하고 아산지역의 청군 또한 움직일 기색이 아니었다.

이것은 무츠·하야시·카와카미 등이 협의했던 조선 작전이 예상했던 것과는 크게 어긋나는 양상이었다. 때마침 전주화약도 맺어져서 병력 파견의 명분도 사라져 버린 판국이었다. 조선정부는 군대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했고, 조선 주재 서양 외교관들도 조선정부의 요청없이 병력을 파견한 일본의 행동을 문제삼기 시작했다. 구미 열강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자세를 보인 것은 러시아와 영국이다.

주일 러시아공사 히트로보(Mikhail Aleksandrovich Hitrovo/Khitrovo)는 이미 6월 8일에 무츠외상에게 일본군 파견 이유를 질문했던 바 있다. 무츠의 답변은 청국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히트로보는 일본함대가 조선 연해에 계속 집중되고 있고, 영국함대도 거문도에 정박하여 벌써 3개월 분의 군수물자를 비축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동쪽 국경에 분규를 초래할 가능성이 생겼음”을 본국에 타전하여 사태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있었다.105)‘Telegram of the Minister at Tokyo to the Minister of Foreign Affairs’(June 8, 1894), “Russian Documents Relating to Sino-Japanese War, 1894∼1895”, in B.G. Weber & S.R. Dimant eds., Krasny Archiv, in The Chinese Social and Political Science Review(Oct. 1933/#3/vol.17), p.485(이하 Krasny Archiv로 줄여 씀).
이 Krasny Archiv는 최근 일문으로 잘 정리되어 이용하기에 편리한 자료집으로 출판되어 있다. 佐佐木揚 編譯,≪一九世紀末におけるロシアと中國:クラ-スヌイ·アルヒ-フ所收史料より≫アジア史資料叢刊 第1輯(東京外國語大學 アジア·アフリカ言語文化硏究所, 東京:巖南堂, 1993).

13일에는 조선에 주재하는 러시아의 대리 공사, 독일의 부영사가 오오토리공사와 회견한 자리에서 일본군의 대거 투입을 문제삼았다. 이에 대해 오오토리는 공사관 호위 외에는 다른 뜻이 없다고 답변하였지만 변명이 궁색하기는 매 한가지였다.106)田保橋潔,≪日淸戰役外交史の硏究≫(東京:東洋文庫, 1951·1965), 128쪽.

이러한 상황에서 6월 12일부터 청일 양국은 위안스카이와 오오토리 사이에 공동 철병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여 15일에 다음과 같은 합의에 도달했다. 즉 6월 15일을 시점으로 일본은 이미 상륙한 육군 병력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250명을 인천에 주둔시키고 청국은 상륙 병력의 5분의 1인 400명만 아산에 남기며 나머지 병력은 양국 모두 본국으로 즉각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잔류 부대 역시 ‘민란’이 진압되기를 기다려서<천진조약>의 뜻에 따라 조속히 철수시킨다는 내용이었다.107)朴宗根 著, 朴英宰 譯,≪淸日戰爭과 朝鮮:外侵과 抵抗≫(一潮閣, 1989), 30쪽. 이제 병력의 공동 철수는 양국정부의 승인만을 남겨두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일본공사 오오토리의 공동 철군 교섭은 일본정부의 정책이 아니었고 특히 외상 무츠의 사전 양해도 얻지 않은 것이었다. 오오토리는 조선 정세를 보건대 공동 철군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여 위안스카이의 공동 철병 제안을 받아들여 교섭에 임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츠는 6월 13일 오오토리의 증원군 귀환 요청을 비판하면서 대규모 일본군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귀국시키게 되면 매우 볼상사나울 뿐 아니라 득책도 아니니… 지체없이 병력을 서울로 입성”시키라는 훈령을 내렸다. 서울의 오오토리는 현시점에서 신속한 철병만이 가장 타당한 수습책임을 건의하였으나 관철되지 못했던 것이다.108)日本外務省 編,≪日本外交文書≫27-2(東京:日本國際連合協會, 1936), 192∼200쪽.

무츠는 대신 당면과제인 철병을 접어놓고 군사력을 계속 주둔시키면서 청국을 도발해 전쟁으로 끌어들일 것,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구미 열강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서 조선에 대한 ‘내정개혁’을 내세울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가 처음 제안한 것을 이토오가 상정함에 따라 6월 15일 내각회의에서 결정된 조선의 내정개혁 방침은 청일 양군이 조선의 농민군을 진압한 뒤에 양국 위원을 중심으로 조선의 근대적 제도개혁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무츠는 일찍이 이 조선 내정개혁안을 제시함으로써 일본의 외교가 “일시에 피동자에서 주동자로 변화”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109)陸奧宗光,≪蹇蹇錄≫(岩波書店, 1940), 36쪽.

6월 21일 청국은 예상대로 일본의 공동 내정개혁 제의를 거부했다. 이에 일본은 조선 내정개혁을 단독으로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했다. 이처럼 일본이 단독 내정개혁 방침에 입각해서 적극 외교를 펼치자 구미 열강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경우 서울 주재 공사 존 실(John M.B. Sill)은 영국·러시아·프랑스 외교 대표와 함께 청일 양국의 동시 철병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미국 국무성은 공식적으로 불개입 방침을 견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선 고종이 주미공사 李承壽에게 미국의 중재를 호소해 보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승수공사가 그레샴(Walter Q. Gresham)국무장관에게 그 내용을 전달하면서 개입 의사를 타진했으나, 그레샴의 대답은 현상유지 정책이었다. 그레샴은 주미 일본공사 쿠리노 신이치로오(栗野愼一郞)에게 공정한 처분을 희망한다는 각서를 전달하는 한편, 실공사에게는 “조선에서의 평화 상태 유지에 만전을 기해주기 바란다”는 전문을 보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따로 외교 훈령을 통해 “조선의 정치문제에 절대로 개입하지 말라”고 명시했던 것이다.110)金源模,<淸日戰爭前後期 美國의 對極東政策이 日本의 韓國侵略에 끼친 影響>(韓國史硏究會 編,≪淸日戰爭과 韓日關係≫, 一潮閣, 1985), 163∼164쪽.

반면 러시아의 반응은 적극적이었다. 6월 25일 주일 러시아공사 히트로보는 일본 외무성을 방문하여 청국군이 철수한다면 일본군 역시 철수할 것인지를 타진했다. 주청 러시아공사 카시니도 청일 분쟁의 조정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위신을 제고할 기회이므로 대일 간섭을 강화해야 한다고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 카시니공사의 상신을 받은 러시아 외상 드 기르스(Michail Nikolaevich de Giers)는 훈령을 내려 히트로보공사로 하여금 30일 일본정부에 대해 “청국과의 동시 철병을 고의로 방해할 경우 일본은 중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경고를 전달하게 했다.111)≪蹇蹇錄≫, 62∼63쪽.

그러나 7월 2일 일본정부는 러시아의 권고를 거절했다. 이것은 러시아정부도 익히 예상하고 있던 반응이었다. 강경책을 뒷받침할 힘의 준비가 문제였던 것이다. 이미 7월 1일에 러시아 육군상 반노프스키(Boris Petrovich Vannovsky)는 외상의 질문에 대해, 군사력 시위를 위해서는 대병력이 필요한데 파병을 실천에 옮기려면 우선 시간적으로 어렵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112)‘Letter of Minister of War to Minister of Foreign Affairs’(July 1, 1894), Krasny Archiv, p.506.

또 히트로보공사가 드 기르스외상에게 낸 견해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 있었다. 즉 일본 국민은 현재 자부심에 도취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적인 교훈을 통해서만 각성시킬 수 있다는 점, 그러나 일본 사회 전체가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에 국가 위신에 상처를 입히지 않을 좋은 구실이 없는 한 비록 일본정부가 원한다 할지라도 스스로 군대를 빼낼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보고했던 것이다. 결국 러시아는 중재를 포기하고 7월 13일 일본정부에 대해 회답 자체를 만족한다는 의사를 표명할 수밖에 없었다.113)주일 공사 히트로보의 6월 13일 전보, Krasny Archiv, pp.497∼498.

러시아에 이어 중재자 역할을 맡게 된 것은 영국이었다. 7월 1일 주일 대리공사 페이젯(Ralph S. Paget)은 일본 외무성을 방문하여 청국과 협상할 것을 권고했다. 런던에서도 킴벌리(John W. Kimberley)외상이 별도로 주영 공사 아오키에게 청일 양국이 빠른 시일내에 타협을 보지 못할 경우, 러시아가 유럽 각국에 요청하여 연합 중재를 시도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청국이 문제삼는 것은 조선에 대한 명목적인 종주권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만 일본이 양보하면서 조선에서 실익을 얻는 편이 유리하리라는 충고였다.114)≪日本外交文書≫27-2, 문서번호 641,<附屬文書>.

킴벌리외상의 판단의 근거는 조선이 청국의 종주권으로부터 벗어나 독립한다면 러시아가 조선에 세력을 키울 기회가 증대하고 일본의 세력은 오히려 쇠퇴하리라는 것, 따라서 일본은 공동 철병에 응하는 편이 장기적으로 일본에 이로우리라는 전망이었다. 이는 조선이 청국의 보호국임을 묵인하고 그럼으로써 러시아의 남하에 대항하고자 했던 종래의 영국 외교정책의 기조를 충실히 반영한 일종의 현상유지론이었다.

킴벌리외상과 의견을 교환한 아오키공사는 나름대로 청국은 원산, 일본은 부산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조건을 내걸고 영국의 조정에 응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본국 정부에 상신했다. 이토오수상은 러시아가 간섭할 경우 영국에 의뢰할 방침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토오는 조선의 오오토리공사에 대해서 과격한 조치를 회피하라고 명령하고 참모본부를 통해 오오시마 혼성 여단장에게도 마찬가지의 내용을 지시했다.

그러나 외상 무츠의 견해는 달랐다. 일본정부가 영국의 중재에 응하는 데에 불만이었다. 그는 영국의 중재가 청국의 의뢰에 따른 결과물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따라서 그는 영국의 제안을 수락은 하되 조건을 달았다. 즉 앞으로 조선에서 모든 정치상·통상상의 관계에서 일본이 청국과 동일한 지위로 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115)이에 대해 청국은 ‘청국과 동등한’이 아니라 ‘타국과 동등한’ 권리로 수정 제안한 바 있다. 田保橋潔, 앞의 책, 242∼243쪽.

7월 7일 영국은 다시 프랑스·러시아·독일·미국정부에게 ‘공동간섭’을 지지하거나 참여할 것인지 타진했다. 그러나 이들 열강, 특히 미국의 반응이 부정적이었다. 7월 13일 외상 킴벌리는 수상에게 보낸 서한에서 열강의 연합 행동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다고 결론을 보고했다.116)Ian Nish,<淸日戰爭과 英國>(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편,≪淸日戰爭의 再照明≫, 한림대학교 출판부, 1996),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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