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Ⅰ. 청일전쟁
  • 4. 중재와 강화
  • 2) 강화 외교

2) 강화 외교

6월 7일 스기무라로부터 일본군 파병 통고를 받은 조선정부는 즉각 일본군 파병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그 철회를 요구하였으며, 주일공사 金思轍을 통해서도 일본정부에게 파명 방침의 철회를 요청하였다. 또한 6월 9일 참의 교섭통상사무 閔商鎬와 미국인 외무고문 르젠드르(Charles W. LeGendre, 李善得)를 인천으로 급파하여 오오토리공사가 대동하고 온 해군 육전대의 서울 진입을 막으려 했다. 이어서 6월 10일에도 협판 교섭 통상사무 李容稙을 양화진으로 파견하여 일본군의 서울 진입을 막고자 했다. 이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13일 조선정부는 다시 한번<전주화약>을 이유로 위안스카이에게 청군의 조속한 철수를 요청하고 14일에는 오오토리에게 일본 병력의 철수를 더욱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대로 청일전쟁의 도발과 강화 외교의 전 과정에서 일본 외상 무츠에게는 일관되게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두말 할 나위 없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정치적 지배 내지 우월권의 확보였다. 중국과의 전쟁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일본이 견지하고 있던 대 조선 정책의 원칙과 기본을 보여주는 문서가 무츠가 기초한<處韓方策四通>이다.117)伊藤博文,≪機密日淸戰爭≫(東京:原書房, 1967), 27∼33쪽.

개전 초기에 이토오에게 제출한 이 문서에서 무츠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네 단계로 그 가능성을 나누었다. 첫째는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고 조선의 운명을 그 자신에게 일임하는 방안, 둘째는 명의만 독립국으로 하고 일본이 그것을 保翼扶持하는 방안, 셋째는 중국과 아울러 공동으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해주는 방안, 그리고 넷째는 조선을 일본이 주도하여 중립국으로 만드는 방안이었다.

둘째 방안은 말할 나위 없이 조선이 일본의 속국으로 되는 길이다. 셋째는 청과의 경쟁이 여의치 못할 경우, 이 시점까지 청이 조선에 대하여 전통적으로 누려온 영향력을 대등하게 나누어 가지자는 방책이다. 넷째 방안은 얼핏보면 열강의 각축을 벗어난 중립국 조선으로 보일지도 모르나, 최악의 경우에는 타 열강의 간섭을 배제시킨 채 조선에서의 일본의 간접적 지배를 꾀한 방책에 다름 아니다. 가장 그럴듯하게 보이는 첫째 방안이야말로 1890년대의 시점으로서는 가장 지능적이고 또 차원 높은 현실적 방책이랄 수 있다.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되 일본의 손으로 한다는 타율성과, 조선의 운명을 조선에 일임한다는 자율성의 강조는 자못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선의 내정개혁이란 첫째, 개혁의 주체로서 또는 후원자로서 일본은 조선에 대한 간섭 뿐 아니라 청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전쟁을 도발할 구실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실제로 응용되기도 하였다. 국제 사회에서도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정당성 홍보에 커다란 무기로 되어 사회진화론이 주도하던 서양 열강 사회에서 일본에 대한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내정개혁을 주창함으로써 무츠가 궁극적으로 노린 것은 일본의 지원과 사주를 받는 내정개혁파로 하여금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케 함으로써 결국은 조선에 대한 간접 통치를 실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젊은 개혁파 지도자인 박영효가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에 기울자, 그의 개혁 의지는 뒷전으로 돌리고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사실만을 욕설과 함께 개탄하고 있는 일본 지도층의 자세에 이러한 속셈은 명백히 드러나 있다.118)宇野俊一,≪日淸·日露:日本の歷史≫(小學館, 1976), 107쪽.

더욱이 일본은 조선이라는 한 나라의 개혁을 주체적으로 추진하고 지원할 만한 구체적인 그림은 물론이려니와 자금도 입안되거나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 실상이었다. 오오토리의 후임으로 조선 내정개혁과 전쟁 도발을 책임지고 부임했던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가 그 자금을 조달하러 토오쿄오의 재력가들을 찾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난 일은 이를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로서 생생히 증언해 준다.119)W. G. Beasley, Japanese Imperialism, 1894∼1945(Oxford Univ. Press, 1992), pp.51∼52. 이노우에는 주지하다시피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메이지 일본의 거물 정치인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쟁 외교를 책임지고 시모노세키 강화회담까지 이토오 히로부미와 시종 일관 보조를 맞추어 청국과 열강과의 교섭을 지휘하던 무츠는 조선에서의 일본의 목표가 이러한 개혁과는 결국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자신의 외교 회고록에서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그의≪蹇蹇錄≫에는 청일 개전 직전 일본의 국내 여론에 대한 평가가 등장한다. 비록 재야의 ‘조기 개전론’ 또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기사도적인 의협론’에 대한 반어법으로서 이기는 하나 무츠는 냉정하고 현실주의적인 논리로 일본이 왜 조선의 ‘동학란’ 사태에 개입하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120)≪蹇蹇錄≫전반부의 개전에 이르는 과정에서 주로 이런 논리를 주장했다.

조선에서의 전국 규모의 내란 발생과, 근대화와는 거리가 먼 청국의 조선에 대한 전통적 영향력, 그리고 내란에서 증명된 조선의 근대화와 내정개혁의 필요성, 그리고 일본의 근대화 플랜과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필연적인 조선에서의 청 세력의 축출과 전쟁 불사의 의지를 명확히 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츠의 이≪건건록≫은 논리와 현실 감각을 겸비한 메이지시기의 대외 팽창론 중에서 으뜸가는 문서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무츠의 조선에서의 일본 이익과 지배권의 확립이라는 이 목표는 전쟁 수행 중에 현격히 확대된다. 전쟁의 종료를 위한 강화의 조건이 조선에서의 청 세력 배제라는 정치적 조건을 훌쩍 뛰어 넘어 중국의 영토를 빼앗는 일이 그 알맹이를 이루게 된다. 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이라거나 전쟁 비용의 배상을 넘어 영토의 할양이 논의되었을 때 무츠의 의중에는 그나마 타이완과 펑후(澎湖)열도 및 그 부속도서 이외에 중국 대륙에서의 영토 할양 조건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랴오뚱(遼東)반도의 할양도 제안은 되고 있었으나 이는 엄격한 의미에서 전쟁 배상의 일부로서가 아니었다. 배상을 규정한 조항과는 별도의 조항, 즉 그 유명한 제1조 “청국은 조선의 완전무결한 자주지방임을 확인”하기 위한다는 명목 하에 영토를 담보하겠다는 하나의 조건으로 두어졌던 것이었다. 조선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타이완과는 달리 조·중 국경선상에 위치한 랴오뚱의 할양은 어디까지나 전쟁 목표였던 “조선 독립을 위한” 하나의 ‘담보’로서 요구될 터였다. 시기적으로는 1894년 11월과 12월 사이였고 전쟁과 외교의 핵심 인물 무츠와 이토오 사이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즉 무츠의 글을 빌리자면 “랴오뚱반도의 점령은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고 청국의 간섭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며 타이완의 할양은 “[전쟁 비용 이외에] 별도의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는” 대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다.121)≪蹇蹇錄≫의 1895년 초판본,≪陸奧宗光關係文書≫, 日本國會圖書館 憲政資料室 소장 마이크로 필름, #65∼1. 전쟁의 전반기까지 이 전쟁의 결과에 대한 일본 지도층의 희망과 논리를 제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전쟁이 후반으로 접어들고 일본군이 연전연승하고 랴오뚱과 샨뚱지역으로의 확전과 정비례하면서 환골탈태하게 된다.

배상금은 배상금대로 챙기고 랴오뚱은 타이완과 더불어 조선 독립을 보장하는 담보로써의 논리가 사라지고 ‘무조건 할양’의 대상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할양 받고자 하는 랴오뚱반도의 영역도 크게 확대되었다.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명분에서라면 랴오뚱반도 중에서도 중·한 국경선의 일부만 점령하더라도 목적이 달성될 터였다. 원래 무츠의 초안도 이 아이디어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1895년 1월의 내각회의에 정식으로 상정된, 그리고 청국에 제시될 강화 조약의 초안은 랴오뚱반도 거의 전체를 할양 대상으로 그려놓고 있었다.122)자세한 과정에 대하여는 朴英宰,<淸日戰爭과 日本 外交:遼東半島 割讓問題를 中心으로>(≪歷史學報≫53·54합집, 1972), 151∼176쪽 참조.

따라서 전쟁 후반기 1895년부터의 일본 외교는 이 확대된 대청 강화조건을 실현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개전 외교 때에 오오토리-이노우에 등 조선 주재 일본 대표들이 대조선·대청 교섭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억지 추진으로 말미암아 난관에 부딪친 것과 마찬가지 맥락에서, 전쟁 중에 이루어진 이러한 목표 팽창에 뒤따르는 외교에서도 과부하가 걸렸다. 무츠는 이러한 사태를 걱정하면서 예상은 하고 있었다.

중국 본토에 대한 영토의 분할은 일본의 최종 요구가 되어 버렸고 이는 서양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 반세기 동안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열강의 간섭은 당시의 제국주의 국제정치와 국제정세에 초보적인 지식만 갖춘 자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이를 미리 막아볼 양으로 일본 외교가 나름대로 취한 대책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랴오뚱반도와 타이완의 할양이라는 강화조건을 강화 회담이 시작될 때까지는 절대 비밀로 지키는 일이었다. 1894년 12월에 무츠와 이토오 사이에 결정되고 이듬해 1월 각의에서 확정된 이 조건은 영토 할양을 본국과의 논의 없이 전권을 가지고 서명할 수 있을만한 청국의 사절과 회담이 열릴 때까지 외부에 특히 열강에 알려져서는 안 될 터였다.

무츠와 외무성이 얼마나 긴장하여 이 조건의 누설 여부에 쏠려 있었는지는 1895년 1월 이후 회담이 열릴 3월까지 기간 동안의≪日本外交文書≫와≪건건록≫의 상당한 분량이 이 문제에 매달려 있는 데에도 잘 드러나 있다. 무츠는 한편으로는 열국 간섭의 꼬투리를 막기 위해 미리 강화조건을 공개할 생각도 있었지만 이토오와의 협의 결과 일체를 비밀에 부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에 대한 러시아의 대응책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결과 무츠 스스로 이 원칙을 버리고 강화조건을 누설하였다.

러시아는 전쟁 초기만 하여도 리훙장의 중재 요청을 거절하였고 또 영국의 공동 중재 제의도 물리치는 등, 일본으로 하여금 이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인상을 주어왔다. 그러나 러시아는 청일 양국이 강화회담을 시작할 때쯤이 되면, 일본의 한반도 점령은 차라리 용인할 수 있을지언정 랴오뚱반도의 점령은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정책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 최신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일본은 주일 러시아공사에게 중국에서의 영토 분할이라는 강화 조건의 일부를 누설하였던 것이다.123)≪日本外交文書≫ 28-1, 문서번호 561은 무츠가 주일 러시아 공사에게, 문서번호 563에서는 러시아 주재 니시공사가 러시아 외상대리 쉬쉬킨에게 각각 발설한 것으로 기록.

한편 청은 1894년 6월 22일 조선에서 철병하지 않겠다는 일본정부의 조회를 접수하고서야 비로소 일본의 전쟁 도발 결심을 인식하게 되었다. 6월 25일경에는 청 조정은 현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이미 “입씨름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내리고 리훙장에게 적절한 대응 조치를 취할 것”을 준비하도록 지시하였다.124)≪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13, 1032件, 25쪽. 7월에 들어서는 1일과 14일, 그리고 16일에 계속하여 리훙장에게 신속히 전쟁 준비를 할 것을 지시하게 된다.

이와 같은 청 조정의 임전 태세로의 방향 전환은 청 조정 내의 주전파의 영향이 컸다. 꾸앙쉬제(光緖帝)와 그의 스승인 戶部尙書 웡통허(翁同龢), 翰林院 侍讀學士 원팅시(文廷式), 禮部 右侍郞 지뤠이(志銳) 등이었다. ‘띠땅(帝黨)’이라 불리고 있던 이들은 시타이허우(西太后)의 ‘허우땅(后黨)’과 암암리에 대립하고 있었다. 조선문제에 대해 띠땅은 주전을, 허우땅은 주화를 고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외정책의 결정과정에 있어 지금까지 실권은 허우땅이 장악하고 있었다.125)戚其章,≪甲午戰爭國際關係史≫(北京:人民出版社, 1994), 146∼161쪽.

이 허우땅의 대표적인 인물이 리훙장이었던 것이다. 비록 전쟁 준비를 지시받고는 있었지만 시타이허우의 의중을 꿰뚫고 있었던 리훙장은 여전히 군사적으로 관망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경거망동을 말고 조용히 관망토록” 지시하고 전쟁의 “꼬투리를 우리측이 만들지 않도록”126)≪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14, 제1169건, 38쪽. 강조하였다. 그는 “우리가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상대편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만국의 공통된 예다. 전쟁을 먼저 일으키는 자가 있으면 어느 누구든 파면할 것”127)≪李文忠公全書≫, 電稿 16권, 25쪽.이라고 경고하였다.

리훙장의 이러한 대책은 전쟁이 발생하면 영국과 러시아가 간섭해 줄 것이라는 그의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리훙장은 6월 상순 티안찐에서 영국공사 오코너에게 영국정부가 나서서 일본의 공격을 저지해주도록 본국정부에 요청하도록 부탁하였다. 영국 수상 킴벌리(John W. Kimberley)는 영국주재 일본공사 아오키 슈우조오(靑木周藏)를 불러 “청일 양국의 충돌은 비극적이며 그것이 전쟁으로 발전할 경우에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러시아의 개입만을 초래할 뿐이다. 따라서 개전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다”128)June 23, 1894, “Kimberley to Paget”, Park Il-Keun ed., Anglo-American and Chinese Diplomatic Materials Relating to Korea, 1887∼1897(Pusan, Korea:Institute of Chinese Studies, Pusan National Univ., 1984), No.15, p.11.라며 현실적 원칙론을 폈다.

토오쿄오 주재 영국공사 페이젯에게도 일본의 중국과의 전쟁은 위험한 일이며 전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임을 경고하고 특히 개항장에서 분란이 일어날 경우에는 무역 활동에 심각한 타격을 주리라는 점을 훈령을 통해 일본정부에 전달하였다.129)June 12, 1894, “Kimberley to Paget”, Park Il-Keun ed., Ibid., No.22, p.13.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일단 중국에서의 영국의 위상에 손실을 두려워한 소극적인 자세를 전달하는 수준의 것이었다. 킴벌리의 결론은 영국의 무력 개입은 없으리라는 것이었고 이는 바로 중국에 전달되었다.130)≪中日戰爭資料彙編≫7, 1894년 6월 30일,<露西亞亞洲司長備忘錄>, 235∼236쪽.

이에 리훙장은 러시아로 눈을 돌렸다. 러시아 공사 카시니에게 동일한 요청을 하고, 러시아의 간섭을 촉구하기 위해 “영국은 이미 조정자를 원하고 있으나 중국은 이 일에 러시아가 우선권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을 돌려 대었다. 카시니는 “러시아도 조선과 인접하고 있어 일본의 경거망동에 간여하지 않을 수 없다”131)≪紅檔雜志有關中國交涉史料選譯≫(北京:三聯書店, 1957. 이 문서는 Krasny Archiv를 한역하여 중국에서 후에 발간한 것이다), 15쪽.며 일단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 시점에서 러시아가 중재에 대해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첫째 1885년 비록 청·일의 반대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조선과의 밀약이 체결된 이후 장차 완공될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조선과의 무역량이 증대할 것이며, 둘째 우수리 지방의 개발과 발전이 원활히 진행되어야 하고, 셋째로 태평양함대의 진출을 위해 조선의 효용도가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32)“The Importance of Corea to Russia”, Novosti(Jul. 28, 1894), Park Il-Keun ed., op. cit. No.89, p.129. 리훙장도 “일본은 영국을 러시아만큼 두려워하지 않는다”133)≪李文忠公全書≫, 電稿 15권, 47쪽.고 판단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중재를 맡으면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증강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134)≪紅檔雜志有關中國交涉史料選譯≫(北京:三聯書店, 1957), 14쪽. 러시아의 일본 주재 공사 히트로보는 “여러 가지 근거로써 관찰한 결과에 따르자면 몇몇 열강들은 오히려 우리가 극동의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135)위의 문서, 18쪽.고 했다. 일본도 절대로 조선을 점령할 뜻이 없다는 뜻을 알렸다. 그러나 러시아정부는 장래의 행동 자유를 고려하여 간섭을 유보하기로 결정하고 1894년 7월 9일 카시니는 리훙장에게 러시아는 우의로서 일본의 철병을 권고할 수는 있어도 그들을 압박할 수는 없다고 통보했다.136)≪中日戰爭文獻彙編≫7, 1894년 7월 1일, 문서번호 32<露西亞陸軍大臣(Vannovskii)致外交大臣函>, 241쪽(이 문서 또한 Krasny Archiv의 번역이다).

이미 일본이 전쟁을 결심한 것을 알아차린 영국은 중재를 포기했다. 대신 영국의 세력권인 샹하이(上海)와 그 인근 지역에서는 전투를 벌이지 않을 것을 일본으로부터 확약을 받아내었다. 7월 16일 영국과 일본은<일영통상항해조약 및 부속의정서>를 조인함으로써 영국의 중재 역할은 이로써 일단 끝나게 된다.137)다 아는 대로 1899년에 시행되는 이 조약은 영국의 치외법권을 철폐하고 일본의 관세율을 인상할 것을 골자로 하는, 근대 일본이 열강과 맺는 최초의 평등조약이었다(≪蹇蹇錄≫, 100∼101쪽).
일영통상 항해조약 및 부속의정서에 관해서는 日本外務省編,≪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上(東京:原書房, 1965), 143∼152쪽.

영국과 러시아의 중재의 포기와 일본의 침략활동에 대한 불간섭 정책의 채택은 실질적으로 전 열강의 동의를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츠에 따르자면 미국은 “옛부터 우리 나라에 대해 우의가 가장 깊고 좋은 뜻을 가진 국가”로 여기고 있었다. 뿐 만 아니라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최근 행동에 대해 일관적인 지지를 표명해오고 있었다. 이를테면 1894년 7월 9일 조선과 청정부의 중재 요청을 받자 미국은 일본에 대해 무미건조한 권고로써 적당히 사태를 넘겼다.138)미국의 간섭에 대한 중국측의 해석은 戴逸·楊東梁·華立,≪甲午戰爭與東亞政治≫(北京:中國社會科學院出版社, 1994), 133∼140쪽 참조할 것.

독일과 프랑스의 일본에 대한 권고도 청국의 의사를 대변한 것은 아니었다. 두 나라의 주일 공사는 무츠에게 “예전부터 청국이 지니고 있는 무지몽매함을 각성시키려면 어떤 대상이 일대 타격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한 일본의 해석은 그 역할을 일본이 하지 않으면 안되리라는 암시를 은연중 표현해 온 것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139)≪蹇蹇錄≫, 105쪽.

1894년 7월 20일 국제 간섭의 가능성이 모두 사라지자 오오토리는 조선정부에 두 개의 조회를 보낸다. 하나는 조선정부가 신속하게 청군이 철수하도록 요구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과 조선 사이의 세 건의 통상장정을 폐기하는 것이었다. 7월 23일 조선의 답변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일본은 이를 다시 구실로 삼아 최후 통첩을 보내고 같은 날 병력을 파견하여 경복궁을 포위 점령하고 대원군을 유인 협박하게 된다.

7월 25일 대원군은 일본의 위협하에 조선의 자주를 선포하고 청군의 철병 권한을 일본군에게 위임하였다. 동시에 중국 代辦 탕샤오이(唐紹儀)에게 중국과 조선간의 상무조약을 폐기할 것을 통보하였다. 이러한 사실의 발표를 몇 시간 앞둔 이른 새벽 일본군은 아산만에서 중국 해군에게 기습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전쟁의 발발을 막아보려는 청국의 외교적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청국은 일본과의 재차, 본격적으로 강화를 시도했다. 서양 열강을 개입시키는 방법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청국은 11월 20일 독일인 데트링(Gustav Dextring)을 일본으로 파견했다. 데트링은 티안찐세관장이자 1885년<티안찐조약>체결 교섭 당시 리훙장과 동행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데트링과의 교섭을 거부했다. 일본은 계획적으로 시간을 끌면서 점령지역을 더 확장한 뒤에 좀더 유리한 강화를 할 속셈이었다.140)강화 교섭과 중재에 대해서는 박영재,<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와 淸日戰爭>(≪淸日戰爭의 再照明≫,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96), 52∼74쪽 참조.

이에 대해 청정부는 앞서 살펴 본 대로 재무장관 대리 짱인후안(張蔭桓)과 육군대장 샤오위린(邵友濂), 또 그들의 고문이자 미국의 국무장관을 지낸 포스터(J. W. Foster)를 강화 사절로 임명했다. 일본은 수상 이토오와 외상 무츠를 대표로 임명했다. 강화 장소는 일본의 주장대로 히로시마로 결정되었다.

당시 일본 지배층 내부의 강화조약에 대한 의견은 일치되어 있지 않았다. 육군은 장래 대륙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랴오뚱반도의 할양을 요구했고, 해군은 장차 남중국의 연안지역에 대한 지배권, 그리고 남지나해에 대한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타이완과 펑후열도의 할양을 요구하고 있었다. 民黨과 여론 매체들도 중국 영토 분할안과 배상금 액수를 놓고 저마다 주장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정부의 각료들조차도, 이를테면 대장성 대신 마츠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는 배상금 10억 엔만 받고 영토에 대한 요구는 포기하자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앞으로의 전쟁 계획에 대해서도 의견 대립이 있었다. 대본영의 계획은 뻬이징을 점령한 후 ‘프러시아-프랑스전쟁(普佛戰爭)’에서 승리한 프러시아처럼, 패전한 적국의 수도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토오는 그러한 강경 대책은 중국에서의 혁명적인 사태나 열강의 간섭을 유발함으로써 오히려 일본의 승리를 수포로 돌아가게 할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그는 랴오뚱반도, 타이완, 펑후열도의 조기 점령을 주장했고 제2군사령관 오오야마 이와오(大山巖)도 이에 동조했다. 전쟁의 장기화가 일본 경제에 파탄을 초래할 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단기 결전으로 조기 강화를 하자는 주장도 적지 않았다.141)大江志乃夫, 앞의 책, 455∼480쪽.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청국 대표단이 도착하기 직전에 대본영과 내각의 합동회의에서 강화 조약 초안이 작성되었는데, 그 골자는 첫째 조선의 ‘독립’을 승인할 것, 둘째 랴오뚱반도, 타이완과 펑후열도를 할양하고 일본의 군사비를 배상할 것, 셋째 구미 열강과 맺은 통상조약을 일본과도 체결할 것 등이었다. 여기서 ‘독립’이라는 표현은 물론 조선으로부터 청국의 세력을 일소하고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침략을 용이하게 하려는 구실에 불과했다. 영토 할양의 요구는 육군과 해군의 주장이 모두 관철된 결과였다. 배상금으로는 전쟁에 소요된 총 경비와 장래의 타이완 진압 비용을 합친 경비의 2배에 달하는 총액 4억 5천 만 엔을 요구했다.

1895년 1월 30일 청국 대표단이 일본에 도착했다. 일본 대표단은 조약 초안을 제시하지도 않은 채 대표단의 권한이 부족하다는 트집을 잡아 귀국 조치를 취했다. 이렇게 시간을 지연시키는 동안 점령지를 확대함으로써 좀더 유리한 강화 조건을 실현시키자는 술책이자 청국의 실세를 불러오자는 계책이었다. 일본 해군은 1895년 1월 20일부터 23일까지 웨이하이웨이를 봉쇄한 다음 육군을 상륙시켜 2월 12일 함락시켰다.

청국은 사태의 급진전에 놀라 리훙장을 단장으로 한 새로운 강화회의 대표를 시모노세키(下關)로 파견했고, 고문으로 포스터를 대동했다. 포스터는 교섭 과정에서 청국의 이익이 아니라 일본의 이익을 옹호했는데, 여기서 미국의 일본 지지를 읽을 수 있다. 미국의 국무성은 차치하고서도 중국에 있는 미합중국 공사 덴비(Charles Denby)를 포함한 미국인들은 거의 청국의 장래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덴비 자신의 기록에 따르자면 청일전쟁은 전쟁의 초기에 강화 중재 따위로 종식시킬 것이 아니라 지속시킴으로써 중국을 세계와 화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당연히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일본에 대한 지지가 뒷받침되는 주장이었다.142)미국은 영국에 이어 1894년 11월의 뤼쑨이 함락된 다음 날인 12일, 일본과 새로운<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미·일간의 불평등조약 체제에 종지부를 찍은 바 있다.

전투가 수도 뻬이징을 위협할 위기에 이른 시점, 주일 미국공사 던(Edwin Dun)은 국무장관 그레샴(Walter Q. Gresham)으로부터 미국이 중재에 나설 일에 대한 훈령을 받는다. 일본은 이때 좀 더 강력한 강화 전권 사절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상태에서 포스터가 리훙장을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143)청일간 강화 교섭 과정에서 미국의 구체적인 개입 사정에 관해서는 朴英宰,<淸日戰爭과 美國>(≪歷史學報≫59, 1973), 53∼66쪽 참조. 전 국무장관으로서, 중국 총리아문의 고문이기도 하였다. 포스터의 개입을 알고는 무츠는 “개인적으로도 나의 친구로서 나는 그의 도일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 환영했다. 강화 교섭 과정에서 그는 음으로 양으로 일본의 이익을 많이 대변해주었기에 후일 일본정부의 치하까지 받았다.144)陳偉芳, 앞의 책, 221쪽.

1895년 3월 하순에 진행된 강화회의에서 일본은 그때까지 점령하지 못한 티안찐, 샨하이구안(山海關), 타이꾸(太沽) 등지를 일본에게 넘길 것을 요구했다. 수도 뻬이징의 목구멍이나 다름없는 이 지역의 포기는 청국에게는 당연히 수락할 수 없는 요구였다.

3월 24일 제2차 회의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리훙장이 강화 교섭 중단과 전쟁 계속을 주장하던 배외주의 단체 소속의 일본 청년에게 저격을 당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저격범은 재판에서 “일본군이 뻬이징 점령을 단념하는 것은 일본의 치욕이다. 청국과 강화하는 것은 시기상조다”라고 주장했다. 당황한 이토오는 이 사건이 열강, 특히 러시아의 개입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일단 21일간(3월 30일부터 4월 19일까지)의 휴전을 제안했다. 그 사이에 진행된 강화회의에서 일본은 앞의 강화조약 초안을 제시하고 청국에게 즉각 수락할 것을 요구했다. 4월 17일 결국 청국은 조약의 조인에 합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朴英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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