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Ⅰ. 청일전쟁
  • 5. 전쟁의 영향
  • 1)<시모노세키 강화조약>과 전후의 동아시아

1)<시모노세키 강화조약>과 전후의 동아시아

1895년 4월 17일 리훙장과 이토오는 청일 양국간의 9개월간에 걸친 전투를 마무리짓는 강화조약을 시모노세키에서 조인하였다. 패전국 청국의 일본에 대한 일방적 양보가 그 내용이었다.

제1조는 “조선국의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청국으로 하여금 확인하게 하고 전통적 한·중간 화이질서 관계의 범주를 폐지하였다. ‘천하’로서의 중국이 마침내 사라진 것이다. 하나의 세계관으로서의 華夷觀은 19세기 중반 아편전쟁과 난찡(南京)조약에서 도전받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형성된 근대적 국민국가관을 기반으로 하는 ‘조약체제’를 중국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화이관 와해의 출발점이 이제 조선마저 떨어져나감으로써 동아시아 전통 세계의 기본 틀의 와해에까지 이른 것이다.145)이에 대해서는 崔熙在,<中華帝國秩序의 動搖>(서울大學校 東洋史學硏究室 편,≪講座 中國史 Ⅴ:中華帝國의 動搖≫, 지식산업사, 1989)를 참조할 것.

이제는 ‘중화’가 변방에 진 것이 아니라, 중국이 일본이라는 하나의 민족국가에게 졌다. 일본의 변혁 주체들은 이미 1850년대에 스스로의 ‘천하관’을 버리고 하나의 ‘민족’으로써 다른 민족 국가로 이루어진 서양 제국과 대응했던 것이다.146)Harry D. Harootunian, Toward Restoration:The Growth of Political Consciousness in Tokugawa Japan(Berkeley: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0), pp.380∼391. 일국 대 일국 민족주의라는 인식은 천하관이라는 세계관에서는 자리잡기 힘든 의식이다.

청초 17세기의 反滿洲的 한족 중심주의라는 민족주의가 전통적 세계에서 중국에서 소위 ‘정복왕조’가 탄생될 때마다 일어났던 순환적 의식이었다면 전후의 민족의식은 이제는 떠날 것이 다 떠난 홀로 남은 민족국가로서의 청나라-중국이었다. 공화주의운동과 더불어 중국의 역사에 처음으로 개조된 세계관이 자리잡는 계기이기도 할 것이다.147)민족의식의 형성과 관련된 미시적 논의로는 의화단운동의 구호 분석에 바탕한 천하관-淸朝관의 추이에 관한 小林一美,<義和團の民衆思想>(≪講座中國近現代史:2 義和團運動≫, 東京大, 1978) 참조.

조선에서도 중화주의가 무너지는 계기가 된다. 이미 수구파와 개화파 또는 친청파와 친일·친러 심지어는 친미파라는, 이념에 입각하든 현실적 계산에 따르든, 다양한 대외관계의 갈래가 형성되어 있어 청나라 중국에 대한 불안과 의구심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지난 반세기 동안의 역사가 중국의 그것을 압도한 사실이 눈앞에 증명됨으로써 지배 피지배층을 막론하고 조선인들은 새로운 선택의 여지에 대한 가능성을 더한층 믿게 되었다. 적어도 부국강병의 맥락에서는 그러하였다.

여기에 대외관계에 대한 명분과 실리에 입각한 검토가 당연히 시작되었다. 당시의 일본이란 가장 힘이 있으면서도 배우기가 쉬운 ‘모범’이나 ‘범례’로서의 대상일 수 있었다. 분명한 사실은 19세기 말이란 온갖 외세와 그리고 전통적 중화 제국주의가 한반도에서 힘을 겨루고 있는 때였다. 이 시기란 다시 말해서 한국이 일본이란 특정 제국의 식민지가 되는 경험을 가지기 이전의 시기이다. 모두가 외세가 될 수도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방일 수 있었다.

이를테면 1880년대 초 주일 청국 공사관 서기관이었던 후앙쭌씨언(黃遵憲)의≪朝鮮策略≫이 제안했던 방안이란 것은 이러한 시각과도 연결된다. 어느 강국과 親하든 結하든 聯하든 그 대상은 청을 비롯한 조선을 둘러싼 강국들과 조선과의 관계를 새로이 정의하고 설정하는 일이었다. 또 그 친소관계의 기준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의 이익이어야 했다. 따라서 1880년대 조선의 지배층을 동요시킨 후앙쭌씨언의 책략이란 19세기 후반 조선의 대외관계에 있어서의 책략적 기술적 차원의 아이디어에 그친 문서로 볼일은 아니다.148)田保橋潔,≪近代日鮮關係の硏究≫上, 746∼748쪽.

후앙쭌씨언의 제안은 비록 청국과의 전통적 관계의 유지를 전제하고는 있지만 러시아를 막는 방도로써 국제관계에서 미국과 일본이라는 신생 제국의 세력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 그 핵심이 있다. 뒤집어 본다면 이 ‘책략’의 바닥에는 오히려 새로운 시대에 조선의 생존을 위한 대외관계의 다양성과 가능성의 넓이가 잠복해 있다. 청일전쟁으로 말미암아 화이질서에서 떨어져 나간 1890년대의 조선이 하나의 민족 국가로써 근대적 민족국가간의 대외관계를 주체적으로 전개할 당위성을 발견할 수 있는 문헌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청일전쟁 이후 조선이 봉착한 舊 화이관적 세계질서의 붕괴와 민족주의적 제국주의의 신질서에의 편입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국제관계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의 진퇴유곡에 들어서게 하였다. 여기에 구 봉건적 왕조 체제 또한 벗어나야 할 짐으로써 중압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일본이 선택한 방법은 대단히 난폭한 것이었다.

전쟁 중 조선의 조정에는 일본의 지원과 사주를 받는 친일 개혁파가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삼국간섭의 효과를 눈으로 확인한 조선의 지배층은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려 하였다. 일본을 등에 업은 기존 세력과 러시아에 기대는 세력간의 충돌 사이에서 일본은 왕궁을 습격하고 후자의 상징인 명성황후를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일본은 손잡을 수 있는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막 움트기 시작한 반 외세적 민족주의의 운동은 반일을 기축으로 전개되었다.

조선의 조정에 형성된 친러세력을 뽑아내기 위해 일본은 외교적 노력도 기울였다. 1896년에는 5월에 조선 주재 러시아공사 베베르(Karl I. Waeber)와 일본공사 코무라 쥬타로오(小村壽太郞)사이에<베베르-코무라협정>, 6월에는 러시아의 니꼴라이 2세 대관식에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파견되어 외상 로바노프(A.B. Lobanov-Rostovskii)와 비밀조항을 포함하는 협정이 맺어졌다. 조선에서의 러·일 두 세력이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평형을 이루게 된다.149)이어 1898년 4월에는 일본 외상 니시 토쿠지로오(西德二郞)와 주일 러시아 공사 로젠(Romanovich R. Rosen)이<니시-로젠 협정>을 맺어 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의 러-일 세력 균형을 안정되게 만든다. 이에 관해서는 崔文衡,≪列强의 東아시아政策:특히 1898年 前後의 美·露의 進出을 中心으로≫(一潮閣, 1979), 4∼42쪽 참조. 그러나 이 안정적 대립·균형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3∼4년 동안 러시아가 조선에 군사고문을 들여보내고 월미도에 군함을 침입시키고 미국도 병력을 보내는가 하면, 제주도에는 프랑스함대가 침입하였다. 일본은 월미도와 인근 섬에 기지를 설치하는 둥, 러일 전쟁 직전까지 군사적 대립은 첨예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조선에 대한 열강의 경제 이권 침탈도 노골화된다. 철도 금광 산림 전기 전신 등의 사업에 일·러·미·독·영·프랑스 거의 모든 열강이 손을 뻗쳤다.

민족자본은 와해되고 지배층은 외세의 첨병이 되거나 부르죠아적 민권운동 또는 의병 무장투쟁으로 나섰다. 농민들도 다시 각처에서 들고 일어났다. 1898년부터 1903년까지 함북 경흥에서 제주까지 근 50여 차례의 봉기가 기록된다. 반외세와 반봉건 투쟁이었다. 그러나 1904년 조선은 다시 국제전쟁의 터전이 되었다. 1904∼5년의 러·일전쟁은 조선의 국운을 끊는 계기로 되고 전후 일본의 실질적인 식민지로 떨어진다.150)이종현 편,≪근대조선역사≫(일송정, 1988), 188∼228쪽 참조.

전후 중국의 양상은 조금 달리 전개되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다른 서양 열강보다 오히려 일본으로부터 효율적으로 부국강병의 방법을 배울 수 있다는 흐름이 나타났다. 戊戌변법시 운동의 주동자인 캉요우웨이(康有爲)가 꾸앙쉬제에게 제출한≪日本變政考≫에 나타나듯, 서양의 총체적·보편적 근대 역사상보다는 더욱 구체적이고 인접해 있는 일본의 경험을 본받을 것을 주장한다.151)吳乃華,<甲午戰爭與康有爲民主觀的轉變>(戚其章·王如繪 主編,≪甲午戰爭與近代中國和世界:甲午戰爭100周年國際學術討論會論文集≫, 北京:人民出版社, 1995), 1025∼1026쪽.

이 시점의 량치챠오(梁啓超)의 경우 일본은 그에게 하나의 이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1911년의 신해혁명까지 이어질 혁명운동의 수뇌들 상당수는 일본에 유학 길에 올랐거나 또는 일본에서의 망명 생활을 거친 사람들이었다. 물론 중국인들이 패배를 딛고 향후 일본을 극복하자는 이른바 “상대와 나를 알지 못하면(不知彼不知己) 싸움마다 지게마련(每戰必殆)”이라는 쓴즈(孫子) 병법식의 새로운 대일관과152)王曉秋,<甲午戰爭前後中國人日本觀的轉變>(戚其章·王如繪 主編, 위의 책), 1166쪽. 일본의 팽창주의자들이 이들을 도우면서 앞으로의 팽창에 이용하려는 의도 등이 복합적으로 움직였겠지만, 1890년대 후반 전쟁 이후 중국의 진보적 분위기는 움직일 수 없는 조류가 되어 있었다.

특히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으로 유학가는 중국학생의 숫자는 급격히 늘었다. 1902년에 500명이었던 것이 1904년에는 1천 500명으로, 1905년에는 8천 명, 이듬해 1906년에는 무려 1만 3천 명으로 늘게 된다.153)이에 관한 총체적인 서술은 Marius B. Jansen, The Japanese and Sun Yat-sen(Stanford Univ. Press, 1970)을 참조할 것.

러일전쟁은 다 알다시피 일본이 청일전쟁·삼국간섭 이후 10년 동안의 ‘절치부심’ ‘와신상담’의 끝에 전 국력을 다해 치른 전쟁이었다. 물론 외교적으로 또 재정적으로 영·미 두 나라의 후원을 업었으나, 어떤 면에서는 이 전쟁은 황색인종들에게 서양인들의 동양인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는 전쟁으로 비치는 국면도 있었다. 러일전쟁에서는 여러 모로 흥미로운 일화가 태어난다.

이를테면 전쟁중의 의연금 내역이다. 위문금 따위의 명목으로 일본인들이 낸 돈이 228만여 엔(현금 133만 엔과 물품으로 환산한 액수 95만 여 엔)이었다. 외국인들도 내었다. 모두 16만여 엔. 이 중 2만 4천 엔 정도가 영국과 미국인들의 출연이었다. 여기에 한국인이 1만 7천여 엔, 그리고 중국인이 낸 돈이 무려 11만 8천여 엔이나 되었다. 외국인 헌금의 약 60%를 중국인들이 냈다는 것이다.154)櫻井忠溫 監修,≪國防大辭典≫및≪一億人の昭和史:日本の戰史-1:日淸·日露戰爭≫(每日新聞社, 1979), 185쪽에서 재인용.

이른바 ‘서세동점’과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 과정에서 1890대에 유럽에서 일었던 ‘황화론’이 거꾸로 된 인식으로서의 새로운 ‘역황화론’으로 부상하게 되는 것도 러·일전쟁기간이었던 것이다. 청일전쟁이 중화주의와 화이질서의 붕괴, 그리고 중국에서 조선에서 제국주의 세계속에서의 ‘민족주의’가 하나의 지배적 담론으로 자리잡게 했고, 일본의 승리는 이제 일본은 중국이나 한국에서 서양을 쉽게 배울 수 있는 모델로 떠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19세기 후반 일본에게 있어 조선의 ‘완전무결한 자주 독립’을 청국으로 하여금 승인하도록 한 시모노세키조약의 제1조는 물론 여러 번 강조했듯 일본의 조선 지배권 확립을 달성하기 위한 정치적 전리품이었다. 이 전쟁 20년 전, 메이지유신으로 출범한 지 불과 5년만에 일어난 조선 침략론, 이른바 ‘세이칸론(征韓論)’ 이래 근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야심의 실현이기도 하였다.

돌이켜보면 이 기간 동안 일본정부의 소위 조선의 ‘독립’을 위한 정책은 청국과 구미열강의 동향을 항상 의식하면서 조선 ‘독립 待遇정책’에서 조선 ‘독립 公認化정책’을 거쳐 다시 이를 뒤집어 ‘조선 독립 공인화 부정정책’으로 단계적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일본은 일본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근대적 종주국’으로서의 지위를 하나 하나씩 획득하고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조약에 이른 것이다.155)崔碩莞,≪日淸戰爭への道程≫(東京:吉川弘文館, 1997), 204쪽.

따라서 조선의 ‘독립’이란 일본이 어떤 빌미를 잡고서라도 청국과 전쟁을 일으켜 달성하고자 했던 이 전쟁의 최소한 그리고 최대한의 목표였다. 따라서 이 외에 강화조약에서 일본이 패전국으로부터 얻어 낸 아래의 이득이란 모두 일본의 전쟁 목표를 초과한 전리품이자 전쟁 중에 새로 태어난 과격한 요구들이기도 했다.

첫째, 청국은 일본에게 영토를 떼어 주기로 하였다. 랴오뚱반도와 타이완 및 펑후(澎湖) 섬들이었다.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한 반세기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랴오뚱지역은 청의 수도 뻬이징을 빤히 건너다보는 지형과 위치로, 마치 서울의 옹진반도나 다름없는 정치적 군사적 요충지였다. 지난 반세기동안 중국을 팽창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영토의 할양만은 삼가 오던 열강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는 땅에 대한 요구였다. 이른바 ‘삼국간섭’을 불러온다.

둘째, 청국은 2억 냥[이하 모두 까오핑인(庫平銀)]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당시 청국정부의 1년 세입이 1억 냥 남짓했다.156)전쟁 전후의 청 재정 개황에 대해서는 梁義群,<甲午中日戰爭與晩淸財政大變局>(楊念群 主編,≪甲午百年祭:多元視野下的中日戰爭≫, 北京:知識出版社, 1995), 52∼76쪽을 참조할 것.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 뿐 아니라 일본은 이 거금을 영국의 正金 파운드로 지불 받기로 했다. 열강들이 다투어 금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음에도 일본 금융은 아직 여력이 없어 은본위제에 머물고 있던 터였다. 일본은 숙원이었던 금본위제로 진입할 수 있는 국제 금융적 기반을 얻은 것이다.157)전쟁 비용이나 배상금의 용도, 그리고 전쟁과 전비의 일본 경제에 미친 직접 영향 등은 Ono Giichi, Expenditures of the Sino-Japanese War(N.Y.:Oxford Univ. Press, 1922)를 참조할 것.

배상금 2억 냥에 추가하여 랴오뚱반도를 되돌려주는 대가로 3천만 냥을 추가로 받았다. 기타 웨이하이웨이를 3년간 수비하는 비용으로 1백 5십만 냥 등 총 수입은 2억 3천 1백 5십만 냥, 일본 돈으로 환산하면 모두 3억 6천 7백여 만 엔에 달하는 액수였다.

배상금은 여러모로 긴요하게 배정되었다. 일본은 우선 전쟁 비용을 충당했다. 약 7천 9백만 엔을 보전했다. 그 다음 육군의 군비 확장에 5천 6백 7십만 엔, 해군의 군비 확장에 약 1억 4천만 엔을 부었다. 총 배상금의 반 이상을 실제로 이미 치른 전쟁 비용과 앞으로 치를 전쟁에 대비하는 데에 쓴 셈이다. 왜냐면 1893∼4년의 방위비는 육·해군을 통틀어 1년 평균 2천만 엔을 넘지 않았다. 1893년의 경우 정부의 세수가 약 1억 1천 7십 7만 엔, 세출이 8천 4백 5십 8만 엔 정도였다. 당시 쌀 한 섬(코쿠:石)은 7엔이었다.158)Ono Giichi, 위의 책, pp.94·281.

여기에 다시 전쟁 비용 복구 명목으로 교통과 통신 시설 확장에 약 3백만 엔을 들이고 전함과 어뢰정 구입에 3천만 엔을 추가로 투입했다. 일반 재정으로 1천 2백만 엔을 교부하고도 남는 돈을 교육 재정 기금으로 1천만 엔, 재해에 대비할 예비비로 1천만 엔, 또 제철소 건설을 위해 수십만 엔을 배정하는 둥 여유있는 쓰임새였다.

배상금의 용도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천황 황실 계정으로 2천만 엔을 배정한 사실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일본의 정치 발전 단계를 감안한다면 이른바 통치자금이나 정치자금의 용도로 해석될 수 있는 혐의가 짙다. 무엇보다도 정부의 일반 재정 계정으로 돌린 1천 2백만 엔보다 8백만 엔이나 많은 액수를 황실 계정으로 옮겼다는 사실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천황제 절대주의적 체제가 확립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하나의 실증적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159)中塚明,≪日淸戰爭の硏究≫(東京:靑木書店, 1968) 참조.

타이완이라는 새로 획득한 식민지 건설 자금도 필요했다. 도로와 철도를 건설하는 돈이 필요했지만 감옥을 지어 반항하는 타이완 원주민들을 묶어야 했다. 전쟁이 끝난 지 이듬해인 1896년부터 1903년까지의 통계를 예로 들면 타이완에 매년 투입된 예산은 군비에서, 일반 계정에서 심지어는 교육 재정 등에서 인출되었다. 매년 적게는 7백여 만 엔에서 많게는 1천 3백 여 만 엔, 평균 천만 엔 가까운 돈을 투입했다.160)Ono Giichi, 앞의 책, pp.146∼148. 1903년까지 통계의 의미는 1902년이 되어서야, 다시 말해<시모노세키조약>에 따라 타이완을 점령하기 시작한 지 7년이 지나서야 군사 진압 작전이 일단 종결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전쟁 배상금은 크게 보아 첫째는 침략 전쟁 비용을 충당하고 앞으로의 전쟁에 대비한 군비를 증강하는 일, 둘째는 천황의 황실을 강화함으로써 앞으로 일본 정치가 천황주의적인 성향으로 기울어질 것을 예고했다. 전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생성되고 상승되는 광기에 가까운 반청 배외주의와 국수주의적 여론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 본 대로이다. 청으로부터 받아 낸 거대한 전쟁 배상금과 랴오뚱반도 반환 대상금은 이렇듯 일본 제국주의의 형성과 확립을 위한 도정에서 가장 중요한 물적 기반의 하나로 된 것이다.

셋째, 일본은 양쯔쟝(揚子江) 어구인 샹하이, 쑤죠우·항죠우(蘇州·杭州)에서 충칭(重慶)에 이르는 창쨩(長江)유역과 후뻬이(湖北)지역 등에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받았다.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 경제 침략이 해안에서 내륙으로 파고 들어 깊어지면서 청 왕조의 몰락과 중국의 반식민지화의 커다란 계기로 된 것이다. 샹하이에서 충칭까지의 물길은 1천 5백 킬로미터의 길이에 천 톤 급의 배가 오르내릴 수 있다. 하류인 양쯔쨩을 포함하는 이 창쨩은 중국에서 가장 크고 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강일 뿐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중국에서 물산이 가장 풍부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유역을 거느린다.

<시모노세키조약>과 뒤따르는 통상조약 그리고 열강에 대한 최혜국 특혜 규정으로 말미암아 이 지역은 이내 일본과 열강들의 근대 자본주의 경제권에 급속히 편입된다. 뿐만 아니라 청일전쟁 전후처리를 위한 청정부의 여러 가지 개혁 정책도 3년 치의 세입을 몽땅 다 부어야 할 정도의 과도한 배상금 부담, 그리고 정부 정책과 기업들 사이의 정책적 차이와 현실 인식의 괴리 등으로 인해 쉬이 추진될 수가 없었다.161)이 외에도 청정부의 배상금 조달문제 등에 대해서는 謝俊美,<再論中日甲午戰爭的賠款問題>(張海鵬 主編,≪第二屆近百年中日關係史國際硏究討論會論文集≫, 北京:中華書局, 1995), 28∼36쪽 참조.

더욱이 제국주의 열강들은 다투어 조차지를 요구하였다. 특히 ‘삼국간섭’으로 랴오뚱반도가 반환되자 청은 러시아 독일 프랑스 삼국에게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의 정치-경제적인 半식민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중국의 패배가 무엇보다 동아시아의 일원으로서 과거 중화세계의 변경에 처한, 그래서 상대적으로 멸시하던 일본에게 당한 사실은 중국인들에게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 메이지유신으로 시작된 일본의 근대화와 양무운동으로 시작한 중국의 근대화가 비교된 것이다.

전쟁 후 여러 열강의 영토할양 요구에서 비롯된 ‘亡國’ ‘亡種’ ‘동아시아의 病夫’ 등의 자학적인 상징어로 나타나는 위기의식과 더불어 기존의 양무식 부국강병 노선은 파탄되고 새로운 모색이 필요해 졌다. 종래의 ‘變法論’이 하나의 새로운 운동으로 전화될 소지가 여기에 마련된 것이다.162)尹惠英,<變法運動과 立憲運動>(서울大學校 東洋史學硏究室 편,≪講座 中國史 Ⅵ:改革과 革命≫, 지식산업사, 1989), 12∼13쪽.

지역적으로 샨뚱지역은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직접 전화에 휘말린 피해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정부의 직접적 통치력이 아직도 가장 효과적으로 운영되는 지역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에게 유린된 이래 영국이 쨔오죠우(膠州)와 웨이하이웨이를 강점하였고 특히 쨔오-찌(膠-濟)철로의 건설은 운수 노동자들의 대량 실직을 부른데다 줄줄이 들어오는 수입품으로 지방 농업과 수공업은 큰 타격을 입고 있었다. 더 나아가 300여 선교사들이 천 개가 넘는 교회에서 벌이는 선교활동은 ‘民敎’의 갈등도 격화시켰다.163)金培喆,<‘敎案’과 義和團>(서울大學校 東洋史學硏究室 편,≪講座 中國史 Ⅵ:改革과 革命≫, 지식산업사, 1989), 68∼69쪽.

이와 같은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와 전후의 국제적-국내적 모순, 그리고 사회 심리적 갈등은 이제 샨뚱지역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분해되고 생성되던 제 사회 계층으로 하여금 1890년대 중반 이후에는 기존 체제에 대한 부정의 고장으로 만들었다. 이 지역이 의화단운동의 근원으로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북 중국을 중심으로 번져나간 이 운동은 전국적인 것으로 되어 청조 멸망의 한 계기로 된다.164)미시적인 개관으로는 戚俊杰,<甲午戰爭期間的黃縣團練>(戚其章·王如繪 主編, 앞의 책, 662∼73쪽).
총체적 기술로는 李宏生·宋靑藍 主編,<山東通史:近代卷 上冊>(安作璋 主編,≪山東通史≫, 濟南:山東人民出版社, 1995)를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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