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Ⅰ. 청일전쟁
  • 5. 전쟁의 영향
  • 2) 전쟁의 영향과 의의

2) 전쟁의 영향과 의의

청일 개전 당시 일본은 큰 승리를 예상하지는 못하였다. 1890년 국회 개설이래 시끄러워진 내정문제의 돌파구를 뚫고자 하는 계산도 있었지만, 전쟁의 목표는 ‘독립’ 조선에 대한 지배권 확립과 약간의 배상금 정도였다. 잇단 승전과 反淸 열기로 영토 점령으로까지 팽창된 무리한 강화조건, 특히 랴오뚱반도의 할양은 열강의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조약 조인 불과 일주일 뒤인 1895년 4월 23일, 랴오뚱반도의 할양에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무력사용을 불사하겠다며 제동을 걸어 왔다. 일본은 배상금을 얹어 받고 물러났다. 이른바 ‘삼국간섭’과 ‘랴오뚱반도 還付’ 사건이었다.165)이에 대한 서양 제국주의의 역학관계에서 분석한 표준적 참고로는 William Langer. The Diplomacy of Imperialism, 1890∼1902(2d ed.)(N.Y.:Knopf, 1951). 또 러시아 중심 서술로는 Andrew Malozemoff, Russian Far Eastern Policy, 1881∼1904, with Special Emphasis on the Causes of the Russo-Japanese War(Berkeley:Univ of Calif. Press, 1958). 중국측의 해석으로는 楊遵道,<三國干涉還遼的實現及其影響>(山東省歷史學會 編,≪甲午戰爭九十周年紀念論文集≫, 濟南:濟魯書社, 1986), 313∼26쪽. 일본측의 당시 대응에 대해서는 陸奧宗光의≪蹇蹇錄≫을 참조할 것.

이후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까지 10년간 일본은 ‘절치부심’ ‘와신상담’을 국론으로 삼았다. 청일전쟁 중에 이미 여물어진 ‘광적인 애국심’이 전쟁 직후의 국민적 적개심과 융합하여 제국주의의 심성을 다졌다. 당대 으뜸가는 계몽주의자이며 여론지도자였던 랴오뚱반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전승의 감격에 눈물을 흘렸고”, 토쿠토미 소호오(德富蘇峯)는 “삼국간섭을 계기로 정신적으로 딴 사람이 되었다”고 술회했다. 1930년대의 국수주의는 한 세대 이전인 이때에 다져진 토양 위에서 쉽게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제국주의의 물적 토대와 정신적 토대를 일군 1895년은 따라서 일본의 근대사에서 하나의 커다란 분기점이었다.

청일전쟁은 중국·일본·조선에만 영향을 미친 사건이 아니었다. 영국은 이 전쟁을 계기로 세계전략과 동아시아 정책을 면밀히 재구성하고 있었으며,166)영국은 전쟁 초기까지 청을 중시했고 일본의 실력을 인정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최후의 승리는 중국으로 돌아가리라는 관측을 내리고 있었다. 鹿島守之助,≪日英外交史≫(東京:鹿島硏究所, 1959), 154쪽. 미국은 조선에 함대와 병력을 파견하는가 하면 강화교섭에 효과적으로 개입하기도 했다.167)미국과 이 전쟁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Jeffrey Dorwart, The Pigtail War:American Involvement in the Sino-Japanese War:1894∼1895(Amherst:Univ. of Mass. Press, 1975) 참조.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간섭’이 전쟁의 결과뿐 아니라 동아시아 대륙에서의 각국의 지위는 물론 전쟁 당사국들의 장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즉 19세기 말, 1890년대 일본의 침략행위는 조선과, 또는 청국과 일대일로 독자적으로 진행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일본의 침략정책은 제삼자인 서양 열강 세력에 의해 실질적으로 ‘지원’이나 ‘간섭’을 받았던 것이다. 일국 대 일국의 침략과 전쟁 행위는 이미 국제적인 사태로 바로 연결되는 이른바 역사의 세계사화의 과정에 들어 선 것이다.

패전 중국은 이 전쟁으로 20세기 전반 역사의 서막을 연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쟁이 끝난 지 5년 뒤의 의화단운동은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의 배외 감정 반제국주의 감정이 민중 중심의 난동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이미 불이 지펴있던 공화·국민 혁명의 열기도 전쟁 이후 더욱 거세게 일었다. 마치 러일전쟁 중에 일었던 러시아혁명운동 전야의 양상을 방불케 한다.

청국의 패전 원인은 일반적으로 봉건적 청정부의 부패와 무능, 군대의 부패와 제도적 전략적 미숙 등으로 치부된다.168)李英 主編,≪中國戰爭通鑑≫(北京:國際文化出版公司, 1995), 765∼66쪽. 그러나 이러한 미시적 분석 외에도 이 전쟁의 패전을 단순한 전쟁사의 주제를 너머 역사의 패전으로 보아야 한다는 지적이 일찍부터 있었다. 일본의 승리는 진보의 승리였으며 나아가 그 진보는 미국의 제독 페리(Mathew C. Perry)가 안내한 결과였다. 중국은 이제 절망적 상태일 뿐 아니라 그 몽매한 반 진보성은 앞으로도 몇 번 더 일본과 같은 손에 의해 충격을 받아야 할 것이며 한국은 일본의 지도에 의하지 않고서는 그들 부패 무능한 지도자들 손아래 영원히 깨어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169)이를테면 Trumbull White, The War in the East:Japan, China, and Corea (Philadelphia & Chicago:J.H. Moore & Co.,1895), pp.671∼673.

전쟁을 전쟁에 국한시켜 개전에서 종전까지 다루면서 단절된 시기의 역사로써 해석할 때의 전형적인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해석은 이미 일본이 이 전쟁을 ‘의전’으로 규정하고 서양 각국에 언론 홍보활동을 시작할 때의 논리와 다름없는 것이다. 나아가 중국과 일본과 한국의 19세기말의 역사를 연장해서 근대사 또는 근현대사 또는 현대사라는 시대구분적 시각을 가지고 해석을 가할 때는 전쟁의 승패만을 가지고 내리는 해석과는 달리 오히려 예리하고 공평한 해석에 도달하기 쉽게 만들 수 있다.

이를테면 전쟁의 결과가 일본의 인민들에게 그리고 이웃 나라의 인민들에게 가져다 준 결과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이다. 안으로는 일본이 근대적 혁신으로 국민국가 형성에 성공했으며 그 결과물의 하나로써 청일전쟁의 승리를 예시할 수 있다. 따라서 통합된 국민적 에너지의 효율적 결집과 주도면밀하고 치밀한 일본군의 편제나 작전도 정녕 그 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구성원인 일본의 ‘국민’은 곧 제국주의 제국의 ‘신민’으로 편제된다. 이 전쟁 이후 일본의 아이들은 목제 무라타 총을 장난감으로 삼게 된다. 군가가 동요를 대신했고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170)Stewart Lone, Japan's First Modern War:Army and Society in the Conflict with China, 1894∼1895(London:St. Martin's Press, 1994), pp.186∼187.

바깥으로는 무엇보다도 일본은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아시아의 제 민족에 대해 ‘성실함’과 ‘겸손함’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이다. 이는 이러한 도덕적인 문제에 멈추는 일이 아니라 앞으로 적어도 50년간 끊임없는 전쟁과 전장으로 이 지역에 참화를 몰고 오는 시발점을 이 전쟁으로 인해 만들게 되었다는 점이다.171)宇野俊一,≪日淸·日露:日本の歷史≫(小學館, 1976), 18∼23쪽.

전쟁으로 인한 일본인들의 사회 경제적 고통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이 전쟁에서 이미 수만의 일본 젊은이들이 전사했고 중국의 군인 비전투원 수만이 죽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앞으로 50년 동안 연달아 닥쳐 올 전화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전쟁에 이김으로써 번 돈은 그러나 거의가 다음 전쟁을 위한 군비 확장에 재투자되었다. 중국에서의 승리는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의 ‘의화단운동’때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연합군의 보조 역할, 이른바 ‘극동의 헌병’ 역할을 떠 안고 아시아에의 압박국으로 된다. 청일전쟁에서 보여 준 실적이 있기 때문이다.172)中塚明, 앞의 책, 306∼16쪽.

많은 역사가들이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중국의 반식민지화가 가속되었다고 결론내린다. 그러나 다시 한번, 1890년대를 하나의 세기말적 기준으로 잘라 평가한다면 모를까 동아시아의 역사를 현재까지의 연속·단절의 문제와 결부시켜 해석한다면 이 패전의 역사적 의미는 단편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청일전쟁 후 5년 뒤의 의화단운동 뿐 아니라 이 전쟁 후 15년 뒤에 성공한 1911년의 국민혁명은 모두 역사의 단절이라기 보다는 연속적 의미가 강하다. 아시아에서 실질적으로는 최초로 공화정 체제를 수립하는 이 반 왕조체제 혁명도 중국근대사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1919년대의 5·4 지적운동과 20∼30년대의 민중운동으로 연장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19세기 말, 아니 19세기 중반부터 중국 근대사의 핵심문제는 언제나 인구의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인민문제와 제국주의의 침략문제라는 이중적 모순과 맞닿아있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청일전쟁 시기 중국의 인민이란 농민을 주축으로 하는 계층적·계급적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반 외세와 반봉건의 역사적 주체성을 지니는 ‘인민’으로 상당 기간 활성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들의 역사적 역할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시점은 평가하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제도적으로는 1949년의 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실제적으로는 현재의 중국에 이르는 20세기 전반 중국과의 연속성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가능할 것이다. 오늘날의 중국은 이른바 대내적 통합과 대외적 주체성을 현재 진행형으로 함께 누리고 있는 것이다.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신제국주의로 등장한 뒤로 1945년의 패전까지 일본은 반세기 동안 파죽지세의 팽창으로 '국위'를 선양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러시아, 중국, 미국과 차례로 전쟁을 치른 50년간, 식민지 조선을 비롯한 주변국 인민들에게 가한 폭력은 물론, 일본 인민의 간단없는 고통과 희생은 핵 공습과 미군 점령으로 막을 내린다. 딱하게도 일본은 패전 후 또 하나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무엇이 일본의 바람직한 미래상인지 제시하지 못한 채 역사의 주체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173)피터 두으스 著, 金容德 譯,≪日本近代史≫(知識産業社, 1983), 제16장.

지난 100년간 일본 역사의 실상이 있었던 그대로의, 객관적인 해석을 아직도 받지 못하고 있는 증거는 최근의 정부 주도의 인위적인 역사 교과서 해석에도 얼마든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첫째, 일본이 갑오농민전쟁을 진압한다며 한반도에 자의로 파병하면서<천진조약>이라는 국제법상의 권리를 내세웠던 점이다. 동시대의 역사에는 같은 역사상이 고유명사만 바뀐 채로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 고유명사를 뺀다면, 한반도의 내정에 외세가 국제법적 근거를 내세우며 개입할 수 있는 전례는 1890년대에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둘째, 일본은 청과 전쟁을 열기 위해서 한국의 근대화 즉 조선의 내정개혁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개혁파를 지원한답시고 명성황후 시해와 같은 유례없는 만행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일본과 논리를 같이 하는 한국인들이 서슴치 않고 일본을 도왔다. ‘근대화’를 지향하는 이념적 친일파였다. 이들에게는 그러나 민족 역사의 발전에는 민족적 주체가 무엇보다도 우선한다는 역사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고 ‘근대화’에 관한 한 그 으뜸가는 역사적 모범 사례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 알다시피 일본의 근대화 과정이다.

셋째, 일본은 ‘동학란’으로 어지러운 한국 민중에게 유포했듯 국제 사회에서도 이 전쟁을 절망적인 중국으로부터 한국을 구해내는 ‘의로운 전쟁’으로 선전하며 친일적 여론을 조성하였다. 미국의 여론은 일본에 기울고 뻬이징과 토오쿄오 주재 외교관들은 표면적으로는 국외 중립을 내세우면서도 청일간의 교섭과정에서 효과적인 후원자가 되었다.174)戚其章,≪甲午戰爭國際關係史≫(北京:人民出版社, 1994), 96∼97쪽. 이 전략에는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평화주의자도 동참했고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통치했다는 군부 주도의 역사 해석까지 동원되었다. 근대화된 역사학이 국제 정치에 이용되는 모습과 이때 형성된 언론 매체망의 국제화라는 현대적 모습이 실제 사례로 이 전쟁에서 드러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청일전쟁-시모노세키조약 당시 미국과 일본 두 신생 열강은 정녕 협조자였으나 이후 동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양국관계는 점점 악화된다는 사실이다. 1895년 청일전쟁의 승리로 새로운 제국주의 일본이 등장함과 거의 동시에 1898년 미국 또한 이 지역에서의 새로운 팽창주의자로 부상하기 때문이다. 하와이와 필리핀 한국 그리고 중국은 두 신생 팽창국의 공통된 목표가 되었다. 이 지역에서 두 나라의 갈등은 미국이 하와이와 필리핀을 선점함으로써 본격화된다.

일찍이 청일전쟁이 막 끝나자마자 일본이 호주를 침공하리라는 소문이 국제 사회에 나돌았다.175)Stewart Lone, 앞의 책, p.180. 일본은 일찍부터 필리핀과 하와이를 침공, 식민지로 만들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176)하와이에 관해서는 Hilary Conroy, The Japanese Frontier in Hawaii, 1868∼1898(Berkeley:Univ. of California Press, 1953), 필리핀에 관해서는 Marius B. Jansen, 앞의 책을 참조할 것. 미국이 남·북미 대륙을 벗어난 지역에서 지향했던 팽창의 목표지점과 동일했던 것이다. 19세기가 다 가기 전에 두 나라는 일단 자신의 영향권을 수립했고 러일전쟁 중에는 한국과 필리핀에 대한 상호 이익범위를 확인했다. 바로<태프트-카츠라 밀약>을 통해서다.

이후 수십년간 미·일 양국간에는 갈등과 협상이 교차했으나 중국문제, 일본 제국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원문제, 미국 서부에서의 일본 이민문제 등 크고 작은 문제들이 두 나라를 끝내는 태평양전쟁으로까지 몰고 가는 요인으로 된다. 이렇게 본다면 태평양전쟁과 전후 체제란 19세기말에 동아시아·태평양지역에 등장한 두 신팽창주의의 반세기 동안의 대립과 모순관계가 전쟁에 의해 해결된 그 결론에 다름 아닌 것이다. 청일전쟁이 그 시발점에 자리잡은 것이다.

한국을 둘러싸고 19세기말에 형성된 밑그림이 21세기에 접어드는 지금의 그것과 비교해서 기본적으로 어떻게 얼마나 바뀌었는가 하는 문제는 역사적으로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할 문제이다. 만약 피동·능동의 주체들이 고유명사만 바뀐 채 본질적인 변화가 없는 구조가 연속되고 있다면 당시의 한·일관계의 침략·피침략·지원·간섭의 구조적 틀에 대한 올바른 분석과 해석을 토대로 한 통시적이면서 동시에 공시적인 개방적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 근대사의 해석과 관련해서 지적하고 싶은 점은 근대 한국사나 한·일관계사의 큰 줄기를 ‘침략과 저항’ 또는 ‘도전과 응전’이라는 이분법적 접근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한국의 근대사, 특히 1894∼95년과 같은 결정적인 시기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의 구조적 모순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수직적으로는 조선사회의 누적적인 역사적 모순이 있고 수평적으로는 1890년대의 현실적 모순이 있다. 따라서 조선 인민의 절대 다수였던 농민들의 운동에 대해서는 ‘반제’와 ‘반봉건’이라는 종·횡의 축을 전제하고 구조적으로 접근되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 근대에 있어서 이 시기는 총체적으로 보아 조선의 모든 인민이 와해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속에서, 상·하, 지배·피지배를 묻지 않고, 새로이 강요되는 인식과 세계를 맞아 사상과 행동, 나아가 인식체계의 구조 자체를 재편성하여 가는 능동적이며 주체적인 움직임을 일구어내는 데 반드시 필요한 시기였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나 한국에서의 이러한 움직임을 침략 대 저항으로 단순 도식화시킨다거나, 일본과 비교하여 ‘민족에너지의 분열’로만 규정짓는다는 것은 각 민족사의 내재적·주체적 발전과 이에 반드시 소요되는 역사적 도정을 부정함으로써 패배주의적 역사관으로 흐를 가능성을 경계해야할 것이다.

중국은 청일전쟁 이후 반세기 동안의 경험을 통해 근대적 의미에서의 ‘민족’ 개념을 재발견함과 동시에 지금까지 자신의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근대사적 의미의 ‘인민(people)’이라고 불리는 계층을 탄생시켰다. 같은 기간 조선이 경험한 역사는 민족의식의 고양과 더불어 ‘인민’과 ‘국민’을 아우르는 분열된 역사상을 맺게 된다. 일본인들은 전쟁 이전에 이미 형성된 천황제 하의 ‘신민’으로써 20세기 중반을 맞는다. 패전 이후 이들 일본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신민’으로부터 ‘시민’으로 변신했는지 단정할 수 없다. ‘신민’ 시대의 역사를 과거의 역사로 잘라서 단정할 수 있는 증거가 아직은 빈약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朴英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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