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1. 청·일군의 조선 출병과 농민군의 전주성 철수

1. 청·일군의 조선 출병과 농민군의 전주성 철수

1894년 시작된 청일전쟁은 이른바 ‘청·일 각축기’의 최종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킨 계기는 조선의 정치적·군사적 지배와 시장의 장악에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자신들의 ‘이익선’ 확보를 위해 군비확장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178)中塚明,≪近代日本と朝鮮≫(三省堂, 1977), 54∼55쪽.
藤原彰·今井淸一·大江志乃夫 編,≪近代日本史の基礎知識≫(有斐閣, 1983), 139∼140쪽.
일본은 1876년 함포의 위력을 매개로 조선을 강제 개국시켰고, 1880년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개입하여 우리 나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끝내 청국에게서 그 우위권을 빼앗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청국과의 전쟁을 겨냥하면서 조선 지배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목적아래 1884년부터 1894년까지 10여 년간 계속 軍備와 軍費를 증강하면서 그 돌파구를 모색하였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청국의 ‘속방’인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명분을 제시하면서 군대 파견을 통한 조선 침략의 기회를 넘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94년의 농민전쟁 발발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침략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는 절호의 ‘外事’ 즉, 기회로 파악하였고 그것은 출병 기회를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한 나라의 군대를 다른 나라에 주둔시켜 그 나라를 자신들의 이해관계 아래 두는 것은 설령 그들의 힘이 강하더라도 대내외적으로 어느 정도의 명분이 필요한 것이다. 일본정부는 조선 침략의 결정적 시기를 모색하고 있던 중에 전라도 농민군의 전주점령 보고를 듣고 이를 더없이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출병을 결정하게 된다.

일본내의 극우세력들과 언론은 이미 그해 1월부터 조선정책에 우유부단하고 ‘늙고 게으른’ 오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공사를 체임시키고 군대를 파견하자는 여론을 조성하고 있었으며,179)≪二六新報≫, 명치 27년 2월 25일. 4월경부터 일본정부는 조선출병을 대비하여 비밀리에 郵船會社 등에 운수 및 군 수요물품의 징발을 지시하고 있었다. 이 무렵 일본은 군사파견을 기정사실화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일본 政局當路者 중 조선정책에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던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도 “출병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는 것을 면할 수 없다”180)陸奧宗光,≪蹇蹇錄≫(岩波書店, 1940), 14∼16쪽.고 말한 바와 같이 아직까지는 청국을 대상으로 한 본격적인 전쟁준비는 아닌 듯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청국정부는 처음부터 일본정국의 형세를 오판하고 있었다. 청국의 실력자 袁世凱 등은 일본은 항상 정부와 의회의 알력으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는 등의 대결단을 행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다.181)≪蹇蹇錄≫, 19쪽. 조선의 농민전쟁에 대해서도 일본과는 다르게 평가하고 있다. 청국은 제1차 농민전쟁의 핵심을 反封建으로 이해하고 농민군이 제기하는 외국인 구축은 명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은 농민군의 핵심주제는 反倭洋으로 평가하고, 이에 조선을 ‘보호’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182)≪淸季中日韓關係史料≫6(臺北:중앙연구원근대사연구소), 갑오 5월 17일, 3381쪽. 당시 청국정부는 일본보다 자국의 힘이 우세하다고 단정하고 양국간의 전쟁발발 가능성을 인식치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청국은 즉시 철수를 하지 않고 지연하여 일본의 출병 기회를 제공하였다.

농민전쟁과 그로 인한 청군출병은 일본정국의 국면전환 계기로 작용하여 일본정부와 군부는 의회해산과 출병의 구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즉<天津條約>을 근거로 드디어 4월 29일 일본 천황은 조선파병 결정을 재가하는데, 이는 민씨정권의 청국군 개입요청보다 하루 빠른 것이다.183)朴宗根 著, 朴英宰 譯,≪淸日戰爭과 朝鮮:外侵과 抵抗≫(一潮閣, 1992), 16쪽. 결국 일본의 침략의도는 이미 짜여져 있었으며 향후 계획된 수순을 밟아가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만한 점은 일본 국내 여론의 동향이다. 자국 정부의 의지를 일찍부터 간파한 일본언론은 정부의 과단성을 촉구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초보적인 전쟁준비 절차와 방법론을 제시하고 군사를 동원한 개입을 권고하는 등 정부를 부추기고 있었다. 조선정부의 청국군 개입 요청일인 4월 30일 보다 4일 전인 같은 달 26일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자신이 깊게 관여하고 있던≪時事新報≫에<내란은 일본에 있어 중대하다>라는 제목의 논설에서 청국과의 전쟁 필요성과, 그 일환으로 조선의 농민군 진압에 일본정부가 앞장설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농민군의 ‘소동’은 일본의 권위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따라서 청국병사가 출동하면 자신들도 출동하여야 할 것이라 주장하였다. 후쿠자와는 그 방법으로 군함 외 별도의 보호 조처가 있어야 할 것, 兵隊를 파견할 것 등을 제안하고, 전쟁준비를 암시하는 표현인 “臨機의 工風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184)≪時事新報≫, 명치 27년 5월 30일. 특히 결론 부분에 “당국자의 주의를 요하는 바”라 하여 처리에 신중성을 기할 것까지 역설하였다.≪萬朝報≫역시 조선문제 ‘해결’과 대청전쟁 수행의 또 다른 명분으로 明治 10년 西南의 亂 이래 ‘20여 년간에 걸친 일본의 태평’을 들고 이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요구하게 되는 상황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185)≪萬朝報≫, 명치 27년 6월 13일. 이러한 여론과 더불어 전쟁준비의 본격화가 이루어진 이즈음 일본정부는 5월 4일<陸海軍省令>을 발해 보도관제를 선포하였다.186)≪國民新報≫, 명치 27년 6월 9일. 이날 일본내의 대외강경파는 출병응원을 선언하고,187)≪郵便報知新聞≫, 명치 27년 12월 30일.<명치 27년 회고의 일록>. 5월 7일 자유당은 시찰원을 조선에 파견하여 농민전쟁의 사정을 조사 보고케 하였다.188)≪萬朝報≫, 명치 27년 6월 10일. 5월 14일에 이르면 국권주의자들은 스스로 민병대를 구성하여 민간차원에 이르기까지 농민전쟁에 적극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189)≪大阪每日新聞≫, 명치 27년 6월 17일. 이렇듯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일본정부는 청일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종일관 제3국의 개입을 우려하고 전쟁을 청일 양국간으로 한정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보이고 있었다.190)≪蹇蹇錄≫, 17쪽. 재야에서도 여타국의 개입을 강력 대응하겠다고 결의하였다.191)≪萬朝報≫, 명치 27년 6월 13일.

반면 청국은 일본 조야의 조선침략과 대청정책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과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시 일본을 압도했던 사실을 회상하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만약 전쟁이 벌어지는 형국에 도달하더라도 당연히 일본에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안이한 인식은 외국관리는 물론 상인과 농민군을 포함한 우리 나라 대다수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역시 양국이 전쟁을 치르게 된다면 당연히 청국이, 그것도 최초의 1·2차전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다.192)≪蹇蹇錄≫, 32쪽.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국정부는 다가올지도 모를 전쟁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그와 같은 사실은 이홍장이 “우리의 군대가 조선에 파병되면 곧 일본에 알려야 되니 우리는 일본과 무력적인 대결도 불사하게 될 결정적인 시기에 봉착할 것이다. 이때를 위하여 우리는 만반의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원세개에게 일을 보아가며 살피도록 해야 한다”고 훈령한 데서 알 수 있다.193)≪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13-5(北京:文海出版社, 1963), 北洋大臣來電.

제1차 농민전쟁을 구실로 조선을 둘러싼 청·일 양국이 이와 같은 조선정책을 전개하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조선은 내부적으로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었다. 특히 전라도 전역에서 활동하던 농민군은 드디어 4월 27일 전주를 점령하였다. 농민군에 의한 전주점령 직후부터 정부의 借兵문제 논의는 본격화되었다. 농민군을 ‘미친 벌떼와 궁한 개’194)≪駐韓日本公使館記錄≫4(번역본, 국사편찬위원회, 1898), 1894년 6월 20일, 發第82號, 日兵 入京에 관한 韓國 朝廷 및 京城內의 상황 탐정보고, 131쪽.로 비유한 선혜청 당상 閔泳駿은 무기력한 중앙군과 지방군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에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집권 민씨세력은 초토사 홍계훈의 청에 따라 청국의 ‘天兵’의 힘을 빌어 이들을 토벌토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비밀리에 이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민영준의 淸軍借兵論은 조정에서도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그 이유는 ①外兵에 의해 ‘몇만의 생명(농민군)이 절멸’당할 것이며, ②외병의 통과지역 등에서는 막대한 폐해가 생겨 인심을 동요시킬 것이기 때문이며, ③일본과 구미열강이 그들의 공관이나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파견할 위험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195)朴宗根, 앞의 책, 12쪽. 농민들의 봉기원인을 직시하고 있던 영돈령부사 金炳始는 “수렴정치에 견디지 못하여 백성이 起鬧한 것을, 바로 동학도에 그 책임을 돌려서 수천 명을 살상한 것도 참지 못하겠거니와, 여기서 淸兵을 청원한 것은 또 하나의 실책이다. 타국의 병을 빌려서 우리 백성을 살해한다는 것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인가”196)≪東學亂記錄≫上,<甲午實記>(국사편찬위원회, 1959), 14쪽.라 하면서 민영준 등의 請兵을 힐책하였다. 당시 국제정세에 밝은 洪鍾宇도 5월 9일 민영준과의 대좌에서 청군출병은 일본측에게 출병의 구실을 주고 결과적으로 민영준은 권좌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충고를 하고 있었다.197)金正明 編,≪日韓外交資料集成≫4, 日淸戰爭編(東京:巖南堂書店, 1965), 일청양국의 군대파견에 관한 탐정 보고의 건, 24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국군을 부르는 것은 당시 집권 권력층의 입장에서는 부득이 취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정부는 원세개를 통해 군사파견 요청서를 전달하였고, 청국은 군함을 곧바로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 청에 따라 5월 5일에는 聶士成이 지휘하는 청국군 1천 명이 충청도 아산만에 상륙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 역시 청국과 조선의 정국을 살피면서 5월 4일 청국측에 일본군의 조선출병을 통지하였고, 5월 6일 공사 오오토리는 일본군을 인천항에 상륙시켰다. 이날 본국에 있던 보병 제11연대 선발대도 우지나(宇品)港을 출발하였다.

그런데 청일양국의 군사배치 목적은 각기 달랐다. 그것은 출병과정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농민군 진압과 종주권 강화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던 청국은 농민군의 근거지와 근접지인 아산에 주둔하였다. 반면 인천과 왕궁이 있는 경성에 주둔한 일본군은 조선의 내전에 따른 영사관과 자국 신민 보호를 명분으로 하지만 실제는 정권전복을 통한 대청 우위와 조선지배에 목적이 있었다.

청·일군의 조선출병은 농민전쟁의 판도를 轉變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전주를 점령한 농민군은 양국 군사의 출병으로 심각한 문제가 도래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全琫準 등 농민군 지도부는 이를 청일전쟁이라는 국제분쟁이 야기될 것을 깊이 우려하고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온 5월 8일 전주에서 정부측과 강화를 체결하였다. 곧바로 전주성을 철수한 농민군은 이후 전라도를 중심으로 각처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5월 11일 전봉준 등은 순변사 李元會에게<全羅道儒生等原情>을 제출, 14개조의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198)金允植,≪續陰晴史≫上(국사편찬위원회, 1960), 갑오 6월, 322∼326쪽. 이후 향촌내의 질서를 바로잡고 내부모순 해결에 치중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진행시켜 나갔다.

이렇듯 전주화약이 성립되게 된 배경에는 농민군측의 경우 청일전쟁과 관련하여 볼 때 크게 두 가지가 언급될 수 있겠다. 먼저 농민군은 예상되는 청국군의 진압을 크게 두려워하여 수만의 군사가 왔다는 소식에 전력의 열세를 고려하여 화해협정을 맺게 되었다. 두번째로 전봉준은 청·일 양국군의 출동으로 인한 국제분쟁과 그것으로 인해 초래될 조선의 국가적 위기를 막아보려고 깊이 고려하였다.199)鄭昌烈,≪甲午農民戰爭硏究-全琫準의 思想과 行動을 중심으로-≫(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91), 160∼161쪽. 그러나 농민전쟁의 휴지기(전주화약후 집강소 시기)가 됨에 따라 조선에 주둔할 명분이 약화되자 곤혹스러워진 일본은 5월 17일 충청·전라도 지방에 시찰요원을 파견하여 농민군의 실상을 파악200)≪統署日記≫3(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고종 31년 5월 17일, 330쪽.하는 한편, 이른바 ‘내정개혁’을 빌미로 조선문제 개입명분을 찾기 위해 다시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이 보다 며칠 앞서 일본 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는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친일개화파 정권을 수립할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201)杉村濬,≪明治二十七·八年 在韓苦心錄≫(1904), 12∼13쪽.

이미 일본공사 오오토리는 청국군 출병에 우선하여 자국정부에 1천 명 규모의 군사를 조선에 파병시키자고 주장하면서, 청국군과 더불어 민란을 진압할 것과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자고 제안한 바 있었다.202)藤村道生,<日淸戰爭>(≪岩波講座日本歷史≫16-近代 3, 岩波書店, 1980), 15∼16쪽. 그러나 5월 5일 일본군 조선파병 문제에 관한 스기무라와의 회견에서 외무독판 조병직은 농민전쟁으로 ①약간의 소요는 있지만 서울은 안전하고 농민군도 조만간 진정될 것이니 일본병을 파견 주둔시킬 필요는 없다고 하여 과거 임오군란시와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②일본이 군사를 파견하면 각국이 모방하여 조선은 물론 동양 전체에 큰 해가 될 것이며, ③일본병이 서울에 들어오게 되면 인심이 흉흉해질 뿐더러 ‘의외의 폐’를 일으킬 우려가 있다203)伊藤博文 編,≪秘書類纂 朝鮮交涉資料≫中(비서류찬간행회, 1936), 명치 27년 6월 9일, 公使館護衛兵派遣ノ儀通知顚末, 372∼373쪽.고 하여 일본군의 파병을 사실상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전주화약 성립 직후 ‘내정개혁’의 명분으로 대규모의 혼성여단을 조선에 진주시켰다.204)朴宗根, 앞의 책, 22쪽. 이는 일본의 침략의지를 극명하게 알 수 있는 것으로, 당시 오오토리공사도 다수의 호위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본국정부에 상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군사를 조선에 대거 상륙시켰다.

일본의 ‘내정개혁’ 제안에는 상당한 계산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첫째, 당면의 긴급과제였던 철병을 회피하고 주둔을 계속하기 위한 구실을 마련함과, 둘째, ‘내정개혁’에 의해 청을 도발케 함으로써 開戰에 끌어넣고자 하였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 ‘내정개혁’을 권고하고 이로 인해 청·일 양국군의 전쟁을 촉진하게 된다면 오히려 다행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205)≪駐韓日本公使館記錄≫3, 1894년 6월 15일, 동학란 변란시 한국군대 보호에 관한 일청교섭관계 1건, 133쪽. 셋째, ‘근대화’를 명분으로 미국과 영국의 지지를 얻는데, 이는 또한 구미의 상품시장이 되고, 넷째, 조선에서 일본의 정치·경제적 지배를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206)朴宗根, 앞의 책, 37쪽. 결국 이는 피상적 ‘개혁’을 빌미로 농민군의 의지를 희석화 내지 무력화하기 위한 기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를 위한 공작으로 일본은 상황을 급박하게 전개시켜야 하고, 한편으로는 이를 왜곡시킬 필요가 있었다. 5월말∼6월초의 어느 기간에 외무대신 무츠는 오오토리공사에 훈령하여 병사를 계속 주둔시키고 농민군 조사에 지연책을 쓸 것과, 농민군의 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양 허위보고서를 작성할 것을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우리 군대의 철수가 지연되는 이유로 삼기 위해 각하는 공공연한 방법을 써서 공사관의 직원이나 영사관의 직원을 폭동이 일고 있는 지방에 파견하여 실황조사를 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실황조사는 될 수 있는 대로 느리게 천천히 할 것이며, 그 보고서는 고의로라도 평화로운 상태와는 반대가 되도록 작성케 할 것을 절망한다. 만약 시찰원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면 순사를 수행케 하여도 무방하다. 또한 조선정부가 평화와 질서가 회복되었다고 말하면서 우리 군대의 철수를 요구해 올 경우에는 제국정부와 각하가 만족할만한 바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실황조사차 특별히 파견한 관리의 보고를 기다려야 한다고 답변하여야 한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3, 1894년 6월 15일, 동학당 변란시 한국군대 보호에 관한 일청교섭관계 1건, 123쪽).

그것은 일본군의 철수를 지연시키는 한편 주둔 명분을 억지로라도 찾으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다. 일본이 청일전쟁을 도발한 이유는 정치·군사적 요인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내의 전쟁 도발 여론은 경제적 측면에서도 작용하고 있었다.≪大阪每日新聞≫은 6월 중순<동학당 반란이 일한무역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인천항의 5월(양)중 무역 상황을 설명하고 ‘동학당의 요란’으로 인해 해초와 牛皮의 무역 수량 감소가 현저하다고 통계를 비교 분석하여 주장하였다.207)≪大阪每日新聞≫, 명치 27년 7월 15일.≪萬朝報≫도 ‘鷄林의 亂’이 일본경제에 미치는 영향으로 ①商船이 결핍하여 정기항해를 중단하기까지 하고, ②운임은 점차 등귀하고, ③생산지의 물가는 더욱 하락하고, ④수요지의 물가는 더욱 증가한다고 하였다. 결국 ‘조선의 내란=선박의 결핍=운임의 등귀’로 이어지고 생산지와 수요지의 가격차는 현격히 심해지기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신문은 일본 국내의 여론을 환기시켜 전쟁을 유도하고 있었다.208)≪萬朝報≫, 1894년 6월 9일. 그러나 이 시기 대부분의 언론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 그대로 ‘공황’은 필연의 형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본 내부의 경제적 모순은 농민전쟁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전가시키는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시각은 후일 청일전쟁 과정에서 일본의 조선이권 획득정책에 반영되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제2차 농민전쟁의 원인으로도 작용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이상의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일본의 조선침략과 대청전쟁의 각본은 어느 정도 구색이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내 일본 외교당국자 사이에 의견이 반드시 일치되어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전쟁수행 방침도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공사 오오토리는 온건정책을 취하였던 데 반해 간혹 공사의 업무도 대행했던 1등 서기관 스기무라는 강경책을 견지하였다. 당시 정부측의 강경론은 대본영의 방침에 의거한 것으로 스기무라와 군참모들이 수행하고 있었다.209)朴宗根, 앞의 책, 32쪽. 처음 일병 출동문제에 관하여만 해도 공사 오오토리와 오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여단장간에 불화가 있었다. 그러나 공사의 철병안을 일본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자 그 역시 대세를 간파하고 곧바로 강경노선으로 표변하였다. 이 시기 강경론이 지배적이었던 일본 조야에서는 청국과의 전쟁 직전인 6월 9일 국권주의적 입장에 서있던 일본내 주전론자와 전쟁불사파들이 대청전쟁을 기정사실화하고 전쟁권유와 명분을 축적하고 있었다. 당시 이와 같은 입장을 반영하고 있었던 대표적인 잡지는≪日本人≫인데, 7월 11일 草한 15호의<일청의 싸움은 드디어 피할 수 없다>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금번 조선사건은 만약 불행하게 국면을 평화로 종결지으면 바다를 건너간 장사, 들에서 暴露한 數旬, 一兵이 칼 써봄 없이, 총 한번 쏘아본 일없이, 앙앙하며 돌아오면… 동양천지는 영구히 平和穩安하다고 망령되이 단언할 수 없고 평화는 일시의 幻影이 될 뿐이다. 일청의 충돌은 결코 안개와 같이 소멸될 수 없다. 하루하루 고요함 속에 절박하여 옴을 알아야 할 것이다.”210)≪日本人≫15호(政敎社, 명치 27년 7월 18일), 1∼2쪽.

일본군이 서울에 들어온 후 조선정부는 곧 청일 양군의 철병을 위한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그 대책으로 저지의 방법을 조회하고, 공사를 면회하고자 고문관 르젠드르(Charles W. LeGendre, 李善得)를 인천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 모두는 스기무라 임시대리공사와 면회가 성립되지 않아 해결될 수 없었다.211)≪秘書類纂 朝鮮交涉資料≫中, 명치 27년 6월 11일, 大鳥公使帶兵入京ノ顚末, 375∼376쪽. 한편 민영환은 르젠드르와 함께 일본군과 청국군의 철병운동을 전개하였다 한다.212)≪大阪每日新聞≫, 명치 27년 6월 26일.

그러면 이 기간 청국군의 동향은 어떠하였는가. 청국 제독 葉志超는 5월 3일 청국을 출발하여 이틀 후인 5월 5일 충청도 아산에 도착하여 ‘倡亂한 土匪’ 정벌에 임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이를 고시하였다.213)≪隨錄≫(京都大 河合文庫 소장자료), 갑오 5월 10일,<甘結>. 그는 진주하자 마자 농민군 동향을 정탐하고자 5월 11일 제1지대를 전라도 전주에 파견시켰다. 다시 청국군은 5월 26일 충청도 공주에 도착하여 농민군이 집결해 있는 전라도로 전진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의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청국군 출병의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고 정찰결과를 보고한 후 5월 28일 그대로 공주에 주둔하였다. 섭지초의 부대는 6월 8일 아산으로 회군하여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214)參謀本部 編,≪明治 二十七·八年 日淸戰爭≫1(동경인쇄주식회사, 1904), 77∼84쪽. 그리고 농민군의 정세를 정찰한 섭지초는 6월 6일 ‘東匪’는 이미 진정되었고, 철회하여도 명분상 손해가 없어 일본군과 동시에 철병해도 될 것이라 주장하였고 ‘초가을에 서서히 대거를 도모’하자고 본국정부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6월 12일 철회되고 오히려 6월 17일 아산주둔 군대 외에 추가파견이 결정되었다. 그 결과 6월 21일 3척의 배로 증원병이 아산에 도착하였다. 증파된 병사들은 다음날 白石浦에 상륙하여 이후 성환에 근거하는 한편, 1천 명의 군사를 천안에 진주시켰다.215)≪明治 二十七·八年 日淸戰爭≫1, 86∼90쪽. 이들은 주둔하고 있던 충청도 각처에서 농민군의 동향을 계속 탐색하면서 본국정부의 훈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 일본공사 오오토리는 전라도의 “亂徒들은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라고 일시적 휴전상태로 인정하고 있었다. 공사는 농민군들이 다만 위축되어 전주에서 금구·고부로 퇴거한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면서 군대의 지속적 주둔을 통하여 공사관과 일본상인을 보호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216)≪駐韓日本公使館記錄≫3, 1894년 6월 17일, 機密第112號 本66, 일본군의 입경문제로 한국정부와 오고간 문서 제50호, 86쪽. 이러한 일본의 입장에 일정하게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던 安駉壽도 농민군의 재발을 우려하는 한편 5월 17일 일본공사와의 비밀담화에서 일본군대의 주둔을 청원하였다.217)≪駐韓日本公使館記錄≫4, 1894년 6월 24일, 發第85號, 조선국 政情에 관한 정보보고, 136쪽. 이와 아울러 홍계훈의 초토사군은 당시 군산에 정박한 筑紫艦에 병기와 탄약을 공급하였다 한다(≪大阪每日新聞≫, 명치 27년 6월 22일). 일본은 청국과의 전쟁을 기정사실화하고 그 사이에 농민군이 서울에 들어갈 것을 우려하였다. 만약에 사태가 예상과 같이 전개된다면 이는 자국 공사관·영사관 및 거류민의 安危와 직결되는 것으로 조기에 개입, 즉각 병사를 파견하여 이에 대응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청일 양군의 출병으로 인한 농민군의 전주성 철수는 ‘불가사의한 일’이나 이는 일시 잠복에 불과하다고 평가하고 있었다.218)≪時事新報≫, 명치 27년 6월 27일. 그러므로 조선과 청국의 일본군 퇴거 요구에 대해 그 대응책으로 농민군 재기의 움직임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진실로 평정되었다고 인정할 수 없으므로 철병요구에 응할 수 없다는 것을 정부는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219)≪東京日日新聞≫, 명치 27년 7월 3일.

이와 같은 농민전쟁에 대한 청·일의 인식차는 일본측 대표인 코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와 청국측 대표 孫毓汶의 대화에서 확연하게 나타난다. 코무라는 농민군은 청·일병 출동소식을 듣고 각처에 잠복하고 있는 것이므로 일본과 청국은 양국 병사의 주둔 필요성을 의논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 손육문은 전라도의 내란은 전부 진정되었고 농민군도 대부분 항복하였다 하여220)≪日韓外交資料集成≫4, 7월 9일 오후 4시 조선사건에 관해 總暑 王大臣과의 면담개략, 77∼78쪽. 이를 양국이 동시철병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6월부터 조선의 ‘내정개혁’에서 ‘종속’으로 명분을 전환한 일본은,221)朴宗根, 앞의 책, 43쪽. 왕궁점령·청일전쟁 도발 직전인 6월 14일 영국과<영일개정조약>을 조인하는 등 조선 경략시 영국의 협력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영국측 조약대표인 킴벌리(Kimberly)외상은 이 조약은 “청국의 대병을 패주시키게 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우세한 것이 된다”고 하면서 다가올 청국과의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전망하였다.222)≪岩波講座 世界歷史≫近代 9-10, 東洋篇 Ⅶ(1978), 426쪽. 영국은 청일전쟁뿐만 아니라 이후 러일전쟁기에도 일본과 몇 차례의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전쟁 승리와 조선 지배정책 강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정도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대조선 침략 파트너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영국의 외교적 지원에 고무된 일본정부는 6월 17일 오오토리공사에게 청국을 상대로 한 개전방법을 일임하였다. 이날부터 경부 군용전신선 가설에 착수하였다. 이에 오오토리는 6월 18일 조선측에 청국군 퇴거와 굴욕적 불평등 무역조약으로 악평높던<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폐기를 강하게 요구하였다. 그리고 청국과의 개전에 즈음하여 전쟁에 임하는 온·강 양면의 ‘표리 2개주의’를 채택하였다.223)藤村道生, 앞의 글, 23쪽. 무츠에 의하면 이는 표면에서는 “이루어진 평화를 파괴하지 않고, 국가의 영예를 보전하고, 일청양국의 권력 평균을 유지”한다고 하면서, 이면에서는 “전력을 다하여 당초의 목적을 관철”하는 것이었다.224)≪蹇蹇錄≫, 17쪽. 이에 대본영에서는 ①해전에서 승리하여 제해권을 수중에 넣을 때는 육군은 북경으로 돌입한다. ②해전의 승패가 미결될 때에는 조선의 유지를 꾀한다. ③크게 패하여 제해권을 상실할 경우는 일본은 대륙으로부터 빠진다는 3가지의 상이한 전략적 개념을 정하였다. 당시 일본정부는 패전상태까지 염두에 두면서 계획을 진행시킬 정도로 전쟁의 승리를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후 전쟁 진행과정에서 일본은 자국측에 가장 유리한 ①안에 근접하는 형태로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225)藤村道生, 앞의 글, 26쪽. 이와 같은 일본의 전쟁방침에 대해 이미 6월 12일 이전부터 조선상인들은 청·일간의 一戰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 감지하고 일본인으로부터 상품주문을 중단하고 잔금 회수에 분주하고 있었다.226)≪駐韓日本公使館記錄≫3, 1894년 7월 14일, 臨庶第39號, 貿易商 田中良助의 聞取書, 203∼204쪽. 개전 1달 전부터 전쟁의 움직임은 민간에서도 어느 정도 예견되고 있었다.227)“어느 누가 말을 전하기를 袁大人이 馬山浦에서 싸움을 신청하고 大鳥圭介는 城內에서 싸움을 청하였다고 한다”(崔鳳吉,≪歲藏年錄≫, 갑오년 6월초 1일).

청일전 이전 1893년부터 전쟁을 미리 계획한 일본군부는 농민군의 동향파악 등 첩보활동에 주력하였고 그 후에도 계속해서 정보수집을 하고 있었다.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은 1893년 4월 이치지 고우가이(伊知地幸介)와 다무라 이요조(田村怡與造) 두 명의 少佐를 조선과 청국으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이들은 첩보활동을 마치고 동년 8월 귀국하였다. 이 시찰에 기초하여 이후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또한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하던 1894년 5월경에는 경성공사관附 武官 와타나베 데스타로(渡邊鐵太郞) 대위 및 참모본부원 이치지소좌가 부산과 경성에서 첩보활동을 하였다.228)≪明治二十七·八年 日淸戰爭≫1, 94∼95쪽.
葛生能久,≪日支交涉外史(上)≫(黑龍會, 1938), 225쪽.
5월 30일 귀국한 伊知地 소좌의 복명을 받아 일본정부는 파병을 결정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본국내의 浪人을 조선에 진출케 하고 농민군과 접촉시켜 재봉기를 부추기고자 하였다. 특히 일본정부의 배후지원으로 조선에 진출하게 된 天佑俠을 비롯한 일군의 낭인배들은 자신들이 마치 농민군에 결정적인 힘을 부여할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義俠의 革命軍’을 자처한 천우협은 전주화약에 따라 상대적으로 일본군의 조선진출과 청국과의 개전 명분이 빈약해지자 이에 새로운 빌미를 마련하려고 부심하였다. 이는 국내의 이른바 ‘對外硬派’도 동일한 것이었다.229)葛生能久, 위의 책, 220∼221쪽. 비록 그들의 행로에는 미심쩍은 바가 많지만, 청일전쟁 직전 농민군의 정세파악을 위해 천우협의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등은 농민군을 방문, 이들의 의견과 목적을 정탐하고,230)≪二六新報≫, 1894년 11월 20일. 이를 본국정부와 대본영에 보고하여 전쟁수행의 참고자료로 활용토록 한 것만은 명백한 것 같다.231)천우협 낭인들과 농민군 지도부의 접촉문제는 姜昌一,<天佑俠と‘朝鮮問題’-‘朝鮮浪人’の東學農民戰爭への對應と聯關して>(≪史學雜誌≫97-8, 1988) 참조. 천우협과는 별도로 전직 군인 출신인 우미우라 도쿠미(海浦篤彌)와 그의 동행인 곤토 겐키치(近藤賢吉)·야마가타 이노스케(山縣伊之助)도 6월 18일 전봉준과 회견하여 그에게 재봉기를 촉구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농민군 추동설’은 실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점이 많으며 그들의 권유에 따라 농민군이 재봉기했다는 것도 명확히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면 청·일군의 조선출병과 관련하여 이 시기 농민군 동향은 어떠하였는가. 전주성을 철수한 농민군은 집강소에서 각처에 통문을 돌려 擧兵을 절제하고, 사태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6월 중순 경 태인·담양 등의 농민군은 집강소의 농민적 지배를 더욱 강화하고 있었다. 이 지역 대다수의 농민은 농민군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와 같은 사실은 다음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태인 담양간 촌락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土民은 대개 道人 아닌 자가 없었다. 門頭에 ‘道人이 아니면 이 문에 들어오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표찰을 걸은 2, 3 가옥이 있어 이 지방의 人氣를 알 수 있다.”232)海浦よし編,<東學黨視察日記>(≪初齋遺稿≫), 85쪽. 初齋는 海浦篤彌의 號다.

일본인 여행객의 보고에 의하면 집강소 활동에 주력하고 있던 전봉준·孫和中 등 농민군 지도부는 청일 양국의 출병이 불가하다는 사실과 각국 공사에게 군함 및 군대의 철회를 유세할 목적으로 공주를 거쳐 서울에 진출코자 한다는 풍문이 있었다 한다.233)≪駐韓日本公使館記錄≫3, 1894년 7월 23일, 臨庶第48號, 5월 14일부터 전라·충청지방을 여행한 상인 白木彦太郞의 聞取書 要點, 215∼217쪽. 이를 통해 전봉준 등은 적어도 가을에 다시 봉기하려고 계획하였고,234)≪初齋遺稿≫, 91쪽. 대일전 준비에 노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9월의 제2차 농민전쟁에 대비한 전봉준 진영의 준비상황은 크게 3가지 방향 즉, ①30여 명의 장교로 하여금 농민군 무장대를 훈련시키고,235)≪初齋遺稿≫, 93쪽. ②재정적 준비, ③민심의 수습236)≪初齋遺稿≫, 99쪽.을 통한 물리력 확보에 치중하고 있었다.

<趙宰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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