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2. 청일전쟁의 발발과 농민군의 정세인식

2. 청일전쟁의 발발과 농민군의 정세인식

쿠데타를 통하여 친청 민씨정권을 뒤엎고 친일정부 수립을 구상하고 있던 일본정부는 청국과의 개전이라는 급박한 사안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6월 중순에 가면 조선문제에 관한 일체의 自決權을 오오토리공사에게 부여하여 조선 지배정책 추진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237)≪時事新報≫, 1894년 7월 17일. 일본정부는 자신들의 출병목적은 “청과의 개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정부의 개혁에 있다”고 언급하면서, 그러나 “이 목적을 방해하는 자는 누구도 용서 못하고 전쟁도 불사할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고 있다.238)≪大阪每日新聞≫, 명치 27년 7월 19일. 청일전쟁 직전에 이르기까지도 일본군의 정탐활동은 계속된다. 특히 6월 11일 노구치(町口)중위 등 일본군의 평양정찰은 그곳 민중의 강렬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고, 中和에서 임무를 계속하였으나 그것조차 여의치 않아 다시 황주로 퇴거하였다.239)參謀本部 編,≪明治 二十七·八年 日淸戰爭≫2(동경인쇄주식회사, 1904), 1∼2쪽. 이러한 시기에 일본은 6월 21일 새벽 그들의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 궁궐수비 조선군을 무장해제시키고, 곧 이어 기존의 정부 구성원들을 축출하는 한편 새롭게 친일정권을 수립시켰다.

甲午倭亂 또는 경복궁 쿠데타로 불리는 일본군에 의한 왕궁점령은 중앙정부는 물론 재야 모두 일본에 의해 국권이 종속될 풍전등화의 위기로 인식되었던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에 따라 농민군의 활동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왕궁을 일본군이 점령하였다는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삼남지방에까지 전파되었다. 이에 전라도 일부 집강소의 농민군은 6월말부터 군사를 다시 일으키기로 논의하고,240)≪東京日日新聞≫, 1894년 8월 5일. 일본군과 그들 거류민을 쫓아낼 목적으로 무장을 강화하여 즉각 북상하였다. 利仁에서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개설하여 결전의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241)洪性讚,<1894년 執綱所期 設包下의 鄕村事情>(≪東方學志≫39, 1983), 70∼72쪽. 영남의 농민군도 즉각 봉기에 돌입하였다. 특히 이 지역의 경우 일본군의 상주 낙동과 함창 태봉의 병참기지 설치는 농민군을 크게 자극하는 것이었다.242)申榮祐,<1894년 영남 예천의 농민군과 보수집강소>(≪東方學志≫44, 1984). 7월 1일 무렵 농민군들은 충청도·전라도·경상도 각처에서 봉기에 돌입하는 등 지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243)“충청도뿐만 아니라 전라도도 다시, 각도에 있어서도 모두 舊 7월 1일로 봉기하였다”(≪大阪每日新聞≫, 명치 27년 8월 20일). 충청도 黃山의 경우 이 기간 두 차례의 봉기 소식을 단편적으로 접할 수 있는데, 첫번째 봉기에서 특이한 것은 이 지역 농민군은 다른 지역보다는 며칠 앞선 6월 22일∼23일 사이에 봉기에 돌입한다는 점이다. 그 목적은 청국인과 단결해서 서울로 공격해 들어가겠다는 계획이었다 한다.244)≪駐韓日本公使館記錄≫3(국사편찬위원회, 번역본, 1988), 1894년 8월 16일, 臨庶第78號, 충청도 黃山地方 東學黨 재발상황 문취서 별지보고, 240∼241쪽. 그렇지만 날짜상으로 볼 때 일본군의 경복궁 강점이 이루어진 하루 뒤이기 때문에 지방에서 즉시 소식을 접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곳도 여타 지역과 비슷하게 일본군의 왕궁점령 소식을 듣고 청·일개전이라는 위기의식과 관련 7월초 재차 봉기에 돌입, 軍需를 확보하면서 계속해서 인접한 강경 지역으로 모여들고 있었다.245)≪駐韓日本公使館記錄≫3, 1894년 8월 10일, 臨庶第44號, 충청도 黃山의 동학당 재발 等에 관한 별지보고, 236∼238쪽. 그러나 이때까지 농민군 측은 조직적이고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는 단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습은 경복궁 점령으로 인해 분명 국권이 위기상황에 돌입하였음을 감지한 농민군의 상황인식과 대응임은 분명하다.

6월 21일 경복궁 침입을 전후로 한 기간 청일군의 동향을 살펴보면, 먼저 다수의 청국군은 평양을 중심으로 조선 북부지역에 포진하고 있었다. 충청도에서는 농민군 토벌을 위해 각처로 파견되었던 일부 군사들도 아산으로 귀환하고 있었다.246)≪明治 二十七·八年 日淸戰爭≫1, 117쪽. 반면 왕궁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후 곧바로 교전을 위해 청국군 주력이 주둔하고 있던 아산지역으로 전함을 대거 급파하는 형국이었다. 6월 23일 오오토리공사는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해 그로부터 청국군의 ‘驅逐 依賴’를 획득할 수 있었다.247)朴宗根 著, 朴英宰 譯,≪淸日戰爭과 朝鮮:外侵과 抵抗≫(一潮閣, 1992), 76∼77쪽. 이날 일본 해군은 아산 앞바다 풍도 일원에 있던 청국함대를 기습적으로 선제 공격하였다.

이로부터 청일전쟁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일본 외무대신 무츠는 청일교전의 원인은 ‘조선의 독립’과 ‘내정개혁’248)陸奧宗光,≪蹇蹇錄≫(岩波書店, 1940), 121쪽.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그는 아산전투도 조선정부의 위탁을 받아 청국군을 쫓아내는 일로부터 발단된 것이라고 일본정부가 국제적으로 표명하였지만, 실제로는 일·청 양국간의 문제라고 보았다.249)≪蹇蹇錄≫, 104쪽. 여기서 무츠는 일본측의 궁극적 목표는 청국과의 전쟁을 통한 동아시아 제패에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치밀한 사전 계획과 준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작전 수행은 여러 점에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아산전투 직후 일본군은 곧바로 성환에서 청국군과 전투를 하게 되는데, 전투과정에서 어려웠던 것으로는 우선 병참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였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일본군을 침략군으로 보고 있었던 조선민중의 반일감정과 비협조, 완강한 저항, 대다수 지방관의 일본군 지령 회피, 대원군을 비롯한 정권 담당자의 비협조뿐 아니라 농민전쟁의 재발 우려 등 전투 외적인 상황의 전개였다. 마지막 문제와 관련하여 7월 1일 천황의 대청 선전포고 후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 외무대신은 주일 미국공사를 설득하여 농민전쟁의 근원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미국정부에 전보토록 하였는데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공사는 본국정부에 電稟하였다.250)≪蹇蹇錄≫, 78쪽.

심지어 6월말 수원에서는 징발된 인마의 도망에 대한 책임추궁을 우려한 보병 제21연대 3대대 대대장 코시 마사츠나(古志正綱)가 자살하는 사건까지 있었다.251)≪明治 二十七·八年 日淸戰爭≫1, 131∼132쪽. 만약 이 같은 상황이 계속 연출된다면 전투에서 이기고도 전쟁에서 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이 전쟁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인식한 일본은 후일 8월의 평양전에서는 각별히 유념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일본군의 압승으로 귀결되었다. 청국군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 패배하였다. 7월 4일 성환은 일본군에게 함락되었고, 청국군은 조선 남부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면 청국은 왜 초기의 전투에서 어처구니없는 참패를 당하였는가. 청국은 전쟁으로 다가올 결과를 오판하고 자국의 승리를 당연한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252)“현금 왜노는 궁성을 점거하고 畿近에 주둔하여 좌우를 엿보고 있다. 인천·공주·평양의 해륙 부근은 넘지 못하고 있다. 생각컨대 天兵에 피해를 입을 것 같아서이다”(≪淸季中日韓關係史料≫6, 臺北:중앙연구원근대사연구소, 3606쪽). 또한 아산과 성환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7월말 이후에 이르기까지도 청국군은 즉각 전면전을 구상하지 않고 완만한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평양에 장기 주둔하고 남하할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았다.253)≪駐韓日本公使館記錄≫5, 1894년 8월 31일, 機密第176號 本100, 조선정부 내정개혁의 전반적 진행상황, 29쪽. 이러한 오판된 장기주둔책으로 일본은 다음 전투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이후 일본군대는 계속 조선에 증파되었다. 결국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평양전투의 승리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산·성환전투의 결과 일본측 입장에 동조하는 일부 지역의 지방관은 일본군의 승리 격문을 자신의 관내에 붙이고 兵杖의 운반에 병참부 인접지역의 주민을 동원하였다.254)李晩燾,≪響山日記≫(국사편찬위원회, 1985), 갑오 7월 9일, 687쪽. 보수관료 출신으로 경북 禮安의 향제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이만도 역시 이곳에서 일본군 군수물자의 강제운반에 참여하였다. 초전의 승리에 고무된 일본은 이후 진무책을 고안하여 이를 조선인민에게 관철시킬 좋은 기회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7월부터 한편으로는 강경진압책을 다른 한편으로는 회유와 동화정책을 채택하였다.255)伊藤博文 編,≪秘書類纂 朝鮮交涉資料≫中(비서류찬간행회, 1936), 명치 27년 8월, 朝鮮國內戰後警察ニ關スル上申, 405쪽. 이는 제2차 농민전쟁 이전 일본군의 대 농민군 정책의 골격을 수립한 것이며, 종래의 견제적 작전에서 공세적 작전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256)일본육군성 편,≪明治軍事史≫(原書房, 1966), 913쪽.

그것은 7월 17일 일본 각의에서 甲乙丙丁의 조선정략 4개안 수립에 반영된다.257)≪蹇蹇錄≫, 134∼139쪽. 이는 아산·성환전투 직후 오오토리공사의 새로운 정세에 대처할 일본의 대조선정책 요구에 의한 것이다. 그 골자를 보면 甲案은 ‘일본 승리 후 자치론’, 乙案은 ‘보호국화론’, 丙案은 ‘일청제휴론’, 丁案은 ‘조선중립화론’이라 할 수 있다. 일본정부는 일단 乙案을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는 보다 강력한 조선침략 정략을 채택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 이해관계를 가진 외국의 간섭이 우려되는 등 위험부담이 따를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다면 조선정책은 열강의 반응을 예의 주시하는 선에서의 ‘보호국화’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아산전투 후 농민군의 활동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對淸戰 수행과 관련한 일본군의 조선인 인부 동원과 식량 징발에 대해 7월 하순 경상도 함창현의 농민군은 “縣官을 포박하고 책하기를 인민을 무임으로 일본을 위해 사역케 했다고 하고 인민에게는 일본의 용역에 따르지 말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현관의 명령에 응하는 사람이 없고 현관은 두려워 사직하거나 또는 거처를 옮겨 그의 소재지를 알지 못할” 정도가 되어 있었다 한다.258)<中路兵站監本部陣中日誌>, 67쪽(朴宗根, 앞의 책, 200쪽에서 재인용). 아산전투 후에도 대다수의 관료층과 농민들은 현재는 일본군이 승리하였지만 결국에는 청국군에게 패망할 것이라 전망하였다. 당시 많은 조선인들은 청국함대, 특히 북양함대는 규모와 질에 있어 일본의 함대에 비해 월등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심지어 청국이 선박에 군기와 군량을 싣고 바다를 건너 일본 내륙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이 기간 俄羅斯(러시아) 병사 20만 명이 討倭를 위해 우리 국경에 머물고 있다는 헛소문도 있었다.259)필자 미상,≪記聞錄≫, 갑오 7월 17일 및 朴冀鉉,≪日史≫, 갑오 8월 19일. 이 때 농민군 지도부는 비밀리에 사자를 서울에 보내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260)≪二六新報≫, 1894년 11월 14일,<동학당의 진상(5)>.

한편 충청도 아산의 농민군은 아산전투 후 다시 봉기한다. 청국군의 아산 도착 직후 곧바로 퇴산한 이곳의 농민군은 이 기간 재집결하고 평양에 있는 청국군과 제휴하여 전쟁에 총력을 기울여 일본군을 퇴치하고자 하였다. 이 지역은 초기 청일전쟁의 중심지로서 청국군의 주력이 주둔하고 있었던 지역적 특수성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 곳의 농민군은 성내에 “지금 형세로 보아 청국이 와서 돕고(청일전쟁) 본국에서 의병을 일으켜(농민전쟁) 내외에서 협공하면…” 이라는 내용의 방문을 붙여 북상을 통한 일본군의 축출을 호소하였다.261)≪駐韓日本公使館記錄≫5, 1894년 9월 26일, 機密第189號 本112, 충청도 동학당에 관한 휘보, 47∼49쪽. 8월 중순 전라·충청도의 농민군은 연합하여 대대적인 서울진격전을 구상하였고,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은 대본영에 구원병 추가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미 전봉준 등 집강소의 농민군 지도부는 일본군의 왕궁점령과 아산전투의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7월초 남원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감사 金鶴鎭측으로부터 파견된 사마 宋寅會로부터 들었을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전봉준은 곧바로 밀사를 대원군에 파견하여 그의 섭정을 지지하고 개혁을 권유하였다 한다.262)≪二六新報≫, 1894년 11월 14일,<동학당의 진상(5)>. 그러나 당시 집강소 활동에 주력하고 있던 전봉준은 주로 내부문제에 치중하여 개혁사업을 전개해 나가고 있었다. 이 당시까지도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는 일본군의 조선진출과 왕궁점령을 식민지화의 결정적 위기로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263)鄭昌烈,≪甲午農民戰爭硏究-全琫準의 思想과 行動을 중심으로-≫(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91), 236∼237쪽. 이들은 농민전쟁을 지속시키면서 농민적 지향을 확산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일찌감치 북상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갑작스런 입성과 그로 인한 민씨정권의 붕괴로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내가 원래 병을 일으킨 것은 경성에 가서 정부의 간적을 없애기 위해서인데, 어찌 그들의 말을 기다릴까. 그런데 우리들의 상경에 앞서 일본병이 많이 경성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東京朝日新聞≫, 1895년 3월 5일,<東學黨大巨魁生擒(2월 18일 경성발)>;강창일,<갑오농민전쟁 자료발굴:전봉준 회견기 및 취조기록>,≪사회와 사상≫창간호, 1988, 256∼257쪽에서 재인용).

이에 그들은 제1차 전쟁의 입장을 계속 유지하는 한편 일본과 청국의 군사적 동향과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하면서 집강소에서 결정적 시기의 도래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산·성환전투 직후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의 구체적 동향은 다음과 같다. 7월 15일 농민군 지도부는 남원에서 청국과 일본의 개전과 관련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농민대회를 개설하는 한편 집강소의 통치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남원대회 이후 전봉준과 손화중·金開南 3인의 농민군 지도부는 청일전쟁 개전 직후의 정세인식과 농민군이 향후 취해야 할 방략에서 서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黃玹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봉준이 개남에게 말하기를 지금 시세를 보니 倭와 淸이 싸워 한쪽이 이기게 되면 반드시 군사를 우리 쪽으로 돌릴 것이다. 우리 무리가 비록 많으나 오합지졸이어서 쉽게 달아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귀화를 빗대어 각 고을에 흩어져 있다가 서서히 그 상황변화를 살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니 개남이 대중은 한번 흩어지면 다시 모으기 어렵다 하여 듣지 않았다(黃玹,≪梧下記聞≫2筆, 92쪽).

전봉준은 농민군을 해산시킨 후 기회를 포착하자고 하였고, 김개남은 대일전쟁 조기강행론을 주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손화중은 조기해산론을 주장하였다. 비슷한 입장에 있었던 전봉준과 손화중은 8월말까지도 ‘官民相和’의 집강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으나,264)鄭昌烈, 위의 책, 250쪽. 김개남은 이에 극력 반대하고 전면전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특히 전봉준과 김개남의 의견대립은 상호 접합점이 없었던 것으로 향후 제2차 전쟁시기에 가면 농민군이 집중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는 큰 요인이 되었다.

7월 17일 茂朱집강소 앞으로 보내는 통문에서 전봉준은 “바야흐로 外寇가 궁궐을 범하여 국왕을 욕보였으니 우리들은 마땅히 목숨을 걸고 義로써 싸워야 하나… 그 화가 宗社에 미칠지도 모른다. 물러나 은둔하여 시세를 관망한 연후에 세력을 모아 다음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萬全之策이다”265)≪隨錄≫(京都大 河合文庫 소장자료), 갑오 7월 17일, 茂朱執綱所. 라고 농민군의 현실적 입장과 향후 방략을 설명하고 있다. 이 무주통문에서는 주로 청국과 일본의 개전에 유념하면서 집강소내의 단속을 강화하는 문제가 제시되어 있다. 그 내용에서 볼 때 이 기간 전봉준은 경복궁에 침입한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고 탐색하는 데 치중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전봉준은 7월 중순경에 이르기까지도 전면전을 구상하고 있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농민군의 대일항전의 전면화는 평양전투 후 조선의 ‘보호국화’가 무르익어 가는 시기인 9월말 이후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趙宰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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