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3. 평양전투와 농민군의 동향

3. 평양전투와 농민군의 동향

먼저 평양전투 직전 청일군의 동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산과 성환의 전투에서 패한 청국병의 다수는 葉志超의 인솔 아래 관동과 관북으로 우회 퇴주하여266)≪東學亂記錄≫上(國史編纂委員會, 1959),<甲午實記>, 59쪽. 평안감사 閔丙奭의 적극적 원조로 평양에서 합류하게 된다. 여기에는 경복궁에서 왕실호위를 하다 일본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고 쫓겨난 조선수비대도 합세하였다. 나머지 패잔병은 개별적 고립적인 활동을 하던가 아니면 농민군의 진영에 투속하고 있었다.267)그러나 이 문제로써 농민군이 친청적·사대적 성향을 지녔다고 할 수 없다. 한 예로 청국 패잔병 500여 명이 전봉준이 있던 논산 대본영으로 와서 받아들이기를 애원하자 ‘정상이 불쌍하여 물리치지 않고’ ‘주의를 묻지 않고’ 軍中에 받아들였다고 한다(吳知泳,≪東學史≫ 필사 초고본 三, 1924, 59∼60쪽). 고종의 명을 받은 민병석은 7월 20일 이홍장에게 전보하여 개화내각을 부정하고 원병을 재차 청원하였고, 고종은 7월 28일 민병석에게 다시 이를 전보토록 하였다.268)田保橋潔,≪日淸戰役外交史の硏究≫(東洋文庫, 1965), 333∼334쪽. 이보다 며칠 앞서 고종은 자신이 발표한 政令은 倭人의 협박과 핍박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본인의 의지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는 뜻을 외무참의 閔商鎬를 통해 중국에 전달한 일이 있었다.269)≪淸季中日韓關係史料≫6(臺北:중앙연구원근대사연구소), 7월 22일 北洋大臣 李鴻章, 3053쪽. 농민군과의 대결 문제는 이 단계에 가면 부차적인 것으로 이해될 정도로 아산과 성환전투에서 청국의 패배는 조선정부로 하여금 후일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충격을 던져주었다. 또한 예상되는 평양전투에 대해 초조해 하고 있었다.

평양전투 이전인 7월 10일부터 평양 근방 中和에서는 청·일군 사이에 국지전이 있었다. 그러나 성환전투 이후 전투력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군은 ‘韓民’의 거센 반항에 직면하고 있었으며 이곳의 여단은 중요 정찰기관을 상실하였다.270)參謀本部 編,≪明治 二十七·八年 日淸戰爭≫2(동경인쇄주식회사, 1904), 3쪽. 이는 일본군 활동의 취약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일본의 의지와는 달리 평양전투가 지연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여기서 ‘한민’은 농민군인지 일반민인지 자료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농민군의 계통적 활동이 파악되지 않는 이곳의 지역적 특성상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청국군의 7월초 평양 도착 후 일본인에 대한 그곳 인민들의 적개심은 더욱 증가하였다 한다.271)≪駐韓日本公使館記錄≫5(국사편찬위원회, 번역본, 1990), 1894년 8월 11월, 機密第160號 本89, 旅團 凱旋後의 景況, 15쪽.

청국은 전쟁이 장기 지연될 것으로 판단하고 제3국의 자연스러운 개입을 유도하기 위한 외교적 방면에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문제는 열강간의 이해관계와 긴밀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인력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여력이 없던 일본은 이를 간파하고 속전속결주의를 채택하여 빠른 시일내에 전쟁을 승리로 종결짓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일본은 평양전 직전인 8월 중순부터는 중국인과 조선인으로 변장한 첩자를 서북지역에 침투시켜 청국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각종 문서류를 수집하여 이를 병참부 등에 보고하였다.272)≪二六新報≫, 1894년 12월 27일.<변복간첩일기 7>.

7월 14일 평산에 통신소를 개설한 일본군은 정찰 수색을 강화하였고, 당시 청국군은 평양을 근거지로 하여 황해도의 봉산과 안악에까지 주둔하면서 평양회전에 대비하고 있었다.273)≪時事新報≫, 1894년 8월 21일. 7월 26일<朝日兩國盟約>체결 후 일본은 조선병을 평양회전에 동원시킬 것과, 인부와 식량징발을 조선에 강요하였다. 일본은 아산전투부터 징발문제를 우려하였는데 평양회전을 앞두고 이의 타개는 절실한 문제였다. 그러나 아산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조선인의 반일감정과 동원된 인부들의 도망은 계속되었다.274)朴宗根 著, 朴英宰 譯,≪淸日戰爭과 朝鮮:外侵과 抵抗≫(一潮閣, 1992), 102∼103쪽. 8월 2일을 시점으로 북진을 개시한 5사단 지휘하의 4團隊는 평양행군시 ①양곡운반의 어려움, ②인부의 도피, ③도로의 불편, ④낮의 폭염과 야간 습냉275)≪明治 二十七·八年 日淸戰爭≫2, 93∼94쪽. 등의 어려움을 보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대세는 일본 편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일본군 제3사단은 7월 27일부터 30일 사이 원산항에 상륙하였으며 8월 2일 평양을 향해 출발하였다. 한편 용산을 출발, 북진을 시작한 일본군 선행대는 8월 7일 황주를 점령하였다. 이어 8월 17일 평양을 공략하여 함락시킨 일본군은 다음 날 18일 황해해전에서의 승리를 통해 청국의 북양함대를 궤멸시켰다.

일본군의 평양점령과 서해안 제해권 획득의 결과 청국군의 전투력은 치유될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었다. 그 반면 일본군은 자유로이 조선 연안을 항행하면서 병력과 군수품 수송을 할 수 있게 되었다.276)田保橋潔, 앞의 책, 346쪽. 이 일련의 전투 승리로 일본은 대륙으로의 진로를 열고, 농민군에 대한 탄압을 단계적으로 가중시킬 수 있게 된다. 8월 18일 외무대신 무츠는 전승지역에 조선군 고급 장교를 파견하여 민심을 복종케 하라고 지시하였고,277)≪駐韓日本公使館記錄≫4, 1894년 9월 17일, 일본군 전승지역으로 조선군 장교 파견 지시, 293쪽. 8월 19일 오오토리공사는 평양승리의 전말을 조선인과 재외국인에게 알리도록 지시하였다.278)≪駐韓日本公使館記錄≫3, 1894년 9월 18일, 평양전승전말 상보 요망, 270쪽. 이는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있음을 알림으로써 힘의 우위를 과시하는 한편 농민군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선무전의 일환이었다. 이날 무츠는 오오토리에 훈령하여 평양전투의 청국군 패주로 이 기회에 조선에 대한 적당한 간섭이 필요하며, 그 방법으로 먼저 조선정부에게 일본의 세력확장에 주의할 것을 전달하고 다음으로 제3국에 대한 조선의 외교·내치상의 중대한 사건은 일본공사의 동의를 받은 후 시행케 할 것을 지시하였다.279)金正明 編,≪日韓外交資料集成≫4, 日淸戰爭編(東京:巖南堂書店, 1965), 140∼141쪽. 이는 대조선 정책의 자신감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앞에서 언급한 7월 17일 채택된 乙案 즉, ‘보호국화’ 정책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하겠다. 이 훈령의 결과 농민군 토벌은 더 적극적이 되었다. 평양전투와 황해해전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지속적인 대청전쟁을 위해 계속 북상하였고 나머지는 농민군 진압을 위해 대거 남하하고 있었다.

평양전투를 앞둔 시기 농민군의 동향과 관련하여 우리의 흥미를 끄는 점은 흥선대원군의 행보이다. 일본에 의해 권력에서 영구히 배제될 위기의식을 느낀 대원군은 농민군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일본측의 기밀문서에 의하면 농민군의 전면적인 움직임을 감지한 대원군은 평양에서 “일청 양군은 반드시 일본군의 패배로 돌아가고 청국군은 곧바로 경성에 돌입하는 경우에 청국과 款을 통하고, 또 일면에는 陽으로 동학당 진무의 효유를 발하고 陰으로 밀사를 보내 동학당을 招集하여 청국군 來着時 내외 세력을 규합하여 일본병을 격퇴할 것을 계획”280)<東學黨事件に付會審の顚末具報>초본(李相佰,<東學黨과 大院君>,≪歷史學報≫17·18합집, 1962, 12쪽에서 재인용).하였다 한다. 즉 대원군은 농민군을 조종하여 서울 진격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점은 대원군이 밀사를 통해 전봉준에게 보낸<卽遣三南召募使李建永密示爾等>이란 밀지내용에서도 확인된다.281)李相佰, 위의 글, 12∼13쪽. 이는 평양전투시 일본군이 노획한 문서 중의 일부이다. 그와 같은 사실은<기밀문서>부록에서도 나타난다. 법부아문의 李秉輝 취조문에 의하면 호서에 있던 대원군의 부하 鄭寅德이 朴東鎭·朴世綱 등에게 제안한 작전구상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① 한 무리는 近畿에 머문다.

② 다른 한 무리는 경성에 들어가 종로에 도회하여 萬人疏廳을 개설하는 한편 글을 정부에 보내 각 공사관에 조회케 한다.

③ 주상을 상왕으로 받들고 중전과 세자를 폐하고 埈鎔으로 보위케 한다.

④ 개화당을 모두 살해하고 ‘自主之政’을 수립한다.

⑤ 밀사를 청병에 보내 일병을 협공한다.

 (李秉輝가 법부아문에서 취조받을 당시의 자술서.<기밀문서>중 부록;李相佰,<東學黨과 大院君>,≪歷史學報≫17·18합집, 1962, 15쪽 참조).

8월 대원군과 농민군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이 자료에 의하면 일부 호서 농민군 세력은 이준용·대원군과 연결하여 왕권을 뒤엎으려는 기도를 보인다. 鄭喬도 그의 저서에서 대원군 지시에 의해 湖西守宰와 농민군은 합력 북상하여 청국군과 더불어 남북으로 협공하여 일병을 타파코자 하였다 한다.282)鄭喬,≪大韓季年史≫上(국사편찬위원회, 1971), 고종 31년 7월, 93쪽. 주요 부분에서는 앞의 자료와 부합되는 견해를 보이며, 이는≪東學亂記錄≫의 이병휘 공초에서도 상당부분 일치한다.283)≪東學亂記錄≫下(국사편찬위원회, 1959), 重犯供草:李秉輝 再招 및 李秉輝 三招.

당시 대원군·농민군·조선정부 모두 평양전의 승패 여하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대원군은 평양회전 직후 鄭碩謨를 통하여 김개남에게 접근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전봉준의 지시로 무산되었다. 전봉준의 대원군관은 그리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284)이에 대해서는 뒤의 4장 주 13), 14), 15) 참조. 봉기진정 효유에 대해서도 전봉준은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평양전투 시기에 가면 농민군의 활동은 이전 아산·성환 전투기에 비해 더 적극적이 된다. 제2차 농민전쟁을 일으키기 직전 전봉준은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온 궁극적인 목적, 즉 ‘入韓의 本旨’를 확인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이고, 이를 통해 일본의 ‘보호국화’의 본질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점은 “금년 6월 이래 일본이 그치지 않고 계속 우리 나라에 온 것, 이는 반드시 우리 나라를 倂呑코자 하는 것이다”라는 전봉준 口供書(供草)의 내용에서 알 수 있다.285)≪東京朝日新聞≫, 1895년 3월 5일. 전봉준은 평양전투 직전인 8월 11일 전주 전라감영에서 일본인 탐문자와 접견하고 필담으로 “그런데 우리들의 擧兵은 생각지도 않게 그 매개가 되어 금일 淸日의 兵爭을 보기에 이르렀는데, 우리는 이를 千秋의 遺感으로 여기는 바다”라 하였다.286)≪日淸交戰錄≫12(1894년 10월 16일), 東學黨守令訪問記, 43쪽. 이 단계에 가면 전봉준과 농민군에게 조선 영토에서의 청·일간의 전쟁은 ‘천추의 유감’으로 인식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으며, 농민군의 반봉건 사업 추진과정에서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일 전면전을 구상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 기간 지방의 반일운동은 주로 일본군의 징발에 반대하여 행해지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북진하는 시점부터 적극적으로 전개된다.287)朴宗根, 앞의 책, 196쪽. 8월 7일 충청도와 경상도에서는 일본군과 그들의 지원세력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 병참부를 습격하는 등의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288)≪駐韓日本公使館記錄≫4, 1894년 9월 6일, 추원경부의 지방시찰 보고요지, 283쪽. 병참부는 청일전쟁의 교두보로 여기를 공격함으로써 일본의 전쟁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한편 평양전투는 농민군 뿐만 아니라 이들과 근본적 입장은 다르지만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던 일부 의병세력의 봉기도 이끌어냈다. 본격적인 의병투쟁의 전 단계로서의 의미를 갖는 안동을 근거지로 하는 유생출신 徐相轍이 주도하던 이 의병이 격문을 통해 청일전쟁 문제를 거론하면서 일본군 철수를 주장한 것은 바로 그 예이다.289)≪駐韓日本公使館記錄≫1, 京第87號, 1894년 9월 28일, 안동의병격문, 123∼125쪽. 이에 오오토리는 농민군과 의병봉기는 청일전쟁의 작전수행에 중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고 하면서 조선정부에 만전의 진압대책을 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8월 17일 평양전투에서 이두황이 이끄는 조선의 壯衛營兵과 평양감사 민병석 휘하의 衛戍兵은 일본군과 청국군 양편에 각기 참가하여 전투를 전개하였다.290)≪明治二十七·八年 日淸戰爭≫2, 200쪽.
平壤民團役所,≪平壤發展史≫, 1914, 512쪽.
당초 평양의 청일교전시 일본의 전승을 믿지 않던 조선인들은 예상과는 달리 일본의 승리가 전해지자 당황하고 의아해 하였으며, 대다수는 戰果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였다.291)“淸倭가 평양에서 서로 칼을 접하고 싸웠는데 왜의 사망자는 천여 인이고 청은 수백 인이다”(李晩燾,≪響山日記≫, 국사편찬위원회, 1985, 651쪽). 이는 농민군에서도 거의 동일하였으리라 판단된다.

평양전투 이후 함경도 지방은 일본측 입장을 따르는 새로운 관리가 부임하였으며 8월말 경부터 일체의 文報는 明治 연호를 사용하였다.292)≪淸季中日韓關係史料≫6, 3694쪽. 이는 일본군이 이 일대의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음을 의미한다.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지역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일본의 대조선 정책에 평양전투 승리가 미치는 영향은 심각한 것이었다. 일본은 이를 계기로 노골적인 내정간섭정책으로 전환하였으며 따라서 개화파의 개혁정책도 후퇴 내지는 희석화되고 있었다.293)鄭昌烈,≪甲午農民戰爭硏究-全琫準의 思想과 行動을 중심으로-≫(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91), 249쪽.

평양전투 이전부터 개화파정부는 일본과 세를 합하여 농민군 토벌계획을 세우고 있었고,294)≪駐韓日本公使館記錄≫4, 1894년 9월 6일, 萩原警部의 지방시찰 보고요지, 283쪽. 이러한 소식은 금방 전국에 깔렸다. 호남의 집강소에서는 다시 농민군을 일으켜 대적하자는 의논이 이루어졌다.295)吳知泳,≪東學史≫(필사 초고본 三, 1924), 47쪽. 이에 따라 8월초에는 충청도 농민군, 8월말에는 전라도 농민군이 본격적인 무력투쟁으로 전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296)김양식,<1, 2차 全州和約과 執綱所 운영>(≪역사연구≫2, 1993), 161쪽. 평양전투 즈음인 8월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 ‘5도 인민’ 16명은 연명으로 오오토리공사에<陳情書>를 제출하였는데, 이들 5도 인민이 파악한 농민군 봉기 이유 역시 일본군의 대규모 조선진출에 있었다.297)“이번 여름 귀국이 대병을 보낸 후 그(농민군) 세가 더욱 치열하고…”라는 구절(≪大阪每日新聞≫, 1894년 10월 4일). 남접과 북접의 연합 시도 또한 청국군의 평양퇴각과 일본군의 제해권 확립 즈음에 이루어진다. 그런데 충청·전라·경상 등지 농민군의 북상준비와 천안 농민군의 일본인 살해 등의 요인으로 8월 24일경 삼남지방은 세금징수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원활한 수세를 위해 1개 중대와 30명의 순사를 파견하여 조선정부 군대에 협조케 하였다.298)≪駐韓日本公使館記錄≫4, 1894년 9월 23일, 동학당 진압을 위한 일본군 파견 승인 요청, 297쪽.

이처럼 평양전투 이전까지 일본의 조선지배는 안정된 것도 아니었고 당시 戰局 형세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식민지화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해가는 시기는 평양전투의 결과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기간 전라도 농민군과 경상·충청도 농민군의 행동방략과 향후 행보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대체로 전라도는 집강소와 연관하여 주로 내부모순 즉 반봉건의 폐정개혁에 주력하면서 기회를 보고 있었고, 반면 경상·충청도의 농민군은 斥日의 깃발을 들고 지속적으로 병참부를 습격하는 등 대외모순 해결에 노력하고 있었다.299)≪二六新報≫, 1894년 11월 8일,<동학당의 진상(1)>.

당시 전봉준은 반봉건 문제 해결에 시간을 집중 할애하였고 평양전투 이전까지 관망적인 경향이 강하였다. 그리고 8월말 이후에도 전봉준은 ‘官民相和之策’을 견지하고 주변세력의 움직임을 보면서 나름대로의 시간을 벌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8월말에도 전면전을 구상하지 않았다. 반면 민과 관의 ‘相和’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계열인 김개남은 전봉준·손화중의 보류권유를 거부하고 남원 입성 후 농민군을 무장시키면서 인근 지역을 점령하고 8월 25일 大會를 개최, 재봉기의 분위기를 강화하고 있었다.300)김양식, 앞의 글, 161·165쪽.
≪梧下記聞≫2筆, 91∼93쪽.
이와 같은 움직임은 8월말부터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은 결국 제2차 농민전쟁이 임박하고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趙宰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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