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4. 일본군의 청국 진입과 농민군의 재봉기

4. 일본군의 청국 진입과 농민군의 재봉기

평양의 청국군 후퇴는 일본군이 농민군과 전면전을 전개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평양전투 후 일본군은 ‘폭도토벌’의 명분으로 농민군에게 방향을 돌렸다. 일본은 이미 2차 봉기 발발 이전부터 본격적인 진압체제를 취하였다. 그 이유는 ①농민군이라는 위협요소의 존속은 ‘조선보호국화’ 정책과 대청전쟁 진행에 중대한 장애로 그 여파가 북부에까지 확대되기 이전에 뿌리를 뽑고, ②농민군을 신속히 진압함으로써 열강의 ‘성가신’ 간섭요소를 미연에 저지하는 데 있었다.301)朴宗根 著, 朴英宰 譯,≪淸日戰爭과 朝鮮:外侵과 抵抗≫(一潮閣, 1992), 211쪽.

그 결과 9월 중순 일본 병참부는 대본영에 농민군 토벌에 전념할 군대 특파를 요청하였다. 오오토리공사도 전라도와 충청도의 농민군이 연합하여 서울로 올라온다는 보고를 접하고 9월 19일 대본영 육군참모에게 정벌병력의 증강을 요청하였다.302)≪駐韓日本公使館記錄≫3, 1894년 10월 17일, 동학당 정토를 위한 병력증강 요청, 284쪽. 이는 농민군 세력에 대한 강한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일본은 곧바로 응원병을 조선에 파견하였다.303)≪日淸交戰錄≫13(1894년 10월 20일). 일본은 9월 중순부터 농민군의 전면적인 재봉기 구도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에 대본영은 농민군에 대한 대대적 토벌작전으로 전환코자 하였다. 이는 청일전쟁 진행과정에서 일본이 계속적으로 승리함에 따르는 자신감에 연유하는 바 크다.

조선정부도 온건책을 견지하던 전라감사 金鶴鎭을 파면하고 농민군 토벌에 강력한 입장을 취하던 충청도 홍주목사 李勝宇를 일시 감사로 임명하였다. 이와 더불어 농민군 진압에 앞서 일본은 서울을 비롯한 각처에 방을 붙여 평양전투의 승리를 지속적으로 홍보하였다. 일본군의 평양전 승리 이후 노골적으로 일본편향으로 방향을 세우는 지방관도 생겨났다. 예를 들면 9월초 해주부사 趙熙一은 관내에 방을 걸어 평양전투의 일본군 승리를 떠들썩하게 알려 황해도 농민군 무마의 효과를 기대하고자 하였다. 그는 농민들에게 일본군에 협조할 것을 당부하면서 일본군을 비방하거나 평양에서의 일본승리를 패배라 말하는 자를 체포하여 엄형을 가하고 있었다.304)≪大阪朝日新聞≫, 명치 27년 10월 17일.

청일전쟁 초기 일본의 목적은 조선지배에 국한되어 있었던 제한적 전쟁의 의미가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쟁 수행과정에서 예상 밖으로 무기력한 청국군의 모습을 보자 본래의 정책을 대폭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평양과 황해전투 직후 제2군의 편성에 착수하고, 청국 본토의 분할을 목적으로 대륙침략전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9월 26일 일본군의 청국 영토 진입이후 전쟁은 성격변화를 보이게 된다. 일본군이 압록강을 넘어 청국 영토로 진입하기 직전까지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청일전쟁과 농민전쟁이라는 2개의 전쟁이 병행되고 있었다.305)농민전쟁의 실태를 알 수 있는 한 자료에 의하면 “客擾連至本倅”라 하여 조선내에서의 청국과 일본과의 전쟁을 ‘客擾’, 즉 남들의 소란(전쟁)으로 평가하고 있다(金若濟,≪金若濟日記≫권 3, 조선사편수회 필사본, 1929, 갑오 11월 20일조). 이 양자는 성격이 서로 다른 종류의 전쟁이나 상호 밀접한 관련과 영향력을 가지면서 전개된다. 그러나 이제 청국군이 사라진 조선내에서는 일본은 농민군의 활동 저지에 주력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군이 농민군 토멸에 본격적으로 투입되는 것은 평양전투 한달여 후부터였다. 총리대신 金弘集은 일본의 청국 봉황성과 여순구 함락을 기대하면서 충청관찰사 朴齊純에게 보내는 서한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쟁이 종결된 후 일본 陸兵 10만이 개선하고 그 소식이 匪徒에게 들리면 당연히 이들은 소산할 것이고 그 날은 멀지 않았다. 매우 관심이 되는 바이다.”306)≪東學亂記錄≫上(국사편찬위원회, 1959), 갑오 9월 9일, 錦營來札(道園), 78쪽. 즉 대청전 수행을 위해 국경을 넘어갔던 병력이 개선하는 즉시 농민군 토벌에 투입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이어 9월 21일 농민군 焦土를 위해 일본은 신정부와 결탁, 신정부는 이를 수락하고 농민군에 대한 대대적 ‘살륙정책’을 공식적으로 취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 변화는 곧바로 공사교체로 연결되었다. 즉, 오오토리가 퇴임하고 9월 27일 이노우에카오루(井上馨)가 주한일본공사로 부임하였다. 대부분의 조선정책을 본국의 훈령에 따라 하고 일등서기관 스기무라 등 강경파의 견제에 의해 개인적 입지가 약했던 오오토리와는 달리 전직 내무대신이자 일본 정계의 원로로서 본국정부로부터 막강한 권한을 위임받은 이노우에는 신임공사로 부임하자마자 대원군 추방작전을 전개한다. 그는 10월 1일 대원군과 마주한 자리에서 일본의 토벌군 파견은 조선정부의 청원에 의해 부득이 이루어진 것으로 명분화하고 있다.307)양인의 대화내용은 伊藤博文 編,≪秘書類纂 朝鮮交涉資料≫下(비서류찬간행회, 1936), 263쪽 참조. 이노우에는 11월초 대원군의 ‘농민군 선동’과 청국군 지원 요청 서한 등을 문제 삼고, 나아가 대원군의 종손자 李埈鎔과 농민군이 관련되었다는 설 등을 문제삼아 결국 대원군을 정계에서 추방하였다. 일본군이 청국 영토로 진입한 직후로 청일전쟁의 종반이었던 이 기간에 일본이 대원군을 추방한 것은 국가원로로서의 그의 상징성과 ‘對民安集’이라는 이용가치가 소멸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거칠 것이 없어진 일본은 고종을 위협하여 친일내각을 재구성하고, 각종 새로운 형식의 조약을 강요하고 이권 침탈을 자행하였다. 즉, 일본의 입장을 대변할 친일정부를 앞세워야만 농민군 진압의 효율성을 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치러진 대청전쟁에서의 승리는 일본이 조선지배 정책을 노골화하는 직접적 계기가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계기적 과정에서 농민군 재봉기의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이 시기 시대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인 층은 농민이라는 단일 계층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당시는 농민전쟁이 전개되던 기간으로 현실적으로 농민군만이 대응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기간 심각한 외부모순이 피부적으로 감지됨에도 불구하고 양반 유생층들 중 대일전쟁의 문제를 제기하는 자는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오히려 농민군의 활발한 움직임이 이들에게는 이른바 ‘綱常’의 문란, 즉 신조의 위기로 인식되었고, 자신들의 힘의 열세에 대해 개탄만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청일전쟁에 대한 대책수립보다는 ‘東匪’의 진압이라는 데 일차적인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언제든지 기회만 온다면 농민들의 ‘준동’을 막겠다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결국 이 시기 여러 계층 중 청일전쟁의 결과 나타난 일본군의 침략행위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층은 농민군뿐이었다.

노골적인 식민지화의 요구와 국가적 위기는 농민군의 일차적인 목적인 반봉건사업 추진과정에 커다란 장애요소로 기능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농민군은 재봉기하여 반침략 의지를 천명하였다. 후일 재봉기의 목적에 관한 일본공사 이노우에의 심문에 전봉준은 답하기를 먼저 奸侫을 갈고, 중앙정부와 협력하여 일본병을 척퇴코자 擧義하기에 이르렀다 한다. 이 시기에 가면 농민전쟁은 반혁명적 세력에 대한 응징의 성격을 갖는 반침략전쟁으로 전화되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반침략전쟁은 반봉건전쟁과 동시 병행적으로 추진되는 것이다.

전면적 재봉기 이전인 8월말∼9월 초엽 이후부터 농민군의 움직임은 활발해지고 그러한 분위기는 남부의 도처에서 보인다. 경상도의 진주농민군 집강소인 忠慶大都所에서는 9월 2일과 10일에 관내에 방문을 내걸었다. 특히 9월 10일의 재차 작성된 방문에 의하면 옛 兵使의 유임을 바라고 ‘倭人과의 조약에 따라 선출된’ 신임 병사의 부임을 저지코자 진주에서 농민군 대회를 갖고자 하였다 한다. 이<嶺右(경상우도)의 各邑 各村에 사는 大小民들에게>라는 방문에 “우리 나라는 옛날부터 小中華라 칭해 왔으며…삼천리는 예의의 나라이고 풍부한 강토이다. 그러나 지금은 國運이 否塞하고 人道가 頹廢하므로 간신들이 禍를 불러들여 倭胡들이 우리 국경을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북쪽 三道는 모두 胡人의 땅이 되었고, 남쪽 五道는 倭賊들이 가득하여…”라 하였다308)≪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894년 10월 22일, 南站發甲第152號, 東學黨의 檄文 通報 및 情報通知 要請, 140쪽. 이에 의하면 진주의 농민군들은 성리학적 명분론의 입장 즉, 華夷論的 ‘小中華’ 의식을 견지하면서, 우리 국내에서 서로 싸우는 일본과 청국 모두 오랑캐로 비판하고 있다. 이는 여타 지역의 농민군들의 격문에서는 보기 힘든 매우 독특한 경우이다. 농민군 대회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은 9월 24일 부산으로부터 수비대 1개 중대를 파견하였다.309)≪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894년 10월 22일, 南站發甲第152號, 東學黨의 檄文 通報 및 情報通知 要請, 139쪽. 또한 전라도 집강소 設包 지역 지방관들의 첩보에 의하면 이곳에서는 10일 전후로 전면적 봉기 준비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에 나타난 사례를 근거로 이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지 역 일 시 인 원 내 용
高 山 縣 9월 10일 300여 명 군기고를 부수고 군기와 물품을 탈취
礪 山 府 9월 10일   대포와 창으로 군기고에 돌입,물건을 탈취
全 州 府 9월 13일   군기고를 파괴하고 銃桶과 環刀를 탈취
威鳳山城 9월 16일 100여 명 군기고의 물품을 모두 탈취
南 原 府 9월 16일   色吏를 난타하고 官庫의 쌀과 軍米를 탈취
綾 州 9월 16일 10여 명 동전 2만량과 백목 30통을 남원대도소로 수송토록 재촉

<표 1>집강소 설포 지역 농민군의 봉기 준비 상황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全州近地 東學黨의 官庫物品 奪取에 관한 報告 ①<行全羅道觀察使 兼都巡察使 親軍武南營外使 爲謄報事>, 開國 503년 9월 15일, 129쪽 및 ②<行全羅道觀察使 兼都巡察使 親軍武南營外使 爲謄報事>, 開國 503년 9월 18일, 130∼131쪽.

한편 9월 10일 태인현감의 첩보내용에 의하면 전봉준은 私通에서 “지금 이런 거사는 몹시 커서 비용이 많이드니 公穀과 公錢을 이용해야 하겠으니 군수미 300석과 동전 2천 량을 밤사이 金溝 元坪의 大都所로 수송하기 바란다”310)≪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894년 9월 18일, 行全羅道觀察使 兼都巡察使 親軍武南營外使 爲謄報事, 130쪽.고 하였다 한다. 또한 다른 ‘東匪의 私通文’ 311)위와 같음.에도 “군기고에 있는 화약·탄환·창포 등을 하나도 빠짐없이 대도소로 수송하기 바란다”로 되어 있다. 이는 김제군수의 牒呈과도 일치한다.

이로 볼 때 전봉준도 9월 초엽부터 제2차 농민전쟁 준비에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실제 그 자신도 삼례역에서 800여 명의 부하를 인솔하고 9월 14일 새벽 전주성내로 들어와 두 차례에 걸쳐 군기고에 있는 화포와 탄환·環刀 등의 무기를 마련하여, 다시 삼례로 향하였다. 이 당시 김개남의 남원대도소에서는 光州牧과 高山縣에 傳通을 보내 동전·백미·백목 등을 수송하라 하였고, 삼례대도소에서도 砲軍이 돌아다니며 群山과 인근 읍에 통문을 돌려 곡물반입을 강요하여 원근 각 읍으로 당시 독촉받지 않은 곳이 없다 할 정도였다.312)≪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894년 9월 18일, 行全羅道觀察使 兼都巡察使 親軍武南營外使 爲謄報事, 131쪽.

농민군은 대원군 재등장의 희구와 개화파 신정부에 대한 불신, 왕궁점령과 일본군의 국토유린, 농민군 탄압에 대한 응징의 결의를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전봉준의 견해도 대체로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유사하더라도 대원군觀에 대해서는 전봉준은 일반 농민군과는 약간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것은 1895년 양력 2월 일본공사 이노우에가 대원군과의 관련설 추궁에 대한 전봉준의 답변에서도 명확히 보인다. 일본과 갑오정부는 대원군의 재등장을 두려워하여 ‘농민군 사주설’ 혹은 ‘밀약설’을 거론하여 대원군을 묶어 놓으려고 하였다. 당시 이노우에의 “대원군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심문에 전봉준은 “대원군이 계속 정치를 행하는 것은 威權이 매우 깊은 것이지만 당시는 老萎하여 정치를 집행할 기력이 없다. 원래 우리 나라의 정치를 그르치게 한 것도 모두 대원군이 한 것이기 때문에 인민들은 그에게 설복하지 않는다”313)≪郵便報知新聞≫, 명치 28년 3월 7일,<東學黨巨魁の審問>(信夫淸三郞,≪增補 日淸戰爭≫, 1970, 21쪽에서 재인용).라고 답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봉준보다 대원군 측에서 더 적극적인 제휴의 손짓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내부대신 朴泳孝의 전봉준 심문 내용중에서도 보인다. 재판소에서 박영효가 대원군과의 연락여부를 문초하자 전봉준은 “대원군 또한 有勢한 자로 어찌 백성을 위하여 同情이 있었으랴”하여 대원군과 농민의 계급적 기반의 차이를 말하면서 전쟁과정에서 일본측에 의해 수시로 거론되던 ‘대원군 지령설’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다.314)吳知泳,≪東學史≫(필사 초고본 四, 1924), 3∼4쪽. 전봉준은 공초에서 대원군의 효유문은 보았으나 이는 깊이 믿기 어려움으로 다시 재기를 도모하였고, 그 이유는 “下情이 상달되지 못하고 上澤이 下究되기 어렵기 때문에” 상경하여 民意를 상세히 개진함과 더불어 일본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었다 한다.315)≪東學亂記錄≫下, 을미 2월 19일,<全琫準五次問目>. 전봉준은 이미 7, 8월 사이에 경복궁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316)위와 같음. 그럼에도 즉각 재봉기를 자제하면서 제2차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장시간 고려를 한 듯하다.

이전부터 일부 국지적 형태를 보이고 있었지만, 전면적인 2차 농민전쟁으로 승화되는 것은 삼례의 대도소를 거점으로 한 전봉준의 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전봉준이 주장하는 재봉기의 이유는 중앙관료를 갈고, 일본병과 접전하여 이를 척퇴하는 데 있었다.317)≪東學亂記錄≫下,<全琫準 初招 問目>.
≪東京朝日新聞≫, 1895년 3월 5일.
이듬해 법부대신 徐光範 주재하의 3월 29일(양) 법무아문 권설재판소의 판결선고서에 의하면 그 이유를 일본의 조선‘병탄’ 위기에 저항코자 하는, 반침략적 측면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7월 하순의 태인 제집으로 귀거하니라. 그후 피고는 일본군대가 대궐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필시 일본인이 아국을 倂呑코져 하는 뜻인줄 알고 일본병을 쳐 물리치고 그 거류민을 국외로 구축할 마음으로 다시 起兵을 도모하여 전주근처 삼례역이 토지광활하고 전라도 요충지로 동년 9월경에 태인을 發程하여 원평을 지나 參禮驛에 이르러 그곳을 기병하는 大都所로 삼고 진안접주, 전주접주… 등 각 지방 인민에게 혹 격문을 돌리고 혹 유세하고 전라우도의 군사를 모으기를 4천여 명이 됨에 각 관아에 들어가 군기를 강탈, 각 지방 富民의 전곡을 징봉…(<東學農民軍指揮者 全琫準, 孫和中, 崔永昌(卿宣) 判決宣告書 原本>, ≪韓國學報≫39, 1985년 여름호 부록, 189쪽).

정토군 독립 제19대대 사령관 미나미 고지로(南小四郞)이 전봉준 포획 당시의 취조문에서도 그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전봉준은 경복궁 강점 이래 일본군의 폭주를 ‘병탄’의 구조로 이해하고 있다.318)≪東京朝日新聞≫, 1895년 3월 5일.

농민군 재봉기의 시점은 일본군이 청국 영토로 진입하는 시기와 같다. 의주함락 이후 압록강을 넘어 간 일본군이 봉천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는 소식을 듣게된 조선인들의 위기의식은 더욱 고조되었으며319)≪大阪朝日新聞≫, 1894년 9월 25일,<한인의 감정>. 따라서 대일관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게 되었다.

당시 삼남(경상·전라·충청)은 농민군의 세력범위에 있었으며, 서도(평안·황해)는 청일교전에 통로가 막혀 있었다. 외무대신 金允植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공고하지 않기 때문에 누차 외부의 刺衝을 만나고 내부의 풍파를 일으켜”라 하여 정부의 약체성을 탄식하고 있다.320)金正明 編,≪日韓外交資料集成≫ 4-日淸戰爭編(東京:巖南堂書店, 1965),<외대 김윤식과의 담화 보고의 건>, 170쪽,. 다소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김윤식은 박제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와 같은 상황 때문에 “朝令은 십리 밖에서도 시행되고 있지 않다(朝令不行於十里外)”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321)≪東學亂記錄≫上, 갑오 8월 11일, 錦營來札(雲養), 85쪽. 군국기무처에서 논의하여 작성한 개혁안도 효율적으로 전파되기 힘들 지경이었다.322)菊池謙讓,≪朝鮮近代史≫下(鷄鳴社, 1937), 338쪽. 청일전쟁과 농민전쟁의 영향으로 인한 전국의 세입상황을 살펴보면 평안·황해 2도는 청일전쟁으로 유린당하고, 전라·충청과 경상도의 절반은 농민군과 관군에 징수당하고, 강원도는 산악이 많고, 함경도의 징세는 변경수비 군수에 충당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으며, 서울과 경기 일원을 제하면 조세 징수 자체가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당해 년도의 세입은 세출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323)≪駐韓日本公使館記錄≫5, 1894년 11월 24일, 機密第217號 本132, 내정개혁을 위한 대한정략에 관한 보고, 74쪽. 이렇듯 당시 농민군의 적극적 활동으로 징세는 여의치 않았다. 이는 일본측의 대청전쟁시 작전수행에도 중대한 장애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0월 12일과 13일 양일간 일본군은 금주와 대련만을 함락하였다. 청국 관내 동북부에서의 청국과의 전투는 일본군을 조선의 농민군 진압에 투입시키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金州·大連灣 함락으로 청국 관내에서 청국군과 전투를 벌이던 병력을 농민군 토벌에 집중적으로 투입시킬 수 있었다.

이즈음 인천의 이토(伊藤)중좌는 이노우에공사에게 15일에 三路進軍 병력이 용산을 출발, 남하하라는 출동명령을 받았으니 곧 출발하겠다고 보고하였다.324)≪駐韓日本公使館記錄≫3, 1894년 11월 10일, 3로로 진군할 일본군 용산출발 명령, 373쪽. 한편 이날 공사는 오야마 이와이(大山巖)대장에게 전문을 보내 금주와 대련만 함락을 축하하면서 반면 농민군 ‘만연’에 대한 대책으로 ①3개 중대를 출동시켜 농민군을 적극적으로 토벌케 할 것과, ②대원군·이준용과 농민군 연결의 개연성을 차단하라고 하였다.325)≪駐韓日本公使館記錄≫3, 1894년 11월 20일, 대원군과 동학당 정황에 관한 보고, 374∼375쪽. 이노우에는 다시 무츠외무대신에게 농민군 토벌방법으로 道를 3분하여 농민군을 포위, 일거에 ‘박멸’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326)≪日韓外交資料集成≫4, 1894년 11월 16일, 동학당 토벌방법 보고의 건, 207쪽. 10월 19일 노무라 야스시(野村靖) 내무대신은 훈령으로 청국과 조선의 ‘점령지’327)내무대신의 훈령은 일본정부의 방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점령지’라면 ‘보호국화’와는 다른 차원으로 일본의 대조선 정책도 이즈음 더욱 강경하게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에 일본 경찰관을 파견시키고, 농민군 정벌시 순사 13명을 군대에 배속시켜 서류를 수색하고 수령을 포박하도록 하였다. 곧바로 다음날 무츠는 이노우에에게 전보하여 ‘할 수 있다면 강력하게’ 순사파견을 시행토록 지시하였다.328)≪日韓外交資料集成≫4, 1894년 11월 12일, 청국 점령지에 경찰관 파견에 관한 건, 207∼208쪽.

한편 미나미가 이끄는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는 10월 2일 일본을 출발하여 9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농민군 토벌 전담부대인 제19대대 파견의 목적은 명분상 조선군을 응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①조선의 군대를 그들의 지휘하에 두고 일본군법을 적용, 절제에 복종케 하고, ②남원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전라도 농민군의 근거지를 진압, 이들을 소탕하고, ③향후 이 지역 농민군이 강원·함경 및 경상도 방면으로 도주하는 것을 방비함에 있었다.329)≪駐韓日本公使館記錄≫5, 1894년 11월 9일, 機密第210號, 동학당 진압을 위한 제19대대 파견에 따른 훈령, 65∼68쪽. 10월 15일 제19대대는 농민군의 본격토벌을 위해 남하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군의 농민군에 대한 입장이 대대적 토벌작전으로 전환될 즈음 조선정부에서는 각도 지방관리와 대소인민에게 농민군 剿滅을 위해 3路로 진군한 일본군에 적극 협력과 주선을 권유하는 취지의<勅諭>포고문을 발표하였다.330)≪高宗實錄≫, 고종 31년 11월 4일조.

10월 25일 여순 함락 직전 무렵에 가면 일본군과 관군 연합군은 전국 곳곳에서 농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농민군 토벌의 핵심은 관군이 아니라 일본군이었다. 일본은 관군을 지휘하였고 관군은 일본군 산하에 배치되어 함께 농민군을 진압하였다. 10월 12일 이노우에공사는 이토병참감에게 농민군 진압차 출동하는 대장들에게 훈령하여 조선군 각 부대를 일본 士官의 명령에 복종케 하고 일본군법을 준수케 하며, 군사의 진퇴도 일본 사관의 지휘 명령에 따르게 하라고 지시하였다.331)≪駐韓日本公使館記錄≫5, 1894년 11월 9일, 機密第210號, 동학당 진압을 위한 제19대대 파견에 따른 훈령, 68쪽.

당시 개화당정부의 농민군 진압 기본방침도 “모름지기 일본 사관과 협의하여 만약 공적이 있으면 즉시 사관에게 양보하여 그 환심을 사는 것이 금일의 묘책이다”332)≪東學亂記錄≫下, 李圭泰往復書竝墓誌銘, 478∼479쪽.라고 할 정도로 철저하게 일본군에 종속되는 것이었다. 무기력한 정부는 농민군 진압이 어렵자 일본군의 무력과 그들의 지휘를 받아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한편 이노우에공사는 고종을 알현하고 軍制를 정하는 문제를 개진하였다. 이때 내란 진무를 위해 충분한 병력을 양성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세입의 일정부분을 군비에 충당할 것과, 士官을 양성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333)≪日韓外交資料集成≫4, 1894년 11월 20·21일, 알현의 모양 보고의 건(一)(二), 219∼220쪽. 그가 예를 들고 있는 일본사관이 훈련한 교도중대는 이 기간 실제 농민군 토벌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에 대외방비에 관한 항목이 전혀 없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海軍無用論을 주장하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조선의 입지조건상 해군은 대외방비에 매우 중요한 군사기구로, 이 한가지 사실로 보아도 일본은 조선 군제의 식민지적 개편을 추구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는<大日本軍 第2中隊 大隊長 南小四郞 麾下 左先鋒 李(12월 8일)>라는 공문의 제목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나 있다.334)≪東學亂記錄≫下, 갑오년 12월 25일, 日本士官函謄, 448쪽. 밑줄은 필자가 강조하기 위하여 친 것이다. 조선의 군대가 이와 같이 철저하게 일본군에 종속됨에 따라 자신들에게 대항할 위험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한 일본은 12월말 농민군의 신속한 진압을 위해 조선군에 탄환 30만 발을 지급하였다.335)≪東學亂記錄≫下, 갑오년 12월 말일, 日本士官函謄, 427쪽.

한편 여순 함락 기간에 일본은 조선정부와<朝日共守同盟>을 체결하여 청국군을 정토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336)≪日韓外交資料集成≫4, 1894년 11월 24일, 조선국 내정개혁에 관한 보고의 건, 238∼240쪽. 이 동맹안의 표면적 내용은 양국이 동맹하여 청국과 싸우는 데 명분을 두고 있지만 실제로는 농민군 토벌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노우에는 11월 1일 외무대신 김윤식에 보내는 전문에 양국이 동맹하여 청국과 싸우고 있는 이러한 ‘비상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경내에서 쫓아버리려고 농민군은 누차 군용전신선을 방해하고, 士官을 살해할 뿐만 아니라 병참부를 습격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일반 범죄인과 다르기 때문에 ‘수괴’와 관련된 심문시에는 일본영사를 입회할 수 있게 하라고 요구하였다.337)≪駐韓日本公使館記錄≫5, 1894년 11월 27일, 第259號, 동학당 심판에 일본영사 입회 요구, 5쪽.

제2차 전쟁 이후 농민군 활동은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충청도와 전라도 농민군의 盛勢는 중앙군과 지방 감영병으로서는 ‘以寡敵衆’의 형세였다. 10월 24일 지리산 하단의 하동·곤양·단성·진주 일대는, 진주 討捕使의 비유에 의하면 마치 “밥에 파리가 몰려드는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이곳의 농민군의 세력은 강하여 지방관이 일본군대의 주둔을 ‘엎드려’ 원할 정도가 되었다.338)≪各司謄錄≫63(국사편찬위원회, 1992), 갑오 10월 24일, 札移電存案, 283쪽.

삼남의 농민군 토벌에 주력할 이 시기 수원은 충청도 농민군 초토의 사령기지로서 역할하였다. 華營에서는 총리대신에게 전보하여 천안에 분국을 두어 공주·청주·보은 등의 소식을 듣게 하였다.339)≪各司謄錄≫63, 갑오 11월 13일, 札移電存案, 286쪽. 또한 이전 평양전투, 황해해전의 청일전쟁 지역인 서북 지역은 서울에서 지속적으로 李鶴圭·조희일·권형진 등 3인의 선유사를 파견, 일본군대와 같이 북진하면서 일병출병의 뜻을 諭示하였다.340)≪大阪朝日新聞≫, 명치 27년 12월 5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농민군은 일본군과 대적하고 있는 청국군에 대한 호응의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341)≪韓國民衆運動史資料大系-1894년의 農民戰爭篇≫1(여강출판사, 1994), 黃海道東學黨征討略記, 541∼543쪽. 일본은 10월말 황해도 농민군 토벌명령과 더불어 첩보를 통해 대원군·이준용·민왕후가 농민군에게 보냈다고 알려진 서한 입수에 주력하고 있었다.342)≪駐韓日本公使館記錄≫3, 1894년 11월 26일, 충청·황해도 동학당 정토상황, 304쪽. 황해도는 11월 10일에 일본병사가 해주관찰부에 주둔하였다. 이곳에서는 일본군 진입 이후에야 비로소 관측에서 힘을 얻어 농민군 진압작전을 체계적으로 전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농민군의 저항은 만만치 않게 전개되었다. 황해도 지역은 지방서리들로서 농민군에 참여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343)≪東學亂記錄≫下, 甲午海營匪擾顚末, 732∼733쪽;黃海道東學黨征討略記, 525∼526쪽.

청일전쟁 말기 일본측은 청국군이 농민군을 소집하여 관군과 더불어 일본군과 개화당을 살륙코자 한다는 여론을 환기시켜 농민군 토벌명분을 계속 축적하고 있었다. 또한 대원군과 그 손자 이준용이 농민군을 이용하여 일본 공사관을 습격할 것이라는 설을 유포하였다.344)≪二六新報≫, 1894년 12월 7일. 따라서 더 적극적인 농민군 토벌책이 지속적으로 있어야 할 것이라 주장하였다.345)≪二六新報≫, 1894년 12월 15일.

그렇지만 평양전투 이후 중국본토의 대청전에서 일본군의 계속되는 승리로 조만간에 청·일간의 ‘和局’이 예견되고 있었다. 이 기간 일본은 농민군의 ‘用力撲滅’을 위해 많은 군인과 무기를 호남지방으로 내려보냈으며, 개화파정부에서도 ‘비도의 剿滅’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낙관하고 있었다.346)≪東學亂記錄≫上, 갑오 11월 冬至前 1일, 錦營來札(雲養), 95쪽.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군 지도부는 더욱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일본군에 대한 농민군의 힘의 열세는 더 이상 농민적 지향을 확산시켜 나가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농민군 지도부는 부득이 정부군과 화해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전봉준은 11월 12일 京軍과 營兵 및 이서·상인 등에게<告示>를 발해 조선사람끼리의 골육상전을 지양하고 ‘道는 다르나 斥倭와 斥化는 그 뜻이 같은 것’이라 하면서 ‘同心合力’하여 연합을 통한 대일 항전을 제의하였다.

금년 10월에 개화간당이 왜국과 연결하여 밤을 타고 왕성에 들어가 군부를 핍박하고 국권을 제 마음대로 하였다. 더구나 방백수령이 모두 개화파 소속으로 인민을 어루만지고 구휼하지 아니하며 살륙을 좋아하고 생령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이에 우리 東徒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멸하고 개화를 제어하며 조정을 잘 다스리고 사직을 안전하게 보존하려 한다. 매양 의병이 이르는 곳의 병정과 軍校가 의리를 생각지 아니하고 나와서 싸우니 비록 승패는 없으나 인명이 서로 상하니 어찌 불쌍하지 아니하리요. 그 진심은 조선사람끼리 서로 싸우자 하는 바 아니거늘, 이와 같이 골육상전하니 어찌 애닯지 아니하리요. (중략) 방금 大軍이 서울을 점령하여 팔방이 흉흉한데 오로지 서로 싸우면 가히 골육상전이라. 한편으로 생각하건대 조선사람끼리라도 道는 다르나 斥倭와 斥化는 그 義가 일반이라. 두어자 글로 의혹을 풀어 알게 하노니 각자 돌려보고 충군우국의 마음이 있어 곧 의리로 돌아오면 상의하여 함께 척왜척화하여 조선이 왜국이 되지 아니하게 하고 同心合力하여 큰 일을 이루게 할지라(≪東學亂記錄≫下,<宣諭榜文幷東徒上書所志謄書>중 ‘고시 경군여영병이교시민’, 379쪽).

이와 같은 구상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힘의 열세는 농민군으로 하여금 계속 수세에 몰리게 하였다. 우세한 화력과 관군의 지원을 받는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비’활동으로 농민군은 대부분의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11월 중순 해미·서산·태안 등 충청도 해안지역은 일본군이 ‘義勇兵’을 구사하여 도주하던 농민군 수백 명을 체포하였고,347)≪大阪每日新聞≫, 1894년 12월 19일,<해미 방면의 동도 진정되다>. 전라도 농민군 주력이 활동하던 흥덕과 고창지역에서는 京軍이 民堡軍의 ‘赴義’를 통하여 잔여농민군(‘流賊’)을 잡아 살해하고 있었다.348)필자미상,≪擧義錄≫, 갑오 11월 25일, ‘興德官’의 密令, 21∼22쪽. 일본군은 농민군 토벌 경군을 배속받아 계속해서 대거 남하하였다.349)≪各司謄錄≫63, 갑오 12월 18일, 札移電存案, 291쪽. 이러한 기회에 편승하여 과거 농민군과 계급적 대립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지방양반과 유생을 중심으로 한 民堡軍, 儒會軍, 스스로 ‘의병’이라 칭하는 무리 및 褓負商 등 수많은 反農民軍 그룹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도처에서 패잔농민군을 색출하여 살해하고 있었다. 또한 鄕約과 5가작통, 10가작통의 作統制를 실시하여 패잔농민군을 숨겨주거나 이들에 협조하는 기미가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얽어매었다.

청일전쟁 막바지인 1895년 1월초 일본은 온건책으로 이른바 ‘歸順反正’의 농민군 효유방안을 마련함과 동시에 강경책으로 청일전쟁을 치르던 병사 중 일부를 지방관과 연합하여 농민군 초토화에 힘을 집중시켰다.350)≪日韓外交資料集成≫4, 1895년 1월 26일, 츠쿠바함 승선 병사로서 東學黨 討滅協力方의 件, 326쪽. 이는 농민군의 잔여세력까지 완전히 토벌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달 후가 되면 지방에 출정했던 일본군은 목적을 달성하고 서울로 속속 귀환하고 있었다.351)≪各司謄錄≫63, 을미 정월 11일, 札移電存案, 293쪽. 정월말 호남으로 내려갔던 중앙군과 일병은 모두 철수하였다. 이 시기에 가면 대다수 농민군은 궤멸되거나, 각 지역으로 은둔하고 있었다. 잔여세력 초멸에 노력하는 기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해 2월에는 농민군 잔여세력의 재발방지를 위해 각 요충지에 일본군을 주둔시켰다.352)≪日韓外交資料集成≫4, 1895년 3월 12일, 동학당 토벌을 위하여 일본군대의 각 요지 分屯에 관한 건, 354∼355쪽. 또한 대청전쟁의 최종 승리를 확인하는<시모노세키조약>체결 즈음인 3월 일본군 수비대 1만 명을 조선에 배치하였다.353)≪日韓外交資料集成≫4, 1895년 4월 8일, 일청평화후에 있어서 對韓방침을 정하는 건에 붙인 內申의 건, 361∼362쪽. 이는 농민군의 완전 진압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결국 이 기간에 이르면 일본과 농민군과의 전쟁은 후자의 완전한 참패로 끝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정부군과 민보군 등 반농민군 및 일본군의 패잔농민군에 대한 잔혹한 살상행위만이 뒤따를 뿐이었다.

<趙宰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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