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Ⅲ. 갑오경장
  • 1. 제1차 개혁
  • 1) 제1차 개혁의 배경
  • (1) 동학농민봉기에 대한 정부의 대응

(1) 동학농민봉기에 대한 정부의 대응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1894년 4월 23일 고부민란을 시발로 전라도 각지로 확산되자 5월 6일 정부는 洪啓薰을 兩湖招討使로 임명하여 농민군을 진압토록 하였다. 그리고 5월 8일에 이르러 농민봉기에 대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할 사실은 당시 정부대신들이 농민군을 조기에 진압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점이다. 즉, 대신들은 동학농민봉기를 지방군대로써 진압할 수 있는 소규모 민란으로 간주하고, 그 수괴를 체포하면 사태가 진정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또한 高宗을 비롯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이러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大更張’을 추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농민봉기의 원인이 지방관들의 가혹한 착취로 말미암아 농민들의 생활이 궁핍해진 데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봉기의 궁극적인 책임을 농민군이 아니라 閔氏戚族의 失政 탓으로 돌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정부대신들은 지방관들을 청렴한 인물로 교체해야 된다는 것 이외에 달리 참신한 개혁방안을 제시하지 못하였다.355)≪高宗實錄≫, 고종 31년 4월 4일.

이처럼 대신회의는 동학농민군에 동정적인 반면 민씨척족에게는 비판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閔泳駿·閔應植·閔泳煥 등 8명의 민씨척족은 아무런 이견을 제기하지 못하였다. 고종 역시 대신들이 피력한 봉기의 원인과 개혁의 필요성에 동의하면서도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인사개편을 단행할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회의 다음날인 5월 10일에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이 黃土峴戰鬪에서 농민군에게 대패함으로써 정부는 청군의 파병을 요구할 정도로 위험한 상항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조치는 여전히 농민군을 진정시키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인사개편을 단행하는 데 머물렀다. 고종은 5월 22일 전라감사 金文鉉을 파면하는 대신 그 자리에 金鶴鎭을 임명하고 동시에 前古阜郡守 趙秉甲과 前按覈使 李容泰를 각각 징역과 유배에 처하였으며, 이어서 26일에는 의정부의 제의에 따라 均田使 金昌錫을 해고시켰다. 그리고 5월 31일에는 전국 각도에 탐관오리의 축출과 각종 불법·탈법적인 무명잡세의 징수를 금하는 조칙을 발포하였다.356)≪高宗實錄≫, 고종 31년 4월 27일.

그런데 이러한 조칙이 내려졌던 날에 농민군에 의해 全州城이 함락되었다. 정부가 농민군의 전주 점령 사실을 모른 채 조칙을 반포하였다는 것은 농민군의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한편 민영준은 홍계훈으로부터 형세가 불리하므로 外兵을 빌려 농민군을 진압할 수밖에 없다는 보고를 받고, 5월 16일에 고종에게 청군의 파병을 요청토록 건의하였다. 그러나 5월 18일에 열린 대신회의에서 민씨척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청군의 차병은 물론 무력으로써 동학군을 토벌하는 데 반대하고, 여전히 탐관의 징계와 인재등용 등을 단행하여 농민군을 진정시켜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부대신들의 태도는 유교적 도덕주의와 부정확한 상황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들은 정부가 청군을 끌어들일 경우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였다.357)日本外務省 編,≪日本外交文書≫27-2(東京:日本國際連合協會, 1936), 문서번호 498, 154쪽. 결국 고종은 청병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국내 최정예군인 江華營의 병정들을 동원하여 농민군을 진압토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5월 26일 민영준은 袁世凱를 방문하여 농민봉기가 확대될 경우 청군의 파병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원세개는 농민군 진압을 위해 파견된 조선군의 무능을 비판하고 자신은 닷새 안에 농민봉기를 진압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다.358)≪日本外交文書≫27-2, 문서번호 501, 155∼156쪽.

5월 31일 농민군의 전주성 함락 이후 정부대신들은 여전히 청군 청병안에 반대하였지만, 6월 3일 민영준은 고종에게 청병을 강력히 건의하여 그의 윤허를 받아냈다. 그 즉시 민영준은 내무부 참의 成岐運을 원세개에게 보내 청군의 파병을 정식 照會하였다.359)國史編纂委員會 編,≪東學亂記錄≫上(國史編纂委員會, 1959), 8쪽.
≪日本外交文書≫27-2, 문서번호 516, 166쪽.
田保橋潔,≪近代日鮮關係の硏究≫2(朝鮮總督府 1940), 280∼281쪽.
당시 원세개는 조선정부의 공식적인 파병 요구가 있을 경우 곧바로 본국 정부에 군대 파견을 요청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360)≪日本外交文書≫27-2, 문서번호 503, 157∼158쪽. 청국정부는 원세개의 파병 요청 통보를 받자마자 조선에 군대를 파견키로 결정하고 1885년의 天津條約에 따라 이 사실을 일본정부에 통고하였다.

청·일 양국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게 되자 정부측과 농민군간에는 극적으로 全州和約이 맺어졌다. 6월 6일에 정부는 홍계훈으로부터 정부군이 농민군을 압도하고 있다는 희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고무된 정부대신들은 청군의 파병이 일본군과 러시아군의 派韓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민영준을 신랄히 비난하였다. 이 때문에 민영준도 원세개에게 이미 조선으로 출발한 청병의 상륙을 중지시킬 것을 제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361)≪日本外交文書≫27-2, 문서번호 524, 172쪽.

결국 6월 7일 조선정부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외아문) 주사 李鶴圭를 통해 청국정부에 청군을 상륙시키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였으며, 6월 9일 청군이 牙山에 당도했을 때에 그들의 상륙을 허락치 않았다. 그러나 청군은 조선정부의 요청과 제지 노력을 무시하고 아산에 상륙하고 말았다.

청군이 아산에 상륙하자 정부대신들이 우려했던 문제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6월 7일에 이미 일본정부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그 다음날 이를 조선정부에 통보하였던 것이다. 외아문 독판 趙秉稷은 이러한 통보를 받자마자 주한 일본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를 통해 일본정부에 파병 반대입장을 통보함과 아울러 주일공사 金思轍에게 훈령을 내려 일본 외무대신에게도 동일한 의사를 전달토록 하였다.362)≪日本外交文書≫27-2, 문서번호 527, 176∼178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 10일 420명의 일본해병이 인천에 상륙하여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공사의 지휘 아래 서울로 진군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정부는 즉각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서한을 스기무라임시대리공사에게 보냈다. 아울러 정부는 미국인 고문관 르젠드르(Charles W. LeGendre,李善得)와 외아문 참의 閔商鎬를 인천에 급파하여 일본군의 서울 입성을 제지토록 하였다. 이에 오오토리공사는 르젠드르와의 면담을 회피하고 민상호가 도착하기 전에 해병과 함께 인천을 출발하였고, 영등포로 파견된 외아문 협판 李容稙의 설득을 뿌리친 채 서울로 진입하였던 것이다.363)朴宗根,≪淸日戰爭과 朝鮮≫(一潮閣, 1989), 18쪽.

청·일 양군이 조선에 진입하자 동학농민군은 이들에게 파병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전주화약을 체결하고 이미 해산하였지만, 청·일 양국의 군사적 교착상태는 지속되었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정부대신들은 가능한 한 빨리 외국군대를 철수시킬 방책을 모색하였다. 6월 17일 민영준은 원세개를 방문한 자리에서 철군을 요청하였지만, 그는 열강의 외교적 항의와 간섭 혹은 청군의 발동으로 일본이 군대를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대꾸하였다. 심지어 청군이 일본군을 손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하기도 하였다.

6월 18일 서울에서 일본이 10척의 군함에 5,000명의 군사를 파한했다는 소문이 나돌자, 도성안의 백성들은 전쟁 발발의 공포감에 휩싸여 성밖으로 피난하기 시작하고 식량과 연료 등의 물가가 폭등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고종과 정부대신들은 막연히 원세개와 李鴻章의 중재에 의존하는 것 이외의 다른 방도를 강구하지 못한 채 사태를 관망할 뿐이었다.364)≪日本外交文書≫27-2, 문서번호 571, 225∼227쪽.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시점에서 민영준과 원세개간의 신뢰마저 금이 가기 시작했다. 대단위 일본군의 서울 입성을 염려한 민영준이 일본군 철수요구의 전제조건으로 청군의 先철병을 원세개에게 요청했기 때문이다. 6월 20일 민영준이 淸館을 방문했을 때, 원세개는 청군을 서울에 우선 진입시켜 의주로·한강 연안 등의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협조를 당부하였다. 이와 정반대의 사안을 요청하러 온 민영준은 그에 대한 답변을 회피하려는 의도에서 그 문제에 관해서는 韓圭卨과 협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답변하였다. 원세개는 이러한 민영준의 태도에 실망한 나머지 그 동안 그를 믿은 것이 자신의 커다란 실수였다고 말하면서 민영준을 꾸짖었다.365)≪日本外交文書≫27-2, 문서번호 579, 238∼239쪽.

이 사건 후 민영준은 종래의 친청적인 입장을 바꾸어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7월 13일 宣惠廳 堂上직에서 해임될 때까지 민영준은 당면한 위기의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정부내 요직에 친일관료들을 기용하였다. 예컨대, 그는 安駉壽의 천거를 받아들여 오랫동안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金嘉鎭을 내무부 참의로, 兪吉濬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主事로 각각 임명하였다. 안경수·유길준·김가진 등은 바로 갑오경장 기간 중 핵심적인 개혁관료로 활약하게 되는 인물들이었다.366)柳永益,≪甲午更張硏究≫(一潮閣, 1990), 116∼119쪽.

이처럼 민영준과 원세개의 관계가 악화된 후 6월 28일에 조선정부는 여전히 청국정부가 조선을 위기에서 구출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이홍장에게 중재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이홍장은 7월 1일자 전보에서, 열강은 조선에서의 일본의 행동을 인정하지 않으며, 청군은 조선에서 일본군을 철수시킬 것이므로 조선정부는 일본공사의 요구를 하나도 받아들이지 말라고 답신하였다. 원세개도 이와 똑같은 부탁을 조선정부에 하였다. 더욱이 조선의 원로대신들은 대부분 전쟁 발발 시 청국이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청일전쟁 개시 전까지 친청적 내지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367)≪日本外交文書≫27-1, 문서번호 583, 242쪽;문서번호 598, 592쪽. 이 점은 7월 12일 西太后의 還曆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정부가 進賀兼謝恩使 李承純 등에게 은 10만 냥을 지참시켜 北京에 파견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368)≪日省錄≫, 고종 31년 6월 10일.

그러나 정부의 대신들은 이때부터 일본공사 오오토리로부터 내정개혁을 실시하라는 압력에 직면했다. 조선정부는 약 4,000명의 일본군이 수도를 점령한 상황에서 일본의 요구를 쉽사리 물리칠 수는 없었다. 6월 26일 오오토리공사가 처음 내정개혁안을 제시했을 때, 고종은 개혁이 실시되기를 바라면서도 그에 앞서 일본군의 철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369)≪日本外交文書≫27-1, 문서번호 371, 558∼559쪽;문서번호 389, 583쪽.

6월 23일과 28일에 열린 대신회의에서 고종과 대신들은 일본군의 불법파병과 내정개혁요구에 관한 대책을 진지하게 논의하였다.

우선 23일의 회의에서 고종은 개혁에 열의를 보이면서 인사, 군정 및 재정을 교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에 대해 金炳始는 일본군의 서울 침입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동시에 재정 악화의 원인이 제도 자체의 결함보다는 세입의 대부분이 소수의 관리들, 즉 민씨척족의 수중으로 잘못 들어가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의 개혁에 대한 입장은 어디까지나 유교적인 인간중심의 개혁사상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370)≪東學亂記錄≫上, 11∼12쪽.

28일의 회의에서도 대부분의 대신들은 김병시와 유사한 태도를 취하였다. 영의정 沈舜澤은 節用을 당시의 급무로 보았고, 좌의정 趙秉世는 새로운 인재를 확보한 후에 정치를 논하자고 주장하였고, 우의정 鄭範朝는 성급히 更張을 논의하면 소요를 유발하기 쉬우니 백성들에게 절실하게 시급한 것만을 골라 한 가지씩 폐단을 풀어가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金弘集은 다음과 같이 좀더 적극적인 개혁추진을 주장하였다.

대저 更張이라 함은 바로 정치의 병폐에 대해 이를 變通하여 그 마땅함에 맞게 하는 것이니, 곧 당시에 취해야 할 時措라는 뜻입니다. 漢臣의 말에 ‘거문고의 소리가 조화롭지 못하면 반드시 그 줄을 풀어서 다시 조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거문조의 줄고르는 것으로 나라 다스리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만약 경장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다면 어찌 융통성없이 舊規만 지켜 구차히 고식책을 일삼는 것이 옳겠습니까(≪高宗實錄≫, 고종 31년 5월 25일).

즉, 김홍집은 경장의 의미를 통치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것보다는 문란해진 기강을 바로잡는 것에 한정시키고 있지만, 舊規에 따른 임시변통책을 버리고 새로운 방법으로 현실의 문제를 개혁시켜야 한다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회의가 끝나고 구체적인 조치가 내려지기도 전에 7월 3일 오오토리공사는 또다시 일본정부의 내정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정부는 이를 수용하지 않으려 했지만 일본의 강력한 요구에 결국은 굴복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정부는 내무부 독판 申正熙와 협판 金宗漢·曹寅承 등 3명을 위원으로 임명하고 그들로 하여금 일본공사 오오토리와 함께 내정개혁안을 협상토록 지시하였다.

첫 번째 회담을 마친 다음 오오토리공사는 조선정부가 친청적인 인물들을 위원으로 파견하여 일본측의 비판을 일시적으로 회피하면서 동시에 이홍장 및 열강 공사들이 조선을 대신하여 일·청 양국군의 철수문제에 개입할 때까지 시간적 여유를 벌려고 노력한다고 진단하였다.371)≪日本外交文書≫27-2, 문서번호 598, 592쪽.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이 조선정부의 개혁이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本使로부터 엄중한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조선정부는 본사가 제출한 국정개선안을 수납하고 위원 3명을 임명하였습니다. 본사는 지난 10일 이들 위원과 만나 該案의 명세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본사는 이들 위원과의 회의에서 유효한 개선을 이룩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정부가 실제로 조금도 개선을 하려는 뜻이 없고 支那黨이 궁중에서 더욱 세력을 확대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日本外交文書≫27-1, 문서번호 400, 594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7월 10일·11일·15일 등 3차례에 걸쳐 오오토리공사는 서울 南山의 老人亭에서 조선측 위원들과 회담을 가졌다. 우선 제1차 노인정회담에서, 일본공사 오오토리는 조선정부에<內政改革方案綱目>을 정식으로 제시하였다. 이 강목은 애당초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발의하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가 부연했던 내정개혁안을 현지의 오오토리공사가 조선정부에 제출하기 전에 이상적인 수식어를 가미하여 작성한 문서였다.372)이 강목의 성립과정에 관해서는 田保橋潔,<近代朝鮮に於ける政治的改革>(朝鮮史編修會 編,≪近代朝鮮史硏究≫, 朝鮮總督府, 1944), 4∼20쪽 참조. 이에 대해 신정희·김종한·조인승 등 조선측 위원들은 일본의 내정개혁 압력을 거부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조선은 다른 나라들이 칭찬할 정도로 훌륭한 제도를 오래 유지해 왔는데, 이들 제도들은 근대 일본의 것과 동일하며, 고종이 이미 개혁관련 조칙을 발포하였을 뿐 아니라 유능한 관료들이 구체적인 개혁조치를 강구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조선정부의 개혁은 현재 실시 중이며, 조선의 전통적 제도안에 일본측이 내정개혁안에서 제시한 요소들이 이미 포함되어 있으므로 단지 그 점들을 복원·활용하면 된다고 변론한 셈이다.373)≪日本外交文書≫27-1, 문서번호 400, 613∼615쪽.

7월 11일의 제2차 회담에서 오오토리는 전 27조 강목의 내정개혁 요구항목을 ①10일내에 실행할 것, ②6개월내에 실행할 것, ③2개년내에 실행할 것 등 3종의 시한부 범주로 구분하고 그 접수와 결행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강압적인 내정개혁요구에 대해 조선측 위원들은 이 시한조건부 개혁 권고가 내정간섭이라고 논박하였지만, 그 문서의 접수만은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와 이에 대한 조선측의 최종 결정을 국왕과 정부에 미루었다.

국왕 고종은 강목에 제시된 일본의 내정개혁 요구에 대처하는 비밀궁정회의를 7월 11일과 12일 두 차례에 걸쳐 개최하여 時·原任大臣을 비롯한 고관들의 의견을 종합하였다. 그 다음 7월 13일에 그는 오랫동안 세도가로서 행세했던 민영준을 선혜청 당상직 등에서 해임함과 동시에 시·원임대신을 總裁官으로 받들고 15명의 堂上으로 구성된 校正廳이란 개혁추진기구를 창설하여 초미의 내정개혁을 독자적으로 실행한다는 결의를 나타내었다.374)金仁順,<조선에 있어서 1894년 내정개혁 연구>(≪甲申·甲午期의 近代變革과 民族運動≫, 청아출판사, 1983), 220∼223쪽.

교정청의 구성원을 살펴보면, 總裁는 심순택·조병세·정범조·김홍집·김병시 등 시·원임대신이었고, 堂上에는 金永壽·尹用求·朴定陽·閔泳奎·申正熙·李裕承·金晩植·趙鍾弼·沈相薰·金宗漢·曺寅承·金思轍·朴容大·李容稙·魚允中 등, 郎廳에는 金珏鉉·鄭寅杓 등이 각각 임명되었다. 이들 중에는 노인정회담의 위원 뿐 아니라 어윤중·박정양 등 나중에 갑오경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개화파 관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375)金明燮,<제1차 갑오농민전쟁기 정부의 개혁추진과정>(≪한국근현대사연구≫3, 1995), 23∼26쪽.

이러한 조치가 내려진 다음 7월 15일에 모인 제3차 노인정회담에서, 그리고 그 다음날 외아문 독판 및 노인정 대표 3인이 발송한 공한을 통해서 조선정부는 일본의 내정개혁요구를 정식으로 거부하였다. 제3차 노인정회담에서 신정희는 다음과 같이 거부이유를 밝혔다.

일본정부의 권고에 매우 감사한다. 조선정부도 10년 이래 내정개혁의 필요를 느끼고 점차적으로 개혁에 착수하여 왔다. 그렇지만 아직 그 실효를 거두지 못하던 차에 남도에 민란이 발생하고, 또 그 외 지방에서도 民擾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러므로 이때에 조정회의에서도 개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정하고, 이를 위해 대군주 폐하로부터 엄중한 칙령도 내려졌고, 계속해서 校正廳을 설치하고 위원들을 임명하였으므로 머지 않아 一新된 정치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귀 공사가 지금 대군을 주둔시키고 기한을 정해서 개혁의 실행을 촉구하는 것은 자못 내치에 간여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修好條規 제1조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 우리 정부가 만약 귀 공사의 청구에 응할 때는 체약 각국이 아마 均霑의 例에 따라 나름대로의 주문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조선의 자주 체면은 손상될 염려가 있다. 더욱이 대군이 주둔하는 한 민심이 경요되어 다스려질 수 없기 때문에 도저히 개혁의 목적을 달성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귀 공사는 먼저 衛兵을 철수시키고, 아울러 기한을 정해 실행을 촉구한 내정개혁안을 철회시켜 주기를 바란다(≪日本外交文書≫27-1, 문서번호 412, 60쪽).

즉, 신정희는 조선정부가 이미 개혁운동을 시작했다고 주장하면서 일본군의 철수와 아울러 시한부로 결행을 강요한<내정개혁방안강목>의 철회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때 조선측은 거부 이유로서, 일본은 남의 나라의 내정개혁을 권고하기 전에 철병부터 실행할 것, 일본이 요구하는 내정개혁요건은 ‘我國 憲章과 槪無異同’인 바 그 중 몇가지 새로운 사항은 이미 교정청을 통하여 독자적으로 실시하고 있다는 등의 완벽한 반박 논리를 내세웠던 것이다.376)≪日本外交文書≫27-1, 문서번호 412, 605∼610쪽.

이러한 조리있는 거부 조회를 받은 오오토리공사는 이론상 궁지에 몰린 사실 이외에 몇 가지 정치적 고려에서 조선정부에 대해 내정개혁문제를 더 이상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그 정치적 고려란, “①조선정부는 我 擧動과 辭氣에 극히 예민한 주의를 가하고 있으며…, ②조선정부내에는 [외국인] 참모자가 많고…, ③我 大兵의 주둔에도 불구하고 근래 그들의 頑强心을 더욱 더 굳혀 왔다”377)≪日本外交文書≫27-1, 문서번호 411, 604∼605쪽;문서번호 412, 612쪽.는 정세파악이었다. 다시 말하면, 오오토리공사는 이러한 조선의 국내외 정세를 고려하여 이권조항이 내포된 내정개혁을 당분간 강요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오오토리공사는 결국 강목의 실행 강요를 당분간 포기하고 그 대신 원래 무쓰가 陳腐爛熟하다고 지적한 바 있는 소위 屬邦論을 내세워 7월 23일 일본군이 감행할 경복궁 점령의 구실로 삼았다.

한편 교정청 설립 후 7월 15일부터 18일까지 국내의 당면문제들에 대한 일련의 개혁조치들이 단행되었다. 교정청의 건의에 따라 의정부는≪大典會通≫의 규정에 따라 帳籍을 정확히 조사·보고토록 하였고, 각 宮·營·衙門과 지방의 營·梱·邑·鎭에서 지난 10년 이래 신설된 잡세를 혁파하였다. 또한 교정청은 7월 18일에 지방관의 불법적인 세금포탈 및 토지강점 금지 등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인 개혁조치를 취하였다.

교정청이 시도한 이 같은 개혁은 일본의 개혁요구를 외면하고 독자적으로 입안·추진한 것이지만, 기존 제도의 운영을 개선하는 데 머물렀을 뿐 근본적인 제도개혁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7월 21일 金炳始를 영의정에 임명한 사실로 미루어 고종이 교정청을 통해 추진하고자 했던 개혁은 보수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병시가 영의정으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적 개혁관료들이 집권함으로써 갑오경장의 단서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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