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Ⅲ. 갑오경장
  • 1. 제1차 개혁
  • 1) 제1차 개혁의 배경
  • (2) 청일전쟁 중 일본의 대한정책

(2) 청일전쟁 중 일본의 대한정책

1885년 천진조약 체결 이래 일본은 조선문제에 관해 親淸反露 노선을 고수하면서 청국의 대한간섭정책을 묵과 내지 후원해 왔다.378)1885∼1894년간 일본이 채택한 대한정책에 대해서는 다음이 참조된다.
山邊健太郞,≪日韓倂合小史≫(東京:岩波書店, 1966), 75∼78쪽.
林明德,≪袁世凱與朝鮮≫(臺北: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1970), 90쪽.
일본정부는 1894년 봄 동학농민봉기의 발발을 계기로 대군을 한반도에 급파하고 청국과의 전쟁을 불사한다고 결정한 다음 조선의 자주독립을 운위하고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시도하였다. 일본정부가 조선의 내정개혁문제를 처음 거론한 것은 6월 15일의 각의에서 였다. 이 자리에서 총리대신 이토오는 동학봉기 진정 후 청·일 양국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는 안을 발의함으로써 명분을 잃어버린 일본군 혼성여단의 留駐와 청국과의 외교협상의 구실로 삼았다.379)≪日本外交文書≫27-2, 문서번호 551, 206∼207쪽.

이러한 안건을 각의에 제출했을 때 이토오와 외무대신 무쓰는 이것이 청국측에 의해 수락되지 않을 것을 예상했다. 그렇지만 이토오는 일종의 외교적 방편으로 이러한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일본 위정자는 되도록 대청전쟁을 도발하여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기를 원했고 그렇지 못할 경우 일본군 출병의 보상으로서 청국으로부터 외교적 양보만이라도 얻어냄으로써 조선에서 청·일 양국간의 세력균형을 유리하게 바꾸려고 기도하였다. 이 목적에 맞는 대청외교협상을 서둘러야 하는 마당에 그들은 종래 거론된 일이 많았던 朝淸從屬論(속방론)은 “陳腐爛熟하여 世人의 視聽을 聳動하기에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에 일단 접어두고 이보다 더 참신한 구실인 내정공동개혁이라는 안을 제기했던 것이다.380)陸奧宗光,≪蹇蹇錄≫(東京:岩波書店, 1967), 104쪽. 즉, 이토오·무쓰 등이 조선의 내정개혁을 거론한 궁극적 목적은 조선에서 對淸 외교상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데 있었다. 이점에서 그들은 조선의 내정개혁문제에 대해 냉소주의적 입장을 취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조선 내정개혁문제에 대한 일본의 냉소주의적 태도는 무쓰의 경우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6월 21일 청의 총리아문으로부터 예기한 대로 공동개혁 제의에 대한 거부조회를 받게된 그는 당일의 각의에 다음 6개조의 단독 내정개혁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다.

一. 官司의 職守를 분명히 하며 지방관리의 情弊를 矯正할 事.

一. 外國交涉의 事宜를 중히 하여 職守 其人을 택할 事.

一. 재판을 공정히 할 事.

一. 회계출납을 엄정히 할 事.

一. 兵制를 개량하며 경찰의 制를 설치할 事.

一. 幣制를 정할 事.

一. 交通의 便을 일으켜 釜山·京城 기타의 地에 철도를 설치하며 각 요지에 전신선을 설치·개조할 事(≪日本外交文書≫27-1, 문서번호 382, 569∼570쪽).

이 개혁안을 제출함에 있어 무쓰는 조선의 내정개혁 그 자체에 대해서는 진정한 관심이 없고, 오히려 이를 빙자하여 조선에서의 이권확장을 도모하고 청·일간의 전쟁을 촉발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이 점은 그가 6월 29일부로 발송한 오오토리공사 앞 ‘朝鮮國 內政改革交涉에 관해서 유의할 사항 申送의 건’이란 內訓에 여실히 나타나 있다.

제1항의 官司의 職守를 분명히 하며 지방관리의 情弊를 矯正한다는 一事에 관해서는 [조선정부가] 우리에게 이를 반드시 실행한다는 약속을 하도록 만드는 이외에 당장으로서는 평판이 좋지 않은 인물을 免黜遷轉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

제2항의 外國交涉의 事宜를 중히 하여 職守 其人을 택한다는 一事에 관해서는…장래 언행일치의 행동을 할 수 있는 實力家, 즉 소위 勢道라 할 수 있는 인물을 외국교섭의 당국자로 임명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담판할 것.

또 재판·회계·병제·경찰·幣制에 관한 각 항에 이르러서는 지금 당장에 실행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선은 [조선정부로부터] 반드시 개량할 것이라는 明約을 받아두는 것으로써 만족할 것.

단, 교통의 便을 일으킨다는 一項에 관해서는 전신이건 철도이건 확실한 약속을 받아둠과 동시에 조속히 이에 착수할 수 있도록 함이 가장 필요함(≪日本外交文書≫27-1, 문서번호 388, 581∼582쪽).

이 내훈을 음미해 보면, 무쓰는 조선의 제도개혁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내정개혁을 내세워 조선정부 주요 부서내의 인사개혁을 추진하면서 철도 및 전신선 부설권 등 이권을 획득하는 데 관심을 집중한 것을 간파할 수 있다.

무쓰는 자신의 청일전쟁 회고록인≪蹇蹇錄≫에서 이러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시인하였다.

나는 처음부터 조선내정의 개혁을 정치적 필요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의협정신으로써 십자군을 일으킬 필요성은 조금도 발견치 못하였다. 고로 조선내정의 개혁은 제일로 아국의 이익을 主眼으로 삼는 정도에 그치되 이것 때문에 굳이 아국의 이익을 희생시킬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조선내정의 개혁으로 말하자면 이는 원래 청·일 양국간에 얽혀 있는 난국을 조정하기 위하여 案出해낸 하나의 정책이었던 것인데 事局이 일변하여 결국 아국이 독자적으로 이를 담당치 않으면 안되게끔 된 것인 바, 나는 애당초 조선의 내정개혁 그 자체에 대해서 각별히 무게를 두지도 않았고, 또 조선과 같은 나라에서 과연 만족스러운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을 지 의심하였다(陸奧宗光,≪蹇蹇錄≫, 東京:岩波書店, 1966, 47∼48쪽).

이는 이토오나 무쓰같은 일본의 위정자가 그 당시 조선의 내정개혁문제에 관해서 가졌던 냉소주의적 태도를 가장 잘 요약한 표현이며, 또 일본 외교의 실리주의를 잘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쓰 등 일본 위정자가 조선 내정개혁을 표방했던 기간에 확보하려 했던 경제적 이권으로는 京釜·京仁간 철도부설권 및 전신선 설치권, 일본인에 대한 내지과세 폐지, 防穀令 全廢, 木浦港 개항, 해관 관리권을 비롯해서 일본 화폐의 통용권, 광산의 조사 및 개발권, 연안 어업권, 연해 해운권, 조선내 우편 관리권, 그리고 전라·충청·경상도의 지세 수취권 등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이권들은 대체로 일본정부 내지 국민이 1894년 이전에 오랫동안 주목·垂涎하였으나 원세개를 앞세운 청국의 대조선 종주권강화정책 때문에 쉽사리 획득할 수 없었던 것으로서, 일본의 대규모 파병 이후 6월 중순부터≪時事新報≫등 일본 민간의 유력지에서 사설을 통해 강조했던 종목이었다.

무쓰는 이러한 이권들의 확보에 비상한 열의를 보였다. 이 점은 그가 오오토리공사에게 내린 여러 차례의 이권획득 노력 지시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서 일본은 갑오경장 기간에<暫定合同條款>과 군국기무처 議案의 형식을 빌어 잠정적으로 이들 이권을 확보하였다.

한편 무쓰가 구상한 조선정부내 인사개혁의 목표는 먼저 김가진·조희연·권형진·유길준 등 국내의 반청·친일경향의 개화파 인사들을 규합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본의 정책에 동조하는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집권태세를 갖추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쓰는 그들이 조선의 정치판도에서 亞流인사들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그들을 대표하는 領袖로서 보다 명망있는 인물, 예컨대 大院君·閔泳翊 및 朴泳孝 등을 포섭·이용하려 하였다. 이 같은 발상의 일환으로 7월 14일 무쓰는 駐홍콩 일본영사 나카가와 쓰네지로오(中川恒次郞)에게 홍콩에 망명중인 민영익을 유도·환국시켜 그로 하여금 대원군과 합작하여 민영준의 친청 세도정권을 대체해 보도록 종용케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민영익의 固辭로 수포화되었다. 그러자 7월 28일부터 무쓰는 박영효 등 갑신정변 관련 망명객들의 귀국을 서둘러 주선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박영효의 환국 주선을 지시한 그날에 무쓰는 오오토리공사에게 조선국의 왕궁점령(7월 23일)과 그에 수반한 정변을 축하하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발송하였다.

본인은 귀하의 성공을 축하한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최단 시간내에 조선정부의 인사개혁을 단행하되, 대원군에게는 가능한 한 최대의 원조를 베풀어 그의 집권을 공고히 하는 데 최선을 다함으로써 同 정권이 최소한 1년간 유지되도록 하라. 가능하면 대원군을 설득하여 유능한 일본인을 조선정부내에 顧聘토록 하라(≪日本外交文書≫27-1, 문서번호 425, 632쪽).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무쓰는 대원군을 정점으로 하는 권력체계하에 기왕 국내에서 성장한 친일개화파 인사들과 甲申政變 이래 일본·미국 등지에 망명하고 있던 개화파 인사들을 총망라하고, 그 위에 일본고문관을 배치하는 형태의 새로운 친일정권 수립을 구상한 것을 간파할 수 있다. 이러한 구상은 대원군파·박영효파·국내개화파 등 각종 정치세력간의 미묘한 이해와 감정의 대립을 고려에 넣지 않은 안이한 탁상안이었기 때문에 결국 11월 하순에 이르러 파탄되었다.

조선의 정치인들을 조종·이용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무쓰를 포함한 일본의 위정자들은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그러한 시행착오의 원인은 그들이 근본적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에 무관심했을 뿐더러 조선인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명치정부의 위정자들은 조선정치인들을 통틀어 ‘蒙昧無識의 輩’로 간주하고 친일 개화파 인사들조차 ‘半知半開의 開化者’로 얕잡아 보고 있었다.381)陸奧宗光, 위의 책, 121·125쪽. 따라서 무쓰 등은 이들 조선인을 兵威나 賄賂로써 쉽게 농락할 수 있을 것으로 단정하였다. 이러한 인식이 1894∼96년간에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내정개혁 등을 벌리고도 종국에는 한반도에서 정치적 기반을 상실하고 쫓겨 나가게 된 요인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한편 1894년 7월 23일 새벽 5시경에 오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중장 휘하의 일본군 혼성여단 2개 대대는 조선의 왕궁인 경복궁을 불의에 습격·침입하였다. 조선측 궁성수비대(箕營兵) 약 600명은 迎秋門과 光化門으로 돌입하는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7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산하였다. 이렇게 쉽사리 경복궁을 석권한 일본군은 慶會樓에 본부를 설치하고 서울과 수원 등 궁성 내외의 조선군대를 무장해제시켰다. 이어서 별도로 동원된 일본군 1개 중대와 경찰대 및 일본인 壯士輩의 호위 아래 대원군이 경복궁에 입궐함으로써 민씨계 친청정권을 대체하는 새로운 친일 정권이 수립되었다. 7월 23일 이후 8월 24일까지 경복궁은 일본군에 의해 수비되었고, 일본공사관이 발급하는 門票없이는 궁궐 출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軍國機務處를 통하여 갑오경장의 막이 오른 것이다.

일본정부는 7월 23일 경복궁 점령 이후 9월 16일 平壤戰의 첩보에 접하기까지 조선의 친일정권에 대하여 될수록 간섭을 삼가는 태도, 즉 소극적 간섭정책을 취하였다. 일본측의 이러한 정책은 무쓰외무대신과 오오토리공사에 의해 추진되었다.

무쓰는 원래 일본군부의 왕궁 강제점령안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지의 오오시마여단장과 오오토리공사의 협의로 왕궁 점령이 실현되고 대원군의 신정권이 수립되자 그는 이 정권의 탄생을 축하하고 왕궁점령문제를 묵과하였다. 7월 23일 이후 사태는 급진전하여 8월 1일에는 청·일 양국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동아시아 근대사상 획기적인 청일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전쟁도발의 대의명분을 조선의 자주독립에 걸었던 일본정부가 전쟁을 치르는 대가를 보상받기 위해 조선에서 일련의 중대조치를 취할 것은 애당초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러나 개전초 일본정부는 열강과의 외교절충 및 불투명한 戰局의 장래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확고부동한 대한정책을 채택할 수 없었다. 그러나 7월 28일에 무쓰가 오오토리공사에게 내린 훈령 가운데 대원군정권내에 일본고문관을 배치하도록 노력하라고 지시한 것은 일본정부가 조선을 보호국화하려고 했다는 최초의 징표라고 말할 수 있다.382)≪日本外交文書≫27-1, 문서번호 289, 477쪽;문서번호 379, 562∼567쪽. 일본내각이 조선의 장기적 내지 근본적 처리방안을 정식으로 거론한 것은 8월 17일이었다. 이 날의 각의에서 무쓰는 4개항의 조선문제처리안을 제시하였다. 일본내각은 이 안을 집중 논의한 끝에 조선문제에 대한 최종적 결정은 뒷날로 미루되 당분간 무쓰가 제시한 4개안 중 乙策의 大意를 대한정책의 지표로 삼는다는 데 합의했다. 이 을책이란, “조선을 명의상 독립국으로 공인하되 [일본]제국이 간접·직접으로 영원 또는 어느 장기간 그 독립을 保翼扶持하여 他의 侮를 막는 노력을 할 것”이라는 표현을 빌린, 사실상의 보호국화안이었다.383)陸奧宗光, 앞의 책, 134∼139쪽. 그런데 일본정부는 청일전쟁 종결 후 三國干涉에 잇따라 열린 각의에서 대한정책을 재정립할 때까지 이 안을 지표로 삼아 대한침략정책을 추진해 나갔던 것이다.

조선의 보호국화라는 정책목표를 설정한 무쓰는 이의 실현에 필요한 제1단계 조치로서 오오토리공사로 하여금 조선의 신정권과<暫定合同條款>이라는 명의의 이권 관련 조약과<大朝鮮·大日本兩國盟約>이란 군사동맹조약을 8월 20일과 26일에 각각 체결케 하였다. 이로써 오오토리는 이권 획득과 고문관 배치 등 對조선 내정간섭에 필요한 법적 근거를 확보한 셈이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청일전쟁의 수행과정에서 조선정부와 국민의 협조가 필수라는 전략적 고려와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외교 내지 무력간섭을 회피하려는 의도에서 조선의 새 친일정권에 대해 강압적인 간섭을 되도록 삼가는 정략을 취하였다. 즉, 8월 23일 무쓰는 오오토리공사 앞으로 보낸 ‘조선국에 대한 장래의 정책에 관한 훈령의 건’에서 “결코 조선의 독립권을 침해하는 따위의 행위는 군사상 불편 혹은 경제적 불이익을 초래할지라도 가급적 피할 것”과 “조선정부에 대한 청구는 불가피한 경우에 한하되…조선정부가 我요구에 견딜 수 없다는 느낌을 일으키지 않도록 충분히 주의할 것”을 지시하였던 것이다.384)≪日本外交文書≫27-1, 문서번호 441, 652쪽;문서번호 437, 644∼646쪽 참조.

이러한 무쓰의 對韓간섭 최소화 지시는 오오토리공사측에서 이미 무쓰에게 제의한 바 있었다. 즉, 오오토리는 8월 4일부로 무쓰에게 보낸 대한정책 의견서에서 다음과 같이 이러한 정책을 주창한 바 있다.

…조선정부는 이미 개혁파의 수중에 들어가 諸事 我 勸告를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는 이상 우리로서는 이들을 강경주의로써 대하는 것이 유리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조선을 취급하는 寬嚴의 정도는 종전 청국이 조선을 취급한 예에 비하여 한층 조선에 이롭도록 고려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조선의 君臣은 그 苦憫을 참다 못하여 결국 제2자에게 의뢰하게 될 것입니다(≪日本外交文書≫27-1, 문서번호 429, 636쪽).

이와 같이 오오토리는 열강이 간섭할 가능성이 있다는 외교적 고려에서 이미 自家囊中에 들었다고 간주한 조선의 신정권에 대해 종래 청국의 대한간섭에 비해 한층 더 관대하게 대할 것을 역설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오오토리공사에게 부과되었던 조선의 내정개혁이란 과제에 결부시켜 살펴 보건대, 그는 조선의 개혁파관료가 착수한 갑오경장에 대해 방관주의·점진주의·불간섭주의로 임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오오토리의 8월 14일부 ‘조선 내정개혁 권고에 관하여 我 政府가 택할 방침 大要’라는 무쓰 앞 품신은 그의 이러한 입장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문서이다.

1. 조선 내정개혁이란 차제에 각종의 폐정을 廢除하고 근본적인 혁신을 단행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행정제반의 제도를 세우는데 있어서 其 국정을 詳察하여 민지·민력의 정도를 잰 다음 이에 적합한 제도를 세운 연후에 국민의 智力 증가에 따라 이를 점차로 개진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지나치게 고상한 법률을 제정하거나 민정에 맞지 않는 제도를 설치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구래의 제도라 할지라도 이를 존속시켜서 해가 없는 것, 또는 이의 廢革으로 말미암아 얻는 效益은 적고 오히려 민심을 거슬릴 것은 당분간 존치시켜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3. 개혁사업은 될수록 조선 인사의 손에 맡겨 실행케 하되 우리측에서 깊이 간섭하지 않는 것이 肝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깊이 개입·간섭할 때에는 어쩌면 이를 支那가 저지른 잘못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비방할 터이며, 나아가 그들로 하여금 아국을 厭忌하는 감을 갖게 함으로써 他日 제3국으로 하여금 그 間隙에 개입하는 불행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조선정부의 초빙에 응할 재정·병제 및 법률 등의 분야에 고문관을 我 정부에서 추천하되… 조선정부의 개혁은 본[공사]관에서는 전혀 관여치 말고 오로지 고문관에게 일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이들 고문관에게는 정부에서 미리 內訓을 주어 諸事에 주재공사와 협의케 함으로써 공사의 의견에 저촉됨이 없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5. 歐美의 감각을 損치 않게 하기 위하여 미국인 고문관 1, 2명을 고용하는 것이 득책인 것으로 봅니다. 단, 이들에게는 은연중에 우리측의 보호를 가하여 반드시 우리의 방침에 찬성토록 함이 專要하다고 생각합니다(≪日本外交文書≫27-1, 문서번호 436, 643∼644쪽).

이 인용문을 음미해 보면, 오오토리공사는 조선인들이 개시한 갑오경장을 조선인들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직접 간섭하지 않는 입장을 自擇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여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9월 17일자 그의 군국기무처 활동상황 보고서에서 방증된다.385)伊藤博文 編,≪秘書類纂:朝鮮交涉資料≫中(東京:秘書類纂刊行會, 1936), 649쪽 참조. 즉, 오오토리공사는 9월 17일까지는 불간섭주의 내지 방관주의 태도를 견지했지만 平壤戰鬪(9월16일)에서의 일본측 승리에 따른 대세변화를 계기로 대원군파·박영효파·친일개혁파 등 조선인 정파간에 사활을 건 정쟁이 전개되자 개혁운동에 대해 적극간섭을 조심스럽게 진언하였던 것이다.386)≪日本外交文書≫27-1, 문서번호 447, 665∼666쪽.

오오토리공사 뿐만 아니라 그 예하의 스기무라서기관이나 무쓰의 ‘私設公使’격인 오카모토 류우노스케(岡本柳之助) 등 壯士輩도 초기의 갑오경장에 간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쓰나 오오토리가 취했던 정략으로 미루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스기무라서기관은 滯韓경력이 가장 오래된 일본공사관내 최고참으로서 대원군의 입궐 유도와 군국기무처 설립에 직접 간여했던 인물이다.387)杉村濬,≪明治二十七·八年在韓苦心錄≫(東京:杉村陽太郞, 1932), 62∼63쪽. 그러나 그가 일단 설립된 군국기무처의 개혁활동에 적극 개입했다는 증거는 어떠한 문건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카모토는 1894년 봄 東京에서 결성된 金玉均友人會의 일원으로 上海에 건너가 김옥균의 유골을 수습하려다 실패하고 귀국 후 ‘동학란’ 발발의 ‘희소식’을 듣고 청일전쟁 도발에 필요한 막후활동-예를 들면, 대원군의 조종-을 하라는 임무를 띠고 동향의 무쓰외무대신에 의하여 서울로 특파된 壯士로서, 7월 23일 이전에 대원군과 수차 면담하여 대원군으로 하여금 출마·입궐을 결심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군의 경복궁점령 직후 7월 26일에 일본으로 귀환하였다가 이듬해 4월에 군사고문 자격으로 다시 내한하였다. 따라서 그는 갑오경장 시행기간 중 서울에 부재중이었으므로 개혁운동에 개입했을 리가 없다. 또한 오오토리공사를 비롯한 일본인이 갑오경장 중에 고문으로 활동한 적도 없었다. 왜냐하면 외무대신 金允植이 施政고문과 군사고문의 초빙을 일본공사에게 정식으로 의뢰한 것이 8월 20일이며, 오오토리공사가 이 조회를 본국정부에 요청한 것이 8월 28일이었고, 실제로 일본고문관이 조선정부내에 배치된 것은 제1차 개혁이 끝난 다음 해인 1895년 초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제1차 개혁(협의의 갑오경장)은 대원군을 추대한 조선인 친일개혁파 관료들이 주동이 되어 추진한 개혁운동이었다.

그러나 갑오경장이 개시된 지 얼마 안되어 일본이 예기한 바와는 달리 조선의 신정권내에 심각한 알력의 조짐이 나타나고 이를 쉽게 통제할 수 없음을 감지한 일본정부는 친일정권에 대해 강경책을 펴게 되었다. 즉 일본은 9월 16일 平壤戰의 大捷을 계기로 대한정책을 전환하였다. 9월 18일자 무쓰의 오오토리공사 앞 훈령은 이 새로운 적극간섭책의 채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난 16일 평양의 一戰에서 재조선 청군이 모두 潰敗된 이상 지금까지 일·청간의 승패 여하를 관망하면서 首鼠兩端의 태도를 취하고 있던 조선인도 점차 주저의 念을 버리고 지향을 一定하였겠기에 이제 조선의 내정과 외교사를 모두 무경험한 彼國人의 소임에 방임할 경우 장차 어떠한 不願事를 야기할 지 모르며, 그렇게 되면 비단 아국이 이제까지 彼를 위하여 진력한 일들을 畵餠에 屬歸케 할 우려가 적지 않을 뿐더러 彼國을 위해서도 불이익임은 물론인 고로, 이번의 平壤得勝 人心一轉의 기회를 이용하여 각하는 韓廷에 대하여 우리 세력을 확장하는 데 주의하여 제3국에 대한 피국의 외교는 물론 內治상의 일이라도 자못 중대한 건은 반드시 각하의 의견을 諮詢하여 동의를 얻은 후 시행하도록 유도하기 바랍니다(≪日本外交文書≫27-1, 문서번호 449, 667∼668쪽).

이 같은 對韓廷 강압·간섭정책이 현지에서 발효한 것은 9월 19일부터이다. 즉, 그날 일본공사관이 조선국 외부에 조회한 ‘갑오경장의 실적에 관한 반성 촉구’라는 문서는 갑오경장에 대한 일본측의 소극적 방관주의 태도에 종지부를 찍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전환에 따라 일본정부는 새로운 정책을 현지에서 집행할 적임자로서 명치유신의 元勳이며 현직 내무대신인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를 발탁하여 주한공사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10월 하순에 서울에 부임한 이노우에공사는 그 동안 군국기무처가 이룩한 개혁의 업적을 무시 내지 백지화하고, 자기 나름의 경륜에 입각하여 박영효를 포함시킨 제2차 김홍집내각과 제휴하여 차원이 다른 개혁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갑오경장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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