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Ⅲ. 갑오경장
  • 1. 제1차 개혁
  • 2) 제1차 개혁의 추진세력

2) 제1차 개혁의 추진세력

갑오경장 중 서울 정계에서 浮沈했던 조선인 정파는 편의상 다섯 그룹으로 대별될 수 있다. 즉, 첫째 金弘集·金允植·魚允中·趙羲淵·兪吉濬 등 甲午改革派(甲午派), 둘째 朴泳孝·徐光範 등 甲申政變派(甲申派), 셋째 朴定陽·李完用·尹致昊 등 貞洞派(혹은 親美派), 넷째 大院君·李埈鎔·李容泰 등 大院君派, 그리고 다섯째 高宗· 閔妃를 둘러싼 洪啓薰·李道徹·沈相薰·玄興澤·李學均 등 宮廷派 등이었다. 이들 정파가운데 개혁 전기간에 걸쳐, 특히 제1차 및 제3차 개혁기간에, 가장 오래 정권을 유지하였을 뿐 아니라 개혁운동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던 세력은 김홍집·유길준 중심의 갑오파였다.388)柳永益,≪甲午更張硏究≫(一潮閣, 1990), 179∼180쪽.
주진오,<갑오개혁의 새로운 이해>(≪역사비평≫26, 1994).
韓哲昊,<갑오개혁 주도세력의 현실대응론>(≪한국근현대사연구≫11, 1999).

갑오파는 1885년부터 1894년까지 약 10년간 민씨척족정권이 조선을 통치할 때 권력의 중추부에서 소외당하여 정치적으로 핍박받고 있던 反淸·反閔의 불평세력이었다. 그들은 1894년 6월 2일 동학농민군의 전주 점령 후 민씨정권이 청군에 군원을 요청한 것을 계기로 일본의 이토오내각이 한반도 출병을 결의할 무렵부터 활발히 집권운동을 벌인 끝에 7월 23일을 기하여 일본공사관의 지원으로 민씨척족정권을 대신하여 집권하였다.

갑오파의 중핵인물은 유길준·조희연·安駉壽·金嘉鎭·權瀅鎭·金鶴羽 등 6명의 소장 문무관료였는데, 그들은 평생 개혁을 희망해 온 인사들로서 일본군이 서울에 침입해 온 것을 ‘호기’로 삼아 일본군이 철수하기 전에 민씨들을 몰아내고 그 대신 대원군을 총리로 추대하여 政事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세력이었다.389)≪日本外交文書≫27-2, 문서번호 579, 239쪽.
金正明 編,≪日韓外交資料集成≫4(東京:巖南堂, 1967), 42쪽.
이들 중 유길준·김학우·권형진 등 3명은 평소 서울 竹洞에 있는 조희연의 저택에 자주 모여 변혁을 모의했다. 특히 유길준과 김학우는 일본정부의 출병 결정이 내려진지 4일 만인 6월 6일에 김가진·안경수의 중개로 일본공사관의 통역관 겸 첩자인 고쿠부 쇼오타로오(國分象太郞)과 면담하면서 자신들이 품고 있는 반청·반민감정과 개혁의지를 표출시키고 있었다.390)菊池謙讓,≪朝鮮王國≫(東京:民友社), 419∼420쪽.
國史編纂委員會 編,≪駐韓日本公使館記錄≫1(國史編纂委員會, 1986), 264∼269쪽.

한편 6월 23일에 김가진과 유길준은 안경수의 천거로 민씨척족정권의 세도가 민영준에 의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외아문)의 參議 및 主事로 각각 기용되었다. 그들은 6월 11일에 서울에 군대를 끌고 입성한 오오토리공사의 내정개혁 압력을 무마하는 외교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6월 23일 이후 한 달 동안 유길준은 외아문 主事로서 아마도 고의적으로 과격한 내용의 외교문서를 기안함으로써 조·일·청 관계의 파국을 재촉하였고, 또 김가진과 안경수 등은 일본공사관과 내통함으로써 일본측의 내정개혁 및 청일전쟁 도발 노력에 협조하고 있었다.

드디어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하자 이들 갑오파 관료들은 일본공사관 일등서기관 스기무라 및 壯士 오카모토 등이 주모한 대원군 引出공작을 후원하여 그 일을 성사시키는 데 일조했다. 일단 쿠데타가 성공하자 그들은 대원군을 섭정으로 추대하고, 또 오랫동안 민씨척족정권하에서 푸대접을 받아 온 3명의 원로급 개혁정치가 즉, 김홍집·김윤식·어윤중을 신정권의 최고위직에 맞아들임으로써 국내외적으로 비교적 체면이 서는 개혁정권을 출범시킬 수 있었다. 이들 갑오파는 7월 27일에 새로 발족된 軍國機務處의 (會)議員으로 特擢되고, 또 8월 15일에는 金弘集·李埈鎔內閣(소위 제1차 김홍집내각)의 대신 혹은 협판직 벼슬을 제수받았다(<표 1>참조). 이로써 그들은 1개월 반 가량의 적극적인 집권 노력 끝에 권력의 중추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391)柳永益, 앞의 책, 179∼183쪽.

議政府 總理大臣 金弘集
左贊成 金壽鉉
右贊成 李裕承
都憲 朴容大·李重夏·李泰容※·曺寅承
(兪吉濬※·尹瀗·趙漢國·李金憲永)
宮內府大臣 李載冕  協辦 金宗漢※
內務衙門大臣 [閔泳達※]  協辦 李埈鎔
外務衙門大臣 金允植※  協辦 金嘉鎭※
度支衙門大臣 魚允中※  協辦 金喜洙(韓耆東)
法務衙門大臣 [尹用求]  協辦 金鶴羽※(鄭寅星)
工務衙門大臣 徐正淳  協辦 韓耆東(安駉壽※·李道宰·趙東弼)
學務衙門大臣 朴定陽※  協辦 鄭敬源※
軍務衙門大臣 [李奎遠]  協辦 趙羲淵※(白樂淵)
農商衙門大臣 嚴世永  協辦 鄭秉夏(成岐運·高永喜)
警務使 安駉壽※(李鳳儀·李允用※·許璡)
壯衛使 趙羲淵※
統衛使 李埈鎔
摠禦使 李鳳儀

<표 1>제1차 김홍집내각의 구성원(1894년 8월 15일∼12월 17일)

1.≪高宗實錄≫, 고종 31년 7월 15일∼11월 21일.
 2. ※표는 군국기무처(회)의원 겸직자.
 3. [ ] 내는 수임 거부자
 4. ( ) 내는 8월 15일 이후 임명된 자

일본군의 경복궁 불법점령과 동시에 탄생한 대원군∼김홍집정권은 군국기무처라는 비상 입법 및 정책발의기구를 통하여 7월 27일부터 10월 29일까지 3개월간에 걸쳐 일대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기간에 군국기무처는 무려 210건의 제도개혁안 내지 정책건의안을 의결하고 국왕의 재가를 거쳐 이를 실시코자 하였다.

군국기무처 의안 중에는 군국기무처의 조직 및 운영, 그리고 구성원의 변동에 관련된 의안이 25건(章程案 2건과 議政案 23건)이다. 이 의안들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갑오경장을 추진했던 세력이 군국기무처를 어떠한 기구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구성원이 어떻게 변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우선, 군국기무처의 조직과 운영을 밝혀주는 의안으로는 7월 28일에 기초된<軍國機務處章程>, 7월 30일에 채택·발포된<議政府官制>안의 군국기무처 관계 조항, 그리고 군국기무처의 기능을 규정한 2건의 의정안 등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의<군국기무처장정>에 의하면, 군국기무처는 會議軍國機務 一切更張之處로서 ①京外諸官府職制, ②州縣職制, ③行政與司法應行一切規則, ④田賦貸稅及各項財政應行一切規則, ⑤學政, ⑥軍政, ⑦殖産興業及營商所管一切事務, ⑧以上諸項外 凡係軍國一應事務를 모두 회의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의결된 안건은 국왕에게 품지한 후 거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392)軍國機務處 編,≪議定存案(第一)≫(奎 17236).

이<군국기무처장정>에 따르면, 군국기무처는 독재적 권한을 가진 개혁입법기관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장정은 고종 혹은 대원군측의 반대, 군국기무처 의원간의 의견 불일치, 또는 일본공사의 제지 중 어떤 한 이유로 공포된 일이 없다. 따라서 이 장정은 법적 효력이 없었고 단지 군국기무처 의원간의 내규 정도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국기무처의 기능과 구성에 관해서는 7월 30일에 의결·공포된<의정부관제>내에 따로 규정된 바가 있다. 여기에서 군국기무처는 의정부 산하의 9개 기구 중 수위 부서로서 다음과 같은 직권과 구성원을 가진 것으로 규정되었다.

군국기무처는 국내 대소사무를 專議한다. 總裁 1원, 總理大臣이 겸한다. 副總裁 1원, 의원 가운데서 品秩이 높은 사람이 겸한다. 會議員은 10인 이상 20인 이하로 한다. 書記官 3인, 1인은 총리대신 秘書官이 겸한다(≪日省錄≫, 고종 31년 6월 28일).

이에 의하면, 군국기무처는 ‘국내 대소사무를 專議한다’라는 극히 막연한-그러므로 막강할 수 있는-직권을 가진 정책의결기관으로서, 그 구성원은 총재(총리대신 겸임)를 포함해서 21인 이하이다. 이것이야말로 7월 27일부터 12월 27일까지 존속한 군국기무처의 母法的 규정인 것이다.

그런데 이 규정이 발표된 후 이를 보완하는 두개의 의안이 의결·채택됨으로써 군국기무처의 기능이 좀더 분명해졌다. 즉, 7월 30일에는 “비록 平民일지라도 진실로 利國便民할 起見을 가진 자는 군국기무처에 上書하여 회의에 부치게 할 것”이라 하여 일반 민중에게도 군국기무처에 대한 발의권을 인정하는 획기적 의안이 채택되었고, 8월 9일에는 군국기무처에서 의결·채택된 의안은 일단 국왕의 재가를 거친 후 ‘邦憲’으로서 법적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393)≪議定存案(第一)≫및 柳永益, 앞의 책, 229∼239쪽. 또한 이에 대한 번역은 宋炳基·朴容玉·朴漢卨 編著,≪韓末近代法令資料集≫1(大韓民國 國會圖書館, 1970)을 참고했다. 앞으로 군국기무처 의안에 대해서는 별도로 註를 달지 않겠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초기의 군국기무처는 21명 이하의 인원으로 구성된 의정부 산하의 정책의결기구로서 여기서 의결·채택된 의안은 국왕의 재가를 거친 후에 국법으로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군국기무처는 초정부적 입법기구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데 8월 15일에 이르러 소위 제1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었을 때 군국기무처 의원 중 다수가 새 내각의 대신 혹은 협판으로 임명되었다. 이를 계기로 군국기무처에서는 8월 18일에 “各 衙門大臣 및 將臣·警務使는 군국기무처 회의원을 겸한다”는 의안이 채택됨으로써 내각 대신과 군사·경찰관계 최고책임자들이 당연직 [회]의원이 되었다. 따라서 8월 18일 이후의 군국기무처는 엄격히 말해 여말선초의 都評議使司나 조선시대 중기 이후의 備邊司를 방불케하는 최고집권자의 合坐機關으로 변질되었고, 그 인원도 21인 이상-즉, 30인 정도-으로 증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8월 중순 이후 군국기무처의 중요성이 점감하여 ‘각 아문대신·장신 혹은 경무사’ 중에서 원래 군국기무처 의원이 아니었던 자가 회의에 참석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합좌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군국기무처의 기능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사실은 군국기무처 의원 중 일부가 군국기무처를 양권분립제하의 근대적인 입법부로 개조하려고 시도한 일이 있었다는 점이다. 즉, 어윤중이 사회를 맡았던 10월 9일의 군국기무처회의에서는, ‘만국의 통례’에 따라 군국기무처를 의정부의 예하기구가 아닌, 의정부(행정부)에 대치하는 독립된 입법기구, 즉 議會394)군국기무처 의원들은 8월 10일부터 가끔 군국기무처를 ‘議會’로 호칭하였다.로 개조할 것을 의결하였다. 그러나 이 획기적인 의정안은 10월 19일자의 군국기무처회의에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당분간 보류·취소’(付黃消案)되어 한국사상 최초로 시도된 의회설립기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회의는 議事部로 하고 정부는 행정부로 하여 서로 對峙 混淆하지 않은 것이 만국의 통례이어서 군국기무처가 정부에 예속되는 것은 事體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마땅히 군국기무처의 장정을 고쳐 專一事權케 함으로써 정부와 더불어 서로 上下케 할 것(≪韓末近代法令資料集≫1, 102쪽).

다음으로 군국기무처의안 중에서 군국기무처 구성원의 변동을 알려주는 의안들이 섞여 있어 갑오경장 추진세력간의 권력배분 내지 암투의 일각을 드러내 보인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7월 27일 군국기무처가 발족할 당시 총재·부총재 및 의원으로 임명된 사람은 아래<표 2>의 18명이었다.

이들 이외에 군국기무처의 서기관(郎廳)으로서 前司事 柳定秀, 前主事 吳世昌, 그리고 幼學 金仁植 등이 임명되었다.<표 2>의 18명은 모두 7월 23일의 쿠데타 이후 대원군·김홍집 혹은 일본공사관의 배려로 괄호내에 표시된 관직에 특탁된 인물들이었다. 그 중 적어도 2명(朴準陽·李源兢)은 대원군계열의 인물로 알려졌다.395)杉村濬, 앞의 책, 66∼71쪽.

總 裁(領 議 政)   金弘集
副總裁(內務督辦)   朴定陽
會議員(內務協辦)   閔泳達
 〃 (江華留守)   金允植
 〃 (內務協辦)   金宗漢
 〃 (壯 衛 使)   趙羲淵
 〃 (大 護 軍)   李允用
 〃 (外務協辦)   金嘉鎭
 〃 (右 捕 將)   安駉壽
 〃 (內務參議)   鄭敬源


 會議員(內務參議)   朴準陽
  〃 (  同  )   李源兢
  〃 (  同  )   金鶴羽
  〃 (  同  )   權瀅鎭
  〃 (外務參議)   兪吉濬
  〃 (  同  )   金夏英
  〃 (工曹參議)   李應翼
  〃 (副 護 軍)   徐相集

<표 2>군국기무처 구성원

그런데 군국기무처의 의원구성에 관해서는 앞에서 논급한 8월 18일의 의안 이외에 두 차례의 규정 개정이 있었다. 즉, 8월 2일에 군국기무처에서는 선혜청제조 魚允中, 이조참의 李泰容, 그리고 참의내무부사 權在衡 등 3인을 군국기무처 의원으로 추가 임명함으로써<의정부관제>의 회의원 정원인 21명을 채운 것이다. 그 후 9월 21일에 군국기무처는 이태용은 ‘病未赴會’란 이유로, 그리고 이원긍과 김하영은 ‘現在外職’이란 이유로 각각 의원직에서 減下하고, 그들 대신 工務協辦 李道宰, 同知中樞院事 申箕善, 壯衛營領官 禹範善을 의원으로 임명함으로써 정원 21명을 계속 유지하였다. 따라서 8월 18일의 결의를 논외로 하면, 갑오경장 기간 군국기무처 의원으로 발령받은 자의 연인원은 24명이었고, 일정 회기 중 의원수는 21명을 초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8월 1일 군국기무처는 대원군의 愛嫡孫으로서 왕위를 노리는 인물로 알려진 檢校直提學 李埈鎔을 군국기무처 의원으로 임명해 줄 것을 국왕에게 건의하였는데, 이에 대해 국왕은 그의 임명을 거부한 일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 15일에 이준용은-아마도 대원군의 배려로-내무협판과 통위사로 임명됨으로써 군국기무처 밖에서 강력한 권력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후 대원군·이준용 등은 평양에 집결한 청군과 내통하고, 삼남지방의 유생 및 ‘東學黨’으로 하여금 반일·반개화의 의병을 조직·궐기하도록 사주하는 등 일련의 반일활동을 벌인 결과 일본공사관 및 군국기무처내 친일개화파와 불화를 일으켜 결국 8월말에 이르러서는 군국기무처와 노골적으로 반목하게 되었다.396)李相佰,<東學黨과 大院君>(≪歷史學報≫27·28합집, 1962), 12∼13쪽.

8월 1일에 국왕이 이준용의 의원직 임명을 거부한 사실과 9월 21일에 대원군∼이준용계 인물로 알려진 이태용과 이원긍이 의원직을 박탈당한 사실은 군국기무처내에서의 대원군 지지세력의 거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대원군은 애당초 군국기무처의 창설에 찬성했고 자파 계열의 의원 3명(박준양·이원긍·이태용)을 그 안에 부식하여 군국기무처의 개혁운동에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게 된 8월 하순부터 그는 일련의 반일공작에 착수하고 또 군국기무처의 개혁사업을 노골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러므로 군국기무처 의안 중 8월 중순 이전에 의결·채택된 의안은 어느 정도 대원군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그 후의 것은 그의 의사와 무관하거나 그것에 역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군국기무처를 주도한 세력은 과연 누구였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군국기무처 의원 중 9월 21일에 새로 임명된 3명의 의원은 초기의 군국기무처 활동과 무관했고, 또 다른 5명(이태용·정경원·권형진·김하영·이원긍)은 군국기무처 존속 기간 동안 외직을 맡아 군국기무처 회의에 꾸준히 출석하지 못하였다.397)이태용은 7월 30일에 경기도 남양부 안핵사로, 정경원은 8월 9일에 호서선무사(17일에 삼남선무사겸차)로, 김하영은 9월 6일에 원산감리로, 이원긍은 9월 9일에 북청부사로, 권형진은 9월 18일에 관서선유사로 각각 발령받아 외직에서 종사하였다. 또 다른 일부 의원은 대원군계열의 인사로서 8월 중순 이후 병을 핑계로 출석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초창기부터 최종 회의가 열린 10월 29일까지 꾸준히 군국기무처 회의에 참석하여 의안의 심의·채택에 적극 관여한 의원은<표 3>에 제시된 11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표 3>에 제시된 군국기무처 의원의 사회·정치적 배경 중 중요한 공통적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은 1880년대 초반에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 소위 급진개화파와 더불어 조선의 개화·자강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갑신정변에는 가담하지 않은 소위 온건개화파 계열의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급진개화파들이 국외로 망명한 후 그들과 절연하고 국내에서 은인자중하면서 개혁운동을 펼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개화세력이었다.

둘째, 그들은 1885∼1894년간 친청·보수적인 민씨척족정권 하에서 조선의 내외정을 감찰했던 청국의 駐箚官 원세개에게 친일 혹은 친미·친러 개화파, 또는 ‘獨立路線派’로 지목받아 핍박을 당하거나 민씨척족계 실권자와 사이가 좋지 않아 정부요직에서 몰려난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반청·독립사상이 강하고 동시에 민씨척족의 세도정치에 대해 반감을 품은 인물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김가진·안경수·조희연·권재형)는 일본공사관의 신임이 두터운 ‘倭黨’으로 알려졌고,398)杉村濬, 앞의 책, 43∼45쪽 및 54·60쪽.
≪日本外交文書≫27-1, 문서번호 424, 631쪽.
다른 일부(박정양·이윤용)는 미국 내지 러시아공사관과 인연이 깊은 소위 친미·친러파(정동파) 인사들이었다.399)韓哲昊,<甲午更張 中(1894∼1896) 貞洞派의 改革活動과 그 意義>(≪國史館論叢≫36, 1992), 33∼45쪽.

姓 名
本貫 家族背景
(父官職)
科擧
登科
外遊國 甲午年 以前 主要官職 甲午更張中
兼職
金弘集 52 慶州 (參辦) 文科 日本·
淸國
修信使(1880), 統理交涉通商事務衙
門督辦(1884), 判中樞府事(1886), 水
原留守(1889)
總理大臣
朴定陽 54 潘南 (牧使) 文科 日本·
美國
朝士日本視察團 朝士(1881), 機器局
總辦(1883), 內務府協辦(1885), 駐美
全權公使(1887∼1889), 戶曹判書·判
義禁府事·典圜局管理 兼 交換局管
理(1892)
學務大臣
金允植 59 淸風   文科 淸國 領選使(1881), 江華留守(1882), 統理
交涉通商事務衙門督辦(1885), 沔川郡
流配(1887∼1894)
外務大臣
魚允中 46 咸從   文科 日本·
淸國
朝士日本視察團 朝士(1881), 西北經
略使(1882), 宣惠廳堂上(1885), 兩湖
宣撫使(1893), 延日縣 定配(1893)
度支大臣
金嘉鎭 48 安東 庶子
(禮判)
文科 日本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主事(1883),
內務府主事(1885), 駐日公使館參贊
官·辨事大臣(1887∼1891)
外務協辦
安駉壽 41 竹山 庶子 日本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主事(1887),
典圜局幇辦(1890∼1894), 壯衛營領
官·別軍職(1890)
度支協辦
·警務使
趙羲淵 38 平壤 (經庶歷) 武科 日本·
淸國
敎鍊兵隊生徒(1881), 機器局委員·幇
辦(1883∼1887), 鍊武公院參理事務
(1888), 機器局會辦(1893)
軍務協辦
兪吉濬 38 杞溪   日本·
美國
朝士日本視察團 隨員(1881), 統理交
涉通商事務衙門主事(1883), 報聘使
隨員(1883)
議政府都憲·
內務協辦
金鶴羽 32 金海 庶子 日本·
淸國·
러시아
機器局委員(1884), 內務府主事(1885),
典圜局委員(1885∼1886), 鍊武公院
事務(1888)
法務協辦
李允用 41 牛峰 庶子
(戶判)
全羅道兵馬節道使(1885), 漢城府右
尹·判尹(1885∼1888)
警務使
權在衡 39 安東 庶子 日本 釜山監理署書記官(1884), 仁川港幇辦
(1887), 駐日公使館署理公使(1891∼
1893)
漢城府尹

<표 3>군국기무처 핵심멤버들의 배경

셋째, 그들의 거의 전부는 1894년 이전에 외교·문화사절단(朝士일본시찰단·영선사·보빙사 등)의 단원 혹은 유학생으로서 일본·청국·미국·러시아 중 한 나라 이상에 遊歷한 경험이 있어 외국어에 어느 정도 능통하고 근대적 문물에 선각한 인물들이었다. 아울러 그들은 고종의 능력본위 인재등용정책에 힘입어 국내에서 주로 외교·통상전담기구 및 機器局·典圜局·鍊武公院과 같은 개화·자강추진 기관에 기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국왕에 대해서는 강도높은 충성심-즉, 勤王思想-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넷째, 이들은 본관 혹은 출신지역으로 따져 볼 때 대체로 조선왕조의 종친(전주 이씨) 혹은 세도가문(여흥 민씨,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에 속하지 않은 비교적 약세의 양반가문 출신이거나 변방의 토반 출신으로서 개인적 능력으로 출세한 업적지향형 인물들이었다. 특히 김홍집·박정양·어윤중·김윤식 이외의 소장인사들은 조선의 전통적 사회체제내에서 고위관직으로 출세하기가 어려웠던 양반의 庶子(서얼) 혹은 中人이거나, 과거를 통하지 않고 외국 유학을 했거나, 달리 개화·자강관계 전문지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주요 관직에 등용된 경력이 있는 자들로서 조선왕조의 신분제도 내지 정치체제에 대해 불만이 많은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 가운데 양반의 서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에 관련하여≪Japan Weekly Mail≫紙는 1894년 11월 24일자<朝鮮宮廷내의 파벌>(Factions in the Korean Court)이라는 제목의 논설에서, 조선정부내에는 현재 ‘嫡室派’와 ‘小室派’(Bastards's faction)가 대립하고 있다고 하면서, ‘改革派·小室派’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조선 궁정내의 파쟁이야말로 현재 이 나라의 개혁 진행을 저해하는 가장 주요한 원인이다.…개혁파 멤버의 거의 대부분은 서자들인 바, 그들은 한때 대단한 권력을 행사하여 군국기무처 의원 20명 중 적어도 12명이 서자 중에서 나왔다. 그들이 표방하는 [개혁의] 모토는 신분적 차별의 철폐와 능력본위의 관리임용이다. 그들이 이러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결과 구체제를 옹호하는 세력은 대원군의 주위로 결속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중립파·친청파 및 여타의 모든 세력이 단합하여 이 서출들의 증대하는 영향력을 억제하려 들게 되었다. 서출들의 권한이 크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여러 적대세력의 연합된 반대를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파의 힘을 증대시키면서 적대세력을 타도할 방책을 여러모로 강구하였다.…그러나 이러한 공작은 실패하였고 개혁파, 즉 소실파의 영향력은 이제 결정적으로 쇠퇴일로에 있다. …개혁파는 현재 참담한 처지에 놓여 있으며 오로지 일본의 후원에 힘입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Japan Weekly Mail≫, 1894년 11월 24일).

요컨대, 조선정부내의 ‘개혁파·소실파’는 한때 군국기무처 의원 20명 중 12명을 헤아릴 정도로 그 세력이 컸으나, 점차 대원군파·중립파·친청파 등 보수연합세력의 반발에 부딪쳐 그 기세가 꺾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주도한 개혁작업도 지체되고 말았으며, 그들은 목하 일본측의 지원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기사에서는 이들 ‘개혁파·소실파’가 표방하는 개혁의 취지가 班常차대와 같은 전통적 신분제도상의 질곡을 혁파하고 능력본위의 관리임용제도를 실현하는 데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파·소실파’는 그후-이 신문 논설에서의 예상과는 달리-쉽사리 실권하지 않고 상당 기간 권력을 유지하였다.

여하튼, 갑오경장 중 그 정확한 숫자는 파악할 수 없으나 10여 명의 양반 서자가 내각의 대신 내지 협판직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한국사회사상 특기할 만하다. 고종은 1882년 9월 4일에 개인의 신분배경에 구애됨이 없이 인재를 등용할 것이라는 교서를 반포한 바 있다.400)≪高宗實錄≫, 고종 19년 7월 22일. 그러나 이 취지는 그후 관철되지 않아 1864년부터 1894년까지 30년간에 당상관 직위에 오른 375명의 고관 중 서얼과 중인출신 관료는 각각 2명과 1명에 불과했다.401)Carlos Kenneth Quinones, “The Prerequisites for Power in Late Yi Korea, 1864∼1894”, unpublished Ph. D. dissertation, Harvard University, 1975, pp.375·492. 이것은 갑오경장 중 ‘개혁파·소실파’의 대거 등장이 사회신분제도상 공전의 변동을 의미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음을 뜻한다.402)杉村濬은 갑오개혁 기간에 격화된 하극상 현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이번 革政 이래 상하신민의 정형은 크게 疇昔과 달라졌다. 문지도 없는 미천배가 갑자기 대신의 현직에 오른 사실은 크게 이목을 놀라게 하였다. 이러한 부류의 하나인 평민[출신] 대신대리 이주회가 이번에 훈련대 입위건과 관련하여 3일간이나 廷爭·항언한 사실이라던가, 경무청의 순검이 대담하게도 왕족懿親인 이준용의 邸內를 침범하여 그를 집거한 사실이라던가, 또 정부가 왕실비를 제한하려고 왕실 부속의 전원 등을 몰수할 때 궁중에서 이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자 [정부측에서 이 요구에] 감히 항거한 사실 등 여러 사실은 분명히 대군주로 하여금 인심의 放肆를 실감케 하였고, [나아가] 이런 사태가 계속되면 결국 순검이 심궁까지도 진입해서 어떠한 不題의 企圖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게 만들었다”(≪日本外交文書≫28-1, 문서번호 313, 451쪽).
환언하면, 갑오경장을 기해서 대두·집권한 개화파 관료는 비단 민씨척족정권의 내치·외교에 대해서 불만이 있었을 뿐 아니라 구체제를 뒷받침하고 있던 신분제도에 대해서도 반발하고 있던 혁신적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이들은 일본·미국·청국 등 외국에 遊歷 혹은 유학하거나 서울에서 외국인과 교섭하는 직책을 맡아 일하는 가운데 영어와 일본어 등 한문 이외의 외국어문을 터득하고 근대적 학문에 눈떠 전통적인 학문 내지 사상체계에 대해 비판적 안목을 갖게 된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詞章 위주의 科文을 虛學으로 간주하여 배척하고 그 대신 便民利國 내지 利用厚生에 관련된 實學 내지 時務學을 연마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사상적으로 조선 후기의 실학, 특히 북학의 전통을 이어 받은 인물들로서 주자학·성리학체계에 사상적으로 도전한 혁신세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섯째, 그들은 대부분 직업적 관료로서의 경력을 지닌, 따라서 관료적 출세를 인생의 최고목표로 삼는 지식인 관료들이었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관료주의적이었으므로 일반 국민에 대해 엘리트의식과 고자세로써 임하는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그들은 개혁운동을 추진함에 있어 상의하달식의 ‘위로부터의 혁명(revolution from above)’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이들은 특정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써 무장된 이념집단도 아니고 또 경제적 이해관계로 뭉친 이익단체도 아니었다. 그들은 형식상 국왕 혹은 왕조에 대한 충성심으로써 결합된 그룹으로서 상호간의 동지적 연대의식이 약했다. 따라서 이들은 국왕의 권위가 극도로 추락되었던 갑오경장 기간에 여러 정파로 나뉘어 이합집산하면서 소위 파쟁을 되풀이할 소지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약점 때문에 그들은 일본측의 분할통치정략(divide and rule tactics)에 쉽사리 농락당하기도 하였다.

총체적으로 볼 때, 군국기무처의 핵심멤버들은 반청·반세도사상이 강하고 전통적인 정치·사회체제에 불만이 많은 반면 서양 및 일본의 문물에 선각한 ‘半知·半解의 開化者’403)陸奧宗光, 앞의 책, 154쪽. 혹은 ‘略涉外國情形 出入宮閭者’404)≪高宗實錄≫, 고종 31년 8월 2일.로서 성취동기가 강한 업적지향형(achievement-oriented)의 관료 엘리트였다. 그들 대부분은 일본·미국 혹은 러시아 등 외국공사관과 일정한 인연을 맺고 자신의 출세를 도모해 온 인물들이었다. 특히 그들 중의 다수가 출세 의욕이 강한 양반의 서자였다는 사실은 군국기무처가 어떻게 전통 파괴적인 혁신적 개혁을 그처럼 과감히 추진할 수 있었는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수의 서자 및 과거 未登科者가 정부의 당상관직을 점유했던 사실은 조선왕조 초유의 일로서 특기할 만하다.

한편 그들은 1880년대 초반의 개화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나 1885년 이후 그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던 정예 개혁세력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상당히 강한 충군·애국사상과 이에 부수하는 독립·자주의식을 가졌고 또 개혁에 대한 사명감도 컸다고 여겨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개략적인 복안과 전문가적 소양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중앙정계 내지 관계에서 소외되어 자신들의 경륜과 이상을 시행착오를 거쳐 실험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막상 ‘更張’을 펴야 할 마당에 구체적인 개혁안을 한꺼번에 제시·실천하기에 역부족인 상태에 있었다. 보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동학농민군과 같은 민중세력을 등에 업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明治維新 때 일본의 長州藩·薩摩藩의 武士집단이 가졌던 것과 같은-독자적인 군사적·경제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세력이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취약점이 있는 관료집단이기 때문에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립·애국정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오경장 기간 그들의 집권을 도와준 일본에 줄곧 의존하는 외세의존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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